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젠슈타인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에이젠슈타인: 유토피아적 관람성과 미적 집단성
번역 이민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 1925, Blu-ray(Kino Lorber, 2011)에서 캡처.(역자 주)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파업 Strike>, 흑백, 1925, Blu-ray(Kino Lorber, 2011)에서 캡처.

 

이 글은 1930년대와 1940대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의 후기 영화이론과 전반적인 미학에서 나타나는 어떤 원리를 논의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 할 그의 이론적 관심사에서 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을 주해하며 몇 가지 요소를 다룰 것이다. 이는 공식적인 소비에트 미학이론에 대한 중재로 읽힐 수 있지만 또한 그를 넘어서는 그의 매우 독특한 영화 및 미학이론의 어떤 특성에 대해 질문하려는 것이다.

 

먼저 좀 더 이른 시기에서 시작해보자.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네 편의 무성영화와 함께 세계 영화계에 등장했다. 그 영화들은 그 자신을 포함하여 소비에트 연방 안팎의 많은 이들에 의해 즉각 미학적, 정치적으로 혁명적이라 선언되었다. 그 시기에 그는 정치화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진영 안에서 보다 새로운 영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과 특별한 주장을 촉진한 일련의 이론적인 에세이와 기사를 기고했다. 1920년대에 에이젠슈타인이 쓴 여러 글 중 일부는 이제 영화이론의 역사뿐 아니라 영화와 대중예술, 그리고 모더니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구상의 역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텍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적인 소비에트 미학으로 선언되면서 대부분의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적 경향은 제한되었다. 에이젠슈타인은 지나치게 유명했기에 비난받아야 했으며, 그에 따라 몇몇 영화 프로젝트는 좌초되었다. 한동안 위기를 겪었던 그는 1938년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가 개봉하면서부터 간간이 공식적인 평판을 회복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몇 년의 시기동안 지속적으로 이론적인 글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사망했던 1948년까지 그는 이미 정전이 된 1920년대의 글을 넘어서서 대개 발표되지 않은 수천 페이지의 이론을 추가로 구상했다. 이 후기의 이론적 연구에는 적어도 두 권의 주요 서적의 전체 초안(현재 『무심하지 않은 자연 Non-Indifferent Nature』과 『몽타주 이론을 위하여 Towards a Theory of Montage』로 출간되었다)과 세 번째 서적(『방법 Method』) 및 다수의 추가적인 에세이와 노트가 포함된다. 1942년, 몽타주 서적들의 몇 장이 통합된 『영화 감각 The Film Sense』의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949년에는 『무심하지 않은 자연』의 몇몇 핵심적인 장이, 그의 25년간의 이론적 궤적을 따라 연대순으로 정리된 그의 주요 글 모음집이라 할 영문책 『영화 형식 Film Form』에 수록되었다.[note title=”1″back] Sergei Eisenstein, The Film Sense, ed. and trans. Jay Leyda (New York: Meridia, 1957 [orig. pub. 1942])와 Sergei Eisenstein, Film Form: Essays in Film Theory, ed. and trans. Jay Leyda (New York: Harcourt, Brace, 1977 [orig. 1949])을 보라. 이전에 에이젠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레이다는 『영화 형식』에 수록될 장을 그와 함께 선정했다. 본 논문은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적 저술의 영어판을 참조할 것이다. 영어로 된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적 저술 중 가장 중요한 책은 3권의 모음집인 S. M. Eisenstein: Selected Works edited by Richard Taylor and published by the BFI and Indiana University Press: Vol. 1, Writings 1922-1924 (trans. Richard Taylor, 1988); Vol. 2, Towards a Theory of Montage (trans. Michael Glenny, co-ed. Michael Glenny, 1991); Vol. 3, Writings 1934-47 (trans. William Powell, 1996)이다. 그러나 특히 미발표된 그의 주요 논문인 Non-Indifferent Nature, trans. Herbert Marshal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이 있다. Selected Works를 인용할 땐 SW와 볼륨 넘버로 표기했다.[/note] 

 

일부 독자들은 잘 알려진 초기의 이론적 에세이를 부인하는 것으로 그의 후기 저술 일부를 접할 수 있었으며, 1942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이러한 부인을, “공식적인 스탈린주의 문화의 보호를 받으려는”[note title=”2″back] 이 인용문은 급진적이었지만 반-스탈린주의자였던 미국 비평가 드와이트 맥도널드가 쓴 『영화 감각』에 대한 박식한 리뷰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음을 보라. “The Eisenstein Tragedy,” in Dwight Macdonald, The Responsibility of Peoples,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Criticism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57), p. 159.[/note] 시도로서 진정한 이론적 전개라기보다는 어떤 전략으로 보았다. 이때부터 에이젠슈타인에 대한 학계의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다. 에이젠슈타인은 초기의 에이젠슈타인과 후기의 에이젠슈타인으로 나뉘는가? 그렇다면 그 변화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스탈린주의의 압제를 감안했을 때, 특히 후기의 저술에서 이론가로서 에이젠슈타인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오늘날엔 더 많은 그의 후기 저술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음에도, 후기 저술의 중대성과 그 복합성,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와 깊이, 그리고 그 기나긴 지적 헌신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note title=”3″back] 자크 오몽이나 제프리 노웰-스미스같은 동시대 영화이론가들은, 이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던 에이젠슈타인의 저술들을 고려했을 때 에이젠슈타인은 이제 “20세기 예술의 위대한 철학자들 중 하나”이자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미학자”라고 평가한다. Jacques Aumont, Montage Eisenstein, trans. Lee Hildreth, Constance Penley, Andrew Ros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p. viii. Geoffrey Nowell-Smith, “Eisenstein’s Aesthetics: Eisenstein in the 21st Century,” foreword to The Montage Principle: Eisenstein in New Cultural and Critical Contexts, ed. Jean Antoine-Dunne with Paula Quigley (Amsterdam: Rodopi, 1994), p. xvi.[/note] 여기서 나는 그의 일부 주요한 관심사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적 관심사로, 가령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읽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짧은 글은 에이젠슈타인의 초기와 후기에 걸친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는 그의 글에서 몇 가지 사례에 주목할 것이다. 일생에 걸쳐 그의 이론적 작업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대개 관객, 보는 이, 독자 혹은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관람(the spectator)과 관련된 영화적이고 미적인 형식이었다. 형식이나 관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영화나 예술작품을 관객을 향한 말하기(address)로 이해하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라는 용어로 형식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을 시작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론적인 작업을 하는 내내 몽타주 개념을 지속시키며 확장했다. 1920년대의 글에서 몽타주 개념은 곧 영화 편집을 넘어서 변증법 전체를 가리켰다. 이는 작품의 모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대립되고 모순적으로 마주하지만 결국 역동적이며 변증법적인 종합으로 해소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그는 또한 몽타주가 관객에게 작용하는 것(work on spectators)이자 관객이 함께 하는 것(with spectators)이라 생각했다.

 

그가 초창기에 쓴 이론적 글은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서 이 틀을 제시한다. 완전히 정전이 된 그의 1920년대 글들보다 3년 전인 1925년에 쓰인 짧은 글, 「노동자 영화 제작 방법 The Method of Making Workers’ Films」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막 그의 첫 번째 영화인 <파업>을 완성했으며,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대해 논의한다. 이는 제정 러시아의 코자크 군대가 파업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장면 안으로 현대식 도살장에서 황소를 도축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삽입되는 복잡한 몽타주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이 몽타주를 형식적인 메커니즘으로 규정하지만, 조건반사 및 무조건반사라는 비교적 새로운 파블로프식 용어로 그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는 영화가, 사전에 조건 지어진 관객의 연상작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람직한 새로운 경로로 이끄는 자극이나 충격을 조직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에이젠슈타인은 모종의 실패를 기술한다. 그는 부르주아 관객만이 <파업>의 클라이맥스에 상응하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을 뿐 노동자와 농민은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노동자들은 황소의 도살을 육류 가공 공장의 일상 노동과 연관시키고 농민들은 그를 동물을 도살하는 평범한 시골의 소일거리와 관련시켰던 것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신(scene)이 주는 감정과 정서는 존재하지 않았다.[note title=”4″back] “The Method of Making a Workers’ Film,”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SW1, p.66.[/note]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 흑백,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파업>, 흑백, 1925

 

이 사례는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적 영화감독들에게 모종의 장애가 놓여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컨대 영화 관객은 사회경제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에이젠슈타인에 의하면 이 계급격차는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삶의 차이를 결정한다. 즉, 동일한 지각적 자극은 다른 계급의 구성원들에게 서로 다른 연관성을 유발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정서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1925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영화감독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된 것은 모든 관객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참여시키는 것이었으며, 영화와 예술은 이 과업에 필요한 새로운 인식과 목적을 전달하기 위한 핵심적인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미적으로 생성된 정서가 관객의 사회적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그들의 공통성을 정서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기에 이데올로기적이라면,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닐까? 에이젠슈타인이 초기 저서에서 몽타주를 충격과 모순의 조직으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관객에게 정서적인 통일을 만들어내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파업>의 실패가 갖는 진짜 중요성이다. 어떻게 관객이 정서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 질문은 이후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형식, 영화-관람의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일반적인 미학을 이론화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었다.[note title=”5″back] 예컨대 몇 년 후인 1929년, 그는 조건반사 언어를 사용하며, 추상이나 이념이 “집단적으로 경험된 지각”이 되는 “단일한 집단적 열정의 장”이라는 목표를 기술한다. Eisenstein, “Perspectives” in SW1, p. 157. 에이젠슈타인은 성공적인 강의를 자신의 모델로 말하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를 형식의 문제로 만들고 영화가 논리의 언어와 이미지(상)의 언어 사이의 충돌을 지울 수 있는 현재 유일한 예술 형식이기에 이념(이데올로기)에 대한 열정을 회복시킨다고 주장한다. Ibid., p. 158.[/note] 

 

지금까지의 설명은 정서적으로 분열된 관객 정서적으로 통일된 관객,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분된 관객 집단적 관객이라는 주요한 대립의 문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노동자 영화 제작 방법」에 담긴 마르크스주의자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이러한 대립을 사회 계급 계급없는 관객 또는 적어도 계급으로 나뉘지 않는 관객으로 다시 쓰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 흑백,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파업>, 흑백, 1925

 

계급에 따라 나뉘지 않는 관객이라고? 아니, 관객은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계급에 따라 나뉘었을지라도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급이 사라진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까? 이는 계급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소비에트 사회의 공식적인 목표와 공명한다(실제로 1930년대 중반까지 스탈린은 소련이 성공적으로 계급 착취를 제거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노동자, 농민 및 지식인과 같은 몇몇 계급들 사이에서 계급 갈등은 사라졌다고 스스로 공표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완전히 계급없는 사회라 할 수는 없지만, “더 높은” 공산주의가 성취할 완전히 계급없는 사회에 이르는 과정에서 “낮은” 공산주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note title=”6″back]J. V. Stalin, “On the Draft Constitution of the U.S.S.R.: Report Delivered at the Extraordinary Eight Congress of the Soviets of the U.S.S.R., 25 November 1936,” reprinted on Marxists Internet Archive,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36/11/25.htm.[/note]).   

 

하지만 단연코 영화나 예술작품 자체만으로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어떻게 보자면 이는 에이젠슈타인이 구상한 사회-정서적 통일이 유토피아적 체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가 계급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고 가정하는 데 반해, 계급이 사라지는 정신적 체험은 일시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영화를 보는 그 현장에 존재한다. 관람성(spectatorship)은 역사적으로 선행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험적 현실을 차치하고라도 당시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대의 유토피아주의자들에게 취했던 입장[note title=”7″back]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전에 이미 푸리에, 생시몽, 오언 등 19세기 초 일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모종의 유토피아주의를 표출한 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그들의 상상력이 지닌 중요성을 십분 인정하지만 그러한 부정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며 비판한다. (역자 주)[/note]을 따라 유토피아주의가 공식적으로 거부되었으며, 에이젠슈타인은 분명 명시적으로 유토피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환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 영화 제작 방법」에서 제기된 문제가, 후기 에이젠슈타인을 방대한 미학적 연구와 저술로 이끈 몇몇 문제를 밝히는 데 있어 유토피아적 소망이 도움이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관계(terms)였을까?

 

여기서 나는, 이러한 프로젝트가 그의 후기 영화이론과 미학에서 취한 몇몇 도식적 방향만을 제시하려 한다. 이는 주로 1935년 소비에트 연방 영화노동자 창작회의(All-Union Creative Conference of Soviet Film workers)에서 있었던 그의 연설과 관련된다. 이 연설에서 에이젠슈타인은 관람성과 관련된 그의 형식과 몽타주 개념에 있어 중대한 새로운 국면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note title=”8″back] 다음을 참조할 것. “Film Form: New Problems” in Eisenstein, Film Form, pp. 122-149. 이는 보다 압축적이고 세련된 연설로, 이전의 연설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전의 연설은 다음을 참조. “Speech to the All-Union Creative Conference of Soviet Film workers” in SW3, pp. 16-47. 1935년의 연설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계급 갈등이 사라졌다는 스탈린의 선언보다 시기적으로 다소 앞섰다는 점을 주목하라.[/note] 후기의 저술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그는 예술사와 영화뿐 아니라 미학, 인류학, 역사, 철학, 수사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끌어들인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새로운 용어를 치켜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의 사회적 기능뿐 아니라 영화이론과 미학을 위한 형식의 중요성을 거듭해서 주장한다. 그는 제법 대담하게도 신임을 잃은 형식주의 용어인 몽타주를 고수하지만, 자신의 이론에 새로운 관람성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를 다시금 사고한다. 여기서 나는 주로 내적 발화(inner speech) 그리고 전논리적(prelogical) 또는 감각적 사고라는 두 가지 새로운 개념에 주목한 다음, 관람성이 지닌 정서적 통일과 계급없음(classlessness)의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내적 발화는 당대의 주요한 소비에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개념이다. 이는 에이젠슈타인 외에도 언어학 및 문학연구에서 바흐찐 그룹과 소비에트의 발달 심리학자였던 레프 비고츠키(Lev Vygotsky)에게도 중요했다(그의 명민한 제자 알렉산더 루리아(Alexander Luria)는 에이젠슈타인과 가까운 사이였다). 심리학자들은 아이의 언어학습 발달에 있어 어떻게 사고가 발화와 연계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연구는, 어린 아이의 사고(mental life)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는 의미에서 내적인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내적 대화 또는 내적 발화는 외적 발화의 원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내적 발화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타인에게 전달되기에 특정한 논리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성숙한 개인의 외적 발화와는 다르다. 내적 발화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는 반면 언어는 특히 그 구문과 의미론적 과정에서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성인의 사고 과정에는 내적 발화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비고츠키와 그 동료들은 글을 쓰며 개인의 주관성 및 사고의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성격을 위시하여 많은 것들을 도출해냈다. 몇몇 내적 발화의 지지자들, 특히 바흐찐 그룹의 일원들에게 내적 발화는 어떤 발화이든 모든 언어 사용에 있어 내적인 대화 또는 바흐찐(Mikhail Bakhtin)이 대화주의(dialogism)라 부른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흐찐에게 대화의 내부(inner life)라는 이 이념은 정신과 개별성이 사회적이라는 증거였으며, 이러한 내적 목소리의 다원성은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로 구성된 문학 작품에 조응했다.[note title=”9″back] 이 글은 이 시기 동안의 내적 발화 개념이 지닌 논의와 영향을 완전히 다루지 않는다. 그 논의들은 내가 이 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감지하기 어려우며 미묘하고 개별적이다. 비고츠키와 바흐찐 및 그 그룹의 다른 일원인 V.L.볼로쉬노프(V.L.Volosinov)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위시한 설명은 다음을 보라. Gary Saul Morsen and Caryl Emerson, Mikhail Bakhtin: Creation of a Prosaics (Palo Alto,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Chapter 7. 그러나 이 책은 바흐찐을 반-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다른 글에서 비고츠키와 그의 동료들, 바흐찐 그룹과 에이젠슈타인은 스탈린주의 문화 내에서 이론적 논쟁에 실제로 전념하고 개입하고자 한 마르크스주의 혁신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모두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중반 사이에 내적 발화를 적용했고 각각 다양한 결과를 낳았다. 다음을 볼 것. Philip Rosen, “Revolution und Regression: Zur Zeitlichkeit in Ėjzenštejns Theorien des Kinos und der Kulter” in Jetztundann: Zeiterfahrung in Film, Literatur und Philosophie, ed. Gertrud Koch et al. (Munich: Fink-Verlag, 2010).[/note]

 

1935년 연설에서 에이젠슈타인이 관람에 대해 논의할 때, 이제 자극과 반사작용의 개념은 사라진다.[note title=”10″back] 그러나 에이젠슈타인의 후기 저술에서 육체적 또는 생리학적 틀이나 사고의 신경 활동 및 반사작용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접근법은 유물론적 심리학이라는 자체의 주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용어들은 때때로 에이젠슈타인의 후기 작업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비고츠키와 바흐찐 그룹은 파블로프 심리학에 반대하는 내적 발화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에이젠슈타인에게는 얼마간 강조점의 이동이 있는 것 같다. 에이젠슈타인이 일부 정신분석학 이론을 읽고 있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에 그가 글에서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해 명시적이고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note] 그 대신 그는 내적 발화를 관람과 형식에 대한 설명에 있어 핵심적인 요인으로 만든다. 비고츠키와 마찬가지로, 그는 내적/외적 발화를 구분하며 통사적 원리와 의미론적 과정을 강조한다. 의미론적 수준에서 내적 발화의 말은 대상을 추상적 개념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특수성과 구체적 특질을 가리킨다. 그 결과, 그러한 특수한 특질은 사고에 있어 이념들을 연결하는 근간이 된다. 반면, 외적 발화의 지배적인 경향은 말을 추상적인 범주 내지는 특수한 것들을 묶는 개념으로 만들고, 이러한 개념은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내적 발화의 구문은 사물의 기호가 가리키는 그 사물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특질에 대한 비유적(figurative) 연결을 통해 작용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내적 발화의 구문 원리를 규제하는 것은 은유(metaphor)와 제유(synecdoche)라는 고전적인 수사적 비유라고 역설한다. 내적 발화가 대상이 가리키는 대상의 구체적인 특질에 따라 연결된 사고의 끊임없는 흐름이라 한다면, 그것들은 상상적으로, 심지어는 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로써 에이젠슈타인은 내적 발화를 시뿐만이 아니라 몽타주로 비유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이젠슈타인이 이러한 연결은 또한 정서적이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내적 발화를 정서의 언어로 만들며, 내적 발화에서의 사고의 흐름을 정서적 흐름으로 만든다. 그는 종종 내적 발화가 감각적인 사고일 뿐 아니라 정서적인 사고라고 말한다. 비고츠키와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타인은 외적 발화가 내적 발화를 폐기하지 않고, 두 수준이 정신적으로 공존하며 서로 의존한다고 단언한다. 이는, 에이젠슈타인에게 외적 발화의 논리적인 구성 밑바탕에는 사고에 있어 정서의 수준이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가 계급없음과 관련된 형식과 관람성 및 통합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와 예술에 의해 야기된 특별한 종류의 감정과 정서는 형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에이젠슈타인이 평생동안 지녀온 전제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내적 발화가 정서의 흐름이라면 구체적인 특질의 특수한 기호가 은유나 제유와 같은 원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흐름은 형식을 지닌다. 그가 중대한 발견이라 말한 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발견이 아니다. 그는, 정서적 사고의 흐름은 영화나 예술작품이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기반이 될 뿐더러 나아가 이는 미적 형식이 내적이고 정서적인 발화의 (구문론적) 형식을 반영하거나 그와 공명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적 발화를 구성하는 법칙은 …예술작품의 형식과 구조를 구축하는 다양한 법칙들 전체의 기저에 있는 법칙과 동일하다. 또한 (외적 발화의 논리와 별개로) 내적 발화를 구성하는 법칙에 속하지 않는 형식적 장치란 [영화 혹은 어떤 예술 형식에서든] 없다.”[note title=”11″back] SW3, p. 28. 강조는 원문.[/note]

 

  에이젠슈타인의 논의는 또한 예술적 형식의 역사 및 초기 예술형식과 영화의 연속성에 비추어 이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새로이 해명해준다. 예술에는 의식의 최고봉이라 할 이념을 향한 확고하고 점진적인 상승이 있으며 동시에 형식 구조를 통해 정서적 사고의 가장 깊은 층으로 침투하는 운동이 있다. 이 두 동향 사이의 양극성은 진정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내용의 통합이라는 놀라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note title=”12″back] Ibid., p. 38.[/note]

 

  이 1935년의 연설은 에이젠슈타인이 남은 생애동안 연구했던 지극히 복잡한 미학 이론을 전개할 수 있게끔 한 공식적인 기반이었다. 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주장은 비교적 단순하며, 그가 일생 동안 미적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명분이 된다. 요컨대 작품의 “내용”은 그 작품에 동기를 부여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이 이념은 사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생성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영화적 관습(film practice)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미적 형식은 이 이념에 감정과 정서를 부여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작품의 역동적인 구성에 가담하게 되며 따라서 참여의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에 관여하게 된다. 형식은 내적 발화 연구에서 드러난 바대로 정서의 흐름을 구성하는 상상적이고 비유적인 형식 및 구문에 깊숙이 준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행한다. 예술 형식과 내적 발화 형식의 일치는 성공적인 영화나 예술작품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정서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영화나 예술작품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효과적이게끔 만든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 흑백,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파업>, 흑백, 1925

 

이 새로운 개념은 「노동자 영화 제작 방법」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같은 정서나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모든 정서는 비슷한 구문이나 형식으로 조직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정서의 흐름이 동일한 구문으로 통제된다면 이는 정서적인 형식이 계급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뜻하며, 이와 동일한 논리가 정서적 형식을 반영하는 미적 형식의 효과에도 적용될 것이다. 만약 이를 계급없음에 대한 초기의 연구로 다시 읽는다면, 이는 비역사적인 보편주의로 해소될 여지가 있다. 1925년, 에이젠슈타인은 관객을 통합하고자 했던 <파업>의 실패가 형식적인 실패라 말했다. 1935년 연설의 견지에서 볼 때 이는 여전히 실패이겠지만 실패의 조건은 다르다. 다른 계급적 연상 작용으로 인해 관객이 정서적으로 나뉠 때, 이는 감독이 인간의 정신 과정을 반영함으로써 그 보편적인 형식에 호소할 수 있는 구성적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관객은 역사적으로 자리한 계급적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경우 해결책은 일종의 형식이라는 보편성이다. 게다가 설명의 결정적인 요인은 비역사적으로 보인다. 이 설명은 사회성과 역사에 기초함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그 자체로 역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를 생각해보기 위해선 1935년 연설에서의 또 다른 주요 주장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문화와 전논리적인 것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놀랍게도 에이젠슈타인은 일종의 개체발생-계통발생 논의를 통해 정서적이거나 감각적인 사고에서 기인하는 특별한 특질을 문화 전체로 확장시킨다. 개인으로서 어린 아이들은, 내적 발화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서적이고 비유적인 사유, 즉 에이젠슈타인이 전논리적 사유라 부르는 감각적 사유가 정신적 삶을 지배하는 초기의 언어 단계를 거친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후일 외적 발화와 논리적 사고의 기초가 된다.

 

1935년 연설에서 그는 인류 문화의 역사에서 이 개별적이며 심리적인 단계와 평행하는 단계를 생각해내고, 그 초-개인적이고 초-문화적인 관행을 정초하는 동일한 구조를 발견한다. 그는 인류학 및 그와 관련된 언어학, 특히 뤼시앙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의 “원시적 정신(primitive mentalities)” 개념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에이젠슈타인은 모든 문화의 기원이 동시대 토착 문화와 언어를 통해 표상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끌렸다. 또한 그는 이러한 문화적 관행과 의식이, 아이의 자기중심적이고 내적인 발화와 동일한 형태의 전논리적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적 발화의 전논리적 사고를 규제하는 법칙과 동일한 법칙이 비-근대적 사회 형태의 관습과 의식 및 일상적인 인식 구조를 규제한다고 말한다.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사고는 논리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마술적 사고방식처럼 비칠 수도 있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이는 사회, 문화 발전에 있어 “시작점”이자 “임계점”으로, “전논리적”이라 할 “초기의 사고 형식”을 드러낸다. 이는 근대 사회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에게 남아있는 내적 발화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잔존한다.[note title=”13″back] SW3, pp. 30-31. SW1, p. 31. 이러한 정서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보라. Film Form, “Dawn”, p. 30.[/note] 그런 점에서 토착 문화에서의 사고는 근대 산업 문화에서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정서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토착민의 “원시적” 정신이라는 개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사상가가 만든 이러한 구분은 에이젠슈타인 자신이 인지했듯 인종주의로 빠질 여지가 있다. 인류학에서는 이제 이러한 구분을 거부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에이젠슈타인의 생각이다. 한편으로 이는 사회구성체의 유형이 정신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확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다른 한편 이것은 근대 사회의 발전된 예술이 부분과 전체라 할 수 있는 내부와 외부, 전논리와 논리, 정서와 이성이 연결하는 교차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에이젠슈타인이 관객의 정서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한 가지 이념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바로 퇴행(regression)이다. 즉, 예술작품의 독특한 특질과 이점은 퇴행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퇴행이란, 영화 혹은 예술작품이 주는 정서적 사고에 압도되거나 감동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인 것만이 아니다. 이는 근대와 공존하고 그 안에서 지속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퇴행이기도 하다. 그 역설은, 예술적 형식이 지닌 호소력에는 유년기나 전근대의 문화적 관습이라는 잔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퇴행적인 호소력은 근대화, 또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있어서 짐짓 예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용하게 만든다. 이야말로 에이젠슈타인의 후기 이론에서 정서적으로 통일된 관객을 이루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계급 없는 관람이라는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퇴행적인 호소력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의 규범에서는, 엥겔스가 사실상 선사시대(prehistoric)와 다를 바 없다고 본 원시 공산주의를 떠올릴 수도 있다. 또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유토피아주의를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때의 유토피아는 완벽한 사회라는 질서정연한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나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언급한 바대로 암묵적이고 충동적인 소망이나 욕망이라 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에이젠슈타인은 이후 평생동안 퇴행이라는 개념과 퇴행이 인간을 매혹시키는 지점을 탐구하는 데 신중히 또 지나칠 정도로 몰두했다. 그는 언제나 이를 비-구분을 만들어내는 정서적 욕구와 관련시켰다. 퇴행과 비-구분을 연결하는 데 매료되었던 그는 플라즈마(the plasmatic)라는 개념에 이끌렸다. 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형체(shapes)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대상(objects)이 되기도 하는 존재를 가리키며, 일상적인 논리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의 원초적인 유동성을 전제로 한다. 그는 때로 이를 아메바, 자궁, 모성애(mutter-liebe), 성적 비구분(indifferentiation), 물질의 근원적인 유연성(malleability)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의 호소력은, 자궁이나 어머니 또는 물리적인 자연 그 자체의 기원으로 되돌아가고 무정형적이며 미분화된 것으로 회귀한다는 점에 있다.[note title=”14″back] 디즈니에 대한 에이젠슈타인의 글과 메모에서 플라즈마에 대한 정의와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을 보라. The Eisenstein Collection, pp. 101, 101, 125-130.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몇몇 쟁점에 있어 엥겔스를 참조할 수 있었으며, 종종 그를 인용했다. 예컨대 1925년에 처음으로 출판됐으며 운 좋게도 공식적으로 수용된 『자연의 변증법 Dialectic of Nature』이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삶이 영구적인 운동이자 생성, 변화라는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엥겔스를 인용할 수 있었다. 에이젠슈타인이 원초적 퇴행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나 새로운 사고를 이끈 영감, 무엇보다 성과 젠더에 관한 징후적 독해에 대해선 다음을 참조하라. Masha Salazkina, In Excess: Sergei Eisenstein’s Mexico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note]

 

그렇다면 계급없음의 문제는? 이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의 논리가 항상 퇴행으로 귀착되어야 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유토피아주의는 가설적이며 완벽한 사회의 공간적인 조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욕구의 기반이자 미적, 문화적 실천의 원인이 되는 소망이나 욕망, 종종은 무의식으로 출현할 수도 있다. 블로흐나 제임슨은 이러한 관점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이와 달리 만일 유토피아가 구체화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1936년 초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했다.[note title=”15″back] Stalin, 앞의 글.[/note] 나는 에이젠슈타인의 관람성 개념이 최종적인 역사적 순간에서의 계급없음이라는 꿈에서 야기된 유토피아적 충동으로 읽혀질 수도 있지만 종국에는 비역사적인 보편주의가 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는 관람을 유토피아적인 소망이자 욕망 및 꿈의 발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는 에이젠슈타인의 후기 이론을 스탈린주의 미학에 굴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묶어줄 수 있는 끈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쩌면 에이젠슈타인은, 그러한 유토피아적 소망이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모든 꿈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퇴행이나 가상에 대한 매혹을 수반하는지 여부를 물어보는 데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더욱 방대한 연구를 촉발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끝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