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지 않은 우주론
번역 이종현

이고리 마카레비치와 옐레나 옐라기나, , 설치작품, 2010. © Stella Art Foundation
이고리 마카레비치와 옐레나 옐라기나(Игорь Макаревич и Елена Елагина), <알려지지 않은 이성적 힘 Неизвестные разумные силы>, 설치작품, 2010. © Stella Art Foundation

 

최근 여러 해 동안 예술가들은 이론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고 몇몇 거대 예술 프로젝트들의 개념적 틀이 된 러시아 우주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선 지난해 6월 가라지(Гараж, Garage)에서 선보인 《이것이 우주다 Это космос》라는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니콜라이 표도로프에 대한 안톤 비도클레의 필름-콜라주(여기에는 볼로신과 자볼로츠키의 시 텍스트들도 삽입되었다)와 말레비치, 차시니크, 스테를리고프 등 러시아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업을 함께 전시했다. 이와 관련해 가라시의 출판부는 출판사 아드 마르기넴(Ad Marginem)과 함께 보리스 그로이스가 편찬한 선집 『러시아 우주론 Русский космизм』을 출판했다. 이 선집에는 표도로프와 치올콥스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드르 스뱌토고르, 발레리안 무라비요프의 글과 심지어 이들과는 결이 좀 다른 프롤레트쿨트에서 활동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글이 실려 있다.

 

옐레나 옐라기나와 이고리 마카레비치. 《공동의 일》, 테살로니카 비엔날레, 2009. © conceptualism-moscow.org
옐레나 옐라기나와 이고리 마카레비치. 《공동의 일 Общее дело》. 테살로니카 비엔날레. 2009. © conceptualism-moscow.org

 

비도클레의 우주론 비디오프로젝트의 제2부(그의 프로젝트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의 부름을 받았다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революция была вызвана солнцем>는 치젭스키에 대한 필름-리서치로 제 6회 모스크바 비엔날레에서 상영된 바 있다. 또, 지난해 아르세니 질랴예프는 우주론을 주제로 활발하게 작업했는데, <인류의 요람 Колыбель человечества>은 우주에 지점들을 설치해 하나의 그물을 이루는 미래의 박물관들에 대한 프로젝트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설치되었다. 니콜라이 표도로프에게 바쳐진 질랴예프의 프로젝트 《인류의 요람-2》가 모스크바 우주학박물관에 설치되지 못한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는 폴리테크니크 박물관에서 열린 질랴예프의 팝업 전시회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그 전시회와 관련하여 비도클레, 나탈리야 시들리나, 아나스타시야 가체바 등이 참가한 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 시들리나는 지난 9월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전시회 《우주인: 우주 시대의 탄생 Cosmonauts: Birth of the Space Age》의 큐레이터들 중 한 사람이다(이 전시회는 자연과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치올콥스키의 미래주의적 스케치, 차시니크, 쿠드랴쇼프, 콘스탄틴 유온의 작업 또한 포함시켰다). 가체바는 러시아 종교철학과 우주론의 역사 전문가로서 현재 니콜라이 표도로프 도서관-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이 도서관-박물관은 연속 세미나 <공동의 일의 철학. 꼼꼼히 읽기 Философия общего дела. Опыт медленного чтения>, 작가와의 만남 시리즈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Всякий человек носит в себе Музей>를 개최하고 『N.F. 표도로프. 백과사전 Н.Ф. Федоров. Энциклопедия』과 『우주론의 철학. 백과사전 Философия космизма. Энциклопедия』의 출판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학술 행사들을 진행했다. 그밖에 우주론 관련 전시회로는 2015년 2월 국립현대예술센터에서 열린 《비행의 가능성 Возможность полета》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시는 “목가적인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부활시키는 새로운 원칙들”과 새로운 예술을 관람객들에게 소개했다. 매우 다채로웠던 이 전시회는 개념주의자들부터 오늘날의 작가들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의(에리크 불라토프 Эрик Булатов, 그룹 <둥지 Гнездо>, 그룹 <푸른 코 Синие носы> 포함) 2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전시했다. 약간의 억지를 부려보자면 우주론자들의 생각과 연관된 프로젝트들의 대열에 지난 가을 멀티미디어아트 박물관에서 열렸던 파벨 펩페르시테인의 큰 전시회 《과거와 사랑에 빠진 미래 Будущее, влюбленное в прошлое》도 포함시킬 수 있다. 전시회에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정복한다는 주제로 아이러니한 유토피아적 줄거리가 가득한 펩페르시테인의 회화와 선화(線畫)들이 한데 모였고 2009년 설치작품 <미래 정복 Победа над будущим>이 복원되었으며 새로운 회화 프로젝트 《태양의 차가운 중심 Холодный центр Солнца》이 전시되었다. 그밖에도 오래 전에 펩페르시테인과 나타샤 노르트가 함께 작업한 환상적 느와르 <태양의 소리 Звук Солнца>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햇빛은 사실 소리이며 이 소리의 영향이 강력해지자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 아이디어는 치젭스키의 태양 중심 이론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치젭스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은 태양이 활동할 때 나는 소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파벨 펩페르시테인, , 2015. © 파벨 펩페르시테인, 2015. Kewenig Gallery 제공
파벨 펩페르시테인(Павел Пепперштейн), <태양 탐사 Экспедиция на солнце>, 2015.  © 파벨 펩페르시테인, 2015. Kewenig Gallery 제공

 

현대 예술에서 우주론적 정서가 급속히 자본화된 사례들은 꽤 이르게 눈에 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4년 5, 6월에 걸쳐 런던의 에라르타 갤러리에서 진행된 경매 전시회 《러시아 우주론과 러시아의 최신 예술 Русский космизм и актуальное искусство Росси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주론이 이처럼 널리 소개되고 수출된 것은 백 년 전 상상의 지도에서 사라진 듯한 이론적 기획을 복권하려는 열망과 연관된 집단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오히려 세대, 맥락, 형식적 접근, 언어 등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최신 예술이 우주론적 주제를 역설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잊혔던 우주학적 모티프들은 이미 1980년대부터 소비에트 예술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우주라는 이념을 실증적 테두리 안에 가두고 지정학적, 군사학적 조이개 사이로 밀어 넣었던 우주개발 경쟁 프로그램에 대한 염증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일리야 카바코프, , 설치작품, 1986.  ©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일리야 카바코프(Илья Кабаков),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가 버린 사람 Человек, улетевший в космос из своей квартиры>, 설치작품, 1986. ©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86년 일리야 카바코프는 설치작품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가 버린 사람>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우주는 정체되었던 후기소비에트의 출구 없는 상황으로부터 개인적 탈출을 감행하는 인간이 날아갈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1990년대 들어서면 우주적, 우주론적 주제들을 다루는 세르게이 슈토프(Сергей Шутов)의 작업이 눈에 띈다. 그의 프로젝트 《루나. 루나 Луна. Луна》 (1996)는 달과 행성들을 그린 그림들을 다시 아날로그 방식으로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작가의 말에 따르면, 묘사된 이미지들의 ‘우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필름이 사용되었다).

 

세르게이 슈토프, , 1996.  © 세르게이 슈토프
세르게이 슈토프, <루나. 루나>, 1996.  © 세르게이 슈토프

 

이 사진들은 기존 사진들을 통해서만 행성들에 접근할 수 있는 우주의 제한성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 사진들은 대안적 행성계, 무엇보다도 작가 고유의 다른 우주를 보여준다. 슈토프가 좀 더 나중에 제작한 프로젝트 <오늘날의 만물회복설 Аpokatastasis Now>(2006)도 떠올려 볼 수 있는데, 이 프로젝트는 보다 직접적으로 표도로프와 치올콥스키의 유산, 즉 지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급진적으로 변용한다는 생각에 기대고 있다. 이 멀티미디어 설치작품은 다양한 오브제, 선화, 비디오 그리고 심지어 우주에 대한 소비에트 시절 노래들을 부르고 있는 소년 합창단도 포함하고 있다. 전시의 핵심요소인 나무로 만든 로켓들 하나하나에는 푸시킨에서 바실라쵸프에 이르는 러시아 문화의 영웅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세르게이 슈토프, , 2006 . © 세르게이 슈토프
세르게이 슈토프, <오늘날의 만물회복설>, 2006.  © 세르게이 슈토프

 

2004년에는 아트그룹 ‘집단행동(Коллективные действия)’이 부조리한 액션 <토성으로의 비행 Полет на Сатурн>을 기획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적 이야기를 들으며 작가들은 자르지 않은 흑빵을 압정처럼 사용하여 안드레이 모나스티르스키의 책에 나오는 설계도-도표(설계도의 중심에 있는 요소는 어딘가 모르게 토성의 외형을 연상시킨다)를 눈 덮인 언덕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이 흑빵의 겉껍질에는 소비에트 백과사전 인물 항목의 사진들이 붙여져 있다. 

 

집단행동, , 액션, 2004.  © conceptualism.letov.ru
집단행동, <토성으로의 비행>, 액션, 2004.  © conceptualism.letov.ru

 

같은 해 ‘집단행동’이 기획한 액션 <신문 게시판 Стенд-газета>도 우주론, 정확히는 인간을 부활시킨다는 우주론의 중심 아이디어를 참조한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게시판 신문에 붙여진 자료들은 게오르기 마르티노프의 과학-판타지 소설 『심연에서 온 손님 Гость из бездны』의 한 구절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소설은 죽고서 1800년 뒤에 부활한 소비에트 외교관에 대한 이야기다. 

 

집단 행동, 신문 스탠드, 액션, 2004.  © conceptualism.letov.ru
집단 행동, <신문 게시판 Стенд-газета>, 액션, 2004.  © conceptualism.letov.ru

 

2000년대 말에는 ‘집단행동’의 일원이었던 이고리 마카레비치와 옐레나 옐라기나가 파트너를 이루어 러시아 우주론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 우선 2009년의 프로젝트 《공동의 일》을 꼽을 수 있다(프로젝트의 제목은 표도로프의 주요 텍스트들을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모아서 발간한 선집 『공동의 일의 철학 Философия общего дела』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제목은 이후 표도로프의 학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표도로프의 학설은 마카레비치와 옐라기나에게 메타유토피아(<위대한 유토피아 Великая Утопия>), 즉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유물론을 결합한 프로젝트 중의 프로젝트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자유로운 해석에 매우 열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공동의 일》 작업은 몇 가지 설치작품들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설치작품은 <세 면의 계단이 있는 페치카 Печь с тремя лестницами>로 러시아식 페치카가 중심을 이루는 세 면의 계단이다. 두 번째 설치작품인 <하늘의 사다리와 에테르의 섬 Небесная лестница и эфирный остров>은 ‘우주의 영적 양식’을 상징하는 붉은 광대버섯과 이 버섯에 설치된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Памятник III Интернационалу> 모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나선형의 <인터내셔널 Интернационал>이 하늘의 사다리를 가리키고 환각을 일으키는 얼룩덜룩한 버섯은 ‘에테르의 섬’이다). 표도로프에 따르면, 사다리는(그의 언어로 말하자면 ‘레스트비차 лествица’[note title=”1″back] ‘레스트비차’는 고대슬라브어로 ‘사다리’를 뜻한다. 현대 러시아어로 사다리는 ‘레스트니차’이다.(역자 주)[/note]) 인류의 성장과 상승을 상징하며 두 가지 의미의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 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우주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을 결합한다. ‘에테르의 섬’은 우주를 정의하기 위해 치올콥스키가 만든 표현으로 이것은 결코 우주와 우주에 대한 지식이 지니는 덧없고 투명한(‘환각적인’) 성격을 강조하려는 지나친 감상성이나 갈망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니다. 감동스럽기까지 한 이 단어결합은 은유가 아니라 우주론자 치올콥스키의 과학적 직관이 담긴 표현이다. 치올콥스키에 따르면, 에테르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환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우주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그는 에테르적 상태를 태양계 형성과정의 첫 번째 단계로 보았다). 이 프로젝트들 다음으로 마카레비치와 옐라기나는 설치작품 <알려지지 않은 이성적 힘 Неизвестные разумные силы>을 2010-2011년에는 파리에서, 2년 뒤에는 모스크바에서 전시했다. 작품의 슈제트는 치올콥스키의 일기에 나오는 일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1928년 오월의 어느 저녁 그는 하늘에서 세 개의 라틴 알파벳 글자가(r A y) 조합된 환영을 보았는데, 그는 음성적 유사성에 따라 이것을 ‘라이(рай)’[note title=”2″back] 러시아어로 ‘천국’을 뜻한다.(역자 주)[/note]로 해독했다. 전기(電氣)로 표현된 이 세 글자가 설치작품의 핵심요소가 된다.

 

다음으로는 레오니트 티시코프(Леонид Тишков)의 ‘마카로니 우주론’을 살펴보자. 《라도미르. 유토피아의 오브제 Ладомир. Объекты утопий》 (2006)라는 제목의 개인전에서 그는 마카로니로 만든 미래주의적 구조물들을 통해서 우주론에 다가간다.

 

레오니트 티시코프, , 2006.   © 레오니트 티시코프
레오니트 티시코프, 《라도미르. 유토피아의 오브제》, 2006.  © 레오니트 티시코프

 

예를 들면, 우주여행을 위한 마카로니 원통은 치올콥스키에게 바쳐진 것이고, ‘이온 태양’은 마카로니-광선들을 달고 있는 뾰족뾰족한 구(球)로서 동시에 태양과 치젭스키의 유명한 샹들리에를 떠올리게 한다. 

 

레오니트 티시코프, , 2007-2012. © 레오니트 티시코프
레오니트 티시코프, <날아다니는 집-태양. 라도미르 Летающий Дом-Солнце. Ладомир>, 2007-2012.  © 레오니트 티시코프

 

우주론에 대한 낭만적이고 회고적인 시선은 타티야나 안토시나(Татьяна Антошина)의 작업 <우주여행자들 Космические путешественники>에서도 나타난다. 첫 번째 작업은 따뜻한 느낌으로 그려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의 연작으로 우주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룬다. 그림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카메라의 대물렌즈에 비춰진 듯 보이고 그들의 시선은 어딘가 위를 향해 있다.  

 

타티야나 안토시나, 연작  중에서, 2006. © М. 겔만 갤러리
타티야나 안토시나, 연작 <우주여행자들> 중에서, 2006.  © М. 겔만 갤러리

 

두 번째 작업은 몇 년 뒤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설치작품으로 작고 어두운 방 안에 무중력 상태의 느낌을 만드는 디스코볼이다. 이 디스코볼은 관객들을 불러들여 우주론적 유토피아가 실현된 공간에 빠져들게 하는데 그 메커니즘은 감각차단탱크[note title=”3″back] 1954년 정신과 의사인 존 릴리가 개발한 기구로 피부와 같은 온도의 소금물을 채워서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의 감각을 차단한다.(역자 주)[/note]와 유사하다. 

 

타티야나 안토시나, , 설치작품, 2015. © 국립현대예술센터
타티야나 안토시나, <우주여행자들>, 설치작품, 2015.  © 국립현대예술센터

 

2014년 아르카디 나소노프(Аркадий Насонов)는 <우주론-타로 Космизм-Таро>라는 작품에서 우주론의 신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아이러니하게 풀어냈다. 그는 타로카드 한 벌 중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22장의 카드, 즉 대(大) 아르카나와 으뜸패들을 손수 만들었는데, 카드마다 ‘마술사’, ‘황제’ 등 타로카드 본래의 인물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나소노프의 타로카드에는 에이젠시테인부터 파스테르나크에 이르기까지 초기 소비에트 문화의 신화화된(정확히 말하자면 우주화된) 영웅들이 등장한다. 표도로프와 치올콥스키도 카드의 인물들로 등장하고 레닌은 ‘악마’의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레닌은 실현되지 않은 건축 프로젝트 《소비에트 궁전》의 꼭대기를 왕관처럼 장식하는 동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우주론적 충동은 드미트리 벤코프(Дмитрий Венков)의 영화 <태양과 같이 Словно солнце>(2014)에도 나타난다. 이 비디오 작업의 바탕에는 세 가지 유토피아 프로그램들, 즉 사회적 유토피아, 과학-기술적 유토피아, 예술적 유토피아를 결합한다는 아이디어가 놓여있다. 벤코프는 러시아 우주론의 이론적 유산들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그는 넓은 의미에서의 우주학과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포함한 1960-70년대 유토피아의 유산들을 다룬다) 다양한 종류의 유토피아들의 잔재를 종합하려는 그의 형식적 방법은 집단적 상상의 합리화를 꾀했던 우주론적 종합(과학적, 사회-실천적, 종교적, 미학적 이념들의 종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영화는 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 개의 부분, 세 개의 평행적 현실들로 나뉜다. 관객은 예술적 현실에서 예술과 삶의 합일이라는 상황주의적 이념을 복원하기라도 하듯 배우와 함께 모스크바 거리를 헤매고, 과학-판타지적 현실에서는 우주 프로젝트에 대한 기억을 상징하는, 버려진 우주정거장 <비오스페라-2 Биосфера-2>를 보게 되고 사회적 현실에서는 경쟁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정치적 실험인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note title=”4″back] 인도 동남부 퐁디셰리 근처에 위치한 공동체로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1968년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워졌고 인도에서 특별자치권한을 갖고 있다.(역자 주)[/note]로 이동한다.

 

드미트리 벤코프,  비디오의 한 장면, 2013.  © 드미트리 벤코프
드미트리 벤코프, <태양과 같이> 비디오의 한 장면, 2013.  © 드미트리 벤코프

 

아마 그룹 ‘위를 향하여!(Вверх!)’만큼 우주론의 테마를 가장 철저하게 발전시킨 사례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그룹에게 우주론은 출발점이 아니라 여러 작가들의 창작적 관심을 결합하는 조건적 틀이기는 했지만, 바로 우주론을 통해서 앞으로 이 그룹에 소속될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2010년 봄에 결성된 ‘위를 향하여!’는 이른바 우주의 사원, 즉 과학, 종교, 예술, 정치를 종합하는 문화학적 공간을 짓겠다고 천명했다. 우주론적 종합의 이념은 이 그룹에게 아주 매혹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룹의 방법론과 입장을 결정하면서 실제에 적용되었다. 누구나 그룹에 참가할 수 있었고, ‘사원(храм)’이라는 이름은 미완의 집단 프로젝트를 뜻했다. 각 개별 전시회야말로 일종의 건축 자재이자 벽돌이었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가상의 건물인 ‘사원’이 지어졌다(꽤 사실적인 ‘우주론의 제단’이 몇몇 전시회와 액션에서 세워지기도 했다). ‘위를 향하여!’의 전시회와 퍼포먼스는 교외나 자연, 아파트 갤러리 뿐만 아니라 국립현대예술센터의 전통적인 박물관 공간에서도 열렸다. 초기 작업들 중 하나인 <네크로포니야 Некрофония>(2010)는 고골, 자볼로츠키, 베르나츠키 등 러시아의 시인들, 작가들, 학자들의 무덤에서 나오는 음파를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선조들’과의 청각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린샷 2019-12-23 오전 8.01.53
나스탸 데르가쵸바(Настя Дергачева), 다니일 진첸코(Даниил Зинченко), 미하일 막시모프(Михаил Максимов). <네크로포니야>, 2010.

 

《침묵의 들 Поле молчания》 (2011)은 흘레브니코보 마을의 눈 덮인 들판에서 열렸다. 어둠이 깔리면 눈밭에 띄엄띄엄 놓인 텔레비전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텔레비전들은 작가들의 비디오 작업을 보여준다. 추위, 눈, 도시의 소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 등은 황폐함과 우주적 공허의 느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같은 해, 두폭화 <Iu-165>와 같은 비디오 작품들이 창작되고 전시되었다. 여기서 ‘Iu’는 우주론 텍스트 단편들과 가가린의 전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알레고리적 이야기이고, ‘165’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은둔하며 지냈던 어느 작가이자 화가에 대한 이야기다.   

 

, 그룹 의 전시회, 2011. © 위를 향하여!
<침묵의 들>, 그룹 ‘위를 향하여!’의 전시회, 2011.  © 위를 향하여!

 

‘위를 향하여!’의 프로젝트들에는 총 20명이 참가했다. 비록 지금은 그룹이 사실상 창작 집단으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그룹의 참가자들은 우주론을 곧장 내버리지 않았고 ‘사원’이라는 동일한 이념에 각자 나름대로 참여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위를 향하여!’의 참가자였던 다니일 진첸코가 찍은 영화 <불사의 묘약 Эликсир>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프로그램에서 상영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장편영화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교차하는 지점, 활짝 트인 공간(넓이)과 우주(높이)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의 러시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결코 풀리지 않을 듯한 신화들, 원형적 이미지들이 빽빽하게 얽힌 실타래라고 할 수 있다(영화의 창작의도를 보면 사실 이 실타래는 풀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 영화에는 동화적인 러시아의 숲과 늪, 세라핌과 목수, 우주비행사, 파르티잔, 관리, 심지어 ‘조국-어머니’[note title=”5″back]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영웅들에게 바쳐진 기념비로 볼고그라드 마마예프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각가 E.B. 부체티치와 엔지니어 N.V. 니키틴의 작품으로 한손에는 칼을 든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동상이다.(역자 주)[/note] 또한 나오는데, 이는 마마예프 언덕에 있는 유명한 동상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깜박이는 성좌로 그려졌다.  영화제의 관객들이 <불사의 묘약>에 나타난 러시아적이고 철학적인 서브텍스트를 간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 관객들에게는 이러한 서브텍스트들이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신화는 특정한 종교적-철학적 바탕 없이는 불가능한 우주론적 신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니일 진첸코,  영화의 한 장면, 2015.  © 다니일 진첸코
다니일 진첸코, <불사의 묘약> 영화의 한 장면, 2015.  © 다니일 진첸코

 

왜 예술가들은 온갖 나이브하고 비의적인 요소, 신비주의로 가득한 러시아 우주론, 그것도 러시아주의로 점철된 우주론자들의 이념적 유산에 관심을 계속 갖는 것일까? 왜 예술은 우주론의 예술적 실천들은(대표적인 예로 그룹 ‘아마라벨라 Амаравелла’의 직관주의 예술가들은 말레비치나 다른 아방가르디스트들과는 달리 자신들이야말로 러시아 우주론자들의 이념을 직접적으로 계승한다고 여겼고 구축주의자들과 절대주의자들과는 선을 그었다) 종종 피하기까지 하면서 우주론의 순전히 이론적, 담론적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왜 우주론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으며 이미 모든 측면에서 체계화되고 검토된 이 주제는 다시 파헤쳐지고 전개되고 시간을 극복하며 고갈되지 않는 것일까? 우주론의 이러한 어마어마한 용량, 연장성, 확장가능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백 여 년 전에 살았던 우주론자들이 골몰했던 문제들을 오늘날의 문제들과 이어주는 것일까? 

 

우주론의 우주는 지구의 시간과 중력이 극복되는 공간, 생물학적 시간도 그에 수반되는 공포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우주론적 이념들을 다루며 작업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첫째, 이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적어도 아주 많은 것이 가능하다), 둘째, 그 자체로 예술 프로젝트인 우주론은 영원한 삶을 예술로 받아들이고, 예술은 세계의 우주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은 카오스를 이성적으로, 감각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수단이고, 물질과 의미가 최종적으로 분산되지 않도록 인류를 지켜주는 영지주의적 백신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양한 이념들을 한데 모으고 있는 러시아 우주론의 몇 가지 주요 특징들과 무엇이 이러한 이념들을 결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러시아 우주론은 총체적 기획이다.” 

 

러시아 우주론은 인류의 우주 공간 점유와 관련된 다양한 이념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우주 공간의 점유는 축자적 의미로는 우주에 인간의 삶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고, 비유적 의미로는 우주에 대한 무지를 극복하는 것, 즉 우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인류 문명을 위해 이러한 이해를 활용하는 것이다. 우주에서의 삶은 결코 다른 행성들에 식민지를 세우는 것으로만 귀결되지 않으며 행성들 사이의 공간(예를 들면, 치올콥스키가 말하는 ‘에테르 정착지’는 행성의 궤도에 세워지는, 수직으로 길게 잡아 늘인 모양의 이른바 ‘도시-도넛’들이다), 그리고 장기적 전망으로는 우주 공간 전체를 포함한다. 대다수의 우주론적 이념들의 바탕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첫째, 불사주의, 죽 불멸에 대한 지향이다(보그다노프가 말하듯 수혈을 통해 젊어지는 것부터 표도로프가 말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둘째, 이른바 적극적 진화, 즉 의식과 자연,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극복은 인간과 인간화된 세계의 오랜 발전에 따른 당연한 결과(즉, 일종의 창조적 성장의 결과)이지만, 이와 동시에 이성과 도덕적 감정,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개념을 통해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극적 진화는 과거의 인간이 미래의 인간(절대적으로 이성적이고 정의로우며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중간 단계이다. 셋째, 도덕-윤리적 체계로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비의적 교의, 금욕주의, 마르크스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이 도덕-윤리적 체계는 독특한 종류의 사회적 책임으로 오직 인간이 자신과 문명의 유대,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인류와 맺고 있는, 시간이 지나도 끊어질 수 없는 긴밀한 유대를 인식할 때에 비로소 생겨난다.

 

이처럼 우주론에는 아주 독특한 고유의 우주가 있다. 이 우주는 초역사적이지 않다. 이 우주는 유토피아적 지평으로서, 이 지평은 반드시 가까운 미래에 극복되어야 하며 인간의 과제는 바로 이 극복과정을 촉진하는 것이다. 지구의 대다수 주민들에게 우주는 단지 별이 빛나는 머리 위의 하늘이라면, 우주론자들에게 우주는 도덕적 법칙의 실행을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리야 카바코프와 에밀리야 카바코바, , 포트폴리오, Mike Karstens Graphics 출판사, 2003. MAMM 콜렉션. © 일랴 카바코프와 에밀리야 카바코바
일리야 카바코프와 에밀리야 카바코바(Илья и Эмилия Кабаковы). <우주에너지센터. 중앙 건물의 외관(건물 제1호). 제 7호 Центр космической энергии Внешний вид центрального здания (здание № 1). № 7>. 포트폴리오. Mike Karstens Graphics 출판사. 2003. MAMM 콜렉션. © 일랴 카바코프와 에밀리야 카바코바

 

러시아 우주론은 총체적 기획이다.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다’라는 치올콥스키의 유명한 말은 ‘노예상태는 자유의 요람이다’라는 헤겔의 말과 쉽게 대조된다. 우주론자들은 오직 우주를 인간화하고 우주를 자신의 창작적, 창조적 에너지로 온전히 차지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통해서 우주의 에너지가 마침내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미래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론자 자신의 보다 완전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이었던 우주론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었고 자연과학(그것도 한 번에 여러 학문분과들)과 종교철학에 심취했었다. ‘르네상스적 인간’이 나타난 뒤 몇 백 년이 흐르고 학문의 통섭이라는 유행이 등장하기 훨씬 오래 전, 우주론은 예술가-연구자의 모델을 제시했는데, 예술가-연구자는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적, 창조적 자유를 갈망하면서 학문분과나 형식적 제한들을 뛰어넘어 사유하는 인물이다. 르네상스 문화와 마찬가지로 우주론은 인간중심적이지만, 우주론의 인간중심주의는 집단적인 이성적 주체를 지향하며 러시아 종교사상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을 자기화한다. 우주론의 총체성은 모든 우주를 포괄하는(혹은 심지어 관통하는) 사회적 이상도 다룬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이상의 주춧돌에는 박애주의와 책임이 놓여있고, 이 두 가지 근본 사상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우주 개척의 과제들 중 하나이자 우리 모두의 ‘공동의 일’인 불멸을 보장한다.

 

‘공동의 일’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표도로프는 서로를 형제로 여기지 않는 인류의 현재 상태를 극복하고 ‘친족성을 복원할 수단’을 찾고자 했다. 인간들은 서로 형제인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우주적 성장’을 지향한 러시아 우주론은 물론 모더니즘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안적 모던의 기획이다. 러시아 우주론은 자연과학 이론들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이론들을 비의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인간의 불멸에 대한 꿈은 낭만주의적 환상이 아니라 고독하고 이기적인 개인의 눈, 허무주의자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 다양한 관점들의 전체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은 현재의 인간을 과거의 인간으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전체라고 여길 수 있도록 인간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부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진보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도 아니고 혁명적 파열의 전조도 아니다(적극적 진화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기가 있다는 생각에서는 공산주의로 가는 길에서 피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단계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진보는 곧 자연적 필연성이자 도덕성의 척도이다.

 

“인간들은 서로 형제인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9세기의 ‘비인간적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답변이 된 러시아 우주론은 이러한 사상들의 과학적 요소를 시화(詩化)하며 인간의 실존적 특성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이와 동시에 우주론자들 대부분은 대안적 유물론, 영혼을 가진 유물론을 제안하며 엥겔스에서 체르니솁스키에 이르는 유물론자들과 논쟁한다. 우주론의 유물론은 분석이 아니라 직관으로 인식될 수 있는 물질의 지속과 영속을 주장했던 앙리 베르그손의 유물론과 통하는 지점을 종종 보인다. 그러한 인식, 즉 일종의 에너지의 분출, 직관의 과잉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식의 결과가 바로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 속에 삽입하는 영원한 지속을 포함하는 진화의 과정이다. 그런데 모든 진화는 창조적 진화라고 생각하는 베르그손의 사상과 우주론의 철학은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우주론자들은 진화에 대해 대단히 실제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그렇다(그런 태도는 바로 도덕적 요구였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이성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고 통제되어야 한다. 인류의 행복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인간의 물질성을 보존하고 죽음에 대해 장엄히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치올콥스키의 긍정적 엔트로피에 대한 생각은 바로 사람이 죽고 나면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어 우주를 여행하게 되고 말 그대로 열린 우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처럼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바람에 날려 보내달라고 미리 유언하지 못하더라도 인간 육체의 질료는 우주로 널리 퍼져나간다.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육체적 질료의 운동은 바로 영원한 우주여행인 것이다. 질료에 대한 논쟁을 다루는 가장 눈에 띠는 슈제트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Андрей Платонов)의 미완성 소설 『행복한 모스크바 Счастливая Москв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삼비킨 박사가 동료에게 ‘모든 생명의 원인’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시체를 절개하면서 그는 내장 속, 미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과 찌꺼기 사이의 비어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모든 인류를 집어삼키는’ 이 비어있는 부분이야말로 영혼이며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설명은 역사적 유물론의 바탕인 정통 변증법의 도식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또, 이렇게 발견된 ‘비어있는 영혼’은 형제애와 도덕적 감정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러한 설명은 우주론자들의 생각에도 잘 들어맞는다.

 

이러한 논증은 우리를 첫 번째 가설로 이끈다. 오늘날의 예술은 왜 러시아 우주론에 계속 관심을 가지는가?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예술계로부터 관심 받지 못하고 주변부에 있던 모더니즘의 기획들을 재귀적으로 복권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거대서사를 종언했던 시대의 결말, 상대주의의 피로감, ‘네오모더니즘’ 또는 ‘얼터모더니즘’의 도래, 무한한 차이들의 세계를 극복할 통합적인 새로운 감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론적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얼터모더니즘적인 새로운 기획을 찾으려는 시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지점에서 분열된 주체에서 벗어나 주체를 새로운 상황에 위치 지으면서 새로이 형성하려는 욕망이 읽히기도 한다. 이처럼 특수성에 반대되는 보편성에 대한 요구, 미래의 합일을 꿈꾸던 과거의 낯선 낭만주의적 꿈을 통해 표현되는 요구는 총체적인 분열로 이어진 포스트포드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뒤늦은 반응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주론은 19세기의 견고한 합리주의와 계몽적 허무주의에 대해 ‘새로운 진리성’으로 대두되었다. 오늘날 사회 및 문화 영역의 연구자들은 계속 가치를 잃어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냉소주의에 대해 이러한 ‘새로운 진리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불멸에 대한 꿈은 낭만주의적 환상이 아니라 고독하고 이기적인 개인의 눈, 허무주의자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 다양한 관점들의 전체적인 체계다.”

 

두 번째 가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래와의 관계라는 주제를 다루고 미래학적 기획들이 부재하는 상황에 대해 발언하려는 예술가들의 욕망과 관련된다. 최근의 과학-판타지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수많은 장면들을 통해 미래의 이미지를 구성해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이미지는 매우 부서지기 쉬운 것이어서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분산된 조각들로 곧장 흩어지고 만다. 기획으로서의 미래는 오늘날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래에 대한 낭만주의적 기획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소비를 위한 기술의 발전, 즉 일상생활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것일 뿐 행성의 궤도에 ‘도시-도넛’들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장 정확하고 심사숙고한 예측들도 한데 모아놓으면, 진보가 도대체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그래서 진보는 ‘아무 곳으로 좋을 대로’ 움직이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표상들을 생산해야 내야 할 문화의 메커니즘은 망가져버려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의 이론가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이러한 상황을 이미 2009년에 문화학적 팸플릿 『자본주의적 리얼리즘 Capitalist Realism』에서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시장이 변화하는 속도는 시장의 참여자들에게 상황에 재빠르게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시장의 참여자들은 각자의 삶을 계획하지 못해 내일의 삶에 확신을 가질 수 없고 온갖 ‘트렌드’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노이로제에 걸린 듯 모니터링/스캐닝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현실은 지속적인 평가와 단기 투자의 대상이 되고 모든 지적, 창조적 역량은 현실에 집중된다. 이것은 말레비치가 약속했던 ‘현대의 어깨에서 자라나는’ 것을 낳을 수 있는 현대가 결코 아니다. 이제 현대는 스스로 아무 것도 낳을 수 없으며 자신의 어깨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 유토피아적 상상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얼마 안 되는 치유책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 바로 우리가 과거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미래와 관련된 작업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가설은 미래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의 인간과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선언, 이론적 작업, 학술대회 등을 보면 미래의 인간을 상상하는 일이 미래 그 자체를 상상하는 일보다 훨씬 쉬워 보인다. 물론 러시아 우주론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우주론자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인간학적 상황에서 우주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는다. 여기서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중심주의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사실상 동일한 것이 된다. 최근 서구의 많은 연구자들은 지질학자, 생물학자, 트랜스휴머니스트, 심지어 환경운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류세(人類世)’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세라는 개념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도래 했는데, 이때부터 지구의 운명은 인간문명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인류세 이전 시대인 홀로세는 약 1100만년 동안 계속되었다). 지질학자들의 계산은 그 자체로서의 지질학적 과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과 진보는 지구의 질료 자체, 해수와 지각의 운동, 토지와 지표 아래에 있는 광물 및 화학 성분을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으며 그 어떤 환경운동도 소용없게 되었다. 이미 우리는 분기점을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자연적인 것(타고난 것, 천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새로 도입한 것) 사이의 대립관계를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주론자 베르나츠키가 예견했던 것, 즉 생물계를 바꾸면서 인간은 정신계를 창조하고 ‘강력한 지질학적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따라서 우주론에 대한 관심은 한편으로는 인류세와 관련된 공통의 걱정과 불안을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종의 가치를 지닌 정세적 활동이자 로컬한 역사와 글로벌한 과학적 맥락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빅토르 미지아노의 지휘 아래 장기간 수행되고 있는 거대프로젝트 《인간의 운명 Удел человеческий》은 직접적으로 이 주제를 다룬다. 이 프로젝트는 ‘미래의 인간’에 대한 예술의 관심이 절정에 이른 독특한 사례이며 2018년 이전까지의 담론적, 예술적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 기준점이기도 하다(이 프로젝트는 총 일곱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파트 <인간적인 것의 경계 Границы человеческого>는 지난 해 12월 국립현대미술센터에서 전시되었다).

 

“진화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이성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고 통제되어야 한다.”

 

우주론 선집에 그로이스가 붙인 서문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루어지고 질랴예프의 프로젝트들에서도 나타나는 네 번째 가설은 박물관화(museification)와 관련된다. 오늘날 박물관은 전통의 수호자도 아니고 예술의 공동묘지도 아닌, 관료주의적 자본주의의 독특한 장치가 부착된 비교적 열린 공간으로 여겨진다. 박물관은 제도적 권력의 담지자인 것이다. 예술은 박물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는 박물관에서 떨어져 나오지도 못했다. 예술은 ‘거리로 나올 것’을 호소했고(실제로 나왔다), 심지어 인터넷으로도 나왔지만 아직 박물관은 결코 자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사태가 그러하다면 차라리 박물관 자체를 어딘가로 옮겨버리는 것, 박물관을 탈영토화하는 것, 박물관의 형식적, 의미적 경계들로 작업해보는 것이 의미 있지 않을까? 박물관의 전시적(교육적, 오락적) 기능 외에도 박물관의 기념비적 기능을 미래에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예를 들면, 미래의 박물관들은 우리의 시대에 대해 무엇을 전시해야 할 것인가? 프린트스크린 갤러리, 메신저들의 로그 아니면 빅데이터의 분석 결과? 표도로프에 따르면, 미래의 우주는 바로 ‘부활시키는 박물관’, 부활한 육체들의 박물관, 죽음에 승리를 거둔 박물관, 즉 생명의 박물관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주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수학, 문화정치와 생명정치, 인공적인과 인간적인 것이 한 데 주조되는 총체적 박물관이다. 이러한 박물관은 감각의 체제를 주체에 정향된 체제에서 객체에 정향된 체제로 급진적으로 재설정한다.

 

언젠가 표도로프는 박물관이 문화에서 차지하는 모순적 지위, 즉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작동하는 박물관 체계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경멸과 명예의 변증법을 지적한 바 있다. 박물관에 물건을 기증하는 것은 어쨌든 유용성을 위해 기증하는 것이지만 이는 동시에 물건이 생활에 필요 없기 때문에 생활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 기증하는 것이고 아주 가치 있는 유물로까지 예찬하는 것이다. 박물관의 존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과 오래된 모든 것, 그리고 그것과의 관계 또한 보존해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보수주의자들을 화해시킨다. 미래의 박물관처럼 우주론의 기획은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의 영토로 보인다. 완고한 도덕적-윤리적 입장을 과학-판타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념들의 화려한 아마포로 가리면서 우주론은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적이고 지적으로는 유연하고 고무찰흙처럼 부드러운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은 누군가의 감정이나 관심을 상하게 할 위험 없이 우주론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소름 끼치고 비합리적이며 암울한 주제들을 유희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론이 누구라도 자신의 영토로 들이며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우주론은 한 가지 의미로 전용되는 것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피한다. 우주론은 아직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등록되지 않고 있다. 우주론은 아직 무주공산(no man’s land)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주론은 각광받는 ‘글로컬한’ 슈제트일 뿐 아니라 대적하고 있는 세력들의 조직과 배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임시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완충지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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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원문과 번역을 비교하고 오류를 지적 및 수정해 준 정태종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