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이미지: 재커리 폼왈트와의 인터뷰
번역 장병호

사미르 겐데샤/요한 F. 하틀[SG/JH]: 당신의 작업은 한 가지 분명한 이유로 이 책을 굉장히 흥미롭게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문화를 『자본』을 통해 읽으면서, 그것은 시각적 재현의 기술에 관한 자본 형식의 반향과 효과를 거듭 다룹니다. 예를 들어 장시간 노출과 저속 촬영은 노동을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 상품으로 사회적 관계들을 감추는 상품물신주의의 논리와 일치하는 – 시각적 방식으로서 논의됩니다. 이러한 시도에서 그것은 자주 무시되는 연속성인, 루카치(Georg Lukacs)의 물화 분석에서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 비판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이행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전통이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되었나요? 그리고 직접 이 연속성을 규정해줄 수 있을까요? 어디서 가장 흥미로운 불연속성을 볼 수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재커리 폼왈트[ZF]: 바디우(Alain Badiou)로 생각되는데, 그가 어디에선가 들뢰즈(Gilles Deleuze)와 관련하여, 차이는 그저 있는 것이며, 동일성이야말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note title=”1″back] Alain Badiou, The Clamour of Be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note]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당신이 루카치와 드보르 사이의 연속성을, 일반적으로 말해서, 상품물신주의 개념에 대한 그들의 전개로 규정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상품물신주의는 물론 변증법적 전개가 될 것이며, 주요 사례로는 마르크스(Karl Marx)의 용어이자 루카치에겐 매개적 개념으로서의 ‘물화(reification)’, 드보르에겐 일종의 시원으로의 복귀로서 더 구체적인, 즉 역사적으로 성숙한 상품물신주의의 형식인 ‘스펙터클’입니다. 이 세가지 경우 모두에서, 자본이 동일성을 생산하는 형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드보르와 루카치를 읽은 지는 꽤 지났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마르크스는 자본이 생산하는 이러한 동일성을 조금 더 낙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적어도 자본의 이해에 대항하면서 자본의 산물인 피착취대중의 이해에 복무하게끔 접합(articulation)되고 증강되는 또 다른 종류의 통일성이라는 궁극적인 가능성에 관해서 말이죠. 자본은 무력한 개인들로 통합된 신체를 생산하고 그러한 통합의 여러 측면들은 자본에 대항하여 사용될 수 있습니다.[note title=”2″back]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부르주아지는, 파우스트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바로 그 힘,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내는 마법사로 간주된다. Karl Marx, Friedrich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Pluto Press, 2008).[/note] 이는 자신에 반해 사용될 수 있는 자본축적의 과정 안에서 여러 형식적 측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만약 루카치가 상품물신주의를 보다 폭넓은 물화의 과정으로 일반화하고, 또한 그 점이 상품물신주의를 자본에 반하여 행동을 조직하는 형식으로 사용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드보르는 이러한 기회를 자본에 의해 전적으로 빼앗겼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적 경험의 대상들이 상품 형태로 철저히 환원된 순간에는 어떤 면에서 상품물신주의의 보다 특정한 영역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주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들이 우리가 노동자로서 생산하는 – 우리가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보이지 않게 하는 – 상품에 의해 더 이상 일차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경우이며, 따라서 우리 관계들의 진정한 본질을 서로 어떤 직접적인 개입의 형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대신에 우리는 이들 사회적 관계들이 이제 직접적으로 스펙터클의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의 표상을 볼 뿐이며, 그 점에서, 이것이 개입의 공간을 더욱더 지각하기 어렵게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불연속성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우리는 지금 스펙터클의 영역 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는 상품물신주의, 물화, 스펙터클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상품 형태는 바뀌지 않고, 거친 의미에서 그 소재(material)만이 바뀌었지요.

 

저는 불연속성이라고 정식화하는 데 더욱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흔치 않고, 그러한 이미지들은 자본에 복속되기보다는 그에 대항하는 활동을 발전시킬 잠재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상품으로서의 이미지가 가지는 일차적 역할을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진정한 연속성,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상품은 가장 기본적인 소재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산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상품의 기원에 도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기껏해야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일 수 밖에 없는 이미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자연적 실체가 사회적 과정과 만나고, 그에 의해 그것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재화가 되는 바로 그 임계점(threshold)에 위치한 기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그러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는 살고 있지 않은, 그러므로 개입할 힘이 없는 세계 속에 관람자를 속박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종류의 이미지입니다.[note title=”3″back]이를테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개인과 개인의 실제 조건과의 가상적인 관계’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라캉주의적 서술을 보라. Louis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New York, NY: Monthly Review Press, 1971).[/note]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이미지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것들은 넓게 말해 제가 찾아 왔으며, 또한 만들어 내고자 했던 바로 그러한 이미지들입니다. 

 

 

SG/JH: 누구나 마르크스, 루카치, 그리고 드보르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동일성이 생산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주의'[note title=”4″back]Guy Debord, Society of the Spectacle (Detroit: Black & Red, 1970).[/note]라는 주장을 통해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을 가르키는 테제를 제안하는 유명한 도입부로 마르크스에게 복귀하는 것으로 보여진 때는 바로 1920년 중후반경이며, 이때쯤에 저희는 양질전환의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시 당신의 영화, <이미지의 자본론 In Place of Capital>(2009)에서 당신은 저희가 물신주의에 대한 어떤 불가피한 논리를 확인할 수 있는 금융 자본과 사진술의 동일한 기원(equiprimordial origin)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헨리 탈봇(Henry Talbot) 인용하면서 ‘움직이는 대중’이라고 말한 그 순간은 탈봇과 다게르(Louis Daguerre)의 초기 사진 실험에서 극도로 긴 노출시간을 감안할 때와 같이 사라지며, M-M’이라는 자본 운동 안에서의 그것, 즉 운동 그 자체도 재현될 수 없습니다. 이 때 당신은 매체 자체는 비판적인 방식으로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탈물신화하는(de-fetishizing)’ 방식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이 점은 사진술이 자본의 가치증식 순환 안에서 그 흐름을 더욱 가속시키는 테일러주의의 요체라는 식의 당신의 언급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ZF: 저는 특히 자본에 관하여, 사진술이 비판적인 방식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의도하거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술은 금융과 마찬가지로 기술입니다. 저는 그들이 공통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둘은 분명히 특정한 순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경제지에 삽화로 사용되는 종류의 사진으로 보통 제시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롭고 복잡합니다. 2007년 금융위기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 2년 후, 저는 2009년에 <이미지의 자본론>을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공황, 그리고 대체로 금융계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이 사진들로 설명되었습니다. <이미지의 자본론>에서 저는 매일같이 신문에서 등장하는 거래소와 은행 및 금융기관의 현대 이미지들에 대한 대조로서 헨리 탈봇의 1845년 런던 왕립 교환 거래소의 사진들을 취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는 사진술의 실패 즉, 특정 유형의 운동을 포착함에 있어 실패라는 유산을 그려 내려는 것이었습니다. 1845년, 사진술은 공간 속 움직이는 신체를 – 구체적으로 런던의 상품거래소 앞 행인들의 신체를 – 포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2009년에 자본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도 실패했죠. 하지만 저는 또한, 움직이는 신체의 묘사에 대한 이전의 실패를 자본의 이미지 그 자체로 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건물의 파사드(façade)와 우의적인 박공벽(pediment) 조각은 오늘날 동일한 파사드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신문 사진에서와 같이 1845년 사진에서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하지만 초기의 사진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경제의 재현적 형태가 나타나는데, 즉 교환의 알레고리는 실제 교환의 상실 아래 완벽히 표현되는 것입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하단에 움직이는 신체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discovering)’ 할애됩니다. 왕립거래소 주변에 있는 군중들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그 실패는 또한, 자본의 미적 상황에 대한 핵심적 측면이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본 축적에 따른 운동의 역사는 바로 그 축적 과정에서 끊임없이 말소되었습니다.[note title=”5″back]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대한 『자본』 제2권의 서술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잉여가치의 기원이 첫 번째 자본의 순환에서 이후의 순환으로의 이동에서 사라져버리는 방식을 보여준다. Karl Marx, Capital Vol. II (London: Penguin Classics, 1992), 159–160.[/note] 따라서 사진 기술의 발전 초기에, 그 매체는 실제로 자본의 특정한 양상을 보여주는 데 적절합니다. 

 

재커리 폼왈트, <이미지의 자본론> (2009)의 비디오 스틸, 헨리 탈봇의 1845년 런던 왕립 교환 거래소 사진 중 한 장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술과 물신주의에 대한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저는 사진을 물신화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진이란 실행되는 어떤 것입니다. 한 곳에서 사진이 물신적으로 이용된다고 해서 물신화에 반하는 사진의 실천을 막지는 못합니다. 특히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사진은 당연하게 여겨지거나 물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SG/JH: 당신의 작업을 보게되면 누구나 자본과 시각매체가 서로 수렴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영과 더불어 물화와 스펙터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기하학적 구조와 사회적 추상화(예를 들어 센젠과 암스테르담의 유리 건물)을 통한 자본의 공간화, 그리고 (센트럴 파크에서 당신의 영화, <정교한 화면의 기술 Through a Fine Screen>의 경우와 같이) 픽쳐레스크(the picturesque)에 대한 정교한 관심 또한 발견할 수 있죠. 이는 기하학적 형식에 대한 상당한 주의력을 요합니다. 이러한 형식적 접근은 (하지만 역사적 탐구를 통해,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는, 공식적인 관행에 대한 당신의 사회적 맥락화로)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적 서사화를 강조하고 있어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당신의 영화 에세이가 다소 단조롭고 우울한 목소리를 통해 드보르의 작업과 꽤 명확하게 일치하는 반면, 그것은 또한 전용(détournement)이라는 전복적인 양식적 실천에 상당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한편으로 서사화와 역사적 착근(historical embedment)에 있어 루카치주의의 탈-물화적 시도와 다른 한편으로는 (전용, 표류, 드보르적 영화 에세이의 전통이라는) 상황주의적 지침에 관련시켜 볼 때, 자신의 미학적 전략을 어떻게 특징지으시나요?

 

ZF: 영화 에세이에서 전용은 때때로 단 하나의 이미지, 보다 최근에는, 특정 종류의 이미지와 관련됩니다. <정교한 화면의 기술>에서 저는 기술적 수단을 통해 신문에 인쇄된 최초의 이미지를 취했습니다. 1880년 그 이미지가 인쇄되었을 때, 단지 기술적 특징만이 묘사되었습니다. 이 맥락 안에서 핵심은 이미지가 그 사진과 맺는 관계의 직접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동판 형태로 그 당시 신문에 등장하고 있던 다른 모든 사실적인 이미지에서처럼 사진과 신문 사이에 어떠한 저자(artist)도 부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미지가 게재되었던 《데일리 그래픽 The Daily Graphic》지에서 주장한 대로, 이는 이미지가 앞으로 어떻게 신문에서 인쇄될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예측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데일리 그래픽》이 설명한 기술적인 측면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무슨 이미지였을까요? 그 신문에 실린 유일한 단서는 ‘뉴욕의 판자촌 장면’이라는 표제와 사진사가 건조물 바로 앞에서 그 이미지를 촬영했다는 메인 기사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앞에서 촬영되었다고 신문에서 그들이 묘사한 ‘뉴욕의 판자촌 장면’은 왜 기계 복제 사진의 기술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것일까요? 이것은 센트럴 파크와 공원 설계에 영향을 미친 픽처레스크 이론을 살피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 이 작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공원의 형태에서, 픽처레스크는 분명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보게 하는 또 다른 전략이었습니다. 일부 사진의 경향처럼, 픽처레스크 공원 설계의 이론과 실제는 자연과 그것의 관계가 특정한 계획으로 나타난 물화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이런 현실의 구성체를 부인하는 형태로 현실을 파악하여, 그것의 구체적인 생산 조건들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뉴욕의 판자촌 장면. 자연으로부터 직접 복제’ (《데일리 그래픽》, 1880). 재커리 폼왈트,  (2010)의 프로덕션 스틸.
‘뉴욕의 판자촌 장면, 자연으로부터 직접 복제’《데일리 그래픽》(1880). 재커리 폼왈트, <정교한 화면의 기술>(2010)의 스틸 이미지.

 

센트럴 파크에서, 판자촌 주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철거를 정당화하는 전략은 공원의 건립 조건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신문 속 이미지에서, 사진사가 뉴욕의 판자촌을 이미지로 담아낸 그 직접적 현전(the immediate presence)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추상화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이 이미지가 실제로 촬영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데일리 그래픽》지에 그 이미지가 실리기 20년 전에 일부 뉴욕 판자촌 지역이 공원에 길을 내기 위해 철거되었지만, 그 당시 판자촌 지역의 일부는 공원의 서쪽에 여전히 존재했습니다(그리고 ‘판자촌’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슬럼 slum’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례였습니다). 따라서 《데일리 그래픽》지의 판자촌 장면과 센트럴 파크의 건립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단지 그 사진이 인쇄 매체의 미래를 그린 이미지로 신문에 묘사된 방식 때문입니다.

 

전용은 사진으로 설명된 출판물(photo-illustrated press)의 기원을 둔 이 이미지의 위상과 관련됩니다. 저는 사진인쇄 기술의 물화, 실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슬럼 물신화를 이러한 출판물의 기원 안으로 재기입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다른 역사 속에서 헤아려지기를 원했습니다. 보도 분야의 기술발전의 중요한 시점으로서 포토저널리즘의 역사 내에서 뿐 아니라, 도시개발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용은 실제로 그 이미지 자체보다는, 포토저널리즘의 역사와 더욱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진으로 설명된 출판물의 시작에는, 단순히 카메라, 망점 스크린, 인쇄기 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존재의 기록과 바로 그 존재의 장소와 시간을 모두 소거하는 방식도 포함됩니다. 즉, 객관적으로 복제된 판자촌 장면의 사회적 조건 대신, 객관성에 대한 기술적 보증의 묘사인 것이죠. 

 

 

SG/JH: 그리고 물론, 루카치와 드보르의 전통 사이와 반대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작품을 공간적 형식 안에서 위치짓는데 구체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형식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상황주의자들과의 대화에서) 물화 비판을 재해석하면서 루카치와 드보르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의 유사성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간의 생산과, 그러한 생산에서 재현이라는 시각적 형식, 특히 사진의 기능입니다.

 

ZF: 특히, 제가 현재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는 바로 자본이 인식될 수 없다는 통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탁월한 계산기(supreme calculator), 즉 사회적 관계의 계산자로서 시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념과 관련됩니다. 시장은 사회적 관계의 규모를 계산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시장은 어떤 종류의 실체일까요? 그것은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공간에 존재하거나,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시공간의 조건일까요? 한편으로, 시장은 이때 자본에 대한 공간적 대조로서 기능합니다. 시장은 자본이 순환하는 곳이며, 바로 그 시장을 통해 자본은 순환합니다. 그렇다면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위를 둘러 보세요. 만약 당신이 보는 것이 개인들이 각자 독립된, 개개의 관심들만을 추구하는 거래들의 연쇄라면, 당신은 시장을 보고있는 중입니다. 시장에서 거래 이외의 모든 관계는 무의미합니다. 만약 주위를 둘러보며 거래로 환원될 수 없는 일련의 사회적 관계를 인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자본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그 둘을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드보르와 루카치에 관련지어보자면, ‘그 시장’은 자본 관계의 물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장’에 관한 사진이나 영화를 만드는 일이 자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저는 이미지를 제작하는 과정이 그 과정의 결과, 즉 이미지 그 자체보다 자본과 더욱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타종식 공간인 사진 기자들의 단상 사진, 중국의 셴젠 증권거래소. 재커리 폼왈트,  (2013)의 프로덕션 스틸.
사진 기자들을 위한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타종식 무대 전경, 중국의 센젠 증권거래소. 재커리 폼왈트, <아크에 비추어 In Light of the Arc>(2013)의 스틸 이미지.

 

지난 4년간 저는 영화 시리즈를 작업해 왔는데, 두 편중 하나는 중국의 새로운 센젠 증권거래소 건설 현장에서 촬영되었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후반에 유럽 최초의 옵션 거래소의 발상지인 암스테르담의 뵈르스 반 베를라허(Beurs van Berlage)라는 구 곡물 거래소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 두 거래소는 시장 활동을 위한 시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 시장을 상징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센젠 증권거래소의 건축가들이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시장 활동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죠. 자본이 모든 공간적 장벽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통신과 교통수단에 의한 교환의 물리적 토대와 그것의 확장을 통해 시간으로 공간을 절멸시킨다는(annihilating) 마르크스의 서술은 이 점에서 더욱 관련됩니다. 이 건물들은 다양한 시장을 거쳐 자본의 흐름을 조정하는 활동을 유치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마르크스가 서술한 절멸을 수행하지만, 건물의 파사드, 경우에 따라 실내의 내부 표면 역시 일차적으로 사진을 통해 시장을 재현하는 이미지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 건물들은 시장 활동을 제공하기 위한 만큼이나 이러한 이미지를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센젠 증권거래소에서, 사진 기자들을 위한 무대는 주요한 의례적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곳에서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타종식이 다양한 그래프와 수치로 시장 자료를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LED 화면 바로 앞에서 개최됩니다. 이 LED 화면은 도시를 바라보는 유리벽 바로 앞에 서 있습니다. 거래소 내부에서, 사진 기자들이 이 무대 앞에 자리를 잡고 촬영한 이미지는 LED 화면 앞에 서서 종을 울리는 사람을 클로즈업으로, 곧이어 와이드 샷으로 보여주며, 이 이미지는 도시 앞에 전경으로 놓여지게 됩니다. 배경으로서 LED 화면은 시장 지표의 세계 안에 종을 치는 신규 상장사 대표(bell ringer)의 이미지를, 배경으로서 도시는 그 도시/세계와의 접촉면으로서 그 시장 지표의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거래소 외부를 촬영할 때, 개장식이 개최되는 이 공간은, 다시 한 번 건축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지면 위로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캔틸레버식(cantilevered) 포디엄(podium)의 일부가 됩니다. 이제, 제작에 막대한 자본과 노동이 요구되었던 부유하는 포디엄 외형과 더불어, ‘파사드를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답게 만들어주면서, 그 이면에 건축기술을 드러낸다’라고 건축가들이 묘사했던, 포디엄 위로 뻗어있는 고층 건물의 양식화된 유리 파사드는 제가 생각하기에, 증권거래소 건축이 형상화하듯이 시장 이미지 안에서의 자본 관계의 물화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물화가 대부분의 건조 환경에 미친다고 생각하지만, 증권거래소 건축을 전형적인 사례의 한 종류로 보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특히, 잘 알려진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을 전도시키기 때문이며 자본이 순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그 시장의 확장은 성취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이 이미지에서, 그것은 시간이자 구체적으로 절멸된 노동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을 자본의 부속물로 이해하는 것은, 마이클 벨(Michael Bell)이라는 상반된 주장을 하는 건축가가 제시한 바와 같이, ‘현대 도시를 지배하는 시장 체제가 생산하는 건축은 재료와 노동이라는 시간 기반 과정에서 내적으로 결합되어(embedded) 있지만, 이러한 시간의 양태들은 여전히 건물의 최종적인 형태에서는 거의 알아볼 수도, 되살려낼 수도 없습니다. 즉, 도시의 생산에 대한 기억은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note title=”6″back] Michael Bell, ‘Eyes in the Heat: RSE’, Michael Bell: Space Replaces Us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2004).[/note] 따라서 시장 메커니즘의 확장은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을 수반하지만, 이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경험 범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거래가 역사로 대체되어온 공간들에 남겨졌습니다. 지난 두 증권 거래소 영화에서 저는 이러한 거래의 시간을 건축의 시간으로 치환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아크에 비추어>의 일부분에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것은 건물의 물리적 구축이라기 보다는, 여타 사회적 과정의 이미지들을 배제시키는 것으로서 시장 이미지의 구축입니다. 

 

건설중인 중국 센젠 증권거래소의 외관. 재커리 폼왈트, <아크에 비추어>(2013)의 스틸 이미지.

 

SG/JH: 마르크스의 ‘본원적 축적’ 개념은 무엇보다 최근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탈취에 의한 축적’ – 자본주의가 도시를 중심 발생지로 특정한 공간적 논리에 의해 ‘과잉축적’으로 일어나는 모순들을 해결하려는 개념 – 이라고 다시 이름을 붙인 작업에서 중요하게 재기된 것 같습니다. ‘영광의 30년(les trentes glorieuses)’ 직후 자본이 축적한 금융 자본이라는 형태로 응결된 막대한 잉여는 물론 거대한 부동산 시장의 투기와 대대적인 과정의 젠트리피케이션, 빈민의 이주와 주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정교한 화면의 기술>에서 이 특수한 ‘공간의 생산’(르페브르)과 폭력(‘무장한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 순조롭게 사라진 천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었나요?

 

ZF: 이는 <정교한 화면의 기술>과 함께 제작된 <이코노미스트 읽기 Reading the Economist>라는 책의 큰 부분이었습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1868년에 보관했던 노트의 일부분으로 시작되며, 그 중 일부는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당시에는 주간지, 지금은 같은 회사이지만 잡지)의 편집장이 1866년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신용공황으로 언급한 데에 대한 보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2년 전을 돌아보며 경제지의 보도를 통해서 이 신용공황의 발생을 주시합니다. 마르크스가 그의 노트에 베낀 공황에 대한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들은 일종의 금융 미학을 끌어냈으며, 특히 금융시장을 강조하자면, 이를 금융 마취제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인 요지는 신용체계가 작동할 때, 그것의 메커니즘은 감지될 수 없지만, 공황이 초래할 때는 마취제가 서서히 풀리며 그 메커니즘이 갑자기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을 어떤 가치 축장물이든간에 그들이 소유한 것을 교환하려는 비정상적인 시도를 하게끔 하며, 곧 그들은 그것을 단지 신용의 표장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신용에 기반을 둔 가치축장물이 아니기 때문이죠. 즉, 현금은 은행에서 인출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 지폐는 금으로 교환됩니다. 이것은 공황을 지속시키는 광란적인 개인들의 집단적 행동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진정하고 그들의 다양한 가치 축장물의 기초가 되는 신용 메커니즘을 외면한다면, 곧 그 가치는 돌아올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 는 금융 영역의 비가시적인 힘에 관해 설명하면서 1866년 공황의 범위를 한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길게 늘어선 은행 대기열을 보여주는 공황의 사태를 일간지에 보도되고 있던 때입니다. 언론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다시 등장함과 더불어 그들이 묘사하고 있던 바로 그 소동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이미지를 싣는 것에 관한 윤리에 대해 논의가 있던 2007-2009년 공황 시기 동안 저는 이 책을 위해 연구 조사를 해왔습니다. 2007년, 《이코노미스트》는 노던 록(Northern Rock) 예금인출 사태 사진이 게재된 표제에서, ‘1866년 이후 영국의 첫 예금인출사태’를 ‘위험천만한 미국 담보 대출’이라고 그들이 묘사한 것과 관련지어 증권화를 설명했습니다. [note title=”7″back] ‘The Bank That Failed’, ‘When It Goes Wrong’, The Economist (London, England), 22 September 2007.[/note]

 

재커리 폼왈트, (2010)에서 마르크스가 1868년에 간직한 노트의 페이지. 이 노트는 암스테르담의 국제 사회사 협회(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al History)에서 찾을 수 있다.
재커리 폼왈트, <이코노미스트 읽기>(2010)에서 마르크스가 1868년에 간직한 노트의 일부. 이 노트는 암스테르담의 국제 사회사 협회(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al History)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 읽기>는 <정교한 화면의 기술>에서 등장하는 《데일리 그래픽》의 판자촌 이미지가 해당 호에서 나온 다른 이야기와 (재)연결되는 부분으로 끝납니다. 판자촌 사진은 윌리엄 H. 밴더빌트(William H. Vanderbilt)가 해운수송과 철도화물 기반시설의 발전을 위해 매입한 맨하튼 토지에 관한 이야기의 아주 좋은 설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작성 당시, 그 토지가 ‘불법 거주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치 없는 것에 이용되고 있다’라고 언급합니다. 확실히 이러한 표현은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에서 초기에 사용된 거친 표현도, 그 토지에 대한 ‘불법 거주자들’의 권리에 대한 옹호도 아니었습니다. 판자촌 지역이 센트럴 파크에 길을 내기 위해 철거된 경우와, 토지를 소유한 주민들 조차도 언론에서 처음에는 ‘불법 거주자들’로 그런 다음 《뉴욕타임스》에 의해 ‘천한 인간’으로 묘사된 점을 생각하면, 그 당시 용어 사용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의 추방은 적어도 도시개발의 필요한 부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저는 일련의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건들을 매개하여 접합된 ‘경제’에 따라 탈구된(disarticulated) 특정 사건들이죠. 미디어 이미지의 미래로 묘사되었던 1880년 판자촌 이미지의 경우, 사진이 찍힌 실제 맥락으로부터 완벽히 추상화되었지만, 파괴가 암시된 맥락은 도시개발로 인해 분명해집니다.[note title=”8″back] 이에 대한 주석으로서, 센트럴 파크로 바뀐 지역의 마지막 거주민들은 1857년 금융 위기에 퇴거당한다. 이 위기에 대한 설명은 그 당시 신문들을 통해 찾을 수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거주민들의 추방은 보도되지 않았다.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순조롭게 제거된 ‘천한 인간’과 같은 거주민들에 대한 묘사는 거의 10년 후에 센트럴 파크에 관한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서 나왔다. LOCAL INTELLIGENCE, ‘CENTRAL PARK, What’s to be Seen There and How to See it – What it Has Cost, and How the Money Goes’, New York Times, 19 August 1866.[/note] 2007년 영국의 예금인출사태와 관련된 ‘위험천만한 미국 담보 대출’에 경우,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자산이 압류된 바로 그 실제적 재앙은 다른 곳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SG/JH: 분명히 시각적 재현의 특정한 양식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의 축적 Accumulation of Capital』처럼 자본주의 발전 수준이 낮은 곳에서의 자본의 확대 재생산과 관련됩니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본원적 축적에 있어서 그러한 양식에 대한 당신의 언급은 캐나다 북부 풍경의 원주민들이 사라지면서 (로마의 법률 용어, ‘무주지 terra nullius‘로 구체화된) 이데올로기를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캐나다의 가장 유명한 예술 운동 중 하나인 그룹 오브 세븐(the Group of Seven)[note title=”9″back] 캐나다 풍경화의 선구자로, 알곤퀸 파(the Algonquin School)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1920-30년대의 신캐나다 예술 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이다.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자연적인 그림을 선호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근대적 풍경화를 주로 그린다. 이들의 그림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캐나다 관광안내 책자 속에도 종종 실려 유통되었다고 한다. (역자 주)[/note]을 연상하게 합니다. 공간은 ‘무주지’, 즉 인구가 감소하는, 사람이 살지 않는, 충분히 식민화 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으로 상상됩니다. 그리고 물론 가나에 관한 프로젝트(사영 기하학 A Projective Geometry)에서 당신은 (본원적 축적에 관한 그의 성찰의 한 요소로서) 마르크스의 식민화론에 관한 논평을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때 시각적 재현의 (때로는 기술적으로 매개된) 기능에 대해 어떻게 보시나요?

 

ZF: 언급하신 <사영 기하학>의 화면은 둘로 나뉩니다. 좌측에는 『자본』 제 1권의 마지막 장의 끝 페이지이며, 특히 이 경우, 마르크스가 식민지에 대한 관심을 오로지 ‘구세계의 정치경제학이 신세계에서 발견한 비밀’이라고 분명히 하며 마칩니다. 소위, 그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조건은 노동자의 수탈, 즉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절멸’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보다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마르크스는 그가 ‘자유로운 이주자에 의해 식민된 처녀지’[note title=”10″back] Karl Marx, Capital Vol. I (London: Penguin Books, 1992) various.[/note]라고 정의한 ‘진정한 식민지’를 다룬 이 장의 도입부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이때 가장 최상위에 있는 곳은 바로 미국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언급되지 않았죠. 그러한 상상의 공간내에 자본에게 있어 문제는, 개인들이 그 ‘처녀지’를 비옥한 땅뙈기(a little plot of land)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거뜬히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들을 임금 노동자로 되게끔 만들 유인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땅뙈기를 공공영역에서 없애고 자본의 통제 하에 두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잠재적 노동시장이 고용주들을 따르지 않는, 스스로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다수의 독립생산자들로 흩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숱한 경우에서처럼, 최종 단계에서 자본을 구원하는 것은 국가로서, 국가는 토지에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개별 노동자들은 이를 매입할 수 없어, 국가가 나서지 않았다면 채취할 자원이 넉넉한 곳에서 어쩔 수 없이 임금노동자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는 이 장에서 웨이크필드(Edward Wakefield)의 ‘체계적 식민화’론을 각별히 살펴보는 데, 그가 말한 국가 활동이란 바로 웨이크필드가 처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처방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이 자본에게 있어 노동력 수탈을 통한 축적을 위해 국가에게 보호를 요구한, 분명 비-자본주의적 순간입니다. 식민지에서, 노동자의 자본가에의 의존은 생산되어야 하며,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은 국가가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체계적 식민이론이 형성되기 위해 보호되어야 하는 다른 조건은 왜 이 서술에서 포함하지 않았을까요? 즉, 원주민의 체계적 파괴말입니다. 이것 또한 분명히 탈취에 의한 축적의 순간입니다. 가장 폭력적인 종류의 탈취죠. 그러나 『자본』의 마지막 장에서는 노동자의 탈취가 원주민의 또 다른 탈취의 결과로 일어난 것을 대신한 것과 같습니다.[note title=”11″back] 10년이 지났지만, 1877년 여름에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가 촬영한 샌프란시스코의 파노라마 사진을 두고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생생하게 묘사한 것처럼, 미국의 대철도파업(the Great Railway Strike)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때, 도시 근로자들과 미국 원주민들은, 비록 지금은 ‘책장과 대학에서는 서로 별개의 주제들이 되어있지만, 그 해 여름 마치 같은 전쟁, 자신들의 힘과 자유, 자신들이 스스로 먹고 살수 있는 능력, 생존의 능력마저 빼앗고 있던 핵심 제도들에 맞선 전쟁에 참여한 듯 보였다. 12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철도 노동자든, 열악한 보호구역 토지를 경작하도록 강요당한 인디언이든, 마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산업시대의 힘, 자원에 대한 통제, 혹독한 직무의 잔인함, 그리고 여전히 먹을 게 넉넉치 않은 궁핍한 삶에 예속되어 있었다. 인디언들을 쫓아냄으로써 개발 자원으로서 그들의 토지를 활용하며, 사악한 이윤을 가능케 하기 위해 종속된 노동자들을 값싼 노동으로 이미 산업화된 지역에 공급하려는 것이다. 5년 전 시팅 불(Sitting Bull)은 전쟁 중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1877년 여름, 수십만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고, 버팔로에서 몬타나의 야생 지역까지, 그들은 산업 단지를 폐쇄하고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Rebecca Solnit, Motion Studies: Time, Space and Eadweard Muybridge (London: Bloomsbury, 2003) 164–165.[/note]

 

재커리 폼왈트, (2012).
재커리 폼왈트, <사영 기하학>(2012).

 

따라서 그 장을 마치는 페이지는 화면 좌측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측 절반은 세 개의 선로 이미지로 채워져 있으며, 그 중 두개는 프레임 상단을 향해 만나는데, 그곳에서 어린 소녀와 어머니가 등장하며, 이들은 이 선로를 따라 걸어 내려옵니다. 그 프레임은 곧이어 상단과 하단 모두 행인들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카메라맨인 제가, 측량 중인지를 묻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남자는 학교에서 측량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제게 말하죠. 저는 그에게 아래의 선로들 중 세콘디(Sekondi)로 불리는 해안 도시로 운행하곤 했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하나를 기록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선로가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확인 해주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교회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일요일이었으며 열차는 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로들은 보행자들로 대신 채워져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이미지로 그려냈던 마르크스의 ‘진정한 식민지’를 설명한 뒤에, 저는 곧 철도를 촬영하며 측량사로 몇 번이나 오해받았던 가나에서 제 자신의 이미지 생산 조건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식민지 수탈의 모든 역사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었습니다.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저는 사실상 철도 측량사가 되었으며, 지도 대신 이러한 이미지와 이 철도가 제공했던 지역사회에 관한 1930년대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 한 철도 측량사에 이르게 되었죠. 이 두 이야기 모두 질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충분히 식민화할 수 있는 공간의 이미지 재생산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먼저 식민지 당국이 철도 본부를 세콘디 시에서, 2007년에 석유가 역외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고려하여 그것이 다시 자본의 자석이 되어왔던 곳인 타코라디(Takoradi)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을 때인 1930년대의 사건을 묘사하며 역순 구성으로 등장합니다. 1930년대에는 철도역이 보다 큰 산업 항만에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전되고 있었으며, 곧이어 타코라디에 건설되었습니다. 철도 본부 이전은 세콘디 지역 사회에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많은 서명으로 식민지 지사에 제기된 탄원서는 입안되고 제출되었습니다. 이 탄원서에는 그 이전이 지역 사회에 미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이 열거되었죠. 탄원서에 대한 식민지 행정 내부의 문서는 지역 거주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낼 능력이 없다’라고 명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주민들은 본부의 이전이 철도 회사에 있어 많은 자금이 축적될 것이라고 단순히 ‘통지’ 받았습니다. 지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제기된 주요 문제는 어떤 회답도 없이 남겨진 것이죠. 이 변화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현지에서 ‘무능한’ 지역 사회의 그 후과(fallout)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지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자신의 생활을 꾸려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무능력한 원주민 이미지는 식민적 관점에서는 매우 친숙합니다. 철도 이전 및 세콘디 거주민들의 청원을 둘러싼 문서들 안에서, ‘무능함’이란 단지 지역 상황에 관한 이해 – 단지 제국의 한 말단(node)으로서 그곳을 본다기보다는 특정 장소로서 바라보는 관점 – 를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콘디 주민들의 탄원서에 관한 식민지 행정부 기록들. 이 기록들은 아크라의 가나 국립 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 of Ghana)에서 찾을 수 있다. 재커리 폼왈트, (2012)의 비디오 스틸.
세콘디 주민들의 탄원서에 관한 식민지 행정부 기록들. 이 기록들은 아크라(Accra)의 가나 국립 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 of Ghana)에서 찾을 수 있다. 재커리 폼왈트, <사영 기하학>(2012)의 비디오 스틸.

 

두 번째 이야기는 1901년 런던의 한 철도 측량사가 당시 광산의 원자재들이 배에 실려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운송될 수 있었던 곳인 세콘디와 광산을 연결하기 위해 황금 해안 도시(the Gold Coast)에서 철도 공사의 진행상황에 대해 강연했던 내용입니다. 강연 중에 측량사는 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통제된 노동력의 발전 속에서 이뤄진 진보에 관한 슬라이드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애석해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세콘디의 지역 주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수입된 노동자들이 철도를 건설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투로 이러한 진보 ‘이전’을 묘사합니다. 측량사나 그의 런던 청중에게 있어서나, 이러한 미련스러운(undisciplined) 구경꾼들은 식민 개발이 이뤄지길 고대해야 할, 미숙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측량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그가 청중들이 하길 원했던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철도 건설의 진행 상황을 보면서 말이죠. 물론 그 지역 주민들은 그 장소, 즉 자신들의 공동체, 자신들의 집, 자신들의 생계수단이 있는 장소를 둘러싼 이해타산을 염두에 둔채 건설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지요. 런던의 청중들은 다른 이해 관심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을 터이고, 이때 이러한 지역사회는 그들이 노동력과 결국 소비 또한 생산하고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중요했을 것입니다. 공장과 시장에 이르는 길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식민지 철도 공사를 보여주는 측량사의 상상적 슬라이드들이 나타냅니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진정한 식민지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의 수탈만이 아닌, 물론 이것도 틀림없지만, 다양한 형식의 본원적 축적이 일어나고 있는 진정한 식민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원적 축적에 관하여 시각적 재현의 기능에 대한 인터뷰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저는 시각적 재현의 특정한 양식이 자본의 확대 재생산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전략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그것의 범위 내에서 무한하게 보이도록 사용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이 무한함의 출현은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축적 이외의 다른 가능성들이 터무니 없이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SG/JH: 마르크스는 자본관계를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관계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물론 『자본』이라는 책은 유령,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으로 가득 차 있죠. 루카치와 드보르의 전통, 사물화와 스펙터클의 개념화뿐만 아니라 당신의 작업은 삶과 죽음의 레토릭을 다루고 있는 듯합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카메라 루시다 Camera Lucida』에서 ‘푼크툼(punctum)’ 또는 평범한 맥락(‘스투디움 studium’)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게 하는 사진 속의 세부 요소(detail) 사이에서 끌어들인 관계를 고려하면,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진 내에서의 ‘현전’은 정확히 그 부재,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입니다. (종종 가장 기하학적인 기념비적 건축을 포함하여) 시각적 재현의 구체적인 형태는 괴사된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과정을 비가시적으로 만들고  움직임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화는 실제로 센트럴 파크의 행인들, 센젠 증권거래소를 건설하는 노동자들 등 유령과 같은 방식으로 부재로서의 현전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비디오와 사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상품은 어떻게 실제로 삶과 죽음의 문제일 수 있을까요?

 

ZF: 당신이 영화에서 유령과도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언급한 부재로서의 현전은 <언서포티드 트랜짓 Unsupported Transit>과 <정교한 화면의 기술> 둘 모두가 그 경우입니다. 그리고 전자는 아마도 이런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가장 쉬운 영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산 노동과 축적된 과거 노동과의 관계는, 보이스오버 속에서 그리고 이미지가 그 삭제 – 그것들을 포착했던 현재의 삭제 – 의 상(picture)을 제시하는 방식 속에서, 명시적으로 분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푼크툼은 이러한 이미지에서 계속 사라지는 특정한 세부 요소들의 삭제 과정입니다. 이러한 세부 요소들은 <언서포티드 트랜짓>에서 오직 관객에 의해 특정한 노력으로 발견할 수 있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때조차도, 그들은 그들을 관통해 볼 수 있는 작업장 앞에서 반쯤 투명하며 흐릿할 뿐입니다. 저속 촬영 영화에서, 이러한 종류의 흐릿함은 빨리 움직이는 모습이 영화가 묘사할 느린 움직임을 간섭하지 못하게 장시간 노출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며 이뤄집니다. 건설현장의 과정을 기록하는 저속촬영 영상의 경우, 재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느릿한 건물 높이의 상승일 뿐인데, 이는 그러한 상승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 실제 모든 노동의 희생으로 이뤄집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러한 영상들은 어떤 건설 공사중에서도, 특히 대규모의 기념비적 건축물들과 함께 만들어집니다. 저속촬영 영상은 그런 사업에서 선호되는 재현 형식이며, 일반적으로 거대한 건축 규모의 자본축적을 묘사하는 데 선호되는 매체로 볼 수 있습니다.

 

셴젠 증권거래소의 작업장. 재커리 폼왈트, (2011)의 비디오 스틸.
센젠 증권거래소의 작업장. 재커리 폼왈트, <언서포티드 트랜짓>(2011)의 비디오 스틸.

 

증권 거래소 건설 현장의 꽤 길고 정적인 숏은 <언서포티드 트랜짓>의 후반부에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건축부지는 전체 현장의 부분만을 보여주는 장면 때문에 사라지는 노동자를 발견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죠. 이런 와일드 샷은 파악하기 어려운 규모의 공간을 드러냅니다. 인간 신체와 건설 중인 대형건축물 사이의 관계는, ‘스투디움’의 측면에서 볼 때, 구축의 관계입니다.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바로 그 실제 작업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축물의 규모는 이러한 활동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누구나 작업이나 건축물을 볼 수 있지만, 둘 모두를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노동과 노동자 양자의 특수성은 이러한 노동의 지속적인 결과물을 그려내는 일반적인 상으로 변형되고 맙니다. 건물 전체의 규모에서는 오로지 사용되는 노동력만 있으며, 개별 노동자가 거대한 기계를 작동시키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구체적인 노동도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당신은 조작자가 아니라 기계만을 볼 뿐입니다. 물론, 누구나 그 기계를 건물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노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과거노동의 결과라는 그 핵심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증권거래소에서 노동이 취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인 것이죠.

 

셴젠 증권거래소의 외부. 재커리 폼왈트, (2011)의 비디오 스틸.
센젠 증권거래소의 외부. 재커리 폼왈트, <언서포티드 트랜짓>(2011)의 비디오 스틸.

 

증권 거래자들과 다른 거래소 직원들을 제외하면, 증권 거래소의 추상 규모에서 노동은 시각적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은 거기서 교환되는 모든 것 안에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노동을 보기 위해서는 첨단 영상 기술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다른 건설 현장과 마찬가지로 거래소가 건설되고 있을 때, 노동은 정확히 거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물의 규모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전적으로 자본의 축적은 실제 이뤄지는 노동을 압도합니다. 제가 <언서포티드 트랜짓>을 촬영했을 때, 그 현장은 확실히 그 단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건설 공사의 저속 촬영을 더 늘리면서 노동이 그와 같은 자본 축적의 이미지로 사라지는 메커니즘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꼈습니다.

 

 

SG/JH: 언급하신 노동자의 형상, 즉 정치적인 것의 유령같은 현전은 시각적/공간적 재현의 지배적인 체제 안에서 부재와 현전이 전환하는 순간의 우울한 형상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드보르의 작업과 관련됩니다. 삶, 죽음, 물화, 스펙터클, 그리고 물론 드보르의 형식에 관해 말할 때, 누구나 당신의 영화와 드보르의 영화(물론 무엇보다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의 영화 버전) 사이의 분명한 유사성을 발견합니다. 이를테면 단조로운 (그리고 어쩌면 음울하기도한) 보이스오버 말이죠. 당신은 이러한 형식을 드보르의 영화적 전통 안에 위치짓고자 하십니까?

 

말뫼 녹음실의 보이스오버 마이크. 재커리 폼왈트의 2005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의 비디오 스틸.
말뫼(Malmö)에 있는 녹음실의 보이스오버 마이크. 재커리 폼왈트의 2005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유라비아’라는 이야기 A Story Called ‘Eurabia’> 의 비디오 스틸.

 

ZF: 그렇습니다, 물론 목소리의 음울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저는 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거나 다소 음울하게 소리를 내지 않고 읽는 것이 어렵습니다. 단조로움은 무대경험의 부족과 관련됩니다. 제가 작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사용한 것은 2005년에 만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라비아’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포르노가 밤늦게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대인 코펜하겐의 소규모 아티스트-런 TV 방송국인 tv-tv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코펜하겐에서 외레순(Öresund) 건너편에 있는 말뫼에 살고 있었습니다. 폭스 뉴스(FOX News)는 말뫼에서 정규 방송을 방영했고, 유럽의 몇몇 도시들을 주목하는 유라비아라는 프로그램이 마침 방송되었죠. 그 중 하나가 바로 말뫼였으며, 그들은 이민과 테러 사이의 피상적인 연관을 보여주는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유라비아’라는 이야기>는 그 프로그램이 이러한 연관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미지와 텍스트를 사용한 방식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이 작업은 일종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짧은 마감기한에 쫓기고 있었고, 기초적인 녹음실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필요한 대부분의 푸티지를 온라인에서 얻은 다음, 제가 녹화한 텔레비전 화면의 ‘방송’을 다시 보여줄 수 있었죠. 저는 처음으로 고다르(Jean Luc Godard)와 미에빌(Anne-Marie Mieville)의 <여기 저기 Ici et ailleurs>, <어때? Comment ça va?> 그리고 <넘버 투 Numéro deux>를 보았고, 그 작품들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위 영화들 모두 제 작업에 영향을 주었지만, 첫 번째 영화가 아마도 제가 2년 동안 만든 작업에 가장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직후 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의 영화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작업을 보기 시작했고, 영화와 비디오의 가능성들의 세계가 저에게 열렸습니다. 이 영화감독들 모두 한번쯤은 그들의 목소리를 사용했었죠. 그 직접성에는 제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무언가가 있었고, 결국에 이것은 제가 프로젝트를 위해 돈을 마련할 필요 없이 작업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오래 전에 보았지만, 그것은 다른 작업들 만큼 저에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가 어느정도 적절한 시기와 영화제작에 대한 제 나름의 견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것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파로키, 클루게, 고다르, 그리고 미에빌 이후, 저는 드보르의 영화들을 다시 보았고, 실제로 그 영화들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순수함 때문입니다. 일종의 궁극적인 불가해성이죠. 저는 이들이 영화가 특정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항상 그와 같은 스펙터클의 총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세부 요소를 다루는데 거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르/미에빌, 클루게와 파로키의 작업에서 제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특정한 사례 혹은 세부 요소이 순식간에 전체로서 펼쳐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드보르를 포함한, 이 모든 경우에서 이미지와 목소리의 관계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형식적 결정이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