흰 코끼리 예술 vs. 흰 개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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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 123분, 1962.
존 포드(John Ford),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흑백, 123분, 1962

 

오늘날의 예술이 갖게 된 그토록 무기력하고 시체 같은 특성 대다수는, 전통을 부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유럽의 명작(masterpiece)에서 볼 수 있는 사각이라는 형태에의 속박, 과거 속에서 광물처럼 결정화된 이런 낡은 관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회화는 명작이라는 낡아 빠진 개념에 고통받아오면서, 이 개념이 부여하는 감옥 같은 조건들을 부수고는 무엇을 이루겠다는 마음 없이, 자질구레하게, 닥치는 대로 아무것에나 관심을 보이면서,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서 어디로나 갈듯한 위협의 태도로, 자살과도 같은 즉흥성에로 향해 갔다. 캔버스의 모서리라는 경계와 그 안에 허용된 공간이 갖는 소중한 본성에 엄격한 경의를 표하는, 그림이라는 동일한 내부에 여전히 속해 있으면서 말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타성과 결별하지 못한 고전적인 예시가 바로 세잔(Cézanne)의 회화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을 그린 세잔의 폐쇄적인 작품들에서는, 농가의 담벼락에 강조된 빛에서 보이는 미세하게 대비되는 보색과 왜곡된 나무의 몸통과 같이, 자신이 “작은 감각(small sensation)”이라 부른 것들을 조금씩 소모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감각을 얼얼하게 만들고 또 감각의 불화를 야기하는 자극들이 발생한다. 각 캔버스의 남은 공간들은, 무게-중량-구조-광택의 꽉 막힌 혼합물로서, 명품(masterwork)이라는 자기 과장에 관련될 뿐이다. 본인이 관심을 가져온 고유하고 사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뒤로, 세잔의 그림은 오히려 고집스럽고 수수께끼 같아졌다.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의 다발에 균형 잡힌 곡선을 부여하고, 색을 덧입히면서, 그림은 경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음울한 작품들, 두려울 만큼 정직했던 수채화와 미완성된 몇몇 유화(화창하고 잎이 무성한 안마당에서 아내를 그린 분홍빛 초상화)에서, 세잔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작품을 뒤집어 탄로 했는데, 그 지점에 이르자 세잔은 사물들의 미세한 상호작용이라는 여전한 매혹을 제외하면, 이전보다 모든 점에서 앞서 나간다.

 

순조롭게 통제된 사회적 영역에서 예술은 사치스런 살덩이와 같다는 관념은, 논리적이면서 마술적이게도, 마더웰(Motherwell)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에 이르는 모든 현대 화가들의 재능에 크게 좌우되어왔다. 마더웰의 은밀한 입장(차갑고, 상투적인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색감을 인위적으로 얇게 깔아 놓은 데서 오는 향기로운 관능성과, 양가적인 형태가 만나며 벌어지는 자극적인 드라마)는 훌륭하게 억제되어 있는 작품에로 이러한 작은 쾌락들을 퍼트릴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무너진다. (거대한 계란 형상을 검게 채우고, 그 해 가장 추운 시기 시베리아의 대초원을 암시하는 듯한 텅 빈 모서리로 십 인치의 직사각형을 구성한다는) 아무런 보답 없을 이상의 노력을 끊임없이 되돌아가 반복하면서, 마더웰은 결국 거대한 회반죽 칠을 지독할 만큼이나 그리게 되는데, 이 작품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지나치게 크고 의아하게끔 그려져, 섬세하고도 자극적인(electric) 윤곽이 퇴적암의 내부로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의 거물들이 주는 특별한 기쁨(기병용 도검처럼 찌르는 데 쿠닝 De Kooning의 형태, 삽화가들이 쓰는 펜 선과 목판화의 색조를 정밀하게 포용한 워홀, 고집스레 한 가지 색으로 양식화된 형태를 채워 나가는 제임스 다인 James Dine의 묵묵함이 주는 활기)마저 명작을 만들겠다는 연속성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대개 탕진된다. 회화, 조각, 아쌍블라주는 점잖은 척, 명성, 야심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그저 기술적으로 지나치게 완성된, 하품이 나오는 생산물이 되어 버렸다. 예술가들 자신에겐 그저 본인의 이름(signature)을 떠받드는 왜소한 베개에 불과한 이들 작품은 이제, 오늘날의 미학을 전통에 부합하는 위대한 예술의 일부로 결합하겠다는 불필요하고 음란하고 허위인 요구에 따라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는 의아할 정도로 항상 흰 개미 예술의 경향에 빠져 있었다. 위대한 작품이란 대개, 창작자들이(로럴과 하디 Laurel and Hardy,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의 <빅 슬립 The Big Sleep> 을 각본으로 개작한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와 그걸 감독한 하워드 혹스 Howard Hawks처럼) 금박칠한 문화에 끼어들려는 야망을 품은 곳이 아니라 어디에도 없고 무엇을 위하지도 않고 다만 비버와 같이 갉아 먹어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 흰 개미-촌충-곰팡이-이끼 예술의 특별한 점은, 이러한 예술은 언제나 자신의 경계를 갉아 먹으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왕성하며 근면하고 헝클어진 활동의 흔적 이외에는 자신의 길에 무엇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예술의 가장 포괄적인 설명은, 자신을 특정한 것으로 규정지으려는 벽을 흰 개미처럼 뚫고서 스스로의 길을 더듬어 나아간다는 것이다. 아무런 기색 없이, 자신의 예술이 목전에 두고 있는 경계를 먹어 치우고 그 경계를 다음의 성취를 위한 조건으로 바꿔 삼는 일 말고는 예술가가 어떠한 목적도 마음속에 품지 않듯이 말이다. 로럴과 하디는 사실 <호그 와일드 Hog Wild>처럼 음울하고 이상한 영화들에서, “성공하는 법” 같은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어 대는 사람들을 아주 수준 높게 패러디하긴 했지만, 작업에 지적인 측면을 발휘할 때면 본능적으로 흰 개미 같은 습성으로 되돌아갔다.

 

탁월한 흰 개미적 연기의 한 사례(분칠한 얼굴의 핏기 없고 지루한 배우들이 살고 있는 비현실적인 마을에서 곤혹스런 카우보이를 연기한 존 웨인 John Wayne)를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존 포드 영화는, 부드러운 웅변조의 연기, 금빛 일몰을 뒤로 한 채 산의 둘레를 따라 달리는 기수들의 윤곽, 큰 덩치들이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의 그림처럼 율동하듯 앞다투어 코너를 도는 장면들의 반복을 선호하는 아일랜드인 특유의 침착하고 근엄한 성격 탓에 그르치고 있다. 웨인의 연기는 그가 속해 있는 창백하고 중립적인 영화적 삶과 씁쓸하면서도 흥미롭게 대조를 이루는 자신의 방랑자 정신에 감염되어 있다. 지난밤 심어진 듯 보이는 선인장들이 그리운 마음을 안겨주며, 만취하고 비겁하고 게걸스런 모습의 연기자들을 불러들이는 곳, 이렇듯 지나치게 평온한 아리조나 타운에서 웨인은 매력적인 직업의식과 어떻게 벽에 기대 의자에 앉을지를 생각하는 힙스터적인 감각으로, 연기가 과도한 배우(리 마빈 Lee Marvin)에게 눈총을 흘기며, 자신이 조금씩 먹어 치워 나갈 아주 좁은 목전의 지역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흰 개미 연기자이다. 촌충의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웨인은, 학교에서나 가르칠 법한 약삭빠른 전문 연기의 방식을 버리고 있다. 존 포드처럼 늙은 카우보이들이나 즐길 법한 소꿉놀이에 진저리를 치는, 비통함과 질투로 가득한 우락부락한 얼굴, 느긋해 보이는 커다란 몸으로 말이다.

 

흰 개미 예술의 가장 탁월한 사례들은 영화 이외의 영역에서, 즉 문화의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조명 따윈 전혀 없는 곳, 그렇기에 수공예적인 장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예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가 아니라 예술 자체에 몰두하면서, 완고하게, 효율 따윈 상관없이, 고집스레 자기 자신에 몰두할 수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 종종 자기 분야에 아주 충실한 전문가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의 조 앨섭 Jo Allsub이나 테드 루이스 Ted Lewis) 흥미로운 사건에 사로잡혀 쓰는 신문 칼럼,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자신의 숙적(딕 영 Dick Young[note title=”1″back] 딕 영(Dick Young, 1917 – 1987), 독설과 직설로 이름 난 미국의 스포츠 저술가로, 197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역자 주)[/note])이 자신에 대해 글을 써댄다는 사실에 각성하게 된 속구 위주의 야구선수, <얼음 장수 오다 The Iceman Cometh>의 TV 판에서 마이론 매코맥(Myron McCormack), 제이슨 로버즈(Jason Robards) 등이 보여 준 나태하게 앵앵거리는 탁월한 연기, 지금도 대중적 비평의 훌륭한 사례로 여겨질 만큼 근 몇 년 약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의 최근 추리 소설 몇 편, 레이먼드 챈들러의 대다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장광설과 냉철한 사실주의, 우회해서 상대에게 반격하던 기술을 버리기 전의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 제임스 매러디스(James Meredith)[note title=”2″back] 제임스 매러디스(James Meridith, 1933 -), 존F. 케네디의 당선에 고무되어 시민권을 주장하며 미시시피 대학교에 입학을 지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2번의 입학 거부 후, 1962년에 미시시피 대학 최초로 흑인 입학생이 됨. 그를 공격하려는 백인 폭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연방군이 파견되기도 하였다.(역자 주)[/note] 가 미시시피 대학에서 벌였던 모험처럼, 프로펠러 칼날과 같은 논쟁의 중심에 기꺼이 뛰어들던 때의 그가 보여준 TV 토론.

 

영화에서는 흰 개미 답지 않은 예술이 각본가와 감독을 좌지우지하며 잡식성의 흰 개미 예술가가 겨우 몇 씬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웨인이 맡은 카우보이 역할조차, 충돌하는 카메라 앵글과 명암 사용, 정형화된 움직임과 자세로 연출된 권총 대결 씬에서 사그라들어버린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 The Loneliness Of The Long Distance Runner>에서 원작자(앨런 씰리토 Alan Sillitoe)는, 어느 비행 청소년이 겪은 삶의 파편들이 관습적인 이야기 속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씰리토가 설정한 작품의 형식(특별히 개인 연습이 허용된 소년이 크로스컨트리 코스인 숲속을 혼자 뛰며 소년원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들을 파편적으로 떠올린다)에 따라 영화는 달리기하는 소년의 씬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천박한 매력의 육상 스타 피터 스넬(Peter Snell)이 본다 해도 마찬가지일 터, 이런 연습 경기 씬들이 과연 그걸 보는 관객들의 시간까지 값지게 만들어 줄지는 의문이다. 버니 베리건(Bunny Berigan)을 흉내 낸 싸구려 톤의 재즈 트럼펫이, 영국의 전원 풍경 속을 빙빙 돌며 뛰고 있는 아둔한 씬들을 어떻게 좀 흥분시켜보려고,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 내던져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명작을 좇는 예술, 에나멜 칠로 반짝거리는 담뱃갑이나 몇십 년 전 중고시장(white elephant auction)[note title=”3″back] 별로 쓸모는 없는 사치품들을 개인들이 내다 파는 장터. 고대 태국에서 처벌하고자 하는 신하에게 희귀한 흰 코끼리를 하사하여 관리하기에도 벅차게 만들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역자 주)[/note]에서 구매한 잔디밭 용 목마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예술이, 과대평가된 TV와 영화예술까지 좌우하게 되었다. 흰 코끼리 예술이 범한 세 가지 죄악은 (1) 일괄적인 양식으로 행동에 틀을 지워 버렸고, (2) 모든 사건, 인물, 상황을 띠 모양으로 늘어진 건축 양식(frieze)마냥 이어놓았고, (3) 필름과 스크린의 모든 여지를, 대회에서 수상이나 하기 좋을 딱 그 정도 창의성으로 매워 버렸다는 것이다. <헤비급을 위한 진혼곡 Requiem for a Heavyweight>은 매혹적인 기법으로 지나치리만큼 장식되어 있기에, 문맹에 가까운 난봉꾼(안토니 퀸 Anthony Quinn)이 섞여 있는 직업소개소가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친절한 사무원에 의해 좌우되는 오직 한 씬만이, 연기의 물성에 완전히 잠겨 흠잡을 데 없는 통찰력으로 소모적인 예술의 표면을 기어가고 있는(slag blanket type)[note title=”4″back] 용접 시에 용접부에 형성되는 일종의 막으로, 산소와 질소의 유입을 막는 역할을 해준다. 파버는 스포츠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등의 생경한 분야와 예술을 접목적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해당 문장에서는 “slag blanket type”이라는 용어가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표면을 기어가는”이라고 의미 중심으로 번역하였다.(역자 주)[/note] 퀸의 예술에 의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죽어가고 있는 고결한 비평가를 친애하는 두 명의 친구가 방문하며 시작하는 오프닝 씬으로부터 이어지는 안토니오니(Antonioni)의 <밤 La Notte>은 연속성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훌륭한 예시다. 이 씬은 무리 없이 출발한다. 그러나 감독은 아주 괴로우리만큼 첫 씬에서 실줄기를 늘려나가며, 무언가 아는 체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차원적인, 예술에 관한 한담에 그걸 보는 관객이 난처할 지경에까지, 예술적이라 자랑하고 있는 헬리콥터 숏이 중간중간 개입되기까지 하면서, 병원을 나선 모로(Moreau)와 마스트로야니(Mastroianni)의 가누기 힘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는 친구의 죽음 이후에 친구로서 비평가는 어떤 ‘의미’였으며 이 가련한 남자의 수수께끼 같은 점들은 무엇이었는지 모로와 마스트로야니가 부연하는 우스꽝스러운 대화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트 시어터(art theater) 후원자들의 총애를 받는 토니 리처드슨(Tony Richardson)의 경우엔, 고상한 척하는 관념 그리고 순수예술로부터 빌어온 카메라 효과 안에 인물의 행동을 욱여넣는 죄악의 탁월한 예시를 보여준다.

 

토니 리처드슨, , 흑백, 104분, 1962
토니 리처드슨, <장거리 주자의 고독>, 흑백, 104분, 1962

 

리처드슨의 영화들(<꿀맛 A Taste of Honey>,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는, 사회적 패자들의 가정생활을 다루는 자연주의적 연출이 메인 디쉬라고 할 수 있다(완벽히 탈색되지 못한 리처드슨의 방 안 공기는, 젊은 혹은 늙은 인물들에 만연한 부랑자의 느낌과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연출의 재료를 대하는 리처드슨의 “따뜻한” 애호와 함께하면서, 혼란에 빠져 죽어가는 소년의 아버지나, 소년의 절도를 수사하러 온 형사의 얼빠진 익명성 따위는, 연출의 디테일을 기어 넘기보다 태만하게 뒤로 후퇴한다. 리처드슨은 초침처럼 정밀하고 제한된 움직임으로 펼치는 놀랄만한 연기를 거의 모든 상황에서 연출해 보이는데, 한밤중 반짝이는 백화점 유리창 앞에서 대화하는 어린 연인, 혹은 열차 안에서 동물적으로 놀고 있는 두 쌍의 어린 연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관객으로 하여금 바로 거기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리처드슨의 능력은, 집, 아파트, 옥탑에 있는 작업실, 아파트처럼 안정감 있는 상태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곳들에서 리처드슨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학문적 동지가 되어 관객의 눈을, 가려진 난간, 팔목의 패턴, 닳아 해진 목재, 혹은 공깃돌같이 작은 눈에 서린 무정한 감정 쪽으로 돌려놓지만, 종종 리처드슨의 방은,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갖게 된다는 기대에 벅차 살펴보는 소녀 혹은 얼굴이 퉁퉁 부은 형사에게 소개되고 나서야 현실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절도범과 닳고 닳은 형사가 짜증스레 서로를 물어뜯는 부엌 씬에서, 완고하게 사실을 폭로하는 리처드슨의 재능은, 이 씬은 (기성의 영화였다면 어느 때보다 습한 진눈깨비 속에서 고통과 고뇌에 찬 존재를 보여주었을) 과장된 영화 연기를 확실하게 뒤집은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서 어느 쪽도 별 호감이 가지 않는 두 적대자가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듯 계속해서 서로를 힐난하며 행동하고 있는 씬임에도 이에 대한 아무런 강조나 지적도 없이 분해하기에 이른다.

 

사건 속에 깊이 머무르는 리처드슨의 능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기량, 숙련됨, 보장된 유머를 암시하는 패턴을 이미지에 부여하면서, 씬의 목둘레에 고상함이라는 목줄을 거는 속임수에 예외 없이 들어맞는다. 그의 영화에서 고평가된 스타들(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에서 톰 커트니 Tom Courtenay까지)은 가짜 감정에 빠진 채 변화된 연기를 제안하지만 사실은 버라이어티 쇼에서나 할 법한 연기로, 겉만 화려한 시퀀스에 몰두하자는 것이다. 가령 놀이공원에서(도서관 대출 카드보다 쟁기를 드는 게 더 익숙한 유형의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한 전형적인 촬영지에서) 장난감 총의 가늠좌를 바라보는 리타 터싱엄(Rita Tushingham)은 커다란 턱 근육과 눈썹을 아주 익숙하고 거리낌 없는 모습으로 움직여 보인다. 리처드슨이 (뒤뷔페 Dubuffet, 래리 리버스 Larry Rivers, 딕 트레이시 Dick Tracy의 기원인) 오브제 다르(Objet d’art)에서 취해와 고상한 척하는 또 다른 태도는, 영화의 인물들이 삶에서 병들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인물들이 서로 망가뜨리는 관계의 망을 짜는 것이다. 이런 광적인 형식 속에서, 톰 커트니(<장거리 주자의 고독>의 화난 소년)는 자기 자신을 경시하고, 얄팍하게 만들고, 그의 턱 근육과 눈꺼풀은 무도병(Saint Vitus dance)에 걸려 미친 듯 떨리게 되기에 이른다. 리처드슨은 부랑자에 가까운 인물들에게, 마대 자루 같은 머리와 걸을 때마다 짝짝이로 보이는 두 발과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한 걸음걸이를 설정하여 그들을 치장하는데, 이런 특징들은 볼수록 우아하고 또 과장되어 보인다(최악의 특징은 신문 만화인 “고아 소녀 애니(Orphan Annie)”의 텅 빈 안구와 같이 인물들이 쏘아 내는 화난 눈빛이다). 그의 영화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지루해진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 호감이 가는 연기자 한 명이, 은총이 내려진 듯 흰 개미 같은 열정으로 자연주의적 연기를 하고 있는 소년의 여자친구가 있지만 말이다. 잡다한 예술가인 리처드슨이 짜넣은 또 다른 폐쇄적 연출은 영화의 씬을 아름다운 여행기와 뒤섞으며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우주적인 상징을 부여하는데, 이 상징은 단순한 경기를 넘어 소년원 전체를 들끓게 만든 소년의 예상 못 한 달리기 경주를 통해, 교도관장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공을 들인 연출들의 공통분모에는, 청중이 본인들이 보고 있는 사진과 지나치리만큼 가까워져야 한다는 작가와 감독의 요구가 있다. 그들은 물렁물렁 타이어 속튜브 같은 상황과 인물들에,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디테일과 지나친 연민을 불어 넣는다. 이렇듯 관객을 배려한답시고 그들이 보고 있는 것과 그들 자신을 친밀하게 만드는 연출은 실상, 오랜 앙숙이던 아카데미 예술과 매디슨 에비뉴(Madison Avenue)의 예술을 결합하는 것이다.

 

흰 코끼리 예술의 한 전형, 작품의 모든 땀구멍을 반짝이고 기민한 스타일과 창의적인 쾌활함으로 채워 놓아, 특히 비평가들이 들러붙기 좋은 그런 전형이 바로 프랑소와 트뤼포(François Truffaut)다. 루브 골드버그(Rube Goldberg)를 프랑스 식으로 번역한 듯 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이 영구기관들,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 Shoot the Piano Player>와 <쥴앤짐 Jules et Jim>은, 기계장치로서의 분명함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헤비급을 위한 진혼곡>, 그리고 <400번의 구타 The 400 Blows>의 칼날 같은 저널리즘이 보여주는 선명함을 모두 뒤로하고 지나쳐간다.

 

헨리 밀러(Henry Miller)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트뤼포의 숨겨진 교훈(message), 무성 영화 시대의 짧은 코미디처럼 연인들을 몰래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은, 유아기로 퇴화하는 일종의 역-성장을 나타낸다. 이제 자살은 게임이 되고, 집은 웃음과 죽음이 든 장난감 상자처럼 보이는데, 이 모든 것이 신화화된 어린 시절의 결백함으로 환원되어버린다. <쥴앤짐>의 진정한 순진함은 원작 소설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기싸움 속에 암시되고 있는 성(sex)의 한 측면, 통제하기 어려운 성의 미숙한 측면 혹은 순진한 측면을 관객이 함께 느껴본다는 점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 흑백, 105분, 1962
프랑수아 트뤼포, <쥴앤짐>, 흑백, 105분, 1962

 

트뤼포의 이야기와 인물들은(모든 여성은 악랄하며, 학교 선생은 불평불만이 가득한 학생의 눈에 비춰서만 존재하고, 모든 영웅은 믿기 힘들 정도로 결백하며 믿기 힘들 정도로 박해받는다) 고무줄에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트뤼포는 일차원적인 자유를 누리는 인물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바꿔 나가는 1930년대식 영화들을 재구성하면서, 이를 곧이곧대로 반복하진 않고 속임수처럼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400번의 구타> 이후, 트뤼포의 영화는 그 자신이 영화는 무엇에 관한 것이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정해진 틀에 갇혀 또한 난처해진다. 트뤼포의 단호함은 인물과 사건을, 손가락으로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미키 마우스 만화책 속 단조롭게 흔들거리는 마네킹으로 바꿔버렸다. 이런 식의 접근은 영화 고유의 형상을 주조하는 특유한 감각들의 긴장 혹은 저항을 모조리 제거해버린다.

 

트뤼포의 영화 중 <쥴앤짐>은 단지 영화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또한 만화적이기도 한데, 단지 격식을 차리고 아닌 체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시각적 효과 대부분은 그저 감상적인 내러티브의 흐름을 보여주는 삽화일 뿐이다.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를 더 능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데 골몰하며 영화의 모든 복잡성을 평평히 다져놓고 자기 영화의 씬들은 포르노의 한 장면들로 바꿔 버린다. 잘 알려진 외설적 농담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그저 따라 하는 사람처럼. 그렇기에 등을 짚고 뛰어 넘는 아이들 놀이처럼 삼자연애의 인물들이 서로의 침대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고 다만 허접하고 장황한 풍자극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왜 갑자기 총을 뽑아 드는가? (위에 언급한 “여성의 악행”에 주의할 것) 왜 그녀는 차를 몰고 끊어진 다리로 달려가는가? (악인은 처벌받아야 한다) 등등.

 

<쥴앤짐>은 인물들의 대화에서 표현된 건조한 활기와 트뤼포 자신의 점묘화적 감각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름막에 걸러 내고서 찍은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시간의-놀잇감[note title=”5″back] “사랑은 시간의 놀잇감이 아니다(love-isn’t-time’s-fool)” 라는 셰익스피어116번 소네트의 패러디.(역자 주)[/note]이라 말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마, 오후의 오두막에서 (오두막은 어떻게 될까?) 잔느 모로가 두 연인을 놀리며 부르는 끝날 것 같지 않은 나른한 포크송이다. 트뤼포의 가사가(그리고 재잘거리는 명랑한 잡담은 대개 그걸 쓴 사람의 지적 세련됨을 전시하는 것이다) 이 씬의 갈등 대부분을 그리고 있다. 아무 의미도 없는 표정의 디테일, 혹은 가구의 디테일에(흔들의자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정도가 이 씬에서 심리학을 흥미롭게 대체한다) 멍청하게 집중하면서 말이다. 요점은, 이런 무의미한 활발함을 제외하면, 이 씬 자체에는 아무런 긴장도, 드라마도, 심리학도 없다는 점이다.

 

트뤼포가 야기한 지루함은(짜증 나게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씬에서 모든 생기를 건조시켜버리는(무슨 즉석-영화인가?) 특유의 방법들에서 비롯된다. (특히 악천후 속에서의) 축축한 조명 그리고 배우들이 금방이라도 뒤돌아 총을 뽑아 들 것 같은 거리감(at thirty paces)의 롱숏을 좋아하는 그의 선호 덕분에, 인물들은 텅 비워질 뿐 아니라 그 씬 자체가 화면 가장자리로 증발해 사라질 것 같다. 증발, 사라짐의 효과와 더불어, 트뤼포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형식은 멜 블랭크(Mel Blanc)가 더빙한 만화 <포키 피그 Porky Pig>같이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가 다만 플라이-아웃[note title=”6″back] 야구 용어로, 타자가 친 공이 땅에 떨어 지기 전에 상대 팀 야수가 잡을 때 타자에게 선언되는 아웃.(역자 주)[/note] 되지 않기만을 신경 쓰고 있는 대화 장면과 배열, (초원을 뛰고,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등) 여기서 저기로의 움직임에 제한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 체계는 영화를 붙들어 놓을 어떠한 실질적인 힘이나 추진력 없이 그저 까치발을 한 채 멀리 떨어져 예술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관객이 영화를 붙잡기 위해 몸을 기울이면, 그것은 실 풀린 연처럼 날아가 사라진다.

 

안토니오니의 특별함, 인물의 움직임을 체스 게임처럼 다루어 만들어 낸 효과는 이내 배우 스스로 움직일 힘과 기골을 빼앗는 독재적인 연출이 되고 만다. 사실 다큐멘터리 작가에 가까운 사람, 종종 <폭력 행위 Act of Violence>를 찍었던 당시의 “지적인”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과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 안토니오니는 세련된 매너리즘 예술을 지향하는 자신의 취향에서 특유의 기이하고 선명한 느낌을 끌어 내는데, 그의 예술은 줄무늬에 도배되어 있다는 느낌 혹은 수평 수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느낌을, 유리 같이 매끄러운 화면을, 반복적인 횡 운동을 만들어낸다. 상호주관적 관계에 무능력한 안토니오니 영화의 성격은 군중을 단순히 경직된 파도로, 연인들은 서로에게 외롭게 매달려 있는 짝사랑으로 바꿔 놓는데, 이들은 우연하게도 종종 철제의자와 같이 서로 맞아 떨어지기도 하지만 서로 진정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은 좀처럼 전해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는 우리 정신의 비굴함을 현대적 고통, 고독, 공허하고 죄의식에 가득 찬 열망의 결과로 바꾸어놓을 뿐이다. 모순적인 성격의 아내, 잔느 모로가, 자기 머릿속을 빙빙 돌고 있는 생각처럼 허공에 손가락을 돌리는 몸짓 같은 디테일들이, 그대로 고립되어 썩어 버리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대부호의 축하연에서 연주하고 있는 팝 재즈 밴드는 영화의 또 다른 시작점인 끝없는 파티와 함께 의도치 않게도 <밤>의 핵심을 이루는데, 안토니오니는 이 소규모 재즈 밴드를 마치 거대한 잔디밭 사유지에 쏟아진 불쾌한 오물처럼 다룬다. 그는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과 완전히 동떨어져 아둔하게 붙박여 있는) 키치한 음악을 연주중인 4인조 밴드로 자꾸만 돌아오면서 작품의 숨을 이어 나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인 숏은 침울하고 소외된 표정을 한 채로 조금 춤을 춰 보이거나, 연주 중인 재즈 음악가들과 우정을 나눠보려는 잔느 모로의 머뭇거리는 시도들이다. 모로의 얼굴, 안토니오니의 모든 배우들이 닳도록 드러내는 특징이기도 한 그 얼굴은, 지나치게 갑작스런 그녀의 자유로운 노력에 의해 오히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다.

 

안토니오니, 트뤼포, 리처드슨, 서로 다른 이 예술가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성질 혹은 결함은, 영화 그 자체의 충격과 야만성 그리고 영화가 앞으로 펼쳐나갈 수 있는 잠재적 생명력에 대한 두려움, 바로 그 두려움이다. 영화의 역사에 관한 지식과 그들 자신의 자의식의 창고에서, 이 두려움이 그들을 끊임없는 각성 상태로 이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 이 각성상태는 건조한 몸짓을 반복하는 무위함으로 드러난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운모편암처럼 새겨진 모습들, 그 선형적 패턴들은, 안토니오니의 지나친 감상주의에 의해, 자기 영화의 빈약한 패턴에서 벽화와 같은 평면성과 그저 지루한 연속성을 이끌어 내야 하는 불가피함에 따라, 더욱 모호해진다.

 

<밤>과 <정사>의 부조리함은, 이 감독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진정 흥미로운 괴짜라는 점에 있다. 그의 재능은, 파울 클레처럼, 억압적인 사회 환경에 대응하는 자기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태도에 압정처럼 박혀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현미경처럼 관찰하기 위해 발휘된다. 너무 작아 이내 그 감정이 스쳐 지나갈 것 같은 클레와 달리, 안토니오니의 염원은 관객들을 벽에 못 박고는 예술가인 척하는 태도와 이건 정말 중요하다는 태도를 젖은 타월처럼 들고 때리는 것이다. <밤>의 한 지점에서, 풍경의 대륙을 감독 특유의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불행한 아내 잔느 모로는, 폐허가 된 건물로 들어서 녹슨 벽의 일부를 벗겨낸다. 미미한 고적감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듯 클로즈업으로 잡은 일종의 기호(ikon)는 사진계에선 아주 닳아 빠진 클리쉐이지만, 중대한 소재의 대서사문학처럼 자기 영화의 이야기와 사건들을 다루길 포기하지 않는 안토니오니는, 아까 말한 젖은 타월로 관객을 강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가령 <밤>의 첫 시퀀스에는 걸레 같은 우리의 영웅 폰타노를 모종의 이유로 덮치려고 하는 아주 흥미로운 연기의 색정증 여성이 등장한다. 영화의 첫 5분에 대체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특히나 큰 사건이다. 안토니오니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떠는 이 여성, 그리고 그녀의 제멋대로 늘어뜨려져 있는 머리칼을, 작품에서 일종의 미봉책 역할을 하는 구성요소로 설정하고는 정말 중요하다는 듯이 지나치게 취급하고 있다. 고통받는 작은 동물과 같은 이 여성은 평행을 맞춰 그어진 줄무늬 벽에 등을 맞대고 있는데, 이는 곧 씬의 끔찍한 느낌을 절충해주겠다는 자만심에 빠진 감독이 곧잘 만들어 낸 이미지에 다름아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122분, 1961.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밤>, 흑백, 122분, 1961

 

이런 영화들에서 말하는 주제가 무엇이건, 말해지지 않은 사유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영화 산업이란 박물관에 걸리거나 패스티시 예술로 끝나리라는 사실이다. <낯선 곳에서의 2주 Two Weeks in Another Town>, <빌리 버드 Billy Budd>, <쥴앤짐>의 시대착오적인 태만함이야말로 이를 깨우쳐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 영화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과거에서 현재로 떨어져 내려온 것 같다. 흰 코끼리의 조건 반사적 몸짓과 흰 개미의 수행 사이에 단절되듯 벌어진 이 틈은, <헤비급을 위한 진혼곡>의 믹키 루니(Mickey Rooney)와 줄리 해리스(Julie Harris)가 보여준 연기, 그리고 황망한 교회를 조망하는 <정사>의 관성적이고 경직된 방어 기제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씬과 배우들은, 스스로는 활기 넘치리라 생각하며 표현한 감정들이 오히려 그들을 무감각적이고 아무런 활기도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데, 부랑자가 노후한 석탄 난로에서 불을 쬐어보려 애쓰는 모습과 같다. 항상 안전한 보험처럼 문화의 중심부에 둘러싸여 만들어진 과거의 영화 예술이 현대의 작업자들이 보기에는, 심지어 그때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마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음을, 큰 코끼리 예술이 처한 관성과 타성의 간극이 곧 증명해주는 듯하다.

 

<시민 케인 Citizen Kane>은 1941년에 이미, 의미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빙산과 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유창하게 진행되는 자연주의적 이야기라는 영화의 낡은 관념에 치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흥미롭지만 연기는 좀 과장된 오손 웰스의 영화가 불러온 이 혁명은, 1950년대 더 갈데 없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 길을 계속 이어갔지만, 이렇듯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 또 낡은 보석같은 영화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불쑥, 못생긴 관목처럼 나타난 새로운 영화 기술들이 혁명을 대체하였다. 전통과 결별을 시작하는 영화는 이상하게도 1950년대 중반의 영화들인데, 얼핏 이 영화들은 스트로하임(Stroheim)의 <탐욕 Greed>처럼 아주 전통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구로사와의 <이키루 Ikiru>는 중심을 잃어도 저절로 복귀하는 기계처럼 우리가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을 방법을 새롭게 제안한 랜드마크 같은 작품인데, 이야말로 흰 개미 예술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확실히 개괄해준다. 어떤 지점이나 목표없이 그저 좁은 영역에 벌레처럼 몰두하여, 무언가를 미화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그저 한 순간에 못 박히는데 집중하면서, 하지만 이런 성취조차 그 지역을 지나쳐 버리는 즉시 잊어버리기. 즉 모든 것을 소모할 수 있다는 느낌, 이 느낌에서야 말로 우리는 잘게 썰어지고 다른 배열 속으로 내팽겨쳐질 수 있다.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