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전환: 협업과 그 불만들
번역 정강산

모든 예술가들은 비슷하다. 그들은 더 사회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예술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

-댄 그레이엄(Dan Graham)

 

리버풀 주거 프로젝트의 늙은 주민들을 위한 슈퍼플렉스의 인터넷 티브이 방송국(tenantspin, 1999), 애니카 에릭슨이 집단들과 개인들의 아이디어와 솜씨를 나누기 위해 그들을 프리즈 아트 페어에 초대한 일(Do you want an audience?, 2003), 산 세바스티안의 스무 곳이 넘는 사회단체들을 위한 제러미 델러의 사회적 퍼레이드(2004), 30분짜리 라디오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파리 북동쪽의 오베르빌리에에서 지역 주민을 교육한 링컨 토비에(Radio Ld’A, 2002), 아틀리에 반 리에 샤우트의 이동식 수상 유산 클리닉(2001), 비난받는 한 쇼핑몰을 로테르담 블라르딩겐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센터로 바꾼 진 반 히스윅의 프로젝트(De Strip, 2001-2004), 실직자들에게 새로운 패션기술을 가르치고 집단적인 연대에 관해 토론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와 또 다른 어딘가)에서 열린 루시 오르타의 워크숍(Nexus Architecture, 1995-), 로스엔젤레스 에코 공원의 빈 공터에 고안된 템포러리 서비스의 단지 환경(Construction Site, 2005), 파벨 알 테머가 “어려운” 청소년들을(그의 두 아들과 함께) 바르샤바의 노동자계급 거주지 브로드노 지구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린 마스트리히트로 보내 놀도록 한 일(Bad Kids, 2004), 핀란드에서 망명신청을 기다리는 난민들의 흑백 초상사진이 들어간 젠스 하닝의 달력 만들기(The Refugee Calendar, 2002).

 

왼쪽: 진 반 히스윅(Jeanne van Heeswijk), , 2001-2004. 퍼포먼스 전경, 로테르담, 2002. 오른쪽: 파벨 알테머(Pawel Althamer), , 2004. 퍼포먼스 전경, 마스트리히트.
왼쪽: 진 반 히스윅(Jeanne van Heeswijk), , 2001-2004. 퍼포먼스 전경, 로테르담, 2002.
오른쪽: 파벨 알테머(Pawel Althamer), <나쁜 아이들 Bad Kids>, 2004. 퍼포먼스 전경, 마스트리히트.

 

이 프로젝트들의 목록은 구체적인 사회적 유권자들을 동반하는, 집단성과 협업, 직접적인 참여에 대한 예술적 관심의 최근 격동 중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비록 이 실천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업 미술의 장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한 주목을 받아왔지만-협업 프로젝트는 개인 예술가들의 작업보다 판매하기 어려우며, 사회적 이벤트와 출판, 워크숍, 혹은 퍼포먼스보다 “작품”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공부문에서 점차 상당한 영향력을 차지했다. 비엔날레의 전례 없는 팽창(지난 십년에만 33개의 새로운 비엔날레들이 설립되었고, 이들은 최근 국제 미술계의 주변부로 여겨지기 전까지 여러 국가들에서 주류였다)은 이러한 변동에 영향을 끼친 한 요인이었는데, 이는 이들이 공공영역에서의 경험적인 참여예술을 제작하는데 전념하는 새로운 유형의 위탁기관이기 때문이다(런던의 아트엔젤, 네덜란드의 SKOR, 프랑스의 누보 커맨디테리는 단지 당장 떠오르는 몇몇 사례일 뿐이다). 자신의 비판적 역사학인 『한 장소 다음에 또 한 장소: 장소특정적 미술과 지역적 정체성』(2002)에서 권미원은 커뮤니티-특정적 작업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공간을 형식적이거나 현상학적인 구조보다 사회적인 것으로서 다루면서, “무거운 금속류의” 공공예술에 대한 비판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획들을 통해 생겨난 상호주체적인 공간은 예술적 탐사의 초점-그리고 매체-이 된다.

 

이 확장된 관계적 실천들의 영역은 현재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사회적 참여 예술, 공동체 기반 예술, 체험적 공동체, 대화적 예술, 연안의(littoral) 예술, 참여하는, 개입적인, 리서치기반의, 혹은 협업적인 예술. 이러한 실천들은-이미 존재하는 공동체들과 함께 작동하는 형식에서든, 누군가의 간학제적(interdisciplinary) 네트워크를 설립하는 형식에서든- 협업적 행위의 창조적인 보상들에 비해 관계미학에는 관심을 덜 갖는다. 이러한 실천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시기를, 공산주의의 몰락이 좌파들에게 남은-정치적 미적 급진주의와 연결되었던-혁명의 흔적을 박탈했던 199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작업이 갤러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차이를 두지 않으며, 심지어 매우 확립되어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프란시스 알리와 피에르 위그, 매튜 바니, 토마스 허쉬혼 등은 그들의 개념적, 조형적 실천의 확장과 함께 모두 사회적 협업으로 전환해왔다. 비록 이 다양한 예술가들과 집단들의 목표와 결과는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 모두는 집단적인 행위와 공유된 아이디어의 고무적인 창조성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되어있다.

 

사회적으로 협동적인 작품의 이 혼합된 전경(panorama)은 아마 틀림없이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아방가르드를 형성할 것이다. 탈 물질화되고, 반시장적이며, 정치적으로 참여하는-예술과 삶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모더니스트의 요구에 대해 수행된-프로젝트들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상황들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관계미학(1998)의 니콜라 부리요에게, 관계적 실천의 텍스트를 정의하는 것, 즉 “예술은 특정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공간이며,” 정확히 “티브이와는 달리 관계들의 공간을 결속한다.” 또 다른 주요텍스트 『대화 작품들: 모던예술에서의 공동체와 소통』(2004)에서의 그랜트 H. 케스터에게, 예술은 특별히 어떤 세계에 반대하도록 설정되는데, 그 세계에서 “우리는 소비자들의 원자화 된 유사 공동체로 전락하고, 우리의 감각은 스펙터클과 반복에 의해 무뎌진다.” 이들, 그리고 사회적 참여예술의 다른 지지자들에게, 참여적 실천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억압적인 매개에 의해 마비되고 파편화된 사회를 재인간화-혹은 적어도 탈소외-시킨다. 그러나 이 정치적 과업의 시급함은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그러한 협업적인 실천들은 자동적으로, 저항의 중요한 예술적 제스쳐와 동등하게 인지된다. 즉, 실패한, 성공적이지 않은, 해결되지 못한, 혹은 지루한 협업적 예술작품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과업에선 모든 작품이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그러한 포부에 공감하는 한편, 그러한 작품을 예술로서, 비판적으로 토론하고,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 비판적인 작업은 부분적으로 영국에서 강조되고 있는데, 그곳의 신노동당은 사회적 통합의 정책을 향해 문화를 조종하기 위해서 사회적 참여예술의 수사학과 거의 동일한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예술을 대상 집단에 대한 통계적인 정보와 “성과지표”로 축소하면서, 정부는 예술적 질에 대한 고려에서 사회적 효과를 우선시한다.

 

사회적 실천들을 판단하는 기준의 형성은 믿지 않는 자들(이러한 작업을 주변적이고, 오도되었으며, 어떠한 종류의 미적흥미도 부족한 것으로 거부하는 심미주의자들)과 믿는 자들(미적 질문들을 문화적 위계와 시장과 동의어인 것으로 거부하는 활동가들)간의 오늘날의 교착상태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 전자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 관계없는 그림과 조각의 세계로 우리를 비난할 것이고, 반면 후자는 예술의 자율성을 조심스레 강화하면서, 곧 예술과 삶 사이의 어떤 생산적인 재접근도 막아내며 스스로 도태되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이때 양측이 만날 수 있는 지반은 존재하는가?

 

사회적 협업 예술과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틀을 잡았다. 즉 동시대 예술에서 사회적 전환이 예술비평에서의 윤리적 전환을 촉발해왔다는 것이다. 주어진 협업이 수행되는 방식에 깊게 주의하면 이는 명백하다. 달리 말해, 예술가들은 점차 그들의 작업과정-좋은, 혹은 나쁜 협업의 모델을 제공하는 정도-에 의해 판단되고, 마치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듯이 그들의 주체들을 “충분히” 재현하는데 실패하는 어떤 잠재적인 착취의 단서로 인해 비판받는다. 제작과정(즉, 목적에 대한 수단)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그 반대편에 대한 자본주의의 두둔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합리화된다. 산티아고 시에라를 향한 분노에 찬 모욕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명백한 사례였으며, 또한 이런 공식을 명목으로 제기된 다른 예술가들의 비평을 읽는 것은 낙담스러운 일이었다. 공감적인(consensual) 협업을 통해 참여자들이 등장하도록 하는 대신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참여자들과 작업하는 예술가들에게 전문지식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비난이 가해졌던 것이다. 터키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오다 프로제시(Oda Projesi)에 관해 서술하는 것은 예술적 판단이 윤리적 기준에 의해 잠식된 상황의 명백한 예를 보여줄 것이다. 오다 프로제시는 1997년부터 3명의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인데, 이스탄불의 갈라타 지역에 있는 방 3칸짜리 아파트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펼쳐왔다(오다 프로제시는 “방 room 프로젝트”의 터키어이다). 그 아파트는 터키계 화가 코멧(Komet)과 아이들의 워크숍, 조각가 에릭 공그리치(Erik Göngrich)와의 커뮤니티 피크닉, 템 야핀(Tem Yapin) 극단에 의해 조직된 어린이를 위한 퍼레이드 등과 같이, 이웃과 협업을 진행할 때 콜렉티브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오다 프로제시는 그들을 둘러싼 것들을 융합시키려는 욕망에 추동되어, 자신들이 상호교환과 대화의 가능성을 위한 상황을 열어젖히길 바란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은 명백히 자신들의 작업을 부드럽게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이들의 프로젝트 리플렛 중 하나는 “교환이 아닌 상호교환”이라는 슬로건을 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을 개선하거나 치료하려하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워크숍과 이벤트를 조직하기 위해 이웃과 함께 직접 작업함으로써, 그들은 명백히 더욱 창조적이고 참여적인 사회적 구성(fabric)을 만들길 원한다. 그들은 과잉 조직되고 관료적인 사회의 모양(face)에 “빈 공간들”과 “구멍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으레 다른 이들과 접촉을 하지 않는 이들의 집단들 사이에서 “중재자(mediators)”가 된다는 것에 대해 논한다.

 

오다 프로제시(Oda Projesi), , 2001. 에릭 공그리치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 참여와 설치 이벤트, 오다 마당(Oda Courtyard), 이스탄불, 2001년 6월 10일.
오다 프로제시(Oda Projesi), <소풍 Picnic>, 2001. 에릭 공그리치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 참여와 설치 이벤트, 오다 마당(Oda Courtyard), 이스탄불, 2001년 6월 10일.

 

오다 프로제시의 작업 대부분은 예술 교육과 커뮤니티 이벤트의 수준에 자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더 넓은 관객들에게 예술을 전달하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이 터키에서 물체에 기반을 두지 않은 실천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젖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터키의 예술 아카데미와 시장은 여전히 상당부분 페인팅과 조각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마 나처럼 기쁠 텐데, 이는 이러한 과업에 착수한 자들이 바로 세 명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지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그들의 개념적 제스쳐는 결국 커뮤니티 아트의 전통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스웨덴, 독일, 그리고 그들이 전시한 다른 국가들로 수송되었을 때, 그들 프로젝트를 워크숍, 토론, 식사, 상영회, 산책 등 예상 가능한 공식 근처에서 맴도는 다른 사회적 참여 실천들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 아마도 이는 미적 가치에 대한 질문이 오다 프로제시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무제(Untitled) 잡지(2005년 봄 호)에서 그 콜렉티브를 인터뷰하고 작업에 있어 그들이 근거하는 기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어디서, 누구와 협업을 하는지에 대해 내리는 결정으로 그 기준을 판단한다고 대답했다. 즉 그들에겐 미학적 고려들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지속되는 관계들이 성공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실천이 협업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다 프로제시는 미학적(aesthetic)이라는 말을 논해져서는 안 되는 “위험한 단어”로 간주한다. 이것은 내게 기묘한 반응인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미적인 것(the aesthetic)이 위험하다면, 오히려 그것은 심문되어야할 이유가 아닌가?

 

오다 프로제시의 윤리적 접근은 최근 그들의 작업에 대해 에세이를 쓴 스위스의 큐레이터 마리아 린드(Maria Lind)에게 수용되었다. 린드는 정치적, 관계적 실천들의 가장 명민한 옹호자 중 한명으로,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뚜렷한 전념과 함께 자신의 큐레이터적 작업을 수행한다. 클레어 도허티의 『스튜디오에서 상황으로: 동시대 예술과 상황에 대한 질문』(2004)으로 출판된, 오다 프로제시에 대한 에세이에서 그녀는 그 그룹이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고 재창조하는 수단으로서 예술을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예술을 보여주거나 전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쓴다. 그녀는 계속해서 뮌헨 근방의 리움에서 있었던 그 콜렉티브의 프로젝트를 언급하는데, 거기서 그들은 티파티를 조직하기 위해 터키의 지역공동체와 협업했고, 거주민들과의 대화를 촉발하기 위한 미용과 터퍼웨어 파티들, 사람들이 그 위에다 쓰고 그릴 수 있는 긴 롤 페이퍼를 설치하는 등의 일에 의해 진행된 투어를 안내했다. 린드는 이러한 시도를, 카셀에서 주로 터키 커뮤니티와 벌인 허쉬혼의 가장 유명한 협업인 <바타유 기념비>(2002)와 비교한다. (이 정교한 프로젝트는 TV 스튜디오와, 바타유에 대한 설치물, 그 반체제적인 초현실주의자에 대한 관심들로 주제화된 도서관을 포함한다.) 린드는, 허쉬혼과 달리 협업자들에게 부여하는 동등한 지위로 인해 오다 프로제시를 더 나은 예술가들이라고 간주한다. “(허쉬혼의)목표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바타유 기념비에 대해, 그는 이미 어떤 계획을 준비했고, 부분적으로는 또한 수행했는데,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며, 그들의 역할은 ‘공동 창작자’가 아니라 ‘집행자’의 역할이었다.” 계속하여 린드는 허쉬혼의 작업이 기념비라는 예술 장르를 비판하는 데에 참여자들을 이용함으로써, “주변화 된 집단을 ‘전시’하고 이국적인 것으로 만들며, 결국 사회적 포르노그라피의 형식과 공모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적절하게 비판받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녀는 오다 프로제시는 “그들의 가까이 이웃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며, 그들이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고 쓴다.

 

토머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 , 2002. 퍼포먼스 전경, 도큐멘타 11, 카셀.
토머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 <바타유 기념비 Bataille Monument>, 2002. 퍼포먼스 전경, 도큐멘타 11, 카셀.

 

여기서 린드의 기준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녀의 평가는 저자의 폐기라는 윤리에 근거하고 있다. 즉 오다 프로제시의 작업은 허쉬혼의 작업보다 나은데, 까닭인즉 그것이 우월한 협업적 실천의 모델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프로젝트들의 개념의 밀도와 예술적 의미는 예술가들이 협업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평가에 기대어 제한된다. 허쉬혼의 (이른바)착취적 관계는 오다 프로제시의 차별 없는 관대함과 부정적으로 비교되는 것이다. 달리말해, 린드는 예술로서의 오다 프로제시의 작업에서 흥미로울 수 있는 것-대화를 하나의 매체로 만든 가능한 성취, 프로젝트를 사회적 과정 속으로 탈 물질화 시키는 것의 의미 등-을 경시한다. 대신 그녀의 비판은 작업 과정과 지향성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의해 지배된다.

 

슈퍼플렉스, 에릭슨, 반 히스윅, 오르타, 그 외 사회적 개량의 전통에서 작업하는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비슷한 예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윤리적 충동은 “실제” 사람들(즉, 예술가의 친구나 다른 예술가들이 아닌 이들)과 협업하는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저술들의 대부분에서 도움을 구한다. 생태학적,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적 관점에서 장소특정적 예술을 논하는 『지역의 매혹: 다중심적 사회에서의 공간 감각』(2007)의 결론에서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루시 R. 리퍼드는 공동체들과 작업하는 예술가들에 대해 8가지의 “공간 윤리”를 제안한다. 케스터의 『대화 작품들』은 그러한 실천들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명쾌하게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이 교육적 혹은 창조적 숙달자의 위치를 점유하지 않는 구체적인 개입적 예술을 옹호한다. 『정당한 태도: 마주침의 예술을 판단하기』(2005)에서 네덜란드의 비평가 에릭 하구트는 우리가 이러한 예술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길 회피해선 안 되며, 외려 예술가들의 좋은 의도들의 표현과 재현을 신중히 평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각각의 사례들에서, 저자의 지향성(혹은 그것의 사소한 결여)은 사회적이고 미적인 형식으로서 작업의 개념적 의미에 대한 논의 이상으로 특권을 누린다. 역설적으로, 이는 콜렉티브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예술가들 또한 자신들의 저자성을 폐기하는 것으로 찬사를 받는 어떤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어느 정도는, 사회적 참여 예술이 예술 비평으로부터 주로 예외가 되어왔던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강조점은 주어진 작업의 분열적인 특수성에서 일련의 일반화된 도덕적 교훈으로 변동되었다.

 

『대화 작품들』에서 케스터는 협의적이고 “대화적인” 예술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전환 – (개인적 경험들인)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논변적인 상호교환과 협상”으로 – 을 요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미적 형식으로서 다루기를 요청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는 이것을 방어하는데 실패하며, 비록 예술의 수준에서 실패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사회적 개입의 수준에서 작동한다면 사회적 협업 예술 프로젝트가 어떤 성공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일로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적인 것에 대한 전념의 부재 속에서, 케스터의 위치는 결국 정체성 정치에 의해 시작된 지적 유행의 익숙한 결론이 되어버린다. 즉 타자에 대한 존중, 차이에 관한 인식, 기본적 자유의 보호, 정치적 올바름의 굳건한 관행 말이다. 그 자체로, 그것은 또한 관객을 불쾌하게 하거나 난처하게 할지 모르는 어떤 예술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는데, 이는 가장 명백하게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향한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스터는 그 아방가르드 계열 내부에서 사회적 참여를 급진적 실천으로 위치 짓고 싶어 한다. 그는, 예술가들이 특권화 된 통찰의 전달자라고 간주하기에 관객을 “충격”에 빠뜨려 그들이 세계에 대해 더 예민하고 수용적으로 되길 추구한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비판한다. 나는 -부조리, 비정상성, 의심, 혹은 순전한 기쁨과 더불어- 그러한 불편함과 혼란이, 반대로 어떤 작품의 미학적 효과에서 중요하며, 우리의 조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이라 주장하려 한다. 사회적 협업 예술의 가장 훌륭한 사례들은 이러한-그리고 다른 많은- 효과들을 야기하는데, 이는 유령적인 사회적 결속의 회복, 혹은 “참되고” 정중한 협업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저자성의 희생과 같은, 더 식별하기 좋은 의도들을 따라 독해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 중 몇몇은 잘 알려져 있다. 허쉬혼의 <불안정한 알비네의 미술관>과 <푸코 24시>(2004), 알렉산드라 미어의 <실업자를 위한 시네마>(1998), 알리스의 <신념이 산을 움직일 때>(2002)가 그들인데, 이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예술이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배열되는 활동가의 계보에 두기보다, 아방가르드 씨어터, 퍼포먼스, 혹은 건축 이론에 더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아마도 그들은 양자를 윤리적인 것 속에서 합하기보다는 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을 함께 사고하려 한다.

 

필 콜린스(Phil Collins), , 2004. 투 채널 디지털 비디오의 스틸컷, 7시간.
필 콜린스(Phil Collins), <그들은 말을 쏘았다 They shoot horses>, 2004. 투 채널 디지털 비디오의 스틸컷, 7시간.

 

예를 들어, 영국 예술가 필 콜린스(Phil Collins)는 이 두 항을 자신의 작업에서 풍부하게 종합시킨다. 예루살렘의 한 레지던시에서 작업에 착수하도록 초대되었을 때, 그는 라말라의 십대를 위한 디스코 댄싱 마라톤을 열기로 했고, 그는 이를 기록하여 투 채널 비디오로 설치한 <그들은 말을 쏘았다>(2004)를 만들었다(이 작업은 시드니 폴락 감독이 1969년 발표한 동명의 영화로부터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이 영화는 불황의 시대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댄스 마라톤 무대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내용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역주). 콜린스는 두 번 이어지는 날에, 화려하게 장식한 분홍 벽 앞에서 과거 40년 전부터 이어지는 혹독하게 싸구려인 팝 히트곡 모음을 틀고 아홉명의 십대들에게 돈을 주어 여덟 시간 동안 계속 춤을 추도록 했다. 열광적인 파티에서 지루함으로, 결국 고갈상태로 넘어갈 때, 그 십대들은 매혹적이고 매력적이다. 그 사운드 트랙의 황홀한 사랑과 거절에 대한 진부한 가사는, 마라톤과 그들이 처해있는 지루하게 긴 정치적 위기에 대한 그 아이들의 이중의 인내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가 예술가들이 응답하도록 초대된 “장소”에 대한 어떤 비뚤어진 재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점령된 영토는 결코 명확히 보이지 않으며, 하나의 프레임으로서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 외부(hors cadre)의 사용은 정치적 목적을 갖는다. 요컨대 참가자들을 일반적인 세계화된 십대들로서 제시하려는 콜린스의 결정은, 공공에서 누군가 비디오를 봤을 때 우연히 들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우리가 숙고할 때 명확해진다. 말하자면,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비욘세를 알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은 나이키를 입게 되었는가? 작업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네러티브를 제거함으로써, 콜린스는 어떻게 이 공간이 미디어의 선정적인 제작과 중동에서 온 이미지들의 유포에 의해 생성된 판타지들로 즉시 채워지는지 설명한다(전형적인 서구의 관객들은 젊은 아랍인들을 피해자나 중세의 근본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을 비난하는 체 할 것이기 때문에). 서구의 십대들에게 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십대들에게도 친숙한 팝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콜린스는 또한 대부분의 행동 지향적인 정치적 예술과는 상당히 미묘하게 구별되는 세계화에 대한 주석을 제공한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호의적인 사회적 협업의 실천의 관습(그것은 그 참여자들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사회적 결속을 강화한다)에 면박을 주고, 그들을 리얼리티 TV의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관습과 결합시킨다. 8시간의 노동시간을 꽉 채워 지속되는 투 스크린 설치를 통한 작업의 제시는 한편으로 그 뚜렷한 유혹의 사용을 통해, 다른 한편으론 기진맥진하게 하는 지속시간을 통해 양자의 장르를 파멸시킨다.

 

왼쪽: 아르투르 지미예프스키(Artur Zmijewski), , 2003. 컬러 비디오 스틸컷, 16분 30초. 오른쪽: 아르투르 지미예프스키(Artur Zmijewski), , 2001, 컬러 비디오 스틸컷, 14분.
좌: 아르투르 지미예프스키(Artur Zmijewski), <노래 수업 2 Singing Lesson 2>, 2003. 컬러 비디오 스틸컷, 16분 30초.
우: 아르투르 지미예프스키, <노래 수업 1 Singing Lesson 1>, 2001, 컬러 비디오 스틸컷, 14분.

 

폴란드 예술가 아르투르 지미예프스키(Artur Zmijewski)의 작업은 콜린스의 작업처럼, 종종 힘겨운 -때론 심한 고통을 주는- 상황을 고안하고 기록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그의 비디오 작품 <노래 수업 1>(2001)에선, 청각장애가 있는 일군의 학생들이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얀 막클라키에비치(Jan Maklakiewicz)의 1944년 폴란드 미사버전에 맞춰 자비송(Kyrie)을 부르는 것이 촬영되었다. 그 오프닝 장면은 놀랄만큼 가혹한데, 교회 실내의 이미지 즉 모든 우아한 신고전주의풍 대칭성은 어린 소녀의 뒤틀린 불협화음의 목소리에 의해 상쇄되는 것이다. 그녀는 동료 학생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은 그녀의 고투를 들을 수 없기에 서로 수화로 이야기한다. 지미예프스키의 편집은 완벽에 대한 종교적 패러다임이 계속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아이디어를 특징 짓는다는 점을 시사하면서, 그 성가대와 그들의 환경 사이의 대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유발한다. <노래 수업>의 두 번째 버전은 2002년 라이프치히에서 촬영되었다. 이번에 청각장애학생들은 전문 성가대원과 함께, 세인트 토마스 교회에서 바로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바흐의 칸타타를 부르는데, 이 교회는 바흐가 한때 지휘자로서 있었던 곳이자 그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독일버전은 그 시도의 보다 쾌활한 측면을 드러내도록 편집되었다. 어떤 학생들은 시연의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웃으며 그렇게 하길 포기한다. 리허설에서 그들의 수화 동작들은 지휘자의 동작에 의해 되풀이된다. 즉 지미예프스키의 시도에 의해 만들어진 두 유형의 음악-오케스트라의 조화와 그 합창단의 경직된 울부짖음-과 일치하도록 수행되는 두 시각 언어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편집은 수화를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과 결부되어, 그 영상의 요점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타인의 감정적이고 사회적인 경험들에 대해 오직 제한된 접근만 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이러한 지식의 불투명성은 그러한 가정들에 기반한 어떤 분석도 방해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것을 독해하도록 초대받는데, 그것은 지휘자, 가수, 청각장애 성가대로 이루어진, 뜻대로 되지 않는 모임이며, 이들은 개인적 창조성의 방출보다 더 복잡하고, 문제적이며, 다층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왼쪽: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 , 2004. 퍼포먼스 전경, 마니페스타 5, 산세바스티안. 오른쪽: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 , 2001. 퍼포먼스 전경, 요크셔, 영국.
좌: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 <사회적 퍼레이드 Social Parade>, 2004. 퍼포먼스 전경, 마니페스타 5, 산세바스티안.
우: 제레미 델러, <오그리브 전투 The Battle of Orgreave>, 2001. 퍼포먼스 전경, 요크셔, 영국.

 

콜린스와 지미예프스키 양자 모두 갤러리에서 소비될 비디오를 생산했다고, 마치 그 공간 외부는 자동적으로 진실해진다는 듯 항의할 수 있지만, 이는 『한 장소 다음에 또 한 장소』에서 권미원에 의해 명백히 해명된 논리이다. 커뮤니티를 “무효로 만드는(unwork)” 그녀의 예술에 대한 변호는 영국 작가 제러미 델러(Jeremy Deller)의 작업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것이다. 2001년에 그는 1984년 영국의 광부 파업 중 주요한 사건들에 대한 재연을 조직했는데, 요크셔 오그리브의 마을에서 일어난 광부들과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오그리브 전투>는 이 대결의 하루를 재상연한 것으로, 이는 여러 역사 재현 행사장들과 더불어 이전에 광부였던 이들과 경찰이었던 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비록 그 작업은 비뚤어진 치료적인 요소(그 투쟁에 연루된 광부와 경찰 양자 모두 참여하고, 그들 중 일부는 서로의 역할을 바꾼다)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다시 여는 것만큼 상처를 치료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델러의 이벤트는 정치적으로 읽기 쉽기도 하고 완전히 무의미하기도 하다. 즉 그것은 정치적 시위의 경험적 효과들을 불러내지만 단지 잘못된 17년 전을 너무 늦게 폭로할 뿐이다. 작업은 그 사람들을 모아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반복하게 하지만, 이 기억은 브라스 밴드와 노점, 주변을 뛰어다니는 어린이들과 함께 한 마을장에 더 가까운 상황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대비는 <오그리브 전투>에 대한 기록영상에서 특히 명백한데, 이는 작업을 대처 정부에 대한 고발의 수단으로 삼는 좌파 영화제작자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에 의해 촬영된 한 시간 분량의 영화의 부분을 형성한다. 델러의 이벤트 영상은 전직 광부들의 감동적인 인터뷰들 사이에서 표시되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전투는 혼란스럽다. <오그리브 전투>는 정치적 분노를 상연하지만, 그것을 다른 어조로 풀어내는데, 이는 델러의 행위가 폭력적인 만남이기도하고 폭력적인 만남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함에 대한 역사 재현 행사장의 개입은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들의 참여는, 혈투가 사회적이고 미적인 오락으로서 열렬히 복제된 이 유별난 레져 활동에 관심을 끌면서, 오그리브에서 벌어진 상대적으로 최근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영국 역사의 위상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벤트 전체는 재현과 실재를 붕괴시키는 동시대적 역사 회화로서 이해될 수 있다.

 

덜 열정적인 상징 수준에서 작동하는, 카르스텐 휠러(Carsten Höller)의 프로젝트 <보두앵 실험: 의도적인, 비-숙명적인, 대규모의 어떤 집단 편차 실험>(2001)은 그에 비해 현저히 중립적이다. 그 이벤트는 출발점으로 벨기에의 왕 (故)보두앵이 자신이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던 낙태법을 승인하기 위해 하루 동안 퇴위했던 1991년의 한 사건을 설정한다. 휠러는 백 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모이게 하여 브뤼셀에 있는 아토미움(Atomium)의 실버 볼 중 하나에 24시간 동안 앉아있게 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하루 동안 포기하게 했다. 여기서 기본적인 것(가구, 음식, 화장실)은 제공되지만, 외부 세계와 연락할 수단은 없다. 비록 그것은 <빅 브라더>와 같은 리얼리티 쇼와 비슷하지만, 사회적 행위는 기록되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문서화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불명확함”의 범주에 대한 휠러의 지속적인 관심의 연장에 있으며, <보두앵 실험>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한 지금까지의 그의 가장 압축된 관심을 구성한다. 그러한 익명의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물 없이, 우리는 그 작품이 실로 존재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휠러의 이벤트의 모호함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토론, 신뢰에 대한 정치적 권한부여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사회 참여예술에 대한 기록물을 볼 때 우리가 느낄지 모를 불확실성과 비슷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두앵 실험>은 완전한 무위, 혹은 “수동적 행동주의”에 대한 이벤트로서, 즉 일상의 생산성에 대한 거부이면서, 또한 어느 정도 감지된 사회적 결여에 대한 보완적 측면에서 예술을 도구화하는 것에 관한 거부이기도 했다.

 

델러, 콜린스, 지미예프스키, 그리고 휠러는 “올바른” 윤리적 선택을 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 희생이라는 기독교적 이상을 수용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무기력한 죄책감의 제한 없이 자신들의 욕망에 맞춰 행위 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을 세심하게 계산된 책략과 뒤섞으려하는 고도로 고안된 입장의 전통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파리의 대중을 포섭하려 했던 일련의 징후였던, 1921년 봄의 “다다의 시기”와 함께 기술되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앙드레 브르통, 트리스탄 차라, 루이 아라공 등등의 인물에 의해 주최된)세인트 줄리엔 르 파우브레 교회로의 “유람”인데, 여기선 폭우에도 불구하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혹독한 날씨로 인해 그 투어는 짧게 끝났고 “추상화 경매”는 실현되지 않았다. 위에 주어진 사례들에서처럼 이 다다 유람에서는, 상호주체적 관계는 그들 자신에 대해 하나의 종결이 아니라, 외려 쾌락, 가시성, 앙가주망, 사회적 상호작용의 관습들에 관한 더 복잡한 난제를 열어젖히도록 기능한다.

 

현재 사회참여 예술의 담론적 기준은 반자본주의와 기독교적인 “선한 영혼”사이의 암묵적인 유비로부터 도출되었다. 이러한 도식에서, 자기희생은 승리를 거둔다. 즉 예술가는 참여자들이 그 또는 그녀를 통해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자의 존재를 포기해야 한다. 이 자기 희생은 예술은 스스로를 미적인 것의 “무용한” 영역으로부터 뽑아내야하며, 사회적 실천과 융합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의해 수반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관측했듯, 미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모욕은 우리가 서구에서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예술의 체계-프리드리히 실러와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개시되었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작동하는 “예술의 미학적 체제”-가 정확히 예술의 자율성(도구적 합리성으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있는 그것의 상태)과 타율성(예술과 삶의 윤곽을 흐리게 하는 것) 사이의 혼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 매듭을 푸는 것-혹은 예술에서 더 구체적인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것인데,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적인 것은 모순을 사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즉 정확히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신뢰와, 더 나은 세상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밀접하게 결속된 것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믿음 사이의 긴장에 의해 특징 지어진, 사회적 변화에 대한 예술의 관계가 지닌 생산적인 모순 말이다. 랑시에르에게 미적인 것은, 이미 내재적으로 이러한 개선적인 약속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적 변화의 제단에서 희생될 필요가 없다.

 

예술가/활동가의 위치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의 영향은 2003년 라스 폰 트리에의 도발이었던 <도그빌>에서의 그레이스라는 캐릭터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지역 공동체에 봉사하겠다는 그녀의 욕망은 그녀의 죄스러운 특권적 지위와 분리할 수 없으며, 그녀의 모범적인 행위는 오직 더 큰 악으로만 근절시킬 수 있는 사악함을 유발한다. 폰 트리에의 영화는 도덕을 직접 제시하지 않지만, 어떤 귀류법을 통해- 자기희생적 입장의 한 끔찍한 결과를 확실히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행동 지향적 실천에 관한 의구심을 표현하기에 <도그빌>은 가혹한 근거라 간주할 테지만, 좋은 의도라고 해서 그것이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예술을 면제시키게 둬서는 안 된다. 최고의 예술은 (<도그빌>이 그랬듯) 실러가 미적 경험의 근본으로 간주했던 이율배반의 약속을 수행해 내며, 스스로를 모범적인(그러나 상대적으로 무의미한) 제스쳐에 내주지 않는다. 지난 십년간 최고의 협업 작품들은 자율성과 사회적 개입 간의 이러한 모순적인 알력을 다루며, 작업의 구조와 그 수용의 조건 양측에서의 이 이율배반을 깊게 검토한다. 우리가 오늘날 사회적 협업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설교들에 관한 대안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일견 불편하고, 착취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이러한 기예에 달려 있다. 이들 설교는 더 어둡고, 매우 더 복잡한 곤경에 대한 고찰과 대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의식중에 예술이 그 진실함과 교육적 효용으로 인해 가치를 부여받는 플라톤 체제로 밀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