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블루 혹은 디지털 재생산 시대의 이미지들
번역 유예빈

알렉시 루보미르스키(Alexi Lubomirski), 〈블루 Blue〉, 2013. 작가의 허락 하에 제공됨.

 

몇 달 전, 나는 이상한 사진이 첨부된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 사진은 짙은 푸른색의 한 정사각형 이미지였다.[note title=”1″back] 이 글의 제목의 일부인 ‘트루 블루(True Blue)’는 알렉시 루보미르스키(Alexi Lubomirski)의 사진 “블루(Blue)”에 대한 은유이자, 이후 이 글 전반에 걸쳐 핵심적으로 논의되는 디지털 재생산에 대한 주요 예시로 등장하는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Madonna)에 대한 암시 역시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루 블루 True Blue 1986년 마돈나가 가장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발매한 세 번째 정규 앨범의 제목이다. 이 앨범에서 마돈나는 디스코 댄스로 일관했던 1, 2집에서와는 대조적으로 어쿠스틱 기타, 드럼, 신디사이저 및 쿠바 토속 악기들 등을 수용하여 보다 클래식한 스타일로의 음악적 변신을 선보였다. 이를 계기로 마돈나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역자 주)[/note]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에 나선형으로 심화되는 아쿠아마린 색 속에 숨겨진 어떤 구조의 윤곽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심해 한 가운데서 촬영한 빌딩처럼 보였다. 아니면 부둣가나 보트 근처에서 물 위로 떠오르던 다이버가 볼 법한 무언가인 것 같기도 했다.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에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 이미지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사진이 거쳐온 여정이었다. 이 사진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패션계의 톱 사진작가이자 셀럽인 알렉시 루보미르스키(Alexi Lubomirski)가 촬영한 것으로, 그 무렵 루보미르스키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의 작업 결과물을 담은 그의 첫번째 단행본 〈데케이드 Decade (2014)를 출간했었다. 작업을 진행하는 기간 동안 종종 루보미르스키는 이동 중에든 작업실에서든 스냅샷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곤 하였는데, 나의 메일함에 안착한 이 사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진은 어떤 유명인사(들)이 함께 자리한 곳에서 찍힌 것이었다.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에도 루보미르스키는 이 사진이 ‘파란 스티커’를 찍은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나에게 사진에 대한 그 어떠한 이야기도 더 이상 해줄 수 없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피사체들의 비밀 보장 – 그리고 나중의 서프라이즈 – 을 기약하기 위하여 그와 현장에서 작업하던 이들은 모두 각자의 스마트폰 렌즈에 파란 스티커를 붙여야 했으며,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 이 스티커는 떼어내는 순간 격자무늬의 패턴 자국을 남겼다. 한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촬영이 끝난 후에는 모두 그 스티커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붙어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는데, 이 작업을 기획한 에디터들은 사진작가였던 루보미르스키에게 마저도 핸드폰 렌즈에 스티커를 부착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핸드폰 렌즈에 스티커를 붙인 루보미르스키는 그것을 그대로 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가져가 그 순간 파란 스티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그의 사진은 – 적어도 아직까지는 – 우리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어떤 사소한 도구였던 셈이다.

 

지젤 프로인트(Gisèle Freund), 〈국립도서관에서의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 1937.

 

스티커에 대한 이 일화는 예술의 기계적 재생산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의 가치(cult value)와 전시 가치(exhibition value)를 구별한 부분을 나에게 상기시켰다. 과거 제의 가치는 예술작품을 특정 신앙(cult)을 숭배하는 제사의 주술적인 도구로 활용하였다. 그보다 근대적인 전시 가치는 세속적인 진열(display)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근대적 전시 가치는 바로 앞서 언급한 종교적 행위로부터 예술작품을 – 과거에 제의적 용도로 사용된 적이 있었던 것조차도 – 해방시켰다. 예술작품의 제의적 가치에 대해서 발터 벤야민은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과거 예술작품에서 중시되었던 것은 그것의 존재 그 자체였지 그것이 보여 진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석기 시대에 한 원시인이 그린 큰 사슴 동굴벽화는 주술적 도구였다. 벽화를 그린 원시인은 자신의 그림을 그의 부족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그림의 주요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적(spirit)인 것에 있었다. 오늘날 제의 가치는 예술작품이 감춰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몇몇 신상(神像)들은 오로지 신전 내부에 안치되어 일부 사제들의 접근만을 허용한다. 일년 내내 거의 베일에 가려진 채 있는 성모 마리아상들도 있다. 중세시대 성당의 조각상 중에는 지상층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note title=”2″back]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중에서. 인용문의 영문 원본 출처: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philosophy/works/ge/benjamin.htm[/note]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파란 스티커는 루보미르스키의 사진들의 제의 가치를 보존한다고 할 수 있다. 파란 스티커 덕분에 루보미르스키는 사전 ‘유출’로 인해 사진들이 제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는 사태를 예방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보여질 용도로 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진들이 공식적으로 공개되기 전에는 –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을 – 이들의 존재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사진들이 공개된 이후부터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는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벤야민은 전시 가치가 제의 가치의 상승을 초래할 수 있음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로, 작품은 더 많이 재생산되고, 전시되고, 보여질수록 더욱더 유명해짐으로써 그에 뒤따르는 더 큰 제의 가치를 얻는다 – 단도직입적으로, 모나리자에서부터 마를린 먼로에까지 이르는 아이콘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벤야민은 전시 가치의 대두를 사진과 영화의 매체성과 결부시켰다. 벤야민은 비록 사진은 제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전시 가치로 대체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제의 가치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며” (중략) “’인간의 얼굴’이라는 궁극적인 긴축 상태(an ultimate retrenchment)로 후퇴한다”고 말한다. 이때 벤야민이 가리키는 것은 초상 사진으로, 초상 사진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는 의식 혹은 심지어 셀럽을 숭배하는 의식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 모델 및 배우들을 촬영한 루보미르스키의 사진의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의 즉각적이면서도 잠재적으로 온라인 배포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재생산의 시대에 유명인사의 초상은 자체적으로 제의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 

 

실제로, 과거 벤야민이 기계적 재생산을 이야기할 때 지적하였듯 ‘디지털 재생산’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별도로 취급하여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벤야민의 유명한 저술 제목에 착안하여 이른바) ‘디지털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은 곧 디지털 생산이자 포스트 프로덕션이며, 배포, 냉정한 평가 (좋아요, 싫어요), 코멘트 (리트윗, 댓글 달기 등), 아카이빙, 인용, 이미지 조합, 심지어 움짤 (GIF 형식 이미지)까지 전부 일컫는다. 일부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게티 이미지 뱅크(Getty Images)’는 대량의 자사 소속 이미지들의 워터마크[note title=”3″back] 저작권 보호를 위하여 디지털 상태의 동영상·그림·텍스트·음악 파일 등에 보이지 않게 삽입된 저작권자의 로고나 상표 등의 디지털 마크.(역자 주)[/note]를 제거했는데, 온라인상 어디서든 누구나 워터마크 없는 이미지의 스크린샷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는 몇 분안으로 순식간에 범지구적 관객을 확보하는 동시에 복수적인 존재성을 가질 수 있다. 요컨대 디지털 작품은 편재적이고 움직이며 변화한다. 교회 벽에 붙어있는 프레스코화처럼 종교적 목적을 위해 제작되어 한 장소에 영구히 종속되었던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는 달리, 디지털 예술작품은 한 전시에서 다른 전시로, 한 스크린에서 다른 스크린으로, 또는 한 관객·사용자로부터 또 다른 관객·사용자로 이동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 세속적인 전시를 위해 제작된 예술작품과도 달리, 디지털 예술작품은 지금도 앞으로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결국 모든 관객은 작품의 잠재적 사용자이자 복제자이며 재배포자이고 편집자이다. 어렵지 않게 영상을 스틸 사진으로 만들어 내듯, GIF 이미지화를 통해 사진은 영상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디지털 왕국에서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는 대중을 시각화 하는 기술인 ‘통계(statistics)’에 의하여 융합된다. 통계에 대하여 벤야민은 기계적 재생산과 아우라의 상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어떠한 대상을 그것의 보호막으로부터 끄집어 내는 일, 즉 객체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작용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동질성을 찾아내는 지각작용이 증가한 오늘날에는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 유일무이한 대상으로부터도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을 추출하기에 이르렀다.[note title=”4″back]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제 3절 중에서.[/note]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인다. “갈수록 증가하는 ‘통계’[note title=”5″back] 벤야민이 아닌, 이 글의 저자인 제니퍼 알렌의 강조.[/note]의 중요성은 이처럼 지각작용의 영역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론적 분야에서도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thinking)와 지각작용 모두에게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과정인 것이다.”

 

엘렌 드제너러스(Ellen DeGeneres), 〈브래들리의 팔만 조금 더 길었더라면. 완전 역대급 사진. #오스카에서. If only Bradley’s arm was longer. Best photo ever. #oscars

 

무려 200만 회가 넘게 역대 가장 많이 리트윗 된  2014년 오스카 시상식에서의 ‘단체’ 셀카는 그 가능성이 얼마나 무한한지 잘 보여준다. 이 셀카가 가진 찰나적인 아이콘으로서의 제의적 가치는 그것이 지닌 탁월한 전시적 가치를 통해 탄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제가 아우라의 상실을 초래한다던 벤야민의 주장은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그가 가리키는 복제가 (모나리자에서부터 마를린 먼로에까지 이르는) 기계적 복제이든 아니면 보다 미시적으로 (오스카 셀카와 같은) 디지털 복제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주장한 다른 하나는 오싹할 정도로 딱 들어맞았는데, 오스카 셀카가 한편으로는 전에 없던 사진과 통계의 연맹이자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의 결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벤야민이 언급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의 디지털 복제의 현현(顯現)이라는 점이다. 이 셀카 이전에 가장 많이 리트윗 된 사진은 〈4년 더 Four more years〉라는 제목의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 나온 초상화로, 오바마가 재선된 날 밤인 2012년 11월 7일 이례로 아이콘이 된 이 트위터 이미지는 80만 회 가까이 리트윗 되었다. 고전적인 정치적 관점에서 이 사진을 역사적 순간에 관한 – 재선에 성공한 미국 최초의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 이미지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보다 더욱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 사진이 아이콘을 기존의 방식으로 포착한 역사적인 사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사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재선에 성공한 날 밤 그 순간의 오바마 모습이 아닌, 그가 영부인을 포옹하는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로 〈4년 더〉는 이 때로부터 몇 달 전인 대선 캠페인이 진행 중이던 2012년 8월에 촬영되었던 것으로, 당시 오바마의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던 로라 올린(Laura Olin)이 이 사진을 업로드하였다. 고전적 개념의 역사적인 아이콘 사진과 그 사진이 묘사하는 사건 간의 물리·시간적 근접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찰나의 한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리고 그로 인해 종종 역사의 흐름을 바꾼) 퓰리처 상을 수상한 사진작가들을 생각해보자. 1972년 6월 8일 베트남의 트랑 방 마을에 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이후 공포에 질려 달리던 아이들의 모습을 포착한 닉 우트(Nick Ut)의 사진을 한 예로 떠올려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바마의 ‘4년 더’ 트위터는 역사를 기록(document)하는 대신 기념(commemorate)한다. 그런데 심지어 오스카 셀카는 오바마의 사진보다도 역사화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트위터 사진은 사건 발생을 기준으로 얼마나 근접한 시기에 사진이 찍혔는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지도 기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오히려 단순히 돌고 도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역사적인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트위터 사진 속 스타들은 직업상 평소에도, 그리고 이 사진이 찍혔던 바로 그 시상식날 밤에도 이미 수없이 많이 영화나 사진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 이 오스카 시상식 날 찍힌 엘렌 드제너러스(Ellen DeGeneres), 제니퍼 로렌스(Jennifer S. Lawrence),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브래드 피트(Brad Pitt) 등의 사진이 이 트위터 사진 단 한 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936년 벤야민이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을 언급하며 예상했듯이, 오늘날 한 무리의 스타들의 사진 – 초점은 맞지 않고 인물들은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 은 역사적인 재선(再選)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사진의 형편없은 퀄리티는 이 사진이 가진 어마어마한 영향력에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진은 이날 시상식을 진행했던 엘렌이 남긴 역설적인 트윗처럼 ‘브래들리의 팔만 조금 더 길었더라면. 완전 역대급 사진’인 것이다. 흠이 있되 영원히 완벽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이 말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 비록 그녀는 이미지의 구성보다는 해상도를 중심으로 이미지의 빈곤함을 논하긴 하였으나 – 2009년에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In Defense of the Poor Image」 라는 에세이에서 사용한 표현이다.[note title=”6″back] http://www.e-flux.com/journal/in-defense-of-the-poor-image/[/note]

 

벤야민의 이론인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은 오랜 기간 인터넷상에서 그 타당성을 입증 받았다. 디지털상의 ‘히트(hits)’와 ‘좋아요’가 만들어낸 통계만 있다면 아마추어가 만든 동물 영상도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 반(反)이슬람주의적 비디오 클립인 〈무슬림의 순진함 Innocence of Muslims〉 (2012)은 – 이 클립은 단순한 영화 예고편으로,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 안에서 폭동을 야기시킨 어떤 가상의 영화를 소개한다 – 온라인상의 아마추어적 노력으로도 폭력과 상처 그리고 죽음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는 1972년도에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내 비판 여론을 강화하였던 닉 우트의 사진이 가진 영향력과는 상당히 판이하다. 사진과 역사 간의 인과관계가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사진이 실제 사건을 기록하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모습이 아니라, 가상의 영화가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만들어내는 현상이며, 이와 같은 전복 역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문자 그대로 모든 현상을 동일한 설정으로 보여주는 – 픽셀 차원의 수치적 동일성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도, 실제 우리 눈 앞에서 밝게 빛나는 스크린 차원의 동일성까지 포함 한 – 방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온라인상에서는 역사적인 사건도 일상적인 사건처럼 우리 앞에 제시된다. 뉴스, 아마존 쇼핑몰, 메이크업 튜토리얼, 신작 영화 예고편, 가상 혹은 실제 이야기, 벤야민의 에세이, 외국어 사전, 몇몇 포르노, 개개인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들, 패션 포토북, 아트 매거진 그리고 귀여운 동물들의 영상까지 온라인에 있는 모든 것들이 – 그 외 개개인의 공간 어딘 가에 별도로 저장된 음악, 사진, 텍스트, 연락처 등은 말할 것도 없이 – 다같이 등장하고 서로 호환된다. 예컨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다른 인터넷 창이나 탭 혹은 같은 화면에 동시에 띄워 놓고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온라인상에서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이고, 개개인은 대중이다. 나아가 사소한 것도 역사적인 것 될 수 있으며,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은 거짓도 실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전체의 기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나비효과’를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의 보편적 동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로 빔 델보예(Wim Delvoye)의 포토샵 된 산 이미지 작품 시리즈가 있다. 이 이미지들 속 산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시시콜콜한 메시지들이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크게 새겨져 있다. 〈벨이 고장 났으니/ 노크를 해주세요/ 티나로부터〉

 

이 작품에서 실제와 가상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아무리 시시콜콜한 것도 언제든 기념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애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빔 델보예(Wim Delvoye), 〈벨이 고장 났으니, 노크를 해주세요. Bell Is Broken, Please Knock〉, 2000. © Studio Wim Delvoye, Belgium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 – 처음부터 움직였든 움직이지 않았든, 또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혹은 그 반대로 만들어졌든, 아니면 아예 다르게 변형되었든 어찌되었든 간에 – 는 통계의 검증을 거쳐 그 자격을 인정받는다. 어떤 이미지가 확산될 때, 그 이미지의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의 융합은 팔로워와 ‘좋아요’ 그리고 이미지의 노출과 인용 및 재배포 빈도에 근거하여 계산된다. 우리의 디지털 시대에는 기존에 있던 사진과 영상의 매체성 간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기계 시대와 구별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사례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에는 대중 예술과 고급 예술 간의 경계도 사라졌다. 어떤 형태의 예술작품이든 간에 – 마우스로 만든 단순한 포토샵이든 손수 제작한 수공품이든 상관없이 – 그 이미지는 반드시 온라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매체의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가 디지털 예술가들이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Everyone can  become an artist)’라고 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유명한 말이 온라인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시간과 속도(velocity), 속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기계 시대와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을 갖는다. 디지털 이미지의 움직임은 규모 면에서 변화할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인 수직 상승도 보인다는 점에서 – 트위터를 예로 들면, 리트윗은 100만, 200만 혹은 그 이상이 되도록 계속 이어질 수 있다 – 방향을 갖기 때문에 벡터(vector)의 속성을 갖는다. 디지털 이미지가 비행기나 자동차, 미사일 등처럼 단독적인 지리적 방향성을 갖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추적하고 그 속도와 여정을 포물선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엘렌 드제너러스는 오스카 셀카를 미국 동부 시간을 기준으로 밤 10시경에 그녀의 트위터 계정에 올렸는데, 이 트윗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오바마의 ‘4년 더’ 트윗이 세운 78만 회의 리트윗 기록을 넘어섰다. 심지어 이 리트윗으로 트위터는 약 20분 간 먹통이 되었다. 드제너러스의 트윗은 초반에 혼자서 13,711개의 웹사이트에서 2.4백만 회 리트윗 되며 3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총 32.8백만여명의 뷰어를 확보했다. 이는 셀럽(celebrity)과 민첩성(celerity)이 손을 잡은 사례로, 그 결과는 기하학적인 속도의 이미지 확산으로 나타났다. 벤야민 시대에는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수 – 예를 들자면, 우편 엽서의 갯수라든가 책의 에디션 횟수 등을 통해 – 를 계산하는 것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빠른 속도 따위의 문제는 차치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미지들을 보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note title=”7″back] http://mashable.com/2014/03/04/oscars-by-the-numbers-ellen/[/note]

 

 

자사 소유의 이미지에 있던 워터마크를 삭제함으로써 게티 이미지 뱅크는 이미지의 저작권 독점에서 사용자들의 데이터 수집으로 옮겨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논리를 습득한 듯하다. ‘더 버지(The Verge)’[note title=”8″back] 미국의 복스 미디어(Vox Media)가 소유한 미국의 IT 미디어.(역자 주)[/note]가 보도했듯[note title=”9″back] http://www.theverge.com/2014/3/5/5475202/getty-images-made-its-pictures-free-to-use[/note] 오픈 임베드 프로그램(an open embed program)[note title=”10″back] ‘끼워 넣다’라는 뜻을 가진 임베드(embed)는 다른 채널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에 있는 소스를 블로그나 카페로 가져와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한 소셜네트워크 환경에서 다른 소셜네트워크 환경으로 콘텐츠를 ‘변형 없이’ 그대로 퍼오는 것을 가리킨다.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식 블로그, ‘2017년 4월호 – 임베드’ https://blog.naver.com/kcc_press/221581999883)(역자 주)[/note]은 “이미지 하단에 크레딧과 라이선스 페이지로 연결되는 링크를 첨부하는 한”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게티 이미지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상당한 양의 사진들을 무료로 이용해지는 것이 합법화된 만큼, 이제 이익의 창출은 더 이상 전통적인 라이선싱(Licensing)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지들이 임베드 되는 한 게티 이미지 뱅크는 해당 이미지들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새로운 돈이 유입된다. 새롭게 임베드 된 파일들은 트윗, 유튜브 영상 등도 임베드 하는 아이프레임 코드에 생성되며, 이는 곧 기업이 사용자들의 정보를 수집하거나 광고를 삽입하고자 할 때 이 임베드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중략) 즉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미지들이 아무렇게 떠돌아다니도록 두는 것보다 임베드 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일종의 옵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게티 이미지 뱅크는 엄격한 개념의 아우라로부터 – 다시 말해, 벤야민이 소개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먼 그 무엇의 일회적 현현”으로서의 아우라 – 점차 멀어져갔다. 실물 소유가 아닌 저작권 소유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미지의 원본을 소유하였고, 법적인 규제 혹은 워터마크라는 이른바 성상파괴적 방식을 통해 다른 사용자들이 원본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였다가, 결국에는 라이선싱 비용을 지불한 사용자들에 한해서 이미지를 재생산할 권리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디지털상에서든 인쇄물로서든 이미지를 재생산할 권리를 어느 한 명에게 판매하는 순간, 결국 누군가는 언제든 온라인에서 그것을 찾아내 사용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디지털 재생산은 결코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재배포 및 기타 여러 활동들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정의하였으나, 오늘날 디지털 아우라는 잠재적으로든 실제로든 이미지의 편재(omnipresence)를 통해 더욱 커지는 듯하다. 지극히 진부하지만 기념비적이고, 사적인 동시에 공적이며, 개별적이되 집단적이고,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인 이 편재는 황홀하다시피 한 위력을 가졌다. 또한 제의 가치는 디지털화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각 이미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전시 가치와 융합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트위터를 하는 행위는 숭배의 대상(religious icon) 혹은 적어도 유물(relic)을 만지는 것과 유사한 행위가 된다. 오스카 셀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디지털 아우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유일무이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근접성(proximity)의 대중적 현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난다. 게티 이미지 뱅크의 새로운 정책이 시사하듯, 대중이 이미지의 삶 속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하더라도 이미지 자체에 그 어떠한 흔적도 – 예를 들어, 만져서 닳거나 찢어진다거나 복제에 의한 원본 훼손 등 – 남지 않는다. 설령 ‘빈곤한’ 복제품들이 떠돌아다니게 될지언정 말이다. 그 대신 이미지는 IP주소들을 통해 어디든 사용자들의 지문을 갖고 다니며, 따라서 사용자들은 언제든지 해당 이미지에 의해 역(屰)으로 링크될 수 있다. 정보적인 차원에서, 이것이야 말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제의(cult)가 된 셈이다. 

 

이러한 고찰은 다시금 앞서 소개한 파란 스티커에 대한 이야기와 제의 가치를 보호 혹은 제고하고자 작품을 비공개 해두었던 그 일화로 나를 데려간다. 한편 최근에 있었던 또 다른 일화로, 2013년 12월 13일에 그 어떤 홍보나 사전 공지 없이 아이튠즈에서 단독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제목의 앨범을 발매한 비욘세의 사례가 있다. 트위터 사(社)의 집계에 따르면, 오스카 셀카 때와 마찬가지로 〈비욘세 Beyoncé〉(2013)는 공개된 직후 처음 12시간 동안 1.2백만 개의 트윗을 생성하는 통계를 보이며 그 어떤 PR 전략을 쓰더라도 달성하리라 쉬이 상상할 수 없는 미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기서 다시 벤야민의 말을 빌려오자면, “제의 가치는 예술 작품이 감춰진 채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전시 가치에 있어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욘세〉가 아직 베일 안에 감춰져 있을 때, 가수 비욘세는 종종 무대 혹은 뮤직 비디오 등에서 자신을 디지털적으로 재생산해왔다. (비록 그 ‘뮤직 비디오’가 현재 우리가 듣게 된 노래와 맞는 영상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2013년 슈퍼볼의 중간 휴식 시간에 그녀가 했던 퍼포먼스를 생각해보라. 이 무대는 비욘세를 디지털적으로 복제한 후 그녀의 몸짓을 틈틈이 코러스에 맞춰 내보냈다. (그리고 이는 분당 26만 8천 개의 트윗을 생성하는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비욘세의 또 다른 뮤직비디오 〈카운트다운 Countdown〉 (2011)은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모습뿐만 아니라, 디지털적으로 복제하여 노래 전반에 걸친 카운트다운에 맞춰 십여 차례 등장시킨 가수의 코러스 라인도 함께 부각시킨다. 실은 데이빗 보위(David Bowie)도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2013년 1월 8일 아이튠즈에서 앨범 〈더 넥스트 데이 The Next Day〉 (2013)의 수록곡 ‘웨어 아 위 나우(Where Are We Now)’를 발매한 적이 있는데, 이 곡의 뮤직 비디오에는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가 제작한 복제된 데이빗 보위의 투사 영상이 등장한다. 여하튼 오늘날의 팝 여왕 비욘세의 전략은 새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유일무이한 룩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옛 팝 여왕 마돈나가 쓰던 전략과 대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새 앨범을 발매할 때면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신선한 스타일 그 이상으로 자신의 성장한 페르소나를 보여주고자 했던 데이빗 보위의 전략과도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비욘세(Beyoncé), 〈카운트다운 Countdown〉(2011) 중.

 

비욘세와 〈비욘세〉는 – 이러한 자기 복제가 암시하듯 – 아이콘의 유일무이성과 아우라의 단독성으로부터 멀어져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기 복제를 제외하면 편재와 다중화가 디지털 아우라를 설명하는 전부인 것이다. 가수 비욘세와 그녀의 노래들 및 그 이미지들을 수반하는 것들은 모두 디지털 다중화에 의해 아이콘이 된다. 즉, 온라인상 유통되는 이미지들로 늘 이루어지고 있는 즉각적인 재생산, 재배포 및 변형을 통해 아이콘이 되는 것이다. 사실 비욘세는 누군가 그녀의 모습을 그럴듯한 GIF 파일로 만들기 이전부터 늘 ‘디지털화’한 존재로 비쳐졌다. 비욘세는 그녀 자신을 추종하면서까지 작업 안에서 자신의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를 뒤섞으며 스스로를 대량으로 디지털 복제하고 이를 즉각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온라인상의 자신의 존재를 앞서 예견하거나 심지어는 부채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고 보면 어느 누가 끊임없이 완벽하게 재생산되는 한 무리의 복제품들보다 더 이상적인 팬들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 복제품들은 임베드 과정 그 자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마돈나는 팔색조 같은 룩을 연출하는 것으로 팝 뮤직계의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라 불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상 속에서 10초 이상 한 가지 룩을 유지하는 일이 없다시피 한 비욘세에 비하면 마돈나의 옷장은 거의 그 빛이 바랬다고 한들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오늘날 셀럽은 민첩성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거의 순간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하며, 그 재생산이 더 빠르고 획기적일수록 그 대상은 더욱 아이콘 다워진다. 한 뮤직비디오 속 비욘세의 재빠른 변신은, 가수 비욘세로서 그녀의 정체성 혹은 〈비욘세〉 앨범에 포함된 또 다른 뮤직비디오 안에서 그녀가 연기했던 여러 다른 캐릭터들 중 그 무엇의 가치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의 싱글 〈프리티 허츠 Pretty Hurts〉에서 비욘세는 미인 대회 참가자 ‘미스 써드 워드(Miss Third Ward)’를 연기한다. 여기서 미스 써드 워드는 숏컷, 보브 컬 및 길게 늘어뜨린 머리 등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한 채 등장하는데, 그에 따라 말할 필요도 없이 수차례 메이크업과 의상을 변경한다. 단, 이러한 변신은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 한 캐릭터에서 다른 캐릭터로의 변화 혹은 시간의 흐름(무엇보다도 숏컷에서 보브 컬을 할 정도로 머리를 기르려면 일 년은 걸린다) 중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이미지들은 여러 다양한 컨텍스트에 삽입되고 활용됨으로써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증폭시키며 이미지 자체의 역동성와 민첩성을 돋보이게 한다. 비욘세의 작업이 디지털 사용자들에게 많은 선택지들을 제공하는 다른 한편으로,  그 누구도 비욘세가 이미 시도한 이미지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디지털 변형은 팝 가수 마돈나가 아닌 성경 속 마돈나[note title=”11″back] ‘마돈나(Madonna)’는 ‘성모 마리아’의 이탈리아어 표현이다. 즉 이 글에서 글쓴이가 가리키는 ‘성경 속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역자 주)[/note]의 제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수 세기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회화, 조각 등으로 마돈나를 묘사해왔는데, 그들의 손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옷’을 갈아입었든 간에 마돈나는 언제나 마돈나였다.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를 융합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속력의 통계와 융합하기까지 하는 디지털 다중성은 세속적인 전시 가치를 제압함으로써 제의로의 과감한 회귀를 보여준다. 어떠한 형태로 표상화 되든 간에 마돈나가 가진 아우라의 힘은 수많은 그녀의 복제품과 변신들에 의해서 결코 축소되지 않았다. 사실 비욘세가 그 어떠한 화려한 변신을 한다 한들 우리는 그것이 결국 비욘세라는 것을 안다… 마돈나의 복제품은 ‘빈곤한’ 것마저 옛 거장이 제작한 것만큼이나 강력한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는 메시아적 소명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대롱거리는 판지로 만든 마돈나는 카라바조(Caravaggio)[note title=”12″back]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역자 주)[/note]의 〈묵주기도의 성모 Madonna of the Rosary〉(1606-07)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강력한 아우라를 지니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 속 마돈나와는 달리 비욘세는 단 한 장소 – 한 무대, 한 영상 등 – 에서 자신을 장신구로 만들어주는 디지털 복제를 통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녀의 아우라를 창조한다. 1936년에 기계 복제에 대한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사진이 제의 가치를 전시 가치로 ‘전면적으로’ 대체한다고 하였지만, 오늘날 이 둘은 한 데 어우러져 이미지들과 복제품들이 셀럽을 숭배하는 것을 넘어서서 특정한 종파(宗派) 없이도 제의가 형성되도록 한다. 한 아마추어가 만든 동물 영상이 유명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현상이 시사하듯 이 제의는 보는 행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기에 동참하는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 더군다나 디지털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복제품이 될 수 있으므로 – 오스카 트윗이 증명해 보였듯, 수백만 개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 오늘날 온라인상의 이미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추종자(following)이자, 제의이다. 

 

앞서 언급한 예시들에 반해, 미술품에 관한 통계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럼에도 몇몇 일상적인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베를린 지하철의 광고게시판에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신혜지의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Deutsche Oper Berlin) 사진들이 있는데, 이들은 광고와 예술 사이에 위치한다. 단일 이미지로 보이는 각 사진은 두 개의 이미지들이 서로 겹쳐져 있다. 아니면 혹시 셋 혹은 그 이상인 걸까? 글쎄, 잘은 모르겠다. 여하튼 비욘세 그녀 자신을 디지털 복제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신혜지 작가는 도이치 오페라라는 건축물 – 무대 뒤, 관객석, 건물 외벽 – 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 외부도 기록한다. 포옹하는 두 사람, 라이스닥(Reichstag)의 돔, 베를린 밤 거리 등. 유리 표면에 비친 모습을 찍은 사진들은 이러한 효과를 더욱 증폭시킨다. 내부가 드러난 동시에 시각적으로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한 데 어우러진 사진들은 도이치 오페라의 겉과 속을 효과적으로 뒤집어 놓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의 아이콘적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이 건축물의 제의 가치를 제고하고 더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는 것을 꾀하고자 – 디지털적으로 변형된 사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진들은 우리가 이 이상 더 손 대기 어려운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note title=”13″back] http://www.deutscheoperberlin.de/de_DE/search#[/note]현대 사회의 사진들은 디지털 복제와 변형의 잠재력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이동성과 속력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한 장, 작품 한 편을 넘어서 이제는 보여지기 마저도 온전히 홀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무엇이 되었든 ‘세상에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