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예술을 먹어라! 현대 예술과 파생파시즘
번역 김상민

Chritstie's auctioneers vend a Mark Rothko painting.
크리스티(Chritstie’s)의 경매사들이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을 판매하고 있다.

 

예술은 통화(currency)인가? 스테판 심코비츠(Stefan Simchowitz)라는 투자자는 그렇다고 본다. 그는 브렉시트(Brexit) 이후 시대에 관해 단호하게 이렇게 쓰고 있다. “예술은 인플레이션과 통화 가치 하락에 대비하여 위험회피(hedge)하는 대안적인 통화로서의 구조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계속할 것이다.”[note title=”1″back] Rain Embuscado, “The Art World Responds to Brexit,” Artnet News, June 24, 2016. https://news.artnet.com/art-world/art-world-responds-brexit-526400[/note] 은으로 그린 회화가 금본위의 대체물이 된 것인가?[note title=”2″back] 이 특정 시장은 그 사이 분명히 붕괴되었다. 그러나 예술 시장 일반은 여전히 다소간 안정적이다.[/note]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진행 중인 위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세금의 세례를 받았고, 그 돈은 무관세 컬렉션으로, 고층 맨션 구입으로, 유령회사로 흘러들어 갔다. 양적 완화 정책은 통화 안정성을 약화시키고 공유 자원을 고갈 시켰으며, (있다 하더라도) 형편없는 임금, 영원한 임시직, 영원한 빚, 영구적인 의심, 점증하는 폭력으로 불안정 서비스 경제를 정착시켰다. 이러한 불안정화는 예술의 가치가 다수의 국가의 GDP 전망보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한 가지 이유다. 유럽 연합에서는 대량 퇴거, 긴축 예산, 방화 공격, 미쳐 날뛰는 다에시(Daesh)[note title=”3″back] 이슬람국가(IS)를 지칭함.(역자 주)[/note], 도이체 방크의 신용사기 등을 배경으로 불안정화가 발생한다. 이를 통해 아동 빈곤, 부채 협박, 조작된 경제, 광범위하게 자초된 실패한 정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파시스트적으로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술은 이 역사적인 시점의 ‘대안적인 통화’다.[note title=”4″back] 통화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도 After Ar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에서 매우 흥미롭게 자세히 다루었지만 다른 역사적 시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확장 시점에서 다루었다. 이제 이 역사적 시점의 종말에서 통화로서의 예술은 훨씬 더 강력해진 것처럼 보인다.[/note] 예술은 수많은 불행에 대비하여 거래되는 것 같다. 

 

한편, 반동적인 극단주의가 많은 곳에서 심화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도 지겨울 것이다. 항상 또 다른 공격, 선거, 쿠데타, 또는 폭력, 미소지니(misoginy), 스너프(snuff)나 악행으로 판돈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 권리를 박탈당한 중산층이 글로벌 경쟁을 두려워하는 (그리고 직면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리고 그들이 반동적인 소수 집권층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로 선택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파생파시즘[note title=”5″back] ‘파생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선물옵션(future options)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의 파시즘과 관련된 광범위한 극우 운동 전반을 의미하지만 결코 파시즘을 위해 선물옵션을 창출하고 마케팅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파생파시즘이 정말 파시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그 기저를 이루는 실체이며 이는 그것의 파생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note]이 계속해서 성장한다.[note title=”6″back] 나는 ‘중산층’이라는 용어를 좀 더 확장된 의미에서, 즉 아웃소싱과 경쟁 확대에 의해 무력화된 세계 중산층(이전에 산업화된 국가의 노동계급 및 탈-노동계급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가 파생파시즘의 새로운 인기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아니다. 독일에서는 작년에 방화로만 90개의 난민촌이 공격받았지만(그해 총 공격은 901건), 동시에 독일이 경제적으로도 매우 성공적이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실제로 독일의 실업률은 2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오스트리아는 90년대 중반 이후 어떤 시점에서도 실업률이 6%를 넘지 않았는데도 왜 국민 53%가 네오파시스트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하는가? 오스트리아의 최근 위기로부터 대규모로 이익을 얻은 양국의 극단적인 우익 단체들의 끊임없는 성장과 현재의 성장 추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오스트리아는 이른바 동쪽으로의 확장, 즉 지역 퇴직자 연금을 오스트리아 금융산업의 예술 컬렉션으로 옮겼던 일련의 약탈로부터 이익을 취했으며, 독일은 유럽의 재정 위기로 인해 횡재했으며 수세기에 걸친 남유럽인들의 미래를 탄소 배출량을 속이고 있는 국내 자동차 산업에 보조금으로 몰아주었다. 불평등이 양국 모두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는 경제 불평등이 훨씬 높고 실업률은 2배나 높다(국가 부채와 관련된 긴축 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부분적으로 최근 역사로 인해 심각한 우익 정당이나 운동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보라. 둘 다 부채 위기의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파시스트 정당이 부상하지는 않는다. 주체할 수 없는 긴축으로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그리스에서조차, 파시스트 정당인 골든 돈(Golden Dawn)에 대해 지지율이 오르는 게 아니라 내려가고 있다. 소위 발칸 루트의 폐쇄로 거기에서 발이 묶인 5만명 이상의 난민들이 대부분 관대하게 환영을 받았으며, 확실히 90건의 방화 공격 같은 것은 없었다. 반대로 파생파시즘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유럽 국가들(프랑스, 일부 스칸디나비아 국가, 오스트리아) 또는 헝가리와 같이 난민 수용을 거부하거나 폴란드와 같이 난민 숫자를 최소화하려는 국가들에서 가장 강력하다. 경제는 가장 분명하게 파시즘을 가속화하는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파시스트 파생물의 붐을 일으키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명백한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어려움과 파시즘의 인기 사이의 상관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후자도 위협을 느끼거나 그저 무시당하면 사회 전체를 파시스트에 투표하라고,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는 일부의 국민들이 필요하다.[/note]  신자유주의 경쟁을 철폐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그러나 대신에 경쟁자들을 개인적으로 제거하는, 자기부족화된(self-tribalized) 체제들이 전에 없이 많이 생겨난다. 파생파시즘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자생존을 촉진함으로써 (예를 들어) 백인 민족주의와 전면적인 자유무역 경제를 융합하려 한다.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권위주의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페이스북의 영속적인 가짜정보들(fakes)은 영속적인 전운을 부채질한다. 이미 규제가 완화된 진실이라는 관념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긴급 상황이 지배한다. 비판은 트롤 축제다. 위기는 엔터테인먼트로 상품화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는 소진되었으며, 수축, 파편화, 독재 지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The growth of the global auction market from 2005 to 2015, according to data from Auction House, ArtNet, and AMMA.
옥션 하우스, 아트넷, 아트론 아트 마켓 모니터(AMMA)의 데이터에 따른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전 세계 경매 시장의 성장

 

대안통화

 

예술 시장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금융 기관과 심지어 모든 정치 단체조차도 솜털 같은 반짝임으로 녹아 사라지는 시기에는, 예술에 대한 투자가 어쨌거나 더욱 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대안통화로서 예술은 이더리움(Ethereum)과 비트코인(Bitcoin)이 지금까지 단지 약속만 해왔던 것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note title=”7″back] 분명히 하자면, 예술은 암호화폐(cryptocurrency)가 아니다. 나는 예술 시스템과 암호화폐 사이의 구조적 유사점을 지적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통화로서의 예술이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암호화폐가 될 가능성은 매우 유익한 텍스트인 J. Chris Anderson의 “Why Art Could Become Currency in a Cryptocurrency World,” The New Stack, May 31, 2015에서 제기된다. https://thenewstack.io/why-art-could-become-currency-in-a-cryptocurrency-world/[/note] 한 국가가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돈보다는 예술이 오히려 네트워크화되어 탈중심적이고 널리 퍼진 가치 체계다.[note title=”8″back] 암호화폐와는 대조적으로, 예술에서는 탈중심화된 투명성에 대한 최소한의 겉치레나 자동화된 부패불가능한 기능의 집합에 대한 겉치레가 없다. 통화로서의 예술은 정확히 불투명성 때문에, 인간관계에 대한 막대한 의존 때문에 상대적인 안정성을 얻는다.[/note] 예술은 경쟁 기관이나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신용이나 오명을 보정하기 때문에 안정성을 얻는다. 시장, 컬렉터, 박물관, 출판, 그리고 전시, 스캔들, 좋아하는 물건 및 가격을 비동기적으로 등록하는 (또는 거의 하지 않는) 아카데미가 있다. 암호화폐와 마찬가지로, 통화로서의 예술에는 가치를 보증하는 중앙기구가 없다. 그 대신에 스폰서, 검열관, 블로거, 개발자, 프로듀서, 힙스터, 핸들러, 후원자, 프라이비티어(privateers), 컬렉터, 그리고 훨씬 더 혼란스러운 캐릭터가 있다. 예술의 가치는 찌라시(gossip-cum-spin)와 내부자 정보에서 비롯된다. 사기꾼과 콘 아티스트는 대혼란의 상황에서 거만한 교수, 불안한 갤러리스트, 소파를 전전하는 학생의 모습과 섞여있다. 이 비공식적인 생태계는 충분히 해킹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 비공식적 생태계는 비록 고도로 조작된 수준에서이긴 하지만 때로는 모두에게 균등해진다. 그 생태계는 매우 유연한 동시에 불활성이며, 숭고하고, 몽롱하고, 불투명하며, 기이하고, 노골적이다. 가장 초월적인 현상이 컬렉터들의 대기 명단에 있는 그런 게임이다. 먹이 사슬 저 아래에서 미디어 아트는 비트코인처럼 무제한성(the illimitable)을 제한함으로써 디지털 희소성의 모순을 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술적 무오류성(infallibility)에 대한 과시에도 불구하고 비트 코인은 예술 시장 가치가 동의, 담합 및 우연의 일치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재적으로는 그룹 권력[note title=”9″back] https://www.bitcoinmining.com/bitcoin-mining-centralization/을 보라.[/note]에 의존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부패불가능한 기술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암호화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예술이 때로는 해독불가능할 정도까지 암호화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술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때조차,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호화가 일상적으로 적용된다. 수많은 상충되고 종종 쓸모없는 실마리를 가진 메시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도, 예술은 암호화 같은 것이다.[note title=”10″back] 이로써 대안통화(혹은 금융옵션이나 계약)를 취급하는 예술 프로젝트들이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그 프로젝트들은 구상적(representational)이 될 수도, 때로는 다소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note] 예술에서의 평판 경제는 무작위로 계량되며 예술가와 학자의 순위를 정하는 엉터리 알고리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 하지만 또한 더욱 전통적으로 배타적인 사회적 위계도 포함한다. 예술은 완전히 우스꽝스럽고 왜곡되고 권력 없는 군집이다. 그럼에도 문명 전체가 그런 것처럼 예술은 하나의 위대한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술산업이 부의 상승효과(trickle-up effects)[note title=”11″back] 부유층이 부유해지면 그들의 부가 저절로 그 아래 계층으로 확산된다고 보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s)와 반대의 방향으로 부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역자 주)[/note]를 유발하여 조세 도피처로 수평으로 흘러가게 한다. 예술의 경제는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 교육 및 연구에서 오는 투자를 전용(divert)하고 사회적 비용과 위험을 외부화한다. 예술의 경제는 지역색을 없애고, 저임금을 주며, 과대평가하고, 극심한 허풍을 팔러 다닌다. 이것이 단지 예술의 투자자와 관리자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예술 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또한 수익을 재정 바나나 공화국[note title=”12″back] 조세 도피처를 의미한다.(역자 주)[/note]으로 즉각 보내는 기업의 기술적(및 반사회적) 인프라를 지원한다. 애플, 구글, 우버, 에어비엔비, 라이언에어, 페이스북 및 기타 힙스터 업체들은 아일랜드, 저지(Jersey) 또는 기타 공공연한 비밀 관할 구역에서 세금을 거의 납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나 병원과 같은 지역 서비스에 기여하지 않으며, 그들이 공유(sharing)라고 부르는 개념은 그들이 자신의 몫(share)을 받고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산업의 규모와 비교하면 예술 분야는 단지 잠깐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자. 현대 예술은 단지 불투명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불공정한 모든 것에 대한 논쟁(hash), 하향식(top-down) 계급 전쟁과 전면적인 불평등에 대한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창(spear)의 역할을 하는 빙산의 일각이다. 

 

“The online art market has continued to grow strongly (up 24 percent to $3.27 billion) despite the global art market slowing in 2015,” states the foreword of this art insurer's report.
이 미술품 보험사의 보고서 앞머리에는 “온라인 미술 시장은 2015년 미술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강세(32억 7천만 달러로 24 퍼센트 상승)를 보여왔다”고 명시되어 있다.

 

타락한 예술 

 

예상할 수 있듯이, 이는 원한과 분노로 이어진다. 예술은 점점 퇴폐적이고 근본이 없으며 세상 물정과 상관없는 코스모폴리탄 도시 엘리트의 활동으로 분류된다. 한편으로 이것은 매우 솔직하고 부분적으로 적절한 설명이다.[note title=”13″back] 나는 벤 데이비스(Ben Davis)의 훌륭한 텍스트인 “After Brexit, Art Must Break Out of Its Bubble,” Artnet News, June 28, 2016(https://news.artnet.com/opinion/brexit-art-532178)에 매우 동의한다.[/note] 현대 예술은 모든 것이 움직이지만 아무것도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는 시간, 정체된 확대의 시간, 교착 상태로서의 일련의 새로움의 시간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대한 변화를 갈구한다. 그 이유는 시스템이 무의미하고 해로우며 상위 1퍼센트만을 위한 것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며, 더 큰 이유는 그들이 비로소 변화에 가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근본 없는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이야기는 저항하는 지식인을 ‘건강한 국가 신체’ 내의 ‘기생충’으로 낙인찍는 것을 즐긴 나치와 스탈린주의 선전을 분명 연상케 한다. 두 정권 모두에서 이런 종류의 용어는 소수의 지식인 계급, 형식적인 실험, 그리고 진보적인 의제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었지, 지역 주민들의 접근성을 개선하거나 예술의 매력을 향상시키거나 확장시키려고 사용된 것은 아니다. 문화에 있어서 ‘반엘리트주의’ 담론은 현재 보수적인 엘리트들에 의해 주로 전개되고 있다. 보수적인 엘리트들은 ‘타락한 예술’이라는 고정 관념을 다시 등장시키면서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특권이 주목받는 것을 모면하고자 한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권위주의자들에게서 새로운 기회를 기대한다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권위주의적 우익 정권은 아트 페어용 VIP 리스트를 없애거나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예술을 더 유의미하거나 접근성 있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엘리트나 심지어 예술을 폐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재정 차원을 넘어서 실존 차원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을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책임성, 기준, 접근성 또는 투명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금 사기, 조작된 시장, 다에시 고대유물 거래, 또는 체계적인 저임금을 방지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거기이며 훨씬 나빠질 것이다.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이라도 하다면,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삭감, 교환의 감소, 전망의 감소, 유통의 감소, 심지어는 더욱 완화된 규제가 있을 것이다. 불편한 예술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무난하지 않거나 성공적이지 않거나 아주 약간 복잡하거나 도전적인 것이라면 어떤 것 이든 사라질 것이다. 지적인 관점, 확장된 규범, 비전통적인 역사는 대폭 축소될 것이다. 당장 눈에 띄는 돈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축소될 것이다. 공적 지원은 인스타그램(Instagram) 인기 지표로 교체될 것이다. 예술은 일종의 예술 증시(Arsedaq) 위에 완전히 떠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박람회, 더 폭력적인 머저리들을 위한 더 길다란 요트, 가슴 큰 금 발여성을 그린 유화, 추상적인 주식차트 모양의 서예. 맛있는 유기농 수퍼 푸드. 가속주의(accelerationist) 디자이너 번성. 탈세자들을 위한 일대일 맞춤 퍼포먼스. 남성 주인, 더 많은 남성 주인 및 그 반복. 예술은 맹수 사냥, 무장한 패러글라이딩, 슬럼가 탐방 어드벤처 곁에 자리잡을 것이다. 

 

값 비싼 공예품과 체인 호텔 로비에 어울리는 공허한 물건에게는 잘 된 일이다. 자연선택에 대해 지겹게 지껄이는 기업 캐릭터로 용접된 플라스틱집괴(plastiglomerate) 대리석. 생물학적 “자기 계발”을 위한 키트. 크랩스트랙션 (crapstraction)[note title=”14″back] 허접함(crap)과 추상(abstraction)을 결합하여 허접한 추상을 그린 투기성 예술작품을 의미한다.(역자 주)[/note], 알고스트랙션(algostraction)[note title=”15″back] 알고리즘(algorithm)과 추상(abstraction)을 결합하여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만든 추상 예술작품을 의미한다.(역자 주)[/note], 크라브 마가(Krav Maga)[note title=”16″back] 이스라엘군이 개발 한 자기방어 무술.(역자 주)[/note] 레슨을 결합한 개인맞춤형 설치. 종교적인 네일페인트(nailpaint)는 특히 루이비통 로고와 더불어 사시사철 죽여줄 것이다. 헤지 펀드 만다라. 겸손한 패션. 야한 패션. 원주민 우상(Nativist mumbo jumbo). 단정한 에스닉풍 도기에 담긴 유전자 조작 캐비어. 개념적인 성형 수술. 인종적인 성형 수술. 맞춤형 상아 총손잡이. 국경 장벽에 그린 벽화. 이런 것들로 잘 해보길 바란다. 당신은 내 철천지원수가 될 것이다. 

 

앞장서서 예술 기관을 단순히 폐지해버린 신자유주의 우파에 의해 제도 비평이 추월된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예술의 비평과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주장은 그들의 반동적 상대편에 의해 축소되었다. 이 반동적 출구 – 혹은 경기침체의 가속화 – 는 이미 한창 진행 중이다. 알고리즘에 의한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시장 조작은 공공 부문과 탈-공공 부문[note title=”17″back] ‘탈-공공(post-public)’은 비엔날레와 많은 기관들과 박물관들과 같은 반(半)-공공인 기업 벤처를 의미한다.[/note]의 지원 철회, 해체 및 공 동화를 동반하면서, 공유된 아이디어, 판단 및 실험을 위한 포럼으로 종종 활용되던 것을 고액순자산보유자(HNWI)의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예술은 고립주의적이고 연결 해제된(unlinked) 규범 안에서 방화벽으로 보호될 것인데, 이 규범은 국가적이고 종교적이며 완전히 편향된 역사로 손쉽게 마케팅될 수 있다. 

 

Game of Thrones lends itself to serving as a metaphor for fanstastic precarity.
〈왕좌의 게임〉은 환상적 불안정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대안적 대안통화?

 

이제 어쩌라는 것인가? 여기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다음 단락을 괄호 안에 넣자. 다음 단락은 단지 가설적인 가능성만을 가리킨다. 

 

만일 예술이 대안적인 통화라면, 그것의 유통은 또한 운영 기반 구조의 윤곽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가 다르게 작동하도록 회수할 수 있을까? 예술의 더 큰 공동체에 혜택을 주기 위해 가장 부패한 측면을 규제하거나 재구성한다면 예술의 대체 통화는 얼마나 가치를 잃을 것인가? 갤러리 계약, 재판매시 최저가, 예술가 수수료[note title=”18″back] W.A.G.E., 불안정 노동자 부대(Precarious Workers Brigade) 등이 이 이슈에 관해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리버레이트 테이트(Liberate Tate), 걸프 레이버(Gulf Labor) 등을 포함해, 새로운 예술가 노조를 비롯한 다른 조직들이 관련된 이슈에 대해 애쓰고 있듯이, W.A.G.E., 불안정 노동자 부대(Precarious Workers Brigade) 등이 이 이슈에 관해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note], 유급 인턴쉽 등, 시장에서 통용되는 규칙의 최소한만이라도 재구성한다면 어떤가? 조세 사기 및 자금 세탁을 방지하기 위해 예술작품의 제작, 거래 및 위치에 대한 블록체인(blockchain) 공공 기록을 도입하는 것은 어떤가?[note title=”19″back] 예술 유통, 비평, 문서화에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면 서로 다른 예술 현상의 정량화, 합의의 조작, 평균의 횡포에의 굴복 등과 관련된 거대한 벌레 통이 열린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예술의 매력(과 가치)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소위 “군중의 지혜”나 인기에 기반한 다른 기능을 항상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모든 예술이 이와 같이 되거나 선물(futures) 및 예측 시장에 따라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어떻게 신나는 동시에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예술이 있다(예를 들어, 코마르 Komar와 멜라미드 Melamid의 “웹상에서 가장 원하는 그림들” http://awp.diaart.org/km/intro.html을 보라). 그렇긴 하지만, 예술을 통한 자금 세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의 출처와 어느 정도까지는 진위성을 기록하고 저작물의 공공 등록과 그 소재지를 확립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종류의 기록 관리는 또한 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지원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또한 예술 작품의 총체적 추적 및 2차 데이터 분석을 위한 잠재력을 창출하여 또 다른 차원에서 사회적 마케팅 및 메타 감시(metasurveillance)로 동화시킨다.[/note] 예술세탁(artwashing) 화석연료 추출[note title=”20″back] 대규모 글로벌 정유회사에서 대중 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문화ᆞ예술 기관에 기부하는 것.(역자 주)[/note], 무기 제조 및 이전 문화계 지원금으로 긴급 구제받은 은행 대신에, 가장 굴욕적인 후원사와 후원자 관계를 거절하는 것은 어떤가? 예술 노동자의 건강보험료를 지불하기 위해 복사에 부과되는 수수료와 유사하게 작품 재판매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은 어떤가? 또는 해외 미술 관련 거래에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은 어떤가? 대안통화로서의 예술은 기존 시스템 내에서 순환될 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경제(공공, 기관, 시장, 평행 예술계 parallel art worlds 등)를 개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지 기반 구조나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진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인터넷이 모든 인류에게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사회주의나 자동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인터넷은 파리 코뮌이 아니라 우버와 아마존(Amazon)을 양산했다. 결과는 ‘공유 경제(sharing economy)’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이는 주로 가난한 자가 부자와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반대는 아니다. 만일 덜 일방적인 공유가 제안된다면 자본의 대부분은 즉각 떠날 것이다.[note title=”21″back] 그리고 순환을 저하시킴으로써, 따라서 아마도 통화로서의 예술의 기능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예술작품을 상품이나 생산품으로 복귀시킴으로써, 통화 기능이 축소될 것이다.[/note] 따라서 평행 예술 부문을 향한 첫 걸음 중 하나는 버블 유동성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부분적인 지속가능성과 매우 제한된 양의 무불노동(free labor)[note title=”22″back] 티치아나 테라노바(Tiziana Terranova)가 창안한 개념으로 디지털 경제 내에서 자발적인 노동인 동시에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공짜 노동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역자 주)[/note]을 조직하는 것이다. 무엇이 등장하건 그것은 새로운 버전의 예술 관련 자율성이 될 것이다. 

 

모더니스트 예술 기획의 자율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자율성은 단독적이거나 연결이 해제되거나 고립되지 않는다. 또한 기술에 내재한 진보의 어떤 환상에 의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한 개체 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교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순환, 변형 및 연금술을 통해 작동하는 자율성이다. 그것이 구축해 낼 연결은 약한 연결(에어 키스[note title=”23″back] 친한 사람들끼리 볼 옆에 대고 공중에서 간접적으로 하는 키스.(역자 주)[/note] 연결로도 알려진)로 존재 하며, 연결을 재조정하는 일이 모순된 활동들의 절충된 혼란상태 내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통해 부분적인 네트워크 자율성을 구축함으로써 예술과 관련된 언더커먼(undercommons)[note title=”24″back] 프레드 모튼(Fred Moten)과 스테파노 하비(Stefano Harvey)가 The Undercommons: Fugitive Plan- ning and Black Study (Brooklyn: Minor Compositions, 2013)에서 발전시킨 일련의 명제들을 적용함. http://www.minorcompositions.info/?p=516 / 본 각주 상의 링크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이 책의 새로 운 링크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www.minorcompositions.info/wp-content/uploads/2013/04/undercommons-web.pdf(역자 주)[/note]과 동기화 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예술이 화폐라면 저류(undercurrent)가 될 수 있을까?우버(Uber)가 아니라 운터(Unter)[note title=”25″back] 독일어에서 위(Uber)에 반대되는 아래(Unter).(역자 주)[/note]처럼 작동할 수 있을까?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예술계가 국가, 재단, 후원자, 기업이 후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그 반대도 적어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역사를 통틀어 예술 작품 제작에 보조금을 주어왔던 이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예술가와 예술노동자였다.[note title=”26″back]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이 “Art without Market, Art without Education: Political Economy of Art,” e-flux journal 43 (March 2013)에서 지적하였다. http://www.e-flux.com/journal/art-without- market-art-without-education-political-economy-of-art[/note] 대부분은 단순히 말해 어떤 형태로건 임금노동(또는 다른 수입)으로 예술 제작 자금을 대는 복합적인 소득 제도를 엮어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는, 관여한 모든 이들 또한 여러 다른 방법으로 예술의 유통에 기여하여 예술을 화폐로서 더 강하게 만든다. 심지어 ‘작품에 의존해’ 살아가는 예술가들조차도 다른 산업과 관련한 엄청난 커미션을 통해 시장을 지원하는 셈이다. 그러나 왜 VIP 사전프리뷰, 채울 수단이 없는 맞춤형 박물관 증축, 아트 페어 군비 경쟁, 형벌 식민지라는 조건 하에 세워진 기관 프랜차이즈, 다른 당혹스런 거품을 후원해야 하는가? 이 부풀고, 제목이 붙고, 완전히 잉여적이며, 당혹스럽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해로운 경비가 무불 노동과 삶의 시간을 통해 보조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블링스트랙션 (blingstraction)[note title=”27″back] 화려한(bling)과 추상(abstraction)을 결합한 예술작품 형식으로 추정.(역자 주)[/note]에 주목하고 그것의 파생물을 유통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영향력과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보조를 받는다. 심지어 어떤 수입이건 마다할 처지에 있지 않은 대부분의 예술가조차도 이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note title=”28″back] 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어떤 것이든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사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자신이 유통에 참여한다는 것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note] 이런 종류의 후원을 거부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폭력과 분열을 간접적으로 증가시키는 투기적 운영에 대한 지속불가능하고 굴욕적인 의존성을 뒤흔들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은행 재단을 위해 무료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돕는 것에 자유시간[note title=”29″back] 여러 훌륭한 사례 중 하나는 베를린의 노이에 나흐바샤프트(Neue Nachbarschaft, 새로운 이웃)를 들 수 있다. 오래된 거주자든 새로 이사 온 사람이건 베를린 사람들은 예술 강좌와 독일어나 음악 수업을 듣기 위해 여기에 모인다.[/note]을 써라. 독점 플랫폼에 기업의 허튼 소리를 ‘공유’하지 말라.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파시스트의 얼굴을 한 글로벌 자본주의를 원하는가? 더 미친 날씨, 미친 지도자, 유독하고 수위가 높아지는 물, 허물어지는 기반 시설 및 새로운 장벽을 예술세탁하고 싶은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을까?[note title=”30″back]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웹사이트(http://platformcoop.net/about)를 보라. 여기서 아이디어는 노동자가 소유하거나 조직한 협동조합인 플랫폼을 통해 노동자 및 서비스 공급자와 사용자를 연결하기 위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이미 존재하는 많은 사례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수 많은 예술 프로젝트가 다른 버전의 블록체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새미 에모리(Sami Emory) 의 “BitchCoin Is a New Cryptocurrency for Art,” The Creator’s Project, February 10, 2015. http://thecreatorsproject.vice.com/blog/bitchcoin-is-a-cryptocurrency-for-art; 스티븐 색스 외(Steven Sacks et al.)의 대화인 “Monegraph and the Status of the Art Object,” dis magazine을 보라. http://dismagazine.com/discussion/73342/monegraph-and-the-status-of-the-art-object/ 블록체인을 다루는 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뛰어난 비판적 성찰은 스벤 뤼티켄(Sven Lütticken)의 “The Coming Exception,” New Left Review 99 (May–June 2016)에서 찾을 수 있다.[/note] 얼마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예술적 (및 예술 관련) 자율성은 어떻게 오만한 주권에서 겸손한 네트워크 권력이양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note title=”31″back] 이 질문에는 사미르 아민(Samir Amin),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및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탐구한 개념, 즉 동시에 네트워크화되고 파편화시키는 글로벌 시스템의 조건 하에서의 “탈연결(delinking)”이라는 개념을 재검토할 긴 단락이 요청된다. 이 텍스트의 보다 완전히 발전된 버전은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의 “자율적 교환양식”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The Structure of World History: From Modes of Production to Modes of Exchange (2014); 한국어판: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2에서 가라타니는 유통을 생산양식으로 중시하며 조합주의(cooperativism)와 연합주의(associationism)를 창의적인 조직의 장소로 강조한다. 예술 시스템은 가라타니가 언급한 대부분의 순환양식, 즉 농경이전의 씨족기반 양식, 약탈, 수용 및 국가에 기반한 양식, 그리고 자본주의 양식을 결합한다. 예술은 또한 공유, 인클로저의 해체, 지역적으로 실현된 다양한 지역구 및 LETS와 기타 사전 블록체인 이전의 대안통화를 사용하는 평행경제의 창출에 기반한 잠재적 미래 유통양식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완전한 부패를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평행한 교환양식을 의미한다. 관련된 주석에 관해서는 아리아 딘(Aria Dean)의 훌륭한 최근의 텍스트인 “Poor Meme, Rich Meme” 를 보라. 이 텍스트는 공유된 움직임, 역사, 운동 및 다양성으로 투사된 흑인 유통주의(Black circulationism)의 방향을 그려내고 있다. http://reallifemag.com/poor-meme-rich-meme/[/note] 플랫폼 협동조합은 어떻게 이 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가? 예술기관은 새로운 지방자치 네트워크와 ‘반란도시'[note title=”32″back] 나는 거대 예술기관들은 스스로를 도시로 여길 수 있다고 본다.[/note] 연합의 주도를 따를 수 있는가? 파생파시즘에 직면하여 지역적 삶의 형태가 혈연, 지연, 국가 및 기업을 넘어서 이웃, 대중, 중층화된 관객의 네트워크로 재구상할 수 있는가?[note title=”33″back] 우리는 누사이빈(Nusaybin), 지즈레(Cizre), 수르(Sur) 및 수루취(Suruç)를 포함한 터키 동남부의 친 쿠르드민주지역당(DBP)이 관리하는 24개의 패배한 지방자치당국(그중 일부는 자치권을 선언했으며 집회 기반 자율성 모델로 작동한다)처럼 공격받는 지방자치당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note] 예술은 지역적 상상력을 호기심 어리고 개방적이며 활기차게 유지할 수 있는가? 소속감이 존재해 온 것이 아닌 형성 중인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note title=”34″back]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Conjunction, Disjunction, Gift” (transversal [January 2011]. http://eipcp.net/transversal/0811/massumi/en)에서 발전시킨 명제.[/note] 성장 감퇴하는 지방자치당국에서 예술의 규모, 관점 및 도전은 무엇인가? 예술의 통화를 예술의 합류(confluence)로 변형할 수 있을까? 투기를 범람(overflow)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note title=”35″back] 운동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연립(coalition) 대신에 합류. 범람: 역동적인 발전에 대한 생산적인 통제의 상실. 이 개념 및 다른 개념들에 관해서는 transversal 저널의 새로운 이슈들을 보라. http://transversal.at/transversal/0916[/note]

 

오랫동안 간과되거나, 경시되거나, 숭배되거나, 망가진 가치 프로세스에서 예술의 조직화 역할은 마침내 합리적이지는 않아도 아마 현실적으로 접근할 정도로 충분히 명확해지고 있다. 대안통화로서의 예술은 예술 분야가 이미 오래된 가십, 욕심, 고귀한 이념, 음주벽, 무자비한 경쟁이 무수한 네트워크화된 파벌을 형성하는 중첩된 시스템의 미로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의 가치의 핵심은 거래에 의해서보다는 가십, 비판, 풍문, 흥정, 야유, 동료 리뷰, 잡담, 의견차를 통한 끝없는 협상에 의해 생성된다. 그 결과는 봉건적인 충성심과 열렬한 적대감, 거절된 사랑과 강렬한 시기심, 공동의 분투, 갈망, 그리고 생명력의 단단한 뒤엉킴이다. 요컨대, 가치는 제품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있다. 가치는 시장의 뒤를 좇거나 예측[note title=”36″back] 예술가들의 수명을 추산함으로써 혹은 여성 예술가들이 키우는 아이들의 숫자에 따라 투자함으로써.[/note]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창출하는 데 있 다.[note title=”37″back] 나는 이것을 엘리 아야슈(Elie Ayache)의 매력적 저서인 The Blank Swan: The End of Probability (Hoboken, NJ: Wiley, 2010)에서 배웠다.[/note] 무엇보다 예술은 파생파시스트들이 아직은 통제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교환 중 하나다. 

 

그러나 멍청하고 비열하며 탐욕스런 돈을 위한 준비제도로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자기)파괴되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빈껍데기를 보호하고 파편화와 분열을 증폭시키는 껍데기 사업으로 변한다. 유사하게, 예술 장소들(art venues)은 마치 전 세계적으로 세 명의 같은 건축가에 의해 디자인된 듯한 도금된 폐쇄 주택가 내부의 보세 창고와 과도하게 디자인된 은행 금고로 이미 변모하는 중이다. 

 

완전히 조작된 시스템의 기축통화로서의 예술에 대한 모토가 무엇인지 상상하기란 쉽다. 그저 큰 아트 페어의 입구를 지키는 화려한 PR 담당자가 배제되고 추방당하며 착취당하고 무시당한 사람들에게 신중히 이렇게 선언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빵이 없으면, 그냥 예술을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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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문화이론전문지 『문화/과학』 89호에 수록된 바 있으나 해당 출판사인 문화과학사와 번역자의 동의를 얻어 부분 수정 후 재게재함을 밝힙니다. 흔쾌히 허락해주신 문화과학사와 번역자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