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기 – 물질성 – 서명. 저항과 넘어섬 사이의 춤추기와 글쓰기
번역 손옥주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 1975. (사진: D. James Dee)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무제 Untitle>, 1975. (사진: D. James Dee)

 

춤과 슈리프트(Schrift)[note title=”1″back] 독일어 용어인 슈리프트(Schrift)슈라이벤(Schreiben)은 영어로 모두 글쓰기(writing)라고 번역된다. 이 중에서 슈리프트는 글쓰기의 물질적인 면, 즉 텍스트(활자체, 폰트, 스크립트 등)와 연관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 용어를 실제 신체적인 글쓰기 행위를 뜻하는 슈라이벤과 구분하기 위해 이탤릭체로 표기하고자 한다. (영문판 역자 주)[/note], 즉 글쓰기는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결합될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측면에서 연관되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둘 사이에 맺어지는 이 같은 역동성, 이 같은 애증관계를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서로 상반되는 동시에 연결되기도 하는 둘의 입장은 오늘날의 무용 담론 안에서 이론과 실기 현장 모두에 걸쳐 꽤나 분명하게 수용되어온 듯하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예를 들고자 무용 작업 현장에서 표출된 두 의견을 인용해볼까 한다: 춤과 슈리프트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안무가 토마스 레멘(Thomas Lehmen)은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춤추기와 슈리프트는 그야말로 서로 다른 것이다. 춤으로 추어지고 있는 것 가운데 언어에 상응하는 것은 없다. 그런 것은 결단코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큐레이터 하이케 알브레히트(Heike Albrecht)는 이와는 정반대의 시각을 보이는데, 그녀는 언어/슈리프트와 춤 사이의 소통작용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언어를 통해 춤을 읽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복과 인식의 행위는 또한 반영의 행위, 즉 자기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 인지 과정은 활성화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춤과 언어를 통한 생각의 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 논문은 춤과 슈리프트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상반성 너머에서, 즉 구술성/신체성(corporeality)과 텍스트성이 이루는, 현존과 부재가 이루는, 수행성과 기호학이 이루는, 지나감과 흔적이 이루는 상반성 너머에서, 둘 사이의 차이와 결합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춤과 슈리프트 간의 관계 가운데 상당 부분을, 즉 문화학 영역에서 폭넓게 논의되어온 부분을 제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슈리프트와 관련해 나는 무엇보다도 역사와 춤의 현존과 안무,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창작물과 분리 불가능한 것 모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담론 영역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담론이란 에세이나 역사적 분석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기획서, 프로젝트 지원서, 프로그램 노트, 리뷰 등을 통해 표출된 담론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슈리프트와 움직임,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적인 변형이 만들어낸 복잡한 결합과 더불어 엄청나게 다양화된 무용 기보 형식들또한 논의에서 제외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과 문화적 테크닉으로서의 슈리프트라는 측면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 논문은 그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 아님을 또한 밝히고자 한다.[note title=”2″back] (마르셀 모스의 이론에 따른) 문화적 테크닉으로서의 춤과 관련해서는Inge Baxmann: The Body as Archive. On the Difficult Relationship between Movement and History(2007) 참조하라; 슈리프트에 대해 다룬 폭넓은 저서들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서적으로 Gernot Grube/Werner Kogge/Sybille Krämer (eds.): Schrift. Kulturtechnik zwischen Auge, Hand und Maschine(2005) 참조하라. 슈리프트와 퍼포먼스 간의 논쟁 관련해서는 Waltraud Wiethölter/Hans Georg Pott/Alfred Messerli (eds.): Stimme und Schrift. Zur Geschichte und Systematik sekundärer Oralität(2008)와 Davide Giuriato/Stephan Kammer (eds.): Bilder der Handschrift. Die graphische Dimension der Literatur(2006) 참조하라.[/note]

 

대신에 나는 춤과 슈리프트의 수행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춤과 슈리프트에 대해 말하는 대신에, 움직임과 그것이 지닌 신체성이라는 관점에서부터 접근해보고자 하며, 춤추기와 글쓰기라는 두 표현 형식을 움직임 현상(movement phenomena)으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따라서 춤과 슈리프트, 즉 텍스트로서의 글쓰기를 뜻하는 슈리프트에 대해 말하는 대신에, 춤추기/안무하기와 슈라이벤[note title=”3″back] 1번 각주 참조.[/note], 다시 말해, 신체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뜻하는 슈라이벤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른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현상학적 철학에 있어 춤추기-글쓰기의 문제는 주로 몸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예를 들어, 장-뤽 낭시는 접촉(addressing)의 제스처라는 관점에서 “몸 쓰기(writing the body)”라는 주제에 접근한다. 여기서 글쓰기란 “의미작용을 통해 나타내거나 증명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가닿고자 하는 제스처”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몸’은 이미 그 자체로 언제나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파열, 전도, 단절(불연속) 또는 사소함, 모순, 그리고 담론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변위 없이 몸을 향해 쓰거나 혹은 몸 그 자체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결국, 이와 같은 불확정적인 ‘몸 쓰기’가 이루어지는 곳이야말로 신체의 저항과 과잉이 명확해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글쓰기에 대항하고자 하는 몸들의 저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움직임의 물리적 행위로서의 글쓰기 그 자체도 이러한 접근 방식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이 같은 양상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안에서 광범위하게 도외시되어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의미로 가득 찬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기호론적 생산과는 별개로) 글쓰기는 감각적이면서도 신체적인 행위인 것이다. “[…] 쓰기(scription), 이동(the moving)은 글쓰기가 행하는 근육적인 행위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이러한 ‘춤추기-글쓰기’에 나타나는 교차점과 차이점을 비롯해서 그것들이 보이는 수행적 특징들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표기와 전달 2. 물질성 3. 서명(signature).

 

춤추기와 글쓰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문학작품에 나타난 문학적 에피소드는 이들 과정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는 ‘마이크로그램’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창안해냈다. 자신의 소설 <도둑 Räuber>에서 그는 펜의 움직임을 지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언급한 바대로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문맥에서 ‘벗어나도록(digress)’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아마도 이것은 더 나은 작가성이 갖춘 비밀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글쓰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뭔가 충동적인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note title=”4″back] 이 구절을 언급한 슈테판 캄머의 훌륭한 에세이에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note] 발저의 시학적 반영은 글쓰기가 가진 위력과 한계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그는 휘갈겨 써놓은 낙서와 펜의 끄적거림과 연필의 사각거림을 관찰하고 거기에 글을 덧붙인다. 이것이야말로 글쓰기의 퍼포먼스이자, 그러한 ‘행동’, 즉 그래픽 행위로서의 신체 움직임에 나타나는 복잡성인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에 관한 한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수행적 글쓰기의 이 같은 양상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낸다: “글을 쓴다는 것과 일단 쓰인 것은 절대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음과 엄청난 의도함에 대한 근본적 통찰과도 같다”. 글쓰기 행위에 있어 이러한 방식의 퍼포먼스는 지극히 낯선 것이다: 예를 들어 시적인 텍스트를 쓸 때도 그러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대개 반복해서 앞뒤로 진행되는 움직임을 뜻한다. 텍스트가 생성될 때, 글쓰기는 단 하나의 역동적인 움직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방해, 제거, 삭제, 덮어쓰기 등 마치 편집자가 텍스트 세대의 고고학 안에서 직면했던 것과도 같은 중층적 그래프 과정을 통해 거칠어진다.

 

<휴먼 라이츠>, 탄츠 임 아우구스트 2010, © Okju Son. 역자 추가.

 

역으로 이는 춤이 지닌 퍼포먼스로서의 특성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춤은 실행될 때 어떠한 방해나 재-검토나 교정 없이 오로지 단 하나의 동작 안에서만 행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글쓰기가 뭔가를 글 에 (적어)넣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수행적 존재로 드러낸다면, 춤은 오로지 라이브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만 자신의 수행성을 드러낸다. 각각의 행위 안에서 ‘자기 드러냄’이 보이는 차이는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글쓰기는 스스로를 순환시키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하면서 특유의 변형, 변경, 다시-쓰기를 수행적 행위로 만들어낸다. 퍼포먼스로서의 춤에 있어서는 대개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난다: 행위는 독창적이고 비가역적이며 다시금 되찾을 수도, 이후에 고쳐질 수도 없다.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는 이러한 춤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자고로 안무적 사고란 어떠한 특정한 해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예가 되는 수행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신체적 행위의 연속 안에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 차원을 놓고 봤을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되풀이될 수 없는” 움직임에 깃든 사고에 대해 실증하게 된다(위의 책).

 

수행하는 춤의 단독성(singularity)과 수행하는 글쓰기의 자기-방해 사이의 이 같은 차이는 춤추기/글쓰기와 수행성이 보이는 또 다른 측면과도 일치한다. 움직임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드러냄(showing)과 자기 드러내기(showing-oneself)의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퍼포먼스 행위에 있어 춤은 보여주고(그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스스로를 내보인다(그 자신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움직임으로서의 글쓰기는 – 글쓰기의 수행성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거의 조명된 바가 없다 – 관객의 주시를 빠져나간다. 춤의 현존을 구성하는 배우/퍼포머와 관찰자의 신체적 공존은 글쓰기 행위에 있어 오로지 조건적인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는다. 그 대신, 이 같은 행위가 지닌 관찰되지 않는 본성이 글쓰기의 특징을 이룬다. 만약 글쓰기가 실험적인 상황들 속에서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관객이 만들어내는 관찰의 통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까다로운 문제는 바로 글쓰기 자체의 퍼포먼스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관찰의 상황들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글쓰기와 춤추기는 공통분모를 갖게 된다. 글쓰기 행위에서 나타나는 ‘자기-드러내기(showing-itself)’와 ‘자기-읽기(reading-itself)’는 비틀거리는 과정과도 같다: 내가 써놓은 것을 읽음으로써 나는 ‘쓰여있는 것(have-written)’을 보게 되는 셈이고, 이로써 나는 나 자신을 쓰는자(writer)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글읽기의 행위 안에서 나 스스로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무용수는 자기 자신을, 다시 말해, 자신의 움직임이 공간 안에 ‘써놓은’ 흔적들을 읽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상 이전과 이후를 오가는 시간적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인지(self-perception)의 다양성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포사이드 컴퍼니의 무용수인 엘리자베스 워터하우스(Elizabeth Waterhouse)는 이러한 자기-인지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나는 내 몸 전체로 인식을 확장시키는 법을 배웠다. […] 손끝에서부터 발끝으로 확장되는 폭넓은 자기수용적(proprioceptive)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관찰하기/피드백하기와 예측하기/피드포워드하기에 동시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춤은 […] 분석과 행동을 결합시키는 기교적(skilful) 행위이다.” 

 

기억하기와 “직관하기”(발터 벤야민 참조)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시간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춤추기와 글쓰기라는 행위에 깃든 이처럼 정교화된 자기-인지적 측면은 이어질 논의에서 다룰 수행적 글쓰기와 춤추기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겠다.

 

 

춤과 글 사이의 표기와 전달

 

춤과 슈리프트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전달/표기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물론 춤추기와 글쓰기 사이의 직접적인 번역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다양한 담론적 경우들을 통해 일종의 전달은 이루어지게 된다: 춤은 춤과 안무에 대한 텍스트로, 리뷰로, 묘사로, 학문적인 분석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반대로도 행해져(vice versa) 글쓰기는 – 신화나 이야기나 언어적 형상화 혹은 이론적인 텍스트는 – 안무와 춤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춤과 텍스트 사이의 양가성, 즉 매력과 거부감이 발생하는 과정이자 마찰을 생성해내는 현재형의 과정인 것이다. 이질적인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전달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에 따라 어떻게 행동을 이어나가야 하는 걸까? 우리는 이처럼 지속적으로 ‘번역불가능성(untranslatability)’의 토포스에 직면하게 된다. 일례로 머스 커닝햄은 춤뿐만 아니라 음악과 타 예술장르에서도 나타나는 ‘번역불가능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note title=”5″back] 수잔 포스터는 방법론적 문제들에 대한 숙고에서‘번역불가능성’에 대한 이 같은 논란에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춤의 진정성이 다른 매체로의 전달을 허용한다고 상정하기도 한다.[/note]

 

이는 춤이라는 예술 형식이 지닌 독특한 특성, 즉 그 어디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는 ‘차이의 현존’과 행동이 가진 비타협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토마스 레멘의 말에 따르면, “춤을 작업하는 데 있어 나는 (이미) 사물들이 언어보다는 서로 다른 방법(manner) 안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을 보는 것이다” – 이는 다른 예술 형식들에도 나타나는 개별적인 차이에 대한 고려(mutatis mutandis)이기도 하다. 찰스 퍼스(Charles Peirce), 로만 야콥슨(Roman Jacobson), 발터 벤야민에서부터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에 이르기까지 번역 이론에는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논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하나의 예술 형식에서 다른 예술 형식으로) 전달되거나 표기되는 과정에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탈락되는지 혹은 – 감각과 관능의 과잉에서처럼 – 무엇인가가 획득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 폭 넓은 – 번역 개념에서 로만 야콥슨은 기호학자 찰스 퍼스의 연구업적을 참조했는데, “해석되어야만 하는 요소는 번역을 통해 언제나 창의적인 방식 안에서 풍요로워진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그의 이론을 칭송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과정은 대체 가능한 의미와 이해로 넘쳐나는 것이다. 이동과 우회뿐만 아니라, 틈새나 지속적으로 전달에 방해가 되는 것들까지도 창의적인 차원을 만들어낸다. 기형성과 유사성은 마찰 상태에 놓이게 되며 – 그리고 춤과 슈리프트 사이(between)에 놓인 세 번째 요소의 잠재태는 바로 이 상태에서 스스로를, 원본 없는 유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발터 벤야민은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 “번역가능성(translatability)”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Benjamin 1972 참조).[note title=”6″back] 벤야민의 번역 이론과 관련하여 다음의 글 참조하라. Jacques Derrida: Babylonische Türme. Wege, Umwege, Abwege(1997), Theologie der Übersetzung(1997), Paul de Man: Schlußfolgerungen: Walter Benjamins‚ Die Aufgabe des Übersetzers‘(1997).[/note] 만약 개방성과 이동성에 대한 이러한 반향이 번역 과정에서 나타난다면, ‘과연 어디가 본래적인 곳(the primary)이고 어디가 부차적인 곳(the secondary)인가?’와 같은 질문은 진부하게 느껴질 것이다. 예술 작품이 지닌 비타협성 – 즉, 언어나 다른 미디어로의 번역불가능성은 번역 과정 안에서 분명해진다. 무용수와 안무가가 춤과 (번역의) 슈리프트 사이에 놓인 이러한 틈에 대해 논하면, 그들은 미적 경험의 중대한 측면을 강조한다. 그들은 안무작업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개방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 사물화나 명확한 해석에 대항하는 안무적 퍼포먼스의 저항성을 강조했던 윌리엄 포사이드처럼 말이다: 될 수 있는 한 명료하게 이뤄지는 시-공간 경험은 일순간적이며 “언어가 학문과 타 예술 분야에 제공해주는 상태로부터, 즉 시시각각 생성되는 인공적인 산물에 대한 구체화된 조사 방식으로부터 벗어난다”. 다시 말해, 춤 행위를 접근 불가능한 동시에 저항적인 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 순간성이 지닌 친숙한 토포스야말로슈리프트로의 고정/표기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슈리프트와 춤 사이에는, 그리고 몸과 언어 사이에는 언제나 교류가 있어왔는데, 윌리엄 포사이드의 안무/퍼포먼스의 경우에 특히 그와 같은 교류가 두드러졌다. 토마스 레멘 스스로도 이와 관련해 언어와 슈리프트가 한편으로는 춤동작을 개념화하고 해석해내기 위한/읽어내기 위한 매개가 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안무적 과정을 이루는 요소들을 구성해내기도 한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레멘에 따르면 “윌리엄 포사이드의 발레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그래픽적 요소, 문자이다. 말하자면 […] 다시금 계속해서 나타나는 단어들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어떠한 의미도 부여되지 않는다. 비록 그와 같은 요소들이 굉장히 분명한 방식으로 발화되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들은 우리로서는 특정 요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공간으로 진입한다. 바로 그와 같은 공간이야말로 예술 공간인 것이다.” 

 

자신의 작품 <쓰기작업 Schreibstück>에서 토마스 레멘은 글쓰기/슈리프트와 안무 사이의 공간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안무작업이 책에 바탕을 둔다는 것, 즉 글쓰기 작업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아이디어에 이미 표기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토마스 레멘의 말에 따르면, “책과 같은 무용 작품”을 써보고자 했다. 작품의 공연을 위해 안무가, 무용수, 프로듀서가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서로 소통해야만 했다”. 이 퍼포먼스 시리즈에서 세 명의 안무가들은 각각 자신만의 버전을 선보였다. 즉, 그들은 텍스트와 그에 덧붙여진 ‘상자’에서부터 그와 같은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윤곽을 잡아나갔던 것이다. 몸의 움직임으로의, 춤으로의 표기는 글쓰기 행위의 기반 위에서 행해진다. 그들은 마치 음악적, 시각적 규범이 한 공간 안에 작용하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 흔들린다. “신체적 현실이 지닌 동시성”[note title=”7″back] 토마스레멘의 <쓰기작업>에 관해서는 Pirkko Husemann: Choreographie als kritische Praxis. Arbeitsweisen bei Xavier Le Roy und Thomas Lehmen(2009) 참조하라.[/note] 안에서 표기가 무한정으로 실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쓰기작업>에 나타나는 각각의 실행 방식과 저마다의 안무적 다시-쓰기는 실행되지 않고 있는 것과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다. 안무가가 작업하는 방식은 표기 과정과 전달된 것을 보이는 과정 안에서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와 같은 병치 속에서 우리는 창작 과정을 이루는 결정, 자유, 축소의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가가 책임져야 할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텍스트와 몸 사이의, 글쓰기와 춤추기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가 번역가능성의 열린 장 안에 놓인다는 것은 명백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표기화(transcriptivity)과정으로서 말이다. 루트비히 예거(Ludwig Jäger)는 언어학적 관점에서 표기화 개념을 차용해와, 이를 언어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기 적용(transcriptive adaptation)의 토대 과정과 연관시킨다: 활자가 지닌 ‘활자에-선행하는(ante-script)’ 특징으로서의 말하기(말하기의 퍼포먼스) – 춤/안무와 슈리프트 사이의 관계가 이 같은 이론적 모델에 반영되거나/적용되어 있다는 점은 자명한 듯하다.

 

 

물질성: 저항하는 글쓰기/춤추기

 

글쓰기 이론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저서와는 별개로, 슈리프트 이론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슈리프트와 글쓰기가 가진 물질성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닌 시각적이고도 촉각적인 물질성, 구체성, 글쓰기가 지닌 역동성과 신체적 특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신체적 행위(기록으로서의 슈리프트와 반대되는 의미에서)가 갖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장-뤽 낭시는 롤랑 바르트의 개념인 “쓰기 장애(dysgraphia)”에서 유래한 용어를 사용한다. 바로 “기탈(exscription)”말이다.

 

“기탈은 글을 써냄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작 기탈되는 것은 기입이라는 다른 쪽 측면에 남아있다. 기입은 한쪽 가장자리에서 기호로 작용하면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다른 쪽 측면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글쓰기에 있어 몸은 자기 자신이자 동시에 타자로서의 측면이 있다[…].” 

 

낭시에 따르면, 글쓰기/읽기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해독의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접촉하면서 접촉되는(touching and being touched)” 것이다: “글쓰기, 읽기, 접촉의 문제”(위의 글)인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가 지닌 물질성은 근본적으로 저항의 경험과 연결되어있다. 글쓰기/춤추기와 같은 – 움직임의 ‘형상’ 만이 시공간 모체가 지닌 복잡한 구조를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지닌 물질성[note title=”8″back] 이 주제에 대해서는 – 의사 소통의 문화적 기술과 관련해서 – Hans Ulrich Gumbrecht/K. Ludwig Pfeiffer (eds.): Materialität der Kommunikation (1988) 참조하라.[/note]은 움직임의 ‘흐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흐름은 저항하는 물질에 나타나는 저항력을 실체적인 것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기입(inscription)이 만들어내는 선과 흐름이 힘과 동력을 증명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 소진됨의 제스처로 나타나는 ‘에네르공(energon)’인 것이다. “선(The line)은 시각적 행위이다”. 표면적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바로 이 같은 행위 안에 저항의 또 다른 측면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기입의 전달자가 지니는 물질성뿐만이 아니라, 실행의 저항성과 거부, 그리고 움직임의 생략 안에서 나타나는 몸의 물질성 또한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글쓰기와 춤추기가 지닌 저항성은 움직임의 물질성이 보이는 마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성의 외부에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정치적 차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춤추기가 곧 저항인 것이다! 다양한 문화적 장에서 활동해온 동시대 예술가들은 몸의 행위를 항의의 제스처로, 정치적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 행위로 기입해낸다. 윌리엄 포사이드는 자신의 안무작 <휴먼 라이츠 Human Writes>(2005)에서 이를 행한 바 있다. 테이시르 바트니즈(Taysir Batnij)가 자신의 <사진 단편선 Photographic Fragments>(2001)작업에서 가자 지구 내의 벽과 주택 입구 등지에 써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폭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시도로 그래피티를 그리고 벽에 이름과 숫자, 그림 등을 적어 넣었다.[note title=”9″back] 2009년에 베를린 마틴-그로피우스-바우에서 개최된 전시회 《TASWIR – Islamische Bildwelten und Moderne》와Gabriele Brandstetter: Forsythes Human Writes: Vom widerständigen Schreiben(2009) 참조하라.[/note] 이는 인권을 훼손시키고 몰수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쓰기의 제스처이다. 윌리엄 포사이드의 안무 설치 작업 <휴먼 라이츠>는 저항적 글쓰기에 있어 부정되어온 신체적 흔적들을 움직임으로 시각화시키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는 글쓰기/춤추기가 만들어내는 완벽성 너머에서이 같은 글쓰기 권력에 대한 희생자들의 관점으로 이어지는 자취를 좇는다. 그것은 곧 글쓰기의 첨예한 곳을 향해, 지하를 향해, 움직임 안의 갈라짐을 향해 여정을 떠나는 것이자,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글쓰기와 춤추기에 담긴 또 다른 측면을 구별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곧쓰기 장애인 것이다.

 

<휴먼 라이츠>, 탄츠 임 아우구스트 2010, © Okju Son. 역자 추가.

 

포사이드의 <휴먼 라이츠>는 행동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작업이다:

 

“글쓰기는 또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안무 방식을 공간적인 글쓰기라고 여긴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흔적을 남긴다. <휴먼 라이츠>에서 그들은 최소한 몇 개의 문자만이라도 재생산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장애 요인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재생산 행위는 기탈의 행위이자 쓰기 장애의 행위가 된다. 이 퍼포먼스는 《인권선언문》의 각 문장들을 다시쓰는 작업이다. 무용수와 비무용수/관객 구성원들은 책상, 즉 글쓰기 테이블주위를 돌아다닌다글쓰기 행위를 규정하는 법칙은 선이나 문자’가 직접적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신체상의 제한과 저항을 통해 행해져야만 한다”(위의 글). 이런 점에서 모든 제스처와 모든 학습된 움직임은 해체되어버리고, 장애 요인의 방해를 받게 된다. 매끄러우면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글쓰기는 움직임의 숙련성과 글쓰기 퍼포먼스는 비틀어지고 훼손된다. 이 같은 제한적인 행위에는 관객이 공동집필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관객을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향하게 하는 어떠한 친숙한 글쓰기/춤추기 방식과도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저항성은 정작 《인권선언문》 공식 서한에는 감춰져 있는 무엇인가가 매 동작 속에서 시각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끔 한다. 그것은 바로 법 규정의 슈리프트내재하는 폭력성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여기서 국가와 사법기관의 권력을 뛰어넘어 개인의 몸이 지닌 신체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온전함(integrity)’을 상정하는 텍스트를 다루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인간성은 여전히 비인간성으로 가득 차있다”(위의 글)라는 구성적인 역설은 심지어 인권이라는 이름 안에서 정치적 행위가 이뤄지는 이기도 한 – 글쓰기 과정 안에서 명확해진다. 뭔가를 수고스럽게 써넣은 흰 종잇장은 글쓰기의 흔적을 간직한다. 그 종잇장이야말로 정치, 경제, 미디어에 의해 정의되는 몸의 일회성에 대한 이 같은 저항의 목격자인 것이다.

 

 

서명: 서명 행위로서의 글쓰기/춤추기

 

마지막으로 나는 춤추기와 관련된 글쓰기의 특정 측면으로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서명이다. 서명하는 춤, 그러니까 춤추기로서의 서명하기 같은 것이 존재할까?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게다가 무용수의 독창적이고도 재생산이 불가능한 움직임 안에서 그러한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모든 춤은 서명 행위라 할 수 있다 – 개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면 움직임이 후에 남기게 되는 자취야말로 움직임의 서명인 것일까? 이는 움직임이 재생산될 수도, 전이될 수도 있음을 간주한다 – 몸의 부재를 나타내는 춤의 형상인 것이다. “스타일”의 측면에서 볼 때, 서명이 갖는 특징은 무용수나 안무가가 만들어내는 식별 가능한 필체(handwriting)인 것일까? 과연 무엇이 이와 같은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혹은 어떤 ‘독자’-목격자가 이 같은 서명을 입증해낼까?

 

누가 춤을 (위해) 서명하는 것일까? 그리고 춤은 어떻게 이 같은 서명에 대한(counter) 서명을 하는 것일까?   

 

서명한다는 것은 – 누군가의 이름을 명시한다는 점에서 – 특별한 글쓰기 행위이다. 그것은 (시그나투라 signatura = 직인, 서명에서 온 것으로) 기호나 이름 또는 예술가의 표징이 덧붙은 인공물, 법률 텍스트, 창작품이나 사물 등과 관련된다. 서명은 권위와 저자권(authorship)에 대한 역사를 비롯해서 인준 및 인증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저자권과 서명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 비록 법과 정치, 그리고 예술의 영역에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여기서 춤에 관한 까다로운 이슈들, 즉 ‘서명’의 의미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저자권’과 예술 작품개념을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 특히 ‘저자권’이라는 주제는 – 동시대 퍼포머들이 발표하는 다수의 춤 작업에서 종종 개념적으로 반영되는 주제이기도 하다.[note title=”10″back] 롤랑 바르트의 La Mort de l’auteur(1968)과 미셸 푸코의 Qu’est-ce qu’un Auteur? (1969)에서 나타난 저자권에 대한 후기-구조주의 담론은 제롬 벨(Jérôme Bel),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 도이퍼트&플리쉬케(deufert&plischke) 등 수 많은 동시대 무용가와 안무가들이 발표한 퍼포먼스의 모체를 이룬다.[/note]

 

이 작품들의 결정적 특징은 바로 ‘결과물’이 아닌, 경험 과정을 촉발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안무/춤에 근접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춤에 있어서의 서명이란 움직임 너머에 있는 어떠한 목적을 고정시키고 보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관객과 조우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놓는데, 그러한 조우 안에서 안무적 슈리프트는 “우리라는 주체가 없어져버린, 중립적인 동시에 복합적이며 애매모호한 공간, 그리고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곳이자 몸 쓰기(the body writing)의 정체성과 더불어 생겨나는 곳으로서의 부정성(the negative)”을 그려낸다. 예를 들어, 글로 쓰이거나 시각적으로 표현된 어떠한 종류의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작업은 퍼포먼스와 그 기록에 대한 모든 담론이 우회할(circumvented) 경우에도 여전히 서명 행위가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급진적 실험이다. 그렇다면 과연 세갈의 컨셉 설치에 있어 작업은, 그러니까 수행적 ‘조각품’의 ‘서명 행위’는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 이 같은 공동 작업에 있어서 작품을 보는 사람이야말로 퍼포먼스를 재-서명하는(re-signing) 공동-저자(co-author)가 되는 것일까? 세갈의 조각품이 가득 채운 미술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서명 행위를 취하는 것은 미술관 관객들인 것일까?

 

저자-퍼포머와 안무가-무용수 사이에 놓인 역동적 관계는 포스트모던과 동시대 작업에 나타난 다양한 컨셉들 안에 담겨 왔다. 여기에는 위계의 해체 과정이 포함되는데, 그와 같은 과정 안에서 점차 늘어나는 콜렉티브적 제작 방식이 (저자의) 재현이 갖는 권위와 상업적 이용이 지닌 경제적 권위를 우회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오늘날 (피르코 후제만 Pirkko Husemann이 보였다시피) 콜렉티브적 ‘작업 방법’의 서로 다른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 이 같은 협력적 제작 과정이 안무하기-수행하기를 특징짓는다면, 그럼 과연 어디에서 서명 행위는 나타나는 것일까? 제롬 벨, 자비에 르 루아, 토마스 레멘과 같은 안무가들은 춤에 나타나는(서명에 대한) 서명 행위(countersigning)의 서로 다른 형식을 재현해낸다: 일례로 자비에 르 루아의 <프로젝트 Projekt>(2003)작업에 나타난 ‘협상적’ 결정과 행동의 형식을 들 수 있다.

 

(오로지 여기서만 다루어져 온) 춤에 나타나는 서명 행위와 저자권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이슈와 관련해, 나는 마지막으로 또 다른 관점에서 서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춤추기(-글쓰기)에 대해 몸을 통한 안무적 서명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카메라 ‘auteur’-camera라는 영화 용어를 응용하자면) ‘몸-펜(body-stylo)’을 가지고 퍼포먼스를 그려낼 수 있을까? 서명과 서명 행위는 해결 불가능한 양가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서명은 서명하는 자의 정체성과 이 같은 글쓰기 행위의 원전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서명하는 자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자끄 데리다의 질문을 빌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서명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있어 완전한 단독성이란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서명들(signatures)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서명은 재생산이 가능하고, 반복될 수 있고, 모방 가능한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 기능하기 위해서 말이다(위의 책). 만약 반복 가능하다면, 서명은 오로지 직인(seal)으로서만 읽힐 수 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춤은 과연 서명될 수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글쓰기-춤추기의 움직임은 독창적이며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슈리프트/서명)의 동작은 반복과 재-인용에서 온다. “안무 행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통해 윌리엄 포사이드는 “안무적 규정을 돌이킨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반복’은 일어난다 – 비록 그것이 계속되는 교체로서 나타난다 해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명 행위는 반복 불가능한 것의 재인용으로서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춤에 나타나는 ‘서명하기’를 저자권의 기호로 (작품의 인장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쓰기/춤추기로서의 서명하기가 갖는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 시적인 실천으로서의 서명하기 말이다. 이와 같은 실천은 서로 다른 매체의 현격한 차이와 더불어 실현된다. 브누아 라샹브르(Benoît Lachambre)의 퍼포먼스 <이즈 유 미 //// 파베.뢰 Is you me //// Par B.Leux>(2008)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서명하기 과정으로서의 ‘기입’이다. 이 작업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로랑 골드링(Laurent Goldring)이 실시간으로 행하는 그래피티와 브누아 라샹브르의 동작은 지속적인 오버랩이 이루어지는 ‘화이트 큐브’ 퍼포먼스 공간 안으로 기입된다.[note title=”11″back] 2009년 8월 17, 18일에 베를린(탄츠 임 아우구스트)에서 있었던 퍼포먼스에서는 두 번째 퍼포머인 루이즈 르카발리에(Louise Lecavalier)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바 있다.[/note] 관객 입장에서 볼 때, 빠르게 진행되는 드로잉의 평면성과 그 드로잉이 무대 뒷벽으로 투사되는 모습은 무용수의 신체성 내부로 번역되어 들어간다. 그리고 계속되는 변형 상태의 한복판에 놓인 그 무용수는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그래픽에 동화되어간다. 이러한 ‘그래핑(graphing)’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삭제하고, 덮어쓰고, 쓰기 동작들(the writing-motions)을 (컬러로) 겹쳐놓는 등의 행위이다. 컴퓨터 폰트를 가공하고 텍스트를 편집하는 데 적용하는 과정, 다시 말해 여기서는 ‘대체’와 ‘삭제’라는 핵심 작용이 작업 과정의 한 부분으로 행해지고 명명되는 것이다.[note title=”12″back] 이 어휘는 오디오 설치작업에서 쓰이는 ‘랩(rap)’ 텍스트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note]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누가 서명을 하는 것일까? 누가 퍼포머의 헐벗은 등에 핏빛 채찍 자국을 남기는 것일까? 이는 마치 한도 끝도 없이 가상적으로 조작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입’의 윤리적 차원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낯선 서명과도 같다.

 

그에 비해, 춤추기와 기입은 복잡하게 얽힌 시적, 매체적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즉 – 춤추기와 글쓰기를 초월하는 변형적, 운동감각적(kinaesthetic) 경험으로서의 – 과잉의 게임을 만들어내는 역학 안에서 맺을 수 있다. 트리샤 브라운은 자신의 드로잉에 대해 “종이 위에서 춤추기”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댄스그램(dancegrams)”은 기록도 아니고 미리 기입된 방식의 무보도 아닌, 주변을 묘사하는 미디엄으로 나타난다(“그들은 공간 형태를 만든다”). 그 드로잉들은 사이(in-between) 공간을 열어낸다; 그것들은 마치 “나와 무용수들 사이를 흐르는 공기에 얹힌” “말”과도 같다. 춤추기와 글쓰기는, 둘 다 재현하지 않는 과정이다. 헨델 타이커(Hendel Teicher)와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트리샤 브라운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춤과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했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안무적 사고방식이 그녀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도록 이끌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덧붙였듯이 “내가 가진 움직임의 언어는 다방향적이기(polydirectional) 때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춤-글쓰기는 시각적인 시로 거듭나며, 이는 그 자체로 – 그것이 만들어내는 표식과 선의 리듬, 그리고 그것들의 방향성 안에서 – 안무적이라 여겨지게 된다. “예를 들어, 모눈종이 위의 피라미드는 세 사람을 위한 춤을 뜻하는데, 난 그들이 축적과 비-축적 개념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프’로서의 춤쓰기(기술하기)는 공간적 관계성을 안무하기 위한 분석적 잠재성을 획득한다. 종이 위에 선을 그린다는 것은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움직임을 찾는 과정 안에서 나타나는 설계의 전략이자 생각의 실험실이기도 하다. 트리샤 브라운의 말처럼 이것은 “조용히 폭발하는 움직임”이다. “드로잉? 난 그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통제할 수도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목적과 행위와 결과와 타이밍이 보기 드물게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니 말이다”(위의 글 1998: 32). 그런 점에서 “드로잉”은 몸과 움직임의 한계에 대해 살펴보기 위한 탐구 방법이 된다.

 

또 다른 예로는 아모스 헤츠(Amos Hetz)의 안무작 <나는 춤추는 당신을 그리고 있다. 당신은 춤추는 나를 그리고 있다 I am drawing you are dancing. You are drawing I am dancing>(텔 아비브, 2007)를 들 수 있다.[note title=”13″back] 이 작품의 최초 버전에서는 아모스 헤츠와 무용수 야엘 크나니(Yael Cnaani) 사이의 대화 방식으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다루는) 두 번째 버전은 아모스 헤츠의 솔로 작업으로 선보여졌다.[/note] 이 공연은 드로잉의 두 영역 사이를 오간다. 즉 – 크고 역동적인 붓질로 만들어내는 작품으로서의 – 글쓰기 ‘그래프’와 춤추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움직임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무용수/일러스트레이터는 글쓰기-서명하기가 만들어내는 두 영역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이 같은 양측 움직임 시나리오에 있어 – 붓질과 신체 행위에 있어 – 양식, 움직임 자극이 불러오는 역동성, 제스처의 포지셔닝과 이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모스 헤츠는 자신의 안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움직이는 몸이 만들어내는 두 가지 행동이 있다: 우선 움직이는 몸에서 손과 팔을 분리시킨다.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몸 전체로 이를 행한다. […] 이처럼 내 머릿속은 여전히 행동과 기다림 사이를,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제스처 사이를 서성이고 있다.” 

 

손과 몸 사이의, 글쓰기와 춤추기 사이의 틈을 인지하는 이 같은 드로잉은 저자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서명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을 서명하는/명명하는 것(에 대한 서명/명명)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제스처로서의 서명하기 행위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흔적이다. 임시적인 서명행위(에 대한 서명행위)라는 의미에서 (누군가의 이니셜만을 적어 넣는) 축약서명하기(paraphieren)[note title=”14″back] 번역자 노트: 독일어 ‘paraphe’는 그리스어 ‘παραγράφειν’에서 유래된 말로, 여러 페이지로 이루어진 긴 협약문에 서명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인장(印章)이나 속기기호를 뜻하는데, 이 때문에 각 페이지는 차후에 서명 없이 교체될 수 없다. 영단어 ‘initial’도 마찬가지로 인장이나 속기기호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에는 이 같은 법적 암시가 결여되어있다. (영문판 역자 주)[/note]인 것이다. 서명을 축약한다(paraphe)는 것은, 즉 특유의(idiosyncratic) 서명을 쓴다는 것은 곧 임시적인 서명을 의미한다. 아직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텍스트/서명 형식을 함축하지는 않은 행위로서의 서명인 것이다. 글쓰기-춤추기의 형식 안에서 몸과 구속력 있는 서명 사이의 경계는 열려있다: 슈리프트와 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코드화되기 이전에 펼쳐진다. 이처럼 그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는, 흔들리는 선으로서의 서명하기(-춤추기)는 – 아모스 헤츠의 말을 인용하자면 – “미상의 이미지가 페이지 상에서, 그리고 춤의 한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시적인 게임과도 같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글쓰기와 춤추기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은 채, 역동적인 마주침 속에서 서로 만나는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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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영어 번역본을 원문으로 하며, 에얼리헤 아르바이트/엘레나 폴저(ehrliche arbeit/Elena Polzer)에 의해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Gabriele Brandstetter(2011), “Transcription-Materiality-Signature. Dancing and Writing between Resistance and Excess”, in Gabriele Klein and Sandra Noeth (eds.), Emerging Bodies: The Performance of Worldmaking In Dance and Choreography, Bielefeld: transcript, 2011, pp.119-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