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음: 비디오와 레디메이드
번역 김영인

백남준, , 1965. 휘트니 미국 미술관, 뉴욕. 디에터 로젠크란츠(Dieter Rosenkranz)의 기금으로 구입.
백남준, <자석 TV Magnet TV>, 1965. 휘트니 미국 미술관, 뉴욕. 디에터 로젠크란츠(Dieter Rosenkranz)의 기금으로 구입.

 

1975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비디오를 제외한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커다란 앞문과 아주 작은 출구를 만들었어요. 그 출구가 비디오입니다. 바로 이 출구를 통해서 마르셀 뒤샹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note title=”1″back] “Marcel Duchamp a tout fait sauf la video. Il a fait une grande porte d’entrée et une toute petite porte de sortie. Cette porte-là, c’est la video. C’est par elle que vous pouvez sortir de Marcel Duchamp.” Irmeline Leeber, “Entretien avec Nam June Paik,” Chroniques de l’art vivant 55 (February 1975), p. 33.[/note] 만약 백남준의 주장처럼, 상업적 텔레비전과 비디오 아트[note title=”2″back] 나는 나의 저서 『피드백: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텔레비전 Feedback: Television Against Democracy(Cambridge, Mass: MIT Press, 2007)에서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 실천 사이의 그러한 연속성을 규명하고자 시도했다. 이 에세이는 그 책에서 내세웠던 주장으로부터 도출되었다.[/note]를 포괄하는 시스템을 지닌 비디오가 레디메이드(readymade) [note title=”3″back] 이 글에서 레디메이드는기존의 목적 및 용례 외에, 예술 작품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사물 혹은 이를 위한 예술 실천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고유 명사 레디메이드로 표기하였다.(역자 주)[/note]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탈출구를 제공한다면, 이는 뒤샹이 산업 제품과 새로운 담론의 체계 사이에서 고안했던 유명한 ‘만남(Randevous)’을 무효화 하기보다는 오히려 재연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상업적인 텔레비전은 광고에서의 노골적인 판매 권유 속에서, 혹은 텔레비전 장르의 픽션과 논픽션 모두를 움직이는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홍보를 통해 사물(상품)을 서사화하여 재코드화(recoding)하는 데 전념하는 거대한 산업이다. 혹자는 TV가 뒤샹이 레디메이드에서 수행했던 일종의 재맥락화로부터 이윤을 얻는 방식을 개발해냈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그러한 상업적 여파야 말로 그가 사물 간에 명백히 생물적 형태를 띤(biomorphic) 성적(erotic) 조우로 주안점을 옮기게 한 요인이었을 수 있다.[note title=”4″back] 이것이 헬렌 몰스워스(Helen Molesworth)의 전시《부분적으로 사물이며 부분적으로 조각인 Part Object Part Sculpture》의 견해이며, 본 에세이는 이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해당 도록에 실린 에세이에서 나는 뒤샹이 레디메이드로부터 조형의 더욱 성적인 과정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 논했다. David Joselit, “Molds and Swarms,” in Part Object Part Sculpture, ed. Helen Molesworth (Columbus, Ohio: Wexner Center for the Arts, Ohio State University Press; University Park, Penn.: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5), pp. 156–65.[/note]

 

백남준은 상업 TV의 도구화된 담론을 (그가춤추는 패턴이라고 부르는) 통제하기 힘든(unruly) 형태로 해방시킴으로써, 레디메이드에 대한 텔레비전의 도전을 다르게 다뤘다. 1984년의 성명에서 그는 미디어 아트가 레디메이드의 ‘출구’이자 적법한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계보학을 제시했다.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John Cage) 이후에는 갈 수 있는 길이 많이 없었습니다. 재스퍼 존스(Jasper Johns)는 천재였지요. 모두가 레디메이드 사물을 가지고 콜라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존스는 레디메이드의 그림을 손으로 그리며 자기 자신 또한 주입했어요. 그는 약간의 변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밸런타인(Ballantine) 맥주 캔은 주조된 것으로, 실제 밸런타인 맥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 캔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 당시의 ‘손댈 수 없었던(impossible)’ 뒤샹의 레디메이드 숭배(cult)로부터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이었어요. 제 경우에, 현실에 처했을 때, 두뇌를 사용해 더 깊이 파고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현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자와 양성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어요. 아예 전자와 양성자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타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레디메이드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질 수 있게 되니까요. 영적인 현실과 과학적인 현실을요.”[note title=”5″back] Nancy Miller, “An Interview with Nam June Paik,” in The Color of Time: Video Sculpture by Nam June Paik (Waltham, Mass.: Rose Art Museum, 1984), n.p.[/note]

 

이 주장에 따르면, 백남준이 스스로 정한 미학적 논제는 형식주의(academicism)나 그가 ‘손댈 수 없는 뒤샹 숭배’라고 불렀던 것에 빠지지 않으면서 레디메이드의 전통과 관계 맺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두 가지 선택지를 밝혀냈다. 이는 레디메이드를 ‘그리는’ 재스퍼 존스의 기술과, 모든 물질적인 것의 보이지 않고 ‘초-사물적인(trans-objective)’ 구성요소인 입자 – 전자와 양성자 – 를 가지고 작업하는 백남준 자신의 실천이다. 이 각각의 접근방식은 레디메이드의 중요성이 발견된 사물(found object)[note title=”6″back] 이 글에서는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을 지닌 기성 물품이지만예술작품으로서 발견되어 지위를 획득한 사물이라는 미술사적 용례를 전달하고자발견된 사물로 표기하였다. (역자 주)[/note]의 회화성(pictorialism), 즉, ‘레디메이드 사물을 사용하여 콜라주를 만드는 것’과는 전혀 무관함을 예증한다. 백남준은 뒤샹의 발명이 지닌 급진성이 대량 생산된 사물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데 있다기보다는 사물로서의 지위와 기호로서의 지위 사이의 영속적인 진동 속에 갇혀 있는 모순적인 사물을 제작하는 데 있음을 이해했다. 나는 백남준의 다음 세 가지 국면에서 기인한 나 자신의 20세기 레디메이드의 계보학을 제안하고자 한다. 1) 기호로서의 사물과 물질로서의 사물의 차이에 대한 뒤샹의 근본적인 증명을 통해 예증된 사물로서의 레디메이드. 2) 특정한 조건이나 발언 속에서 사물이 갖는 구문론적인(syntactic) 조건에 대한 존스의 탐구에서 보이는 행위로서의 레디메이드. 3) 정보의 코드들로 구성된 레디메이드 속으로 정보와 물질이 함께 뭉쳐 들어간 것(collapse)을 통해 백남준이 증명한 네트워크로서의 레디메이드.[note title=”7″back] 이 세 용어는  20세기 레디메이드의 모든 국면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분명히 공존한다. 백남준과 같이, 나는 논의의 목적으로 이들을 뚜렷이 구분하였다.[/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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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부러진 팔에 앞서 In Advance of a Broken Arm>, 1945 (망실된 1915년 원작의 복제품). 예일 대학교 미술 갤러리, 캐서린 S. 드레이어(Katherine S. Dreier)가 소시에테 에노님(Société anonyme)의 소장품으로 기증. ©2007 미술가 권리 협회 (ARS), 뉴욕/글로벌 저작권자 보호협회(ADAGP), 파리/ 마르셀 뒤샹 상속.

 

1. 사물로서의 레디메이드.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사물에 새로운 명문(inscription)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의 유전자(DNA)를 뒤섞어 놓았다. 그가 <커다란 유리 Large Glass>를 위해 적은 메모에 쓰여 있듯이.

 

‘레디메이드’를 위한 설명서.

 

(어느 날, 어떤 날짜, 어떤 찰나에) 다가올 순간을 계획함으로써, ‘레디메이드를 명문화하는 것’ – 레디메이드는 후에 탐색 될 수 있다. – (모든 종류의 지연과 함께)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이밍의 문제, 이러한 스냅사진 효과이다. 어느 경우라도 상관없으나 특정 시간에(such and such an hour) 행해지는 연설과 같은. 그것은 일종의 만남(rendezvous)이다.[note title=”8″back] Michel Sanouillet and Elmer Peterson, eds., Salt Seller: The Writings of Marcel Ducham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3), p. 32.[/note]

 

예를 들어, 뒤샹의 <샘 Fountain>(1917)에서 소변기를 여느 소변기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 레디메이드에 물리적으로 부착된 실제 텍스트로서 표현되든지 혹은  제목으로서 가상으로 투사되든지 간에 – 명문이다. 그리고 사물과 명문 사이의 이 미끄러짐(slippage)은 상품과 정보 네트워크 간의 미래의 관계를 예술과 텔레비전 모두에서 이론적으로 확립한다. 백남준은 상품과 네트워크간의 상호교차(chiasmus)로서의 텔레비전이, 1920년대 뒤샹이 이미 미학적으로 증명한 사물과 그 텍스트로 구성된 틀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활용한 사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했다.

 

재스퍼 존스, , 1962. 볼티모어 미술관. 덱스터 M. 페리, 주니어(Dexter M. Ferry, Jr.) 신탁 회사와 에디트 페리 후퍼(Edith Ferry Hooper)가 제공한 기금으로 구매, BMA 1976.1. © 재스퍼 존스/ 시각예술가저작권협회(VAGA), 뉴욕, NY 인가.
재스퍼 존스, <장치 Device>, 1962. 볼티모어 미술관. 덱스터 M. 페리, 주니어(Dexter M. Ferry, Jr.) 신탁 회사와 에디트 페리 후퍼(Edith Ferry Hooper)가 제공한 기금으로 구매, BMA 1976.1. © 재스퍼 존스/ 시각예술가저작권협회(VAGA), 뉴욕 인가.

 

2. ‘행위로서의 레디메이드’. 뒤샹이 기의로부터 기표를 자유롭게 했다면, 존스는 사물의 구문론적 조건을 탐구했다. 이 조건 하에 감상자는 사물의 문법적인 어형 변화(declension)를 경험한다. 예를 들어, <장치>(1961-62)라고 명명된 두 개의 그림에서 자(rulers)는 회화의 테두리에 부착되어 있으며 표현주의적인 붓질이 된 바탕에 흐릿한 반원들을 남기기 위한 컴버스로서 조작된다. 여기서 레디메이드는 동시에 그림, 사물, 회화적인 흔적, 그리고 ‘붓’으로서 기능한다. 1967년 즈음에 적힌 스케치북 메모에서, 존스는 그러한 물체의 어형 변화가 그에게 언어와의 유사성을 띠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언어학적으로 아마도 동사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회화에서 그런 경우는 어떠한가?”[note title=”9″back] 스케치북 수록본, “Book B, c. 1967,” in Jasper Johns: Writings, Sketchbook Notes, Interviews, ed. Kirk Varnedoe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96), p. 61.[/note] (일종의 ‘명사’로 자연스럽게 가정되는) 사물을 동사로 만드는 일은 행위의 장(field)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존스가 회화적 전통 속에서 레디메이드를 통사적으로 조작한 것이 네오 아방가르드적(neo-avant-garde) 퇴보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는 레디메이드가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 초기 충격의 가치가 금새 시들 것이라는 역사적으로 기민한 인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뒤샹 그 자신도 레디메이드가 회귀(recuperation)에 영향을 받기 쉽다는 것을 이해했다. 레디메이드의 초기 표현(presentations)에 수반되었던 사물과 개념 사이의 불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결과물을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그리고 후에는 <샘>처럼 그중 일부를 재치 있게 재연(restaging)하고 재공표(reissuing)함으로써, 즉 사물을 동사로 만듦으로써, 그것의 중립화를 예견하고 앞지르는 데 주력했다.[note title=”10″back] 뒤샹이 <>을 연속적으로 ‘재공표한’ 탁월한 내력은 William A. Camfield, Marcel Duchamp, Fountain (Houston: Houston Fine Arts Press, 1989)를 참조하라. 나는 레디메이드의 이러한 측면을 에세이 “Dada’s Diagrams,” in The Dada Seminars, ed. Leah Dickerman (Washington, D.C.: National Gallery of Art, 2005), pp. 221–39에서 논했다.[/note]

 

존스의 혁신은 캔버스의 통합된 평면 위에서 사물의 다양한 역할을 편성하는 데 있다. 그는 언어라는 추상적인 기호에 용법(use) – 혹은 행위 – 의 특수성을 도입했다. 사물은 특정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기능 혹은 반복을 추구하면서 기호를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존스가 1960년 경 스케치북에 기록했을 때 도달했던 지점이다.

 

집중하라 

혹자의 쳐다봄을 포함하라

   〃     ‘바라봄’을     〃

  〃       사용함을     〃

그것 & 그것의 용법 &

그것의 행위.

그대로, 그랬던 대로, 그렇게 되는 대로.

(각각은 단일한 시제로서, 모두는 하나로서)[note title=”11″back] Varnedoe, Jasper Johns, p. 49.[/note]

 

여기서 또 다시, 언어학적인 용어가 이 화가의 전략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글에서 그는 물체(그리고 인식)들을 결합하는 방법을 상상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각각은 단일한 시제로서, 모두는 하나로서 [기능한다].” <장치>에서 자 그 자체는 현재 시제로 간주될 수 있는 데 반해 그것이 캔버스 위에 만들어낸 흔적은 과거에 있듯이, 동사의 시간적 문법(temporal moods)이 공존한다. 실제로, 백남준이 예리하게 관찰한 것처럼 존스는 “그의 레디메이드 그림을 손으로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행위(동사)와, 그가 선택한 모티프에 있어서 일종의 시제 둘 다를 도입했다. <과녁과 석고 주조물 Target with Plaster Casts>(1955) 혹은 <회색 알파벳 Gray Alphabets>(1956) 등에서 보이는 주형과 스텐실에 대한 그의 애호는 회화적 흔적이 레디메이드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강조한다. 주형에 밀어 넣어진 신체 기관(organ)의 윤곽선은 ‘흔적’으로서 기능하는 반면 스텐실은 글자와 숫자로 구성된 회화에서 붓질의 질서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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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재스퍼 존스, <과녁과 석고 주조물>, 1955. 데이비드 게펜(David Geffen) 소장품.
우: 재스퍼 존스, <회색 알파벳>, 1956. 하버드대학교미술관 포그미술관, 장 크리스토프 카스텔리(Jean-Christophe Castelli)로부터 대여.

 

3. ‘네트워크로서의 레디메이드’. 백남준은 존스의 천재성을 “레디메이드의 그림을 손으로 그리며 자기 자신 또한 주입하는” 전략과 결부시켰다. 예를 들어, 실로 그의 ‘손’을 통해야 자가 캔버스를 만나고, 거푸집이 신체 기관을 만나고, 스텐실은 붓질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손’은 손짓이 무의식적 욕동(drive)을 위해서 쓰이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같은 작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감정 보증인(guarantor)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은 매우 코드화된 행동을 위한 신체적 에이전트로 활용된다. 존스의 초-사물성이 여전히 신체의 운동성을 필요로 하는 반면, 백남준은 사물성의 다른 사용역(register)[note title=”12″back] 연령이나 지역 혹은 문체 등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의 변이형.(역자 주)[/note]를 포착한다. 레디메이드에 대한 그의 실천은 – 주관적인 것에 반하는 것으로서 – 하위-객관적인(sub-objective) 단위들로 구성되었다.

 

“제 경우에, 현실에 처했을 때, 두뇌를 사용해 더 깊이 파고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현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자와 양성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어요. 아예 전자와 양성자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타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레디메이드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질 수 있게 되니까요. 영적인 현실과 과학적인 현실을요.”

 

백남준은 자신이 ‘춤추는 패턴’이라고 불렀던, TV 수신기 신호의 해방에 따른 반-중력적(anti-gravitational) 선회 속에 있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전자와 양성자를 직접” 조작했다. 작가는 그 춤추는 패턴의 연대를 뉴욕 보니노 갤러리(Galeria Bonino)에서 열린 그의 1968년 전시 《전자 예술 2 Electronic Art II》로 삼았다.

 

“저는 세 개의 오디오 신호를 내부 조정하여 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오디오 신호를 수상기(set)에 입력했고, 그것들은 다양한 패턴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컬러 수상기에서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 기술의 두 가지 도약은 흑백 수상기에 자석을 두었던 것과 춤추는 컬러 패턴입니다.”[note title=”13″back] Douglas Davis, “Nam June Paik: The Cathode-Ray Canvas,” in Art and the Future: A History/ Prophecy of the Collaboration between Science, Technology, and Art (New York: Prager, 1973), p. 150.[/note]

 

백남준의 ‘기술적인 도약’은 방송용 TV의 상업적인 언어를 변형시킴으로써, 뒤샹이 레디메이드로 이미 시도했던 상품과 네트워크 사이의 음운 탈락(elision)을 완수했다. 춤추는 패턴에서는 네트워크 상품(방송용 TV)이다. 각각을 구성하는 ‘전자와 양성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따라서 그 둘 사이의 전환은 전적으로 그들의 재배열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백남준의 ‘전자 회화’는 기생적이고 침투적이다. 작가의 ‘흔적’은 그의 손짓이라는 단일한 지표로 작용하는 대신, 수신기의 일반적인 작동을 교란시키면서 나타난다. 텔레비전 이미지들은 비월 주사선(interlaced scan-lines)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송되는 이미지는 구성 요소 혹은 픽셀로 세분화되어 전파를 통해 수신기로 전송되고, 빠른 속도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개별 인광체를 활성화시키는 전자총을 통해 재구성된다. 텔레비전 수신기를 개선하는 가운데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이미지 생산-생태계(ecology of image production)를 다시 밝혀냈다. 그의 ‘매체(medium)’는 주사(scanning)의 패턴 그 자체가 되었다. 그가 1967년 쓴 글에서 단언 했듯이, “나의 전자 예술이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 . . 일반적이지 않은 주사 패턴을 창조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 때문이다.”[note title=”14″back] Nam June Paik, “Experiments with Electronic Pictures,” Fylkingen International Bulletin 2 (1967), pp. 38-39.[/note]

 

백남준은 비디오가 레디메이드의 소진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도발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작업은 뒤샹의 첫번째 레디메이드가 반대했을 상품과 명문사이의 구분이 형성한 개념적 토대를 제거함으로써, 그 전통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비중력 운동(nongravity movement)’으로 구성된 백남준의 ‘춤추는 패턴’은 말 그대로 토대가 없다(groundless).[note title=”15″back] David Ross, “A Conversation with Nam June Paik,” in 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 ed. Toni Stooss and Thomas Kellein (New York: Harry N. Abrams, 1993), p. 58.[/note] 그러나 백남준은 정보 코드의 신체화된 성격 또한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몇몇 기이한 제안서에서 백남준은 에로티시즘을 그러한 차이를 무너뜨리는 수단으로 상정했다. 1965년에 빌리 클뤼버(Billy Klüver)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젠가 컬러 TV의 더 정교한 주사 시스템과 행렬 회로(matrix circuit)와 같은 무언가, 그리고 직각 변조 방식(rectangular modulations system)이 우리로 하여금 단일한 반송파 대역(carrier band)[note title=”16″back]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에서 낮은 주파수의 신호를 보낼 때, 이를 실어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높은 주파수의 파동 단위.(역자 주)[/note]에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보낼 수 있게끔 만들 겁니다. 예를 들어, 오디오, 비디오, 몸의 맥박, 온도, 습도, 압력까지 한 데 결합해서요. 고무로 만들어진 로봇과 결합되고, 수축-팽창 될 수 있는 브라운관의 모습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하나의 작은 로봇’이라면 . . .

 

           원격-성교를 하세요!

 

                   리오(RIO)에서 당신의 연인과 함께”[note title=”17″back] “Nam June Paik with Charlotte Moorman: Videa, Vidiot, Videology,” in New Artist’s Video: A Critical Anthology, ed. Gregory Battcock (New York: E. P. Dutton, 1978), p. 127.[/note]

 

에이즈(AIDS)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백남준은 정보가 몸과 정보 둘 다를 개조할 수 있는 병이라고 이해했다. 작가가 1975년에 천명하였듯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의 몸과 TV 수상기 간의 성교[les rapports]였다. 무어만과 TV 같은 두 미국인이 사랑을 나누고 있으면,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다.”[note title=”18″back] “Ce qui était surtout intéressant c’étaient les rapports entre le corps de Charlotte Moorman et l’appareillage TV. Lorsque deux Américains comme Moorman et la TV font l’amour ensemble, on ne peut pas rater ça.” Leeber, “Entretien avec Nam June Paik,” p. 33.[/note] 여기에서, 기계와 인간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눈다. 자아와 비자아(non-self) 사이의 경계는 더 이상 피부로 구분되지 않고, 살과 주사의 융합된 표면으로 몸 전체에 분포한다.

 

백남준의 작업에서, 몸과 물체는 주사선으로 흡수되어 순전히 추상적인 패턴으로 다시 쓰일(rewritten) 뿐이다.[note title=”19″back] 캐서린 헤일스는 20세기 중반 휴먼에서 포스트휴먼으로의 전환과 정보의 특성이 존재에서 패턴으로 전환된 것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했다“존재/부재에서 멀어져 패턴/무작위성(randomness)으로 향하는 인식론적 전환으로 이해되는 비물질화를 향한 동시대의 폭주(pressure)는 인간과 텍스트의 본체에 (육체적 기질인) 신체의 변화와 (재현의 기호인) 메시지의 변화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영향을 끼친다.” N. Katherine Hayles, How We Became Posthuman: Virtual Bodies in Cybernetics, Literature, and Informatic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p. 29.[/note] 이 지점에서, 뒤샹이 기표와 기의를 떨어뜨려 놓으면서 시작되었고, 존스의 구문론적 어형 변화로 이어진 계보학은 레디메이드의 진정으로 변형된 형태로서 표현된다. 그 가운데, 코드 그 자체는 상업 텔레비전 신호의 모습으로 다시 명문화된다. 전파 간섭(interference)의 예술에서 패턴은 패턴과 조우한다.[note title=”20″back] 둘 이상의 파동이 한 지점에서 만날 때, 합쳐진 파동의 진폭이 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역자 주) [/note] 적어도 백남준에 따르면, 뒤샹의 레디메이드 발명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레디메이드가 상품과 사람들을 모두 침범하고 개조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왜곡하는 것이다. 백남준과 무어만의 협업에서 드러난 객관성과 주관성의 그러한 혼합은 레디메이드와 관련은 있으나 그로부터 구별되는 향후 예술 실천 모델인 아바타의 징후가 된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인격체로서의 아바타는 연속적인 미디어 재현을 통해 생산된 유명인 문화의 인공물이다. 실제 인물(영화 배우, 정치인, 음악가, 혹은 범죄자 등)로부터 유래되었지만, 법적으로 정당성을 보증받는 사람으로부터 독립하여 돌아다닐 수 있는 자격을 지닌 가운데, 유명인사들은 사실상 자율적이며 준-허구적인 개체들, 즉, 일종의 인간 레디메이드로 간주되어야만 한다.[note title=”21″back] 상품화된 사물로서, 이와 같은 아바타는 레디메이드 전통과 연관된다. 그러나 아바타는 보통 발견된 사물과는 달리 생산되므로, 이는 ‘보조 레디메이드’로 분류되어야 한다.[/note] 최근 예술가들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아바타를 개발해왔다. 그중 몇몇은 매튜 바니(Matthew Barney)의 아바타들처럼, 사적인 세계들(private worlds)[note title=”22″back] 예를 들어, Nancy Spector, “Only the Peverse Fantasy Can Still Save Us,” in Matthew Barney: The Cremaster Cycle, ed. Nancy Spector (New York: Solomon R. Guggenheim Museum, 2002), pp. 3–91를 참조하라.[/note]에 거주하는 화려한 욕동의 화신으로 기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베르나데트 코퍼레이션(The Bernadette Corporation)과 같이 (갤러리, 소설, 비디오테이프 등의 제작을 포함하여) 다양한 집단적 활동을 용이하게 하고자 익명의 조직을 설립한다. 베르나데트 코퍼레이션은  ‘비어있는 정체성’으로서 기능한다. 이는 그들의 비디오 <네 자신을 없애라 Get Rid of Yourself>(2003)에 등장하는 반-세계화 시위자들로 구성된 무정부주의 집단과 의식적으로 유사하다. 그리고 이 ‘비어있는 정체성’은 여러 작가가 쓴 소설 『리나 스파울링스 Reena Spaulings』(2004)의 준-초현실주의적(quasisurrealist) 공동 작업같은 다양한 프로젝트, 그리고 여러 갤러리와 미술관의 개입에 적합할 것이다. 아바타를 도구이자 개념으로 도입하는 것의 장점은 레디메이드의 전통과 종종 연관되어있는 (레디메이드의 ‘수동성’ 혹은 단순한 비평으로서의 무효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혹은 주관적인 물체로서) 아바타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연관된 에이전시(agency)에 대한 권리를 부활시킬 지도 모른다. 이는 미디어 문화에 적절한 수단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뒤샹 또한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 라는 아바타를 발명했다. 그녀는 20세기에 걸쳐 샬롯 무어만, 엘리노어 안틴(Eleanor Antin),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그리고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발명품을 포함한 많은 예술적 동류(cognates)를 지녔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적인 영역 속에서, 그리고 그 위에서 작동하는 바로 그러한 허구적인 인물들 속에서 레디메이드로부터의 가장 매력적인 출구를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