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번역 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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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마틴(Roger Martin)이 그린 르 크루아시크 13(Le Croisic 13).

 

서론

‘신유물론’의 점증하는 유명세는 인간과 비인간 또는 인간 외의 물질적 세계에 대한 오래된 기존 가정들을 극복하려는 교차-학제적(cross-disciplinary) 탐색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이 논문은 현재 통용되는 신유물론에 관한 단일한 정의란 없지만, 적어도 세 가지 구별되고 부분적으로는 양립불가능한 궤적들이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note title=”1″back] ‘생기적’, ‘부정적’, 그리고 ‘수행적’ 신유물론. 세 가지에 대해 폭넓게 인용되는 자료들에서 ‘신유물론(들)’을 정의하는 것을 보려면, Stacy Alaimo and Susan Hekman, eds., Material Feminisms (Minneapolis: Indiana UP, 2008); Diana Coole and Samantha Frost, eds., New Materialisms: Ontology, Agency, and Politics (Durham, NC: Duke UP, 2010); Rick Dolphijn and Iris van der Tuin, eds., New Materialism: Interviews and Cartographies (Ann Arbor, MI: Open Humanities, 2012)를 참조. 앞의 두 논문집 서문은 신유물론을 존재론과 인식론, 또는 물질과 의미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전자의 논문집이 수행적 신유물론자들, 즉 카렌 바라드와 비키 커비를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존재인식론적 상간-작용이나 수행적 신유물론을 무시한다. 두 번째 자료의 서문은 생기론적 접근을 받아들인다. 세 번째 책은 세 신유물론 옹호자들과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책의 절반에서, 그들은 생산적인 대화 안에서 서로를 인용하는데, 이는 횡단적 신유물론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이 유물론은 많은 측면에서 수행적 접근을 포용한다. 이 자료들 중 어떤 것도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수행적, 생기적 그리고 부정적 신유물론 간의 핵심적인 차이를 이론화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우리 논문의 최우선적인 이론적 목표다.[/note] 이 세 가지 궤적들 모두 최소 하나의 공통된 이론적 수행을 공유한다. 즉 대부분의 20세기 이론에 존재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이고 구성주의적인 지향(anthropocentric and constructivist orientations)을 과학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를 고무하는 방식에 따라 인문학적으로 문제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전회’에 공통적 동기는 지배적인 서구-유럽 전통 안에서 물질을 본질적으로 의미화가 결여된 수동적 실체로서 공연히 부정 또는 폄하한다는 것이다. 어떤 실질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말하자면, 신유물론자들이 그저 물질이 얼마나 ‘살아 있는’, ‘활기찬’, ‘생기 넘치는’, ‘역동적인’, ‘행위주체적인’ 따라서 능동적인 것인지 그저 평이하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유물론 학자들이 이러한 말들을 교환가능하도록 사용하지만[note title=”2″back] 이 외에 부정적 신유물론자들은 ‘살아 있는’, ‘생생한’ 또는 ‘생기적’과 같은 개념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Timothy Morton, The Ecological Thought (Cambridge, MA: Harvard UP, 2010)을 보라. 여기서 그는 인터넷을 “‘웹’(Web)”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 생각에는 […] 다소 너무 생기론적”이라고 하면서, 그 대신 보다 덜 생기론적-어감을 가진 ‘메쉬’(Mesh[그물망, 철망-역자])를 선호한다(28).[/note] , 그와 같은 개념들이 우리가 지목할 세 가지 접근들에서 날카롭게 분기(divergent)하는 의미로 취급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래에서 음미할 것처럼, 신유물론을 떠받치는 이 동일한 분기가 인간중심적 이항대립(이를테면 ‘의미와 물질’, ‘문화와 자연’ 그리고 ‘젠더와 섹스’) 또한 애써 문제화하려는 지점이기도 하다.   

 

신유물론의 발흥을 따라, 많은 비판들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신유물론은 초기 페미니즘 학제의 ‘자연생명혐오’(biophobia)나 물질 부정의 범위를 과장한다고 비판받는다.[note title=”3″back] 최초의 공식화로는Sara Ahmed, “Imaginary Prohibitions: Some Preliminary Remarks on the Founding Gestures of the ‘New Materialism,’” Europe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5.1 (2008): 23–39를 보라. 니키 설리반(Nikki Sullivan)의 “The Somatechnics of Bodily Inscription: Tattooing,” Studies in Gender and Sexuality 10.3 (2009): 129–41에는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보다 최근의 것으로는 Caroline Braunmühl, “Beyond Hierarchical Oppositions: A Feminist Critique of Karen Barad’s Agential Realism,” Feminist Theory 19.2 (2017): 223–40; Dennis Bruining, “Interrogating the Founding Gestures of the New Materialism,” Cultural Studies Review 22.2 (2016): 21–40. For responses, see Davis, “A Response and Feminism’s Anti-Biologism: A Response to Sara Ahmed,” Europe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6.1 (2009): 67–80; Iris van der Tuin, “Deflationary Logic,” Europe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5.4 (2008): 411를 보라. 데이비스의 논문에 따르면, 아메드가 인용한 페미니즘 과학 연구는 ‘뒤얽힘’(entanglement)이 아니라, 바라드가 ‘혼종’(mixture)라고 부르는 인간적 의미와 생물학 간의 관계를 취급한다(71, 75 n. 5). 전자는 어떤 미리 존재하는, 이산적인, 불변하는 경계를 가정하면서, ‘둘 모두/그리고’ 또는 ‘상호작용적’ 논리를 함축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경계들은 상호적으로 또는 ‘간-행적으로’(intra-actively) 구성된다. 우리는 오직 수행적 신유물론만이 간-행적으로 뒤얽힌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페미니즘의 ‘반생물학주의’에 관한 최근의 비판은 Elizabeth A. Wilson, Gut Feminism (Durham, NC: Duke UP, 2015)을 보라.[/note] 이들이 잘못된 근거에 기반하여 맑스주의와 문화 유물론을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이다.[note title=”4″back] Simon Choat, “Science, Agency and Ontology: A Historical-Materialist Response to New Materialism,” Political Studies 66.4 (2011): 1027–42; Joss Hands, “From Cultural to New Materialism and Back: The Enduring Legacy of Raymond Williams,” Culture, Theory and Critique 56.2 (2015): 133–48.[/note] 또는 물질 자체와 물질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무비판적으로 포괄하고 뒤섞는다고 비판받기도 한다.[note title=”5″back] Angela Willey, “Biopossibility: A Queer Feminist Materialist Science Studies Manifesto,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Question of Monogamous Behavior,”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41.3 (2016): 553–77.[/note] 또한 이러한 비판은 신유물론이 ‘새로움’[note title=”6″back] Sarah Ellenzweig and John H. Zammito, eds., The New Politics of Materialism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7)를 보라. 이 논문집은 스스로를 “신유물론에 있어서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묻고, 그것을 간학제적 전망 안에 정위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대부분이 장들은 비판적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note]을 과도하게 내세운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비판들은 그 모든 신유물론자들을 동일한 비판 아래에 [구분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놓아둠으로써 그 타겟을 자주 잘못 지정해 왔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논문은 그와 같은 비판에 대해 신유물론을 그저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대답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합한 타겟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재겨냥하는 것에 도움이 되길 희망하며, 이에 기반하여 우리는 기꺼이 ‘수행적인’(performative) 또는 ‘방행적’(方行的, 무작위적, pedetic) 신유물론에 접근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이 앞으로의 발전에 가장 큰 가치와 잠재력을 가질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접근이 나쁜 방식으로 오해되고 출현중인 신유물론의 두 가지 유형과 잘못 뒤섞여 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 신유물론’(negative new materialism), ‘생기적 신유물론’(vital new materialism), 그리고 ‘수행적’ 또는 ‘방행적’(무작위적) 신유물론이 어떻게 단순히 서로 양립가능한 것은 아닌지 조명하고자 한다.[note title=”7″back] 위 주석 [1] 참조.[/note] 그들의 동기들은 비슷할지라도, 그것을 이끌어가는 기초적인 전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유물론의 세 가지 유형 각각이 고유하게 수동적이고 의미화가 결여되었다는 물질에 관한 인간중심주의의 가정을 비판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오직 수행적 신유물론만이 인간과 물질 사이의 어떤 이산적(discrete) 분리를 급진적으로 침식한다고 논증한다. 여러모로 부정적 그리고 생기적 신유물론은 물질의 진정한 수행적 운동의 가치를 계속 차단해 왔다. 한편으로 부정적 신유물론은 또한 인간과 사유 간의 근본적 분리, 그리고 비유기적 물질 또는 어떤 ‘물러난’(withdrawn) 본질을 포함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둘은 모두 어떤 외적인, 인간-관찰자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고 한다.[note title=”8″back] Carol A. Taylor, “Close Encounters of a Critical Kind,” Cultural Studies – Critical Methodologies 16.2 (2016): 201–12. 이 논문은 대부분 직접적으로 객체-지향 존재론 이론가인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 210)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비판은 Thomas Lemke, “Materialism without Matter: The Recurrence of Subjectivism in ObjectOriented Ontology,” Distinktion: Journal of Social Theory 18.2 (2017): 133–52에서 재진술된다.[/note] 다른 한편으로 생기적 [신]유물론은 분명히 어떤 형태의 본질주의도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기적 신유물론이 비유기적 물질에 투사된 삶/생명의 형이상학을 통해 그 본질주의를 슬며시 다시 들여 놓는다고 본다.[note title=”9″back] Thomas Lemke, “An Alternative Model of Politics? Prospects and Problems of Jane Bennett’s Vital Materialism,” Theory, Culture and Society 35.6 (2018): 31–54. “시효 지난 어휘로 그것을 논하자면 다음과 같다. 베넷은 유물론에 기반하여 ‘관념론’을 찬성한다.”(46)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생기적 유물론에는 물질성이 결여되어 있다”(47). 이와 조응하는 생기적 유물론 비판은 Quentin Meillassoux, “Iteration, Reiteration, Repetition: A Speculative Analysis of the Meaningless Sign,” trans. Robin Mackay, Freie Universität, Berlin, 20 Apr. 2012, 4를 보라.[/note] 이러한 결정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아래에서 비수행적 신유물론 이론들이 어떤 객관주의적인, 비관계적인 따라서 관념론적 가정들이나 잔여들을 지속시킨다고 설명할 것이다.[note title=”10″back] 이 되풀이되는 문제에 대한 (충분하게) 수행적인 해법이 제안되지 않는 동안, 유물론은 지속적으로 여러 관념론들에 의해 감염되고 침식당해 왔다. Jean-Michel Salanskis, “Some Figures of Matter,” trans. Ray Brassier, Pli: The Warwick Journal of Philosophy 12 (2001): 5–13를 보라.[/note]

신유물론에 대한 수행적 접근은 그 행위자들을 이끌고, 구조화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 인간적 의미화를 포함한 – 물질의 외부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어떤 가정을 거부함으로써 이산적 분리를 성공적으로 회피한다. 이와 같은 전망에서, 카렌 바라드(Karen Barad)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물질은 단순히 “어떤 작용(doing) (…) 이다.”[note title=”11″back] Barad, Meeting the Universe 151. 강조는 필자.[/note] 토마스 네일(Thomas Nail)에 따르면, 물질은 그것이 작동하는 바이거나 “그것이 움직이는 방식”이다.[note title=”12″back] Thomas Nail, Being and Motion (Oxford: Oxford UP, 2018).[/note] 그리고 인간의 수행이 물질적 세계의 중지상태에 속한 것들에 외재적이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게도 이 전망은, 모든 관찰 행위가 동시에 관찰되고 있는 것의 변형이며, [따라서] 구성중인 과학에 관한 수행적 이해로 이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신유물론에 관한 비판에 다음과 같은 응답을 할 수 있다.

(1) 물질의 방기(neglect). 우리는 몇몇 신유물론이 문제화하려고 하는 이항대립을 부지불식간에 실재로는 강화한다고 보지만[note title=”13″back] 주석[4]를 보라.[/note] , 이러한 비판이 수행적 접근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믿는다. 예컨대 후자가[비판들이] 물질에 대한 선행적인 ‘방기’[무관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전의 이론가들이 물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론가들은 물질을 (정확히, 인간을 예외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의미란 비물질적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가정에 기반하여) 고유하게 동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방기[방치]했거나 가치절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note title=”14″back] 예컨대 『우주의 길목에서 만나기』에서 바라드의 영향력 있는 언급은 다음과 같다. “오직 더 이상 물질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물질이다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132).[/note]

(2) 과학 선망(Science envy). 우리는 물론 몇몇 신유물론자들이 과학을 그것의 발견들과 물질 자체를 융합하는 식으로 무비판적인 수용을 했다는 데 동의하지만, 수행적 사유에서 과학적 실천들과 담론들은 이런 저런 행위나 인간 또는 그 외의 것들이라고 기술하는 바로 그 세계의 생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고려는 모든 인간적 담론들이 구성적이라고 보는 후기 구조주의와 과학-기술 연구들에 동의한다. 하지만 새로운 논증에서는 (적어도 서구-유럽적의 지배적인 전통 안에서) 그 담론들 역시 그 자체로 – 그리고 오로지 – 물질의 특유한 구성이나 수행들이라고 본다.     

(3) 새로움에의 집착. 비록 우리가 신유물론의 분명한 새로움을 역사적으로 의문시하는 작업을 포용한다해도, 이러한 비판이 수행적 접근에 적용된다는 것에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은 언제나 운동 중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의 창조성이 서구 전통에서 어떻게 지워지고 배제되었는지 다른 곳에서 보여 주었다.[note title=”15″back] Nail, Being and Motion; Christopher N. Gamble and Joshua S. Hanan. “Figures of Entanglement: Special Issue Introduction,” Review of Communication 16.4 (2016): 265–80.[/note] 더구나 단언컨대 수행적 유물론에서 가장 중요한 서구-유럽의 역사적 선구자는 고대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인데, 그의 철학적 시는 많은 방면에서 호메로스에 관한 수행적 유물론의 이해와 연결된다.[note title=”16″back] Thomas Nail, Lucretius I: An Ontology of Motion (Edinburgh: Edinburgh UP, 2018); Lucretius II: An Ethics of Motion (Edinburgh: Edinburgh UP, forthcoming 2020)을 보라.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Christopher N. Gamble (MS in progress)을 보라.[/note] 덧붙여 우리는 또한 바라드의 ‘행위주체 실재론’(agential realism, 행위적 실재론)과 같은 수행적인 ‘신’유물론과 본래의 문학 연구에서 논의되는 여러 가지 행위주체 존재론들[행위적 존재론들] 사이의 친연성(그리고 차이)에 대한 보다 큰 관심을 촉구하고 그것에 지속적으로 연루되고자 하는 최근의 경향에서 큰 중요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중 몇몇 경우들은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note title=”17″back] Jerry Lee Rosiek, Jimmy Snyder, and Scott L. Pratt, “The New Materialisms and Indigenous Theories of Non-human Agency: Making the Case for Respectful Anti-Colonial Engagement,” Qualitative Inquiry (forthcoming 2019).[/note] 따라서 우리는 수행적 유물론을 더 오래 전에 경시되거나 광범위하게 무시된 유물론을 새로운 형식으로 회복한 것이지, 어떤 무로부터 출현한 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이해한다.

이 논문의 목표는 유물론에 대한 수행적 또는 방행적 접근이 예전 유물론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유물론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분명히 하는 것이다. 1부의 일반적 목표는 우선은 [그러한] 구별을 전개한다.

 


1부: 구유물론들(old materialisms)  
이 논문의 1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구유물론들을 비교한다. 고대와 근대 유물론이 그것이다. 각각은 서로 간에 구별되지만, 공통적으로 물질을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비-수행적으로 구성되는, 그리고 자기충족적인 개념으로 본다. 더욱이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물질의 바깥에서(다른 지점에서) 어떤 객관적인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이때 우리가 (그리고 오직 우리만이) 물질의 진정한 본성 또는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비-수행적이며, 내밀한 관념론적(crypto-idealist) 가정으로부터 나온다.

 

고대 유물론
유물론의 뿌리는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에 의한 이후의 변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시작할 지점은 이곳이다. 왜냐하면 고대 원자론은 유물론이 어떻게 오랫동안 규정되어 왔는지 뿐만 아니라, 우리가 3부에서 논할 것처럼, 신유물론이 이 오래되거나 표준적인 사유에 대해 회복하고 극복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어떤 중추적 표현 같은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리는 고대 원자론의 핵심적인 특징 – 그 존재론적 사유, 물질의 고유한 수동성 개념, 그리고 외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로서의 인간 – 을 신유물론에 대한 유의미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논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수행적 유물론의 이점으로부터 고대 원자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유물론적 노고들을 평가하기 위한 일련의 유용한 기준을 제공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3부에서 이 지점으로 돌아와 더 발전된 논의를 진행시킬 것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실재하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진공을 가로질러 항구적으로 이동하는 영원하고, 작고 불가분적인 원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note title=”18″back] 그러나 원자론자의 허공은 진공에 관한 현대적 개념과는 구분된다. David Sedley, “Two Conceptions of a Vacuum,” Phronesis 27.2 (1982): 175–93.[/note] 그러므로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 – 가장 큰 별들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포함하여 심지어 신까지도 – 은 너무 작아 직접 관찰하기 어려운 날아다니고, 파괴될 수 없는 물질 조각들의 계속적인 충돌과 이후의 구성 그리고 해체로 환원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신유물론이 포용할 고대 원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단순하게 인식론적이라기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점이다. 즉 고대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그들의 감각 지각, 문화적 관습, 또는 언어의 선입관과 한계들에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실재 존재, 즉 원자와 허공에 접근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비록 데모크리토스가 ‘진정한’, 신뢰할 만한 진리를 제공할 정신의 능력에 반하는 ‘허튼’ 감각적 지식에 반대했다 해도[note title=”19″back] DK 68B6-11.[/note], 그는 심지어 정신조차도 사실상 오로지 물질적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note title=”20″back] DK 68A28.[/note] 따라서 고대 원자론은 퀭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상관주의라고 부르는 것 – 실재가 오직 인간 사유와의 모종의 관계에서만 접근가능하다고 보는 관점 – 을 피해가는데, 왜냐하면 인간 사유가 확실히 실재 자체로의 접근을 제공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note title=”21″back] Quentin Meillassoux, After Finitude: An Essay on the Necessity of Contingency, trans. R. Brassier (London: Continuum, 2009) 36–37. 메이야수는 에피쿠로스주의를 내세우면서(“모든 유물론의 패러다임”), 또한 그 논점을 똑같이 데모크리토스에게도 적용한다.[/note]
 
하지만 신유물론이 고대 원자론에 대해 가장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유하게 수동적인 물질 개념이다. 게다가 그 수동성은 어떤 근원적 – 이고 근원적으로 불만족스러운 – 역설을 원자론적 존재론의 핵심에서 드러낸다. 즉 원자들은 무한한 수의 이전에 갖추어진 모양과 크기에 기반하여 그 충돌과 이후의 결합을 통해 자연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산에 대해서는 창조적 행위주체로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모양과 크기들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그 순간속도는 가장 최근의 충돌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별체들이 그 행위주체적 측면을 완전히 결여한 채, 살아 있고, 생각하는 생명체들을 불러일으키는가? 원자론은 이 질문에 대해 오로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서 그 행위주체성을 박탈하는 결정론을 통해서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몇몇 신유물론자들은, 그것의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원자의 고유한 수동성이 근본적으로 제멋대로인 비창조적인 우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note title=”22″back] Ibid. 99–101.[/note] 다시 말해 원자들은 오직 총체적으로 무작위한 충돌들, 즉 수동적으로 앞서 존재하는(pre-existing)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그 충돌들을 통해서만 [우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note title=”23″back] 원자의 우연한(random) 운동에 대해서는 DK 67A14, 68A37을 보라.[/note] 따라서 특정한 원자들이 형성할 복합물이 무엇이든지간에, 가능한 복합물들의 총체는, 원자들의 주어진 특성이라는, 단지 영원히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비록 그와 같은 우연한 충돌들이 오로지 우리가 아는 이 하나의 복합적으로 질서잡힌 세계만을 초래한다는 것이 극단적으로 말해 명백하게 있음직 하지 않다 해도, 데모크리토스는 우리의 세계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논증한다. 사실 그는 무한한 수의 원자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무한한 수의 공존하는 세계, 또는 코스모이(조화, kosmoi)가 있다고 주장한다.[note title=”24″back] DK 67A24, 68A40.[/note] 그리고 원자들의 고유한 무작위성 때문에, 우리의 우주도 포함하여, 어떤 가능한 [다른] 코스모스(우주, kosmos)의 현실성도 결과적으로 똑같이 있음직한 일이다. [하지만] 요컨대 물질의 본질적 수동성과 불변성으로 인해, 우주적 [조화의] 가능성의 전체 범역이 선결정되고 변치 않는 것이 된다. 그 안에서 무한한 수의 세계들이 (무작위적으로) 출현하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이후, 아마도 인간 행위주체의 척도를 애써 보호하기 위해 에피쿠로스는 그의 유명한 클리나멘 개념으로 소량의 예측불가능성을 개별적인 원자들에 투여했다. 물론 이에 따라 데모크리토스의 결정론이 약화된다.[note title=”25″back] David Sedley, “Epicurus’ Refutation of Determinism” in SUZHTHSIS: Studi Sull’ Epicureismo Greco E Romano Offerti a Marcello Gigante (Naples: Biblioteca della Parola del Passato, 1983) 11–51을 보라.[/note] 이렇게 개량된 사유 안에서, 일반적으로 원자들은 예정된 경로에 무작위적으로 남겨지지만, 우연히 어떤 단일한 원자가 이웃한 경로로 빗나가게 된다. 이로써 사건의 폭포에 잠재적으로 방아쇠가 당겨지고, 마치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처럼, 엄청나게 변화된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note title=”26″back] 카오스 이론에 대한 접근이 용이한 것으로, ‘나비효과’에 관한 논의가 있다. James Gleick, Chaos: The Making of a New Science (New York: Viking, 1987)을 보라. 그렇다 해도, 큰 규모의 변화를 초래하는 이 작은 분기들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은 정말로 자생적(spontaneous, 즉흥적)이다(즉 내재적으로 야기되며 따라서 어떤 외적 법칙들이나 힘들로 환원불가능하다). 반면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는 예측불가능한데, 이는 단순히 그 최초의 조건들과 원칙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또는 어떤 전지한 존재만이 알 수 있는) 자연법칙에 대한 우리 지식의 결핍에 기인한다.[/note]

어떤 신유물론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일반화된 판본에서 클리나멘을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고 ‘살아있는’ 것으로서 물질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note title=”27″back] 클리나멘을 어떤 “물질성 자체에 내재하는 생생한 추진력(impetus)”으로 보는 관점, 즉 “에피쿠로스주의적인 생기적 유물론”에 대해서는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NC: Duke UP, 2010) 68를 보라. 하지만 베넷은 에피쿠로스주의의 “진공 안에서 낙하하거나 클리나멘을 일으키는 개별적 원자들에 관한 상상”을 비판한다(xi). 대신에 그는 들뢰즈적 배치의 구성적 기능을 강조한다(2장을 보라). 루크레티우스에 대한 이런 생기적 해석의 비판은 Nail, Lucretius I을 보라.[/note]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관점이 실재적으로 물질과 실재를 단지 본질적으로 비-생성적이며 여전히 가능성들의 불변하는 총체성에 제한하는 것임을 올바르게 깨달았다.[note title=”28″back] 위 주석[22] 참조.[/note]우리는 이 후자의 관점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와 같은 동의에 대해 분명히 수행적인 관점에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우주적 가능성들의 총합이 또한 역시 불변하는 것으로 남는 것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이 그것들의 운동들과 서로간의 만남을 가로질러 오직 내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아래에서 고찰하는 것처럼, 물질에 관한 수행적 이해는 모든 범위에서 물질이 각각의 새로운 운동과 만남에 의해 미세하게나마 반복하여 변형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수행적 물질은 따라서 그것이 무작위적/결정론적이든(데모크리토스적) 또는 개연적이든(에피쿠로스적) 결코 양적으로 소진되는 법이 없다. 대신에 물질의 반복적 수행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개별체들과/관계로서 구성하기 때문에 언제나 부분적으로 계산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수행적 물질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들과 불가능성들을 생성한다.   

이 장을 마무리 하기 전에, 우리가 살펴봐야할 것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고대 원자론의 비-수행적 차원이다. 우리는 가장 깊숙이 확립되고 무엇보다 음미되지 않은 채로 있는 가정이 이 차원에서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고전문헌학자인 다니엘 그래함(Daniel W. Graham)이 최근 주목한 바에 따르면, 그리스 원자론은 (서구 형이상학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우주란 ‘자연적 설명의 닫힌 체계’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note title=”29″back] Daniel W. Graham, Explaining the Cosmos: The Ionian Tradition of Scientific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P, 2006) 15.[/note] 나아가 이 가정은 우리를 특권적인 인간 – 이른바 우리의 이성과 언어에 관한 특출한 능력에 의해 – 으로 정립한다. 이때 우리는 관찰들에 의해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자족적인 물질 세계의 근원적인 관찰자이다. 아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논하듯이, 오직 수행적 신유물론만이 이 가정을 완연하게 극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적 의미와 관찰을 이론화하게 된다.

 

근대 유물론

두 번째 구유물론은 근대 유물론으로서, 대략 16세기경에 출현했다. 원자론이 인간이 물질의 형이상학적 실재(원자와 허공)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유물론도 물질의 운동을 설명하는 (force)의 형이상학적 실재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인간은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각 경우에 다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실재적인 것에 존재론적 접근을 허용받았다. 근대 유물론자들은 그리스 원자론의 수동적 유물론을 광범위하게 수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능동적인 생명(power)을 도입했다.

소위 ‘기계론의 시대’가 물질적 결정론의 시대처럼 사유되었던 것은 철학사에서 크나큰 오류이다.[note title=”30″back] 신유물론자들도 유사한 실수를 범했다. Charles T. Wolfe, “Varieties of Vital Materialism” in Ellenzweig and Zammito, New Politics of Materialism 44–65; Coole and Frost, New Materialisms를 보라.[/note] 유물론적 자연학[물리학]과 자연주의적 신학이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발흥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까지 물질의 기계적 운동의 제일 동력인은 언제나 힘 – 물체들이 움직이는 원인인 어떤 형이상학적 힘(power) – 으로 남아 있었다. 요컨대 ‘형상과 질료’라는 고대 공식은 점점 더 ‘힘과 기계론’이라는 근대적 공식으로 대체되어 갔다. 이 시기에 생기론과 기계론은 서로 간의 대립하기보다 함께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note title=”31″back] 생기론과 기계론에 반대하는 논문의 예로는, Georges Canguilhem, “Aspects of Vitalism” in Georges Canguilhem, Knowledge of Life (New York: Fordham UP, 2008) 59–74를 보라.[/note] [그래서] 근대 기계론의 관점에서 자연은 점차 그 신체가 시계 부속장치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각각의 ‘원자들’ 또는 ‘적백혈구들’의 복합체로 기술되었다. [note title=”32″back] Edward Dolnick, The Clockwork Universe (New York: HarperCollins, 2011).[/note] 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그 시계장치를 휩싸고 돌고 부속품들을 관통하면서 움직임을 전달하는 누군가(신) 또는 무언가(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근대 시기 동안 물질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어떤 것, 즉 (force)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었다. 예컨대 16세기에, 영국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원래 14세기 말에 버디안(Burdian)과 16세기에 필로포누스(Philoponus)에 의해 제기된 신성한 추진력(impetus; force)이라는 공식과 동일한 것을 따를뿐 아니라, 자연을 이러한 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어떤 시계장치처럼 묘사했다. “자연의 법칙은 이제 세계가 끝나기까지 불가침적으로 남아 통치하는 바, 신이 처음 그의 노고를 내려놓고 창조를 그만둘 때 비로소 힘 안에서(in force) 시작되었다.”[note title=”33″back] Francis Bacon, A Confession of Faith [1602] in The Works of Francis Bacon, ed. James Spedding (London: Green, 1857–74) 14: 49–50.[/note]

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거기 힘(자연의 법칙들)을 불어넣었다. 마치 시계가 작동하는 것과 같이, 자연은 이러한 아주 단순한 원리들에 의해 부과된 이동과 긴장의 운동에 따라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펼치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따르면 “이 첫 번째 입자들 안에 신에 의해 이식된 힘”은 ‘다양한 사물들’을 구성한다.[note title=”34″back] Idem, “On Principles and Origins According to the Fables of Cupid and Coelum” in The Works of Francis Bacon, ed. James Spedding (London: Green 1857–74) 10: 648.[/note] 신은 물질의 원자론적 입자들의 형상 안에서 스스로를 외재화한다. 그리고 충돌을 통해, 신에 의해 최초로 전달된 힘이나 추진력을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이 생산된다. 베이컨은 따라서 신학, 자연주의 그리고 기계론을 생기적 힘의 관계들에 관한 단일한 이론 안에 종합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여기서부터 기계론은 거의 언제나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생기론을 포함하게 되었다.

비록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물질과 정신 사이에 강경한 이원론을 채택하였다 해도, 사람들은 그의 물리학 안에서 활동하는 생명력의 관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note title=”35″back] Rodolfo Garau, “Late-Scholastic and Cartesian Conatus,” Intellectual History Review 24.4 (2014): 479–94 (484).[/note] 인간이 여러 종류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자동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는 신이, 비록 인간보다는 더 커다란 운동을 할 능력이 되지만, 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신체의 움직임은 “과 위치를 따라 그리고 그것의 균형추와 휠의 모양에 따르는 움직임이 필연적인 것과 같이”[note title=”36″back] René Descartes, Discourse on Method, Adam and Tannery edition of the Oeuvres de Descartes (Paris: Librarie philosophique J. Vrin, 1976) VI: 50.[/note] 움직인다. 그래서 긴장된 무게라는 동기화된 힘이 부속장치들을 통해 소통되는 것처럼, 신적인 힘은 이와 유사하게 자연의 협력적인 부분들을 관통하여 외화된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역시 운동을 직접 통제하는 신, 그리고 자연이 스스로 자동적인 법칙에 따를 때, 그것의 작용인일 뿐인 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홉스에게 운동이란 “한 장소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획득하는 계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에[note title=”37″back] Thomas Hobbes, De Corpore in English Works 1: 109.[/note], 물체의 운동의 시작은 그 물체의 장소 안에 무한하게 작은 변화를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무한하게 작은 변화는 홉스가 ‘코나투스’(endeavour) 또는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note title=”38″back] Ibid. 206.[/note]

데카르트가 내적 경향과 외적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코나투스의 형이상학을 도입한 반면, 홉스는 오히려 코나투스가 ‘무한소적인 운동’일 뿐임을 논증했다. 홉스는 따라서 운동들 사이의 무한소적 간격들 안에 힘을 묻으려고 애쓴 것이다. 데카르트가 명백하게 운동(힘)의 결정을 운동의 경향과 분리했던 반면, 홉스는 그것들을 통합하려 했다. 홉스는 “코나투스란 운동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고 쓰지만, 그것은 어떤 양화된 운동이 아니다.[note title=”39″back] Ibid.[/note] “어떤 사물의 그 최초 시작이 그것의 한 부분이며 전체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 부분(즉 첫 번째 코나투스) 또한 그것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마찬가지로 운동이다.”[note title=”40″back] Ibid. 207.[/note] 따라서 홉스는 운동에 속하는 물질 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의 관점들이 여전히 운동의 무한소적 원인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한에서, 이것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 원인은 운동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며, 그가 코나투스, 경향 그리고 욕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최초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초월적인 생명력들이 물질의 기계론적 운동의 원인으로서 궁극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 유물론은, 물질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초래되거나 움직여지는 것인 한에서 물질의 수동성으로 정의된다. 생명적이고 원인인 힘들 또는 운동의 자연 법칙이 그것이다. 고대 유물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질은 다시 스스로 창조적이거나 수행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 변형을 거쳐, 물질은 이제 그가 궁극적으로 운동 안에 정립한 신과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된다.[note title=”41″back] Wolfe, “Varieties of Vital Materialism.”를 보라.[/note] 더 나아가, 근대 유물론은 다시 고대 유물론을 따르면서, 물질을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낱낱의 단순한 신체들, 입자들 또는 원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계속 간주한다. 이런 식으로 물질에 관한 개선된 생각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물론은 물질을 수동적 실체로 취급하는 원자론의 한 갈래로 이어지며, 비물질적인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짐에 틀림없고, 물질 자체의 흐름과 운동, 즉 힘 바깥에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2부 인식론적 간격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론적 지향이 구유물론과 신유물론 사이의 중요한 매개라는 점을 논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과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의한 가장 최근의 공식들이 현대 이론가들에 의해 자주 유물론으로 다루어지는 데 반해,[note title=”42″back] 버틀러에 관한 유물론적 연구로는, Bruining, “Interrogating” 과 Ahmed, “Imaginary Prohibitions.”를 보라. 그와 흡사하게 라캉을 다루는 것으로는, Christian O. Lundberg, “On Missed Encounters: Lacan and the Materiality of Rhetoric” in Rhetoric, Materiality, and Politics, eds. Barbara Biesecker and John Louis Lucaites (New York: Peter Lang, 2009) 161–83을 보라.[/note] 우리는 그와 같은 취급이 신유물론 이론들에 대해 무엇이 ‘새로움’인지, 또는 여러 가지 가운데 그 새로움을 어떻게 구분해 낼 것인지에 대해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분명히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구유물론과 신유물론 둘 모두에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유물론(failed materialism)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전혀 유물론이 아니라고 본다. 대신에 그것은 인식론적, 인간중심주의적, 또는 메이야수의 개념에 따라, 신유물론이 그로부터 떠나고자 애쓰는 상관주의 전통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패한 유물론
앞의 두 장에서 봐왔듯이, 모든 고대와 근대 유물론은 물질 자체의 특성이나 그 운동들을 제한하거나 결정하는 그것의 불변하고 외적인 법칙 또는 힘, 어느 것에 대해서든, 물질이 어떤 자기-결정하는 행위주체라는 것을 거부한다. 이와 흡사하게 이러한 유물론들은 모두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근본적인 특성들, 법칙들 또는 힘들을 아는 능력이 예외적으로 주어졌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실패한 유물론이 (비-인간적) 물질이 그와 같은 (자기-)인식에 있어서 무능력하다는 구유물론의 견해와 일치하는 반면, 실패한 유물론은 적어도 어떤 방향에서 또는 비-상관주의적 형태로 인간에 대해 그와 같은 인식[능력]을 마찬가지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구유물론과 다르다. 따라서 물질을 파악하고 수학, 인간 언어 또는 담론을 통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한 유물론에게는]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실패로 귀결됨에 틀림없다.

비판적으로 보면 실패한 유물론적 견해의 뿌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까지 닿아 있다. 그로 인해 이성은 결코 물자체(noumena)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주의자와 뉴턴주의자가 물질과 운동체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수학과 물리적 실재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전제한다면, 칸트는 그와 같은 인식을 인간 이성의 표면적으로 보편적인 구조의 한계 안으로 제한한다. 따라서 근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데카르트와 뉴턴을 따라 전개된 물질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을 고려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그는 그러한 지식이 그가 ‘초월론적 주체’라고 불렀던 것 너머의 어떤 실재에 조응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칸트는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상관주의는 “우리는 지금까지 오직 사유와 존재 간의 상관성에만 접근했었고, 결코 각각을 분리하여 고려할 만한 것으로 접근하지 못했다”[note title=”43″back] Meillassoux, After Finitude 5.[/note]는 주장이다.

실패한 유물론의 형태가 아니라 해도, 칸트에게 실재가 궁극적으로 물자체(noumena)에 놓여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칸트의 상관주의가 여러 가지 구성주의적이고 실패한 유물론적 이론들을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궁극적 실재와 다른 한편으로 우리 인간이 알 수 있거나 접근할 수 있는 ‘실재성’ 사이의 근원적인 불연속성에 관한 그 주장으로 인해 초래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칸트의 비물질적인 물자체를 어떤 물질적인 실재로 치환함으로써, 이어지는 이론들은 똑같이 상관주의적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 그 이론들의 물질을 향한 지향에 있어서 인식론적으로 남게 된다. 여러 방면에서, 구성주의와 실패한 유물론은 19세기와 20세기 철학을 지배하게 된다. 지면의 여유가 있기에, 그리고 실패한 유물론과 신유물론 사이의 부분적인 중첩이 특히나 혼란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절의 나머지를 실패한 유물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두 인물, 즉 자크 라캉과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논의에 할애할 것이다.    

칸트와 여타 인물들에 관한 특유한 현상학적, 정신분석적 그리고 구조주의적 변형을 통해, 라캉은 언어 습득이 인간에게 어떤 본질적으로 파편화된 주체성, 우리가 결핍된(manqué) 인간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전승해 준다고 논증했다. 언어습득은 그의 ‘거울 단계’를 따라[note title=”44″back] Jacques Lacan,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in Reading French Psychoanalysi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4) 119–26.[/note] 야기되면서, 실재-상상-상징이라는 삼항일조 안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삼항일조는 인간 주체성을 등재하는 것으로서, 라캉이 세 가지 중첩된 보로메오의 고리(Borromean Ring)라고 표현한 것이다.[note title=”45″back] Idem, “Rings of String” in On Feminine Sexuality, trans. Bruce Fink (New York: Norton, 1978) 123–36.[/note] 이런 관점에서, 상상(the Imaginary)은 현실적으로 언제나 이미 파편화된 우리 주체성과 구분되는, 그리고 이러한 구분에 관한 최소한의 깨달음은 물론 전체적인 또는 통일된 주체성의 이미지(imago)를 표시한다. 하지만 오직 언어(상징적인 것)를 통해서만, 우리는 보다 의식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구분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것은 오인(mis-recognition, méconnaissance)에 기초한 우리의 자기-인식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는 동안 실재(the Real)는, 이제 이것이 최종적으로 잃어버린 채로 남은 절대적인 전체성과 충실성의 전-상상적, 전-상징적 영역으로 – 소급적으로, 언어 안에서부터 – 형성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오인의 조건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으로 작동한다.  

라캉의 사유에서 언어나 상징 영역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달아나고 초과하는 그것(실재)의 (재)포획에 실패함으로써만 구성되기 때문에, 인간 주체성은 칸트의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덕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어떤 예외적인 인간적 권한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 -역사적인 인간중심적 잔여물이 라캉적 주체성을 좇아 다니며 구조화한다. 이 –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는 – 권한의 한계는 비-언어적인 물질적 실재 자체(Real itself)에 의해 표시된다.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생물학적 신체들을 조율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실재는 어떤 풍부함의 영역이며 그 (언제나 탈구된) 의미의 절대적인 결핍 또는 부재로 인해서만 전체성이다.[note title=”46″back] 라캉은 이것을 “결여의 결여는 실재를 만든다”라고 말한다(Jacques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Book XI), ed. Jacques-Alain Miller;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98) ix).[/note] 더 나아가, 라캉의 ‘아버지의 법’에 의한 상징적인 것의 남근중심적 연합과 ‘여성’에 따른 실재적인 것을 고려하자면, 칸트 안에서 여성과 다른 역사적으로 부차화된 그룹들이, [라캉에게서는] 단순히 본질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어떤 결핍의 논리에 제한된 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실패한 유물론의 가장 세련된 형태는 주디스 버틀러가 발전시킨 라캉에 대한 수행적 대안일 것이다.[note title=”47″back] Judith Butler,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1).[/note] 사실 몇몇 학자들은 버틀러에게서 없는 것은 신유물론에도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note title=”48″back] 예컨대, Ahmed, “Imaginary Prohibitions” 33; Bruining, “Interrogating,” 특히 39쪽을 보라.[/note] 보다 분명히 하자면, 버틀러의 목표는 어떻게 해서 물질을 포획하려는 담론의 실패가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결코 완전히 또는 궁극적으로 완결되지 않는 ‘반복적인 인용’의 지속적인 과정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note title=”49″back] Butler, Bodies that Matter 11–14.[/note] 물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각각의 새로운 (부분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라 담론은 새로운 방식들로 인간 정체성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라캉에 따르면, 단지 그것의 절대적 또는 변경불가능한 부재를 통해서만, 담론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늘 그것의 부분적이고 특정한 배제를 통해 변경이 용이하고 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러한 ‘구성적 배제’[note title=”50″back] Ibid. 141.[/note]는 – 주어진 담론 안에서 – 특별히 절망적이거나 비-규범적인 인간 정체성들을 표명한다. 때문에 담론들을 재표명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가장 큰 잠재성에 닻을 내리는 것은 그러한 비-규범적 정체성들이다. 즉 이것은 정체성 논쟁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개방하고 닫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간략하게 보로메오의 고리로 돌아감으로써 의미의 물질화에 관한 버틀러의 수행적 사유가 가진 중요한 기여들과 한계들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이미지[보로메오의 고리]에 관한 라캉의 판본에서, 세 영역들 간의 경계는 완전히 정적이고, 불변하며,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의미로부터 물질의 개개의 분할은 완전하고 궁극적이다. 반대로 버틀러의 판본에서 담론과 물질의 고리들은 그것들 간에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에 그어질 것인지 교섭하는 계속되는 수행적 과정 안에서 항구적으로 움직이며, 서로 연루된다.[note title=”51″back] Vicki Kirby, Telling Flesh (New York: Routledge, 1997) 101–28을 보라. 수행적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버틀러에 대한 훌륭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독해에 있어서, 이 책은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note]

하지만 이 중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관한 버틀러의 이론은 여전히 어떤 실패에 의해 기본적으로 정의되고 운용된다. 즉 그 실패란 물질을 결코 완전히 또는 충분히 잡아 쥐지 못하는 인간 담론의 부단히 지속되는 실패다. 물질과 담론 사이의 경계선의 특정 위치가 언제나 옮겨지지만, 버틀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동일한 경계선이 계속해서 어딘가에 그어져야만 한다고 지속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버틀러는 정말로 인간 담론과 물질 사이에 선재하고 불변하는 존재론적 분리가 어떤 영역으로서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비키 커비(Vicki Kirby)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물질 자체는 “버틀러의 생각에 언설불가능하고 사유불가능한데, 그것에 대해 알려질 수 있는 유일한 사물/사태는 그것이 재현을 초과한다는 것이다.”[note title=”52″back] Vicki Kirby, Judith Butler: Live Theory (London: Continuum, 2006) 70.[/note] 그러므로 버틀러의 주장에서, 물질이란 오직 그것의 불복종성, 다시 말해 오직 그것이 본질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즉 인간 담론)에 의해 파악될 때,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한에서만 ‘구성적’이거나 ‘활동적’이다.               

 

 

3부: 신유물론
그렇다면 신유물론에서의 ‘신’(new)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합의는 신유물론이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과 물질의 고유한 능동성에 관한 인식으로의 이동에 기반하는 비-인간중심주의적인 실재론을 포용한다는 것으로 보인다.[note title=”53″back] 이것은 사실상 주석 [1]에서 신유물론의 참고저서로 가져온 세 가지 훌륭하게 편집된 논문집의 개론적 장들에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언급했듯이, 이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note]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 간 관계의 본성이 광범위하게 오해받아 왔다고 믿는다. 통상적인 가정과는 반대로, 존재론적 초점도 물질의 능동성에 대한 인식도 필연적으로 다른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각각이든 함께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깨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하게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가 1부와 2부에서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존재론으로의 전환이 상관주의를 피하고 분명 ‘신’(new)이라는 것이 실패한 유물론이나 후기구조주의와 일반적으로 비교될 수 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전환은 단지 고대 원자론과 유사한 유물론의 만회를 표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원자론의 물질에 관한 수동적 개념이 단지 어떤 능동적인 것으로 대체되었다면, 이때에도 여전히 (충분히 물질적인) 인간을 물질적 실재에 관한 예외적인, 외적인 객관적 관찰자로 위치지운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note title=”54″back] 안젤라 윌리(Angela Willey)가 ‘과학 친화적 성향’이라고 부른 것을 채택하자면, 그와 같은 신유물론의 작업은 물질의 진정한 본성을 수동성보다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단호하게 수립하는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을 옹호한다. “Engendering New Materializations: Feminism, Nature, and the Challenge to Disciplinary Proper Objects” in Ellenzweig and Zammito, New Politics of Materialism 131–53을 보라. 윌리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그와 같은 성향은 “신실증주의적 과제로서 작동하는 바,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식획득의 과학 학제적 방식 안에 존재하고, 그렇게 되어 가는 그 권위와 재통합하는 것이다”(149). [/note] 3부에서 계속되는 바, 우리는 생기적이고 부정적인 신유물론 둘 모두가 이런 관점에서 사실상 인간 예외주의를 함축한다고 논한다.[note title=”55″back] 쿨과 프로스트는 명시적으로 인간-중심적 과학(어떤 비-수행적 이해)과 ‘잘 들어맞는’ 틀거리를 수용한다(New Materialisms 5). 메이야수는 사유하는 인간에게만 실재에 대한 객체적 접근을 허용한다. Dolphijn and van der Tuin, New Materialism 81을 보라. 결과적으로 우리의 정의에 따라 브루노 라투르가 신유물론자임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비-인간중심적 실재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기론적 유물론자들과 비슷한 관계론적 존재론을 가지고 있지만, ‘생기’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수행적 유물론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가 인간만이 물질적 세계를 재현하는 어떤 상징적 능력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현된 세계는 실재 세계와는 다르다. 어떻게 라투르의 관점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재현하게 되는 인간’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나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섬세한 옹호와 비판으로는, Vicki Kirby, Quantum Anthropologies (Durham, NC: Duke UP, 2011) 79–88를 보라.[/note] 우리는 오직 수행적 신유물론의 존재인식론(ontoepistemology)만이 모든 단계에서 인간 예외주의를 문제 삼는다고 논증한다. 우리가 수행적 논의의 말미에 주장할 바처럼, 이것은 새로움에 관한 어떤 비-수행적 사유를 영속화하는 방식으로 ‘신’이라는 말에 그와 같은 근원적인 접근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가장 새롭다고 발견하는 것, 그리고 수행적 ‘신’ 유물론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바는 (지배적인 서구-유럽 전통과 관련해서) 그것이 많은 고대적인, 지하에 숨어 있는, 그리고 비-서구적 존재론의 어떤 만회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생기적 신유물론
단언컨대 가장 널리 알려진 신유물론은 생기적 신유물론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생기적 신유물론과 – 우리가 앞으로 볼 – 다른 두 가지 종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끼어들게 된다
 
역사적으로, 생기론적 신유물론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1960년대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코나투스 이론(그리고 그보다 좀 덜한 측면에서 라이프니츠의 코나투스)에 대한 독해로부터 출현했다.[note title=”56″back] 이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들뢰즈 자신이 유물론자였다는데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진실이다. 쿨과 프로스트(New Materialisms)는 다음과 같이 쓴다. “질 들뢰즈는 그의 저작이 새로운 존재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의 급진적 경험주의와 유물론을 환기시키는 몇몇 글들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을 유물론자라고 여기지 않았다”(9).[/note]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돌아갔는데, 왜냐하면 다른 근대 유물론자들과 반대로 이들은 모든 자연이 내재적인 생명력 또는 힘에 의해 근본적으로 정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베이컨, 데카르트, 홉스 그리고 뉴턴에게서 생명력은, 종종 신이나 이신론적 자연 법칙의 형태로, 정신이나 물질과 구분되는 어떤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들과 관계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서 힘이란 물질에 내재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물질은 힘 자체의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그의 권능(power)을 개별적인 유한한 사물/사태의 코나투스를 통해 표현하는 바, 이는 동시에 존재와 행위에 관한 신의 권능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가지 표현은 모두 동일한 코나투스를 표현한다.

 

개별적인 사물/사태들은 그것에 의해 신의 속성[사유, 연장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들]이 어떤 특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 즉 어떤 특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신의 힘[Dei potentiam]이며, 이에 따라 신은 존재하고 행위한다. […] 따라서 그것이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그것 자체가 놓여 있는 한,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한다.[note title=”57″back] Spinoza, Ethics, Book II, Postulate 6.[/note]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철학 안에 어떤 형식적인 장소를 주지 않고, 또는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운동의 무한소적인 간격에 인과적 힘을 묻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물질적 코나투스의 개념을 전개하는 대신,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가장 높은 존재론적 수준으로 격상했다. 즉 신 그리고/또는 자연(deus sive natura).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내재적 힘 또는 코나투스의 존재론이다. 이에 따라 그는 이미 데카르트에게서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 – 내적 힘, 분투[코나투스], 그리고 모든 물질적 사물/사태의 힘 – 이었던 것을 분명하게 하고 그것을 무한한 것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

 

『동력학 Specimen Dynamicum』(1695)에서 라이프니츠는 심지어 운동, 공간 그리고 시간을 실체의 힘으로부터 파생된 비실재적인 정신적 구성으로 환원하는 것에까지 나아간다.

 

공간, 시간 그리고 운동은 어떤 정신적 구성[de enterationis]에 가까운 무언가를 가지며, 그 자체로 진리나 실재가 아니지만 오로지 무변성(immensity), 영원성 그리고 활동성이나 창조된 실체들의 힘을 포함하는 한에서는 그러한 것을 가진다.[note title=”58″back] Leibniz, Specium Dynamicum 445.[/note]

 

따라서 라이프니츠에게 실재적인 유일한 것은 힘의 관계들이다. 운동은 그것이 “변화를 향해 분투하는 어떤 힘”인 한에서 실재일 뿐이다. “기하학적 대상 또는 연장 외에도 신체적인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러한 힘으로 환원됨에 틀림없다.”[note title=”59″back] Ibid. 436.[/note]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힘이란 실재적이며 절대적인 것이고, 운동(그리고 물질)은 단순히 상대적 현상에 속하는 하위 부류라고 결론 맺는다. 

 

생기적 신유물론은, 고대와 근대 기계론적 유물론의 물질에 대한 취급, 즉 외적 힘들(자연 또는 신)의 수동적 객체로서 힘을 대하는 것 그리고 실패한 유물론자들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오늘날 이러한 전통[(들뢰즈적)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을 취해 왔다. 예컨대 포스트-들뢰즈주의자의 전거인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이러한 접근법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아래와 같은 차이에 대해 환기시킨다. 

 

내가 비인격적 정동(affect) 또는 물질적 진동(vibrancy)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것에 거주할 곳을 준다고 알려진 물질에 부가된 어떤 영적인 보충물이나 ‘생명력’이 아니다. 나의 개념은 전통적 의미에서 생기론이 아니다.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 그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분리된 힘을 세우기 보다, 정동과 물질성을 나란히 놓는다. 다시 말해 나의 목표는 그러한 물질성에 내재하는 생명성을 이론화하는 것이고, 물질성을 수동적, 기계적 또는 신성하게 주입된 실체라는 형상들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다. 이 진동하는 물질은 인간이나 신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순전한 재료가 아니다.[note title=”60″back] Bennett, Vibrant Matter xiii.[/note]

 

베넷에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그리고 들뢰즈)를 따르는 것은 힘들 그 자체의 관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이아나 쿨(Diana Coole)과 사만다 프로스트(Samantha Frost)가 논한 바에 따르면, 여기에는 “물질을 능동적, 자기-창조적, 생산적,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넘침, 힘, 생명, 관계성 또는 차이”가 있다.[note title=”61″back] Coole and Frost, New Materialisms 9.[/note] 이 관점의 변형들은, ‘전-가속상태’, ‘진동하는 물질’, ‘잠재력’ 그리고 ‘효과들’과 같은 사물/사태에 관한 논의들에서 여러 생기적 신유물론 철학자들에게서 등장한다.[note title=”62″back] Bennett, Vibrant Matter xiii; Erin Manning, Relationscapes: Movement, Art, Philosophy (Cambridge, MA: MIT P, 2012).[/note] 그러므로 구유물론과 생기적 신유물론의 주요한 차이는 원자적 물질의 기계적 수동성을 생명력의 내재적 능동성에 관한 존재론화(ontologization)에 있다. 생기적 물질은 따라서 결정론적, 이신론적, 자연론적이지도 않고, 인식론적이지도 않다. 생기적 물질은 인간 의식, 언어 또는 사회 구조들에 의해 구축되지 않으며, 물론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를 통해 그것이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 자체 실재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창조적이다.

 

하지만 의심스럽게도, 생기적 신유물론은 존재론적 생기론에 대한 것일 때 그리 유물론적이지 않다.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새로운 생기론 전통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간의 밀접한 연결을 인지했던 매우 드문 생기적 유물론자 중 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로스는 “소위 신유물론의 발흥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동시에 신관념론을 필연적으로 불러 온다고 말할 수 있다”고 쓴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가 ‘신관념론’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note title=”63″back] Elizabeth Grosz, The Incorporeal: Ontology, Ethics, and the Limits of Materialism (New York: Columbia UP, 2017) 13.[/note] 그러므로 생기론적 ‘유물론’이나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선택은, 라이프니츠가 이미 특히나 분명히 했던 것, 즉 “힘의 존재론이지만 물질은 아니다”처럼, 궁극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기반하는 수사적 전략과 같다.[note title=”64″back] See Thomas Nail, Being and Motion (Oxford: Oxford UP, 2018) 309–19.[/note]

 

만약 모든 물질이 수동성을 탈각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라면, 그때 물질은 어떻게 [그것이] 작용할 어떤 객체 없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 긍정적 생기론은 일반적으로 힘에 관한 어떤 모호한 평면 존재론으로 물질적 실행들의 다양성을 ‘평면화’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캐서린 헤일스(N. Katherine Hayles)가 논한 바대로, 생기론적 신유물론은 극단적으로 “‘힘’의 본성에 관한 불명확성”에로 향하면서, “비록 이러한 종류의 구별이 여러 과학적 장들에서 광범위하게 탐구되었다 하더라도, 상이한 종류의 힘들 사이의 구별에 실패한다.”[note title=”65″back] N. Katherine Hayles, Unthought: The Power of the Cognitive Nonconscious (Chicago: U of Chicago P, 2017) 80.[/note]

 

생기적 평면 존재론은 또 다른 측면에서 문제시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삶/죽음 이분법(삶/생명, 능동성, 행위주체)이라는 오직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측면만을 존재론화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 수동성 그리고 수용성이 삶/생명의 ‘평면 존재론’ 안에서 말 그대로 아무런 존재아무런 장소도 가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위험한 개념적, 정치적 결과를 가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note title=”66″back] 이러한 비판의 예로는, Choat, “Science, Agency and Ontology.”를 보라.[/note] 개념적으로, 생기론적 신유물론은 단적으로, 삶과 죽음,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뒤얽힌 관계들에 관해 사유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이것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비-생명에 대한 생명의 특권화 과정과 이 과정이 인간과 비-생명과 연합된 비-인간적 신체들의 착취와 약탈에 기반해 왔다는 함축들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note title=”67″back] Mel Y. Chen, Animacies: Biopolitics, Racial Mattering, and Queer Affect (Durham, NC: Duke UP, 2012); Alexander G. Weheliye, Habeas Viscus: Racializing Assemblages, Biopolitics, and Black Feminist Theories of the Human (Durham, NC: Duke UP, 2014).[/note]

 

결국 힘의 존재론은 물질에 관한 비-수행적 전망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베넷에게, 사물/사태는 수행적 연결에 진입하기 이전에 ‘어떤 특정 생명력’[note title=”68″back] Bennett, Vibrant Matter 24.[/note]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렘케(Thomas Lemke)가 올바르게 지목한 것처럼, “달리 말해 여기에는 그것들이 진입하는 관계들과 상관 없이, 배치된 개개 개별체들과 관계를 맺는 배치 이전의 그리고 너머의 어떤 생명력이 존재한다.”[note title=”69″back] Lemke, “Alternative Model of Politics?” 41.[/note] 하지만 만약 힘이 물질적 관계를 앞서면, 그때 그것은 단순히 관계들 자체의 수행적 간-행(intra-actions, 상간작용)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생기론적 신유물론은 어떤 심층적으로[깊이로서] 형이상학적, 비역사적, 그리고 비정치적 입장으로 남는다.

 

부정적 신유물론
두 번째 유형의 신유물론은 아마도 가장 특이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정적 신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이 비-관계적으로 사유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는 사유와 물질의 관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따라서 구유물론과 실패한 유물론 사이의 불연속성을 넘어, 놀라운/흥미로운 합리주의적 조합을 야기한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 볼 부정적 유물론의 두 가지 전통은 ‘사변적 실재론’(specualtive realism)과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다. 이 두 가지가 비록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이들은 둘 모두 사유의 비-관계성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퀭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서

 

유물론은 두 가지 핵심적인 진술로 요약된다. 1. 존재는 (넓은 의미에서 주체성으로 이해되는) 사유로부터 분리되고 독립적이다. 2. 사유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1번 테제는 주체를 존재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려는 어떠한 의인화(anthropomorphism)에도 대립된다. 즉 유물론은 물활론, 정신주의, 생기론 등등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주체성도 배제하고 우리의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의 예를 따라, 비-사유가 실재적으로 앞선다고, 또는 적어도 사유를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유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 2번 테제는 유물론이 관계론이라는 점을 긍정한다.[note title=”70″back] Dolphijn and van der Tuin, New Materialism 79.[/note]

 

메이야수에 의거하면, 물질은 사유로부터 독립적이고, 정확히 말해 물질은 사유이고, 합리성은 유일하게 사유의 근원적으로 비-관계적 존재 안에서 물질을 생각할 수 있다. 메이야수는 그리스 원자론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만 원자들과 허공이 필연적으로 실재의 궁극적 요소들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note title=”71″back] 메이야수에게, 유일한 절대적 필연성은 실재의 근원적인 우발성이다. 그는 이것이 감각이 아니라 오로지 ‘지성의 빛나는 명료성’에 의해서만 드러난다고 논증한다(After Finitude 91 (cf. 90–92)). 원자론자들의 이성주의는 이때 길을 잃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지성 대신 감각의 ‘거짓된’ 추론에 뿌리를 둔 경험적 관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메이야수의 원자론에 대한 직접적 비판에 대해서는 36, 51, 99–101을 보라.[/note] 메이야수에게 물질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우발적(contingent)이며, 따라서 주어진 순간에 절대적으로 무엇이든지, 심지어 신도 생산할 수 있다.[note title=”72″back] Meillassoux, “The Immanence of the World Beyond” in The Grandeur of Reason: Religion, Tradition and Universalism, eds. Peter M. Candler and Conor Cunningham (London: SCM, 2009) 444–78을 보라.[/note]

 

비록 메이야수가 물질에 관한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사유를 인간 사유와 뒤섞지 않으려고 조심함에도, 사유 – 인간 안에서 무로부터(ex nihilo) 출현되는 – 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존재를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비-사유적 물질은 인간 이전에 존재했으며 그리고 갑작스럽게 사유가 비-사유적 물질로부터 비-관계적으로 출현했다. 메이야수의 유물론은 그러므로 물질과 사유에 대한 어떤 설명불가능한 기적적인 이원론에 기반하는 것이다. 즉 그 이원론은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개연적으로 어떻게 출현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note title=”73″back] 어떻게 ‘순수 우발성의 원리’가 비유기적인 죽은 물질로부터 그와 같은 유기적, 감성적 삶/생명이 출현하는, 그리고 유기적 물질로부터 인간 사유가 생겨나는 ‘무로부터’의 ‘기적’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Meillassoux, “Iteration, Reiteration, Repetition” 14를 보라.[/note] 그가 존재의 ‘초카오스’(Hyperchaos)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심대한 비-관계적 철학의 직접적인 결론이다.[note title=”74″back] Ibid. 11.[/note] 만약 존재가 비-관계적이라면, 그것은 신을 포함하여,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존재가 심지어 신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토록 급진적으로[근원적으로] 우발적이라면, 왜 이것을 ‘물질’이라고 부르는가?[note title=”75″back] 메이야수는 그 자신의 기획을, 그것이 수학적 사유를 경유하여, 주체주의를 극복하고 직접적으로 물질적 실재에 접근하고자 하기 때문에 ‘새로운-유물론’(neo-materialism)이라고 묘사한다(ibid. 6–7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야수에게 사유(와 삶/생명)의 무로부터의 출현은 물질이 근원적으로 비-관계적 –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에서, 관념적으로 –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note]

 

부정적 신유물론의 두 번째 경향은 ‘객체-지향 존재론’(OOO)이다. 이 개념은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이 만든 개념으로서, 물질에 관해 인간 경험 너머의 실재를 사유하는 이론적 시도로 정의된다. 하만은 “우주 안에서 실재적인 것은 형식들(forms) 안에 감싸여진 형태들(forms)이지, 다른 모든 것을 파생적인 지위로 축소하는 물질의 항구적인 입자들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유물론’이라면, 물질의 실존을 거부하는 역사적으로 첫 번째 유물론일 것이다.”[note title=”76″back] Graham Harman, Tool-Being: Heidegger and the Metaphysics of Objects (New York: Open Court, 2011) 293.[/note] 하만에게 존재자의 본질은 그것을 구성하고 사유하는 모든 객체들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는 결코 인간중심주의적인, 경험적인 또는 관계적인 어떤 것이 아니지만, 비록 그것이 완전히 ‘진공상태로 밀봉되어’ 있다 해도, 절대적으로 그리고 비-관계적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근원적으로 자기-충족된 무언가로서의 동일성에 관한 이러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사실상 이 이론의 상징적인 약칭이 된 세 가지 개개의, 개별적으로 둘러쳐 진 원들, 0들 또는 ‘O에 속한 것’에 의해 완전히 파악된다. 이러한 관점은 또한 하만이 “새로운 종류의 ‘형식주의’”라고 부른 것을 긍정하도록 이끈다.[note title=”77″back] Ibid.[/note]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도 유사하게, 의미-생산적인 인간 영역을 무한하게 흘러 넘치는 본질적 형식들에 기대어 “어떤 종류의 기체(substrate) 또는 미정형의 물질”[note title=”78″back] Timothy Morton, “Here Comes Everything: The Promise of Object-Oriented Ontology,” Qui Parle 19.2 (2011): 163–90 (177).[/note]에 대해 논한다. 예컨대 모튼은 ‘초객체들’(hyperobjects)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는 “그 원초적인 실재성이 인간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실재 개별체”로서 지구 온난화 현상과 같은 것이다.[note title=”79″back] Idem,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13) 15.[/note] 그에 따르면 하만과 트리스탕 가르시아(Tristan Garcia)에 있어서 ‘객체’는 궁극적으로 어떤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부분적으로라도 결코 드러내지 않는 무한하게 숨겨진 본질을 지칭한다.

 

그러나 수행적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이 물러난 본질이 스스로 관계적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 본질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의 실존을 완전히 거부하는 어떤 철학을 사유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마치 생기론이 물질을 수행성과 물질의 관계적 운동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한 주체적 힘으로 정의하듯이, OOO은 물질을, 마찬가지로 수행성과 물질의 관계적 운동을 초월하는 관념적인 물러난 본질(withdrawn essence)로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부정적 신유물론이 물질로부터 사유를 끊어 놓는 완고하게 비-관계적인 합리주의이기 때문에, 실재로 전혀 유물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의 진실한 목표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고, 신실재론(new realism)을 전진시키는 것이라 해도, 부정적 신유물론의 두 가지 판본은 모두 사유를 오직 인간에게만 허용하며 결국 이러한 사유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비판은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한다. 즉 OOO에 관한 근원적인 물러남의 실재론이 객체의 이론이라기보다 오히려 한갓 이성적 주체론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다.[note title=”80″back] Lemke, “Materialism without Matter”; Taylor, “Close Encounters.”[/note] 사실, 메이야수 자신이 하만을 ‘주체론자’(subjectalist)며 이에 따라 반-유물론자라고 적절히 비판했다.[note title=”81″back] Meillassoux, “Iteration, Reiteration, Repetition” 7.[/note] 하지만 동시에 메이야수는 유물론이라는 표지를 부분적으로 그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 이유는 그가 존재와 사유 간의 어떤 엄격한 외재성, 즉 수행적 유물론이 거부한 그런 외재성의 관한 구유물론자의 주장을 승인한다는 것이다.[note title=”82″back] “우리는 우리가 유물론에 속하는 두 가지 원리들, 즉 존재는 사유가 아니며, 사유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복종하는 한에서 유물론자들이다”(ibid. 12).[/note]

 

수행적 신유물론
신유물론의 세 번째 유형은 우리가 ‘수행적’ 신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수행적 접근은 다른 두 가지[생기적 신유물론과 부정적 신유물론]와 혼동됨으로써 광범위하게 은폐되어 왔다. 이 장에서 우리는 어째서 이 이론이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인지 밝히기 위해, 다른 것들과 수행적 이론을 – 특히 존재론, 행위주체, 그리고 인간적 관찰(human observation)이라는 측면에서 – 명백하게 구분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카렌 바라드[note title=”83″back] Barad, Meeting the Universe.[/note]와 비키 커비[note title=”84″back] Kirby, Telling Flesh; idem, Quantum Anthropologies.[/note]의 저작을 통해 논의를 진행하는데, 이들은 수행적 접근의 구성요건이자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위에서 봐왔듯이, 모든 신유물론은 뚜렷한 방식으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이동을 수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수행적 이론들은 존재론과 인식론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계속 주장한다. 수행적 접근에서는 반대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고유하게 상호-함축되어 서로를 구성한다. 나아가 그러한 상호구성은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거기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바라드는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와 관련된 그녀의 ‘상간-작용’(intra-active, 간-행) 개념을 통해 특별히 그와 같은 관점에 흥미로운 기초를 제공한다. 이 문제는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과 함께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실험적 배치를 함으로써, 빛(또는 원자 등등)이 파동이나 입자라는 상호 배제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로 갈라져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모순되는 발견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쉼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슈레딩거(Erwin Schrödinger),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그리고 보어(Niels Bohr)에 의해 널리 정의되었다. 이 논쟁에 대한 바라드의 개입은 보어를 앞선 두 사람이 행한 ‘인식론적’ 해석들에 반해 ‘존재적’ 해석을 진전시킨 것으로 새롭게 독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바라드가 보어의 통찰을 꿰뚫는 존재적인 것을 파악한 바는, 이전에는 이해되지 못했던 것으로서, 개별체들이 단순히 서로를 배제하는 결정된 하나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특유하고, 물리적인 측정도구들과는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이다.[note title=”85″back] 반대로, 바라드는 하이젠베르그의 ‘인식론적’ 관점을 고려하는데, 예를 들면, 그에게 (적어도 처음에는) 측정이란 항상 측정 대상(예컨대 전자의 위치 또는 운동량)을 ‘교란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바를 변경하지 않고, 그것을 알기 위한 우리의 능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Barad, Meeting the Universe 115–31을 보라. 메이야수와는 달리, 바라드에게 (인간 또는 비-인간의 의한) 실재에 관한 관찰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실재를 구성한다. 바라드의 경우에 하이젠베르그에 대한 존재론적 평가로부터 시작하는 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함축이 가지는 대단히 분명한 대안적 기여에 대해서는 Michael Epperson, Quantum Mechanics and the Philosophy of Alfred North Whitehead (New York: Fordham UP, 2004)를 보라. 이들의 생각에 많은 일치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퍼슨은 수학이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닫힌 우주라는 가정 하에서만 작동하는 확률적 예측을 수행하는 양자 물리학의 최상의 정밀함을 포용한다. 반대로 바라드의 우주는 결코 절대적으로 닫혀 있지 않다. 어떤 수학적 ‘재현’을 사유하는 단순한 행위, 물질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위는 그러므로 재현되는 우주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에퍼슨과 바라드는 시간성에 대해 양립불가능한 관점을 내 놓는다. 에퍼슨은 과거의 현실화는 영원히 정착되지만 미래는 열려진 채로 남는다는 ‘절대’ 시간적 비대칭을 논증한다(94–97). ‘양자 지우개’(quantum eraser)에 관한 그녀의 논의에서, 한편으로 바라드는 과거 조차 결코 현재를 충분히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는 반복적으로 재작동되고 시공물질화(spacetimemattering)의 반복적 실행들을 통해 접혀진다고 논증한다(315; cf. 310–17).[/note] 따라서 다른 물질들과 같이, 빛도 고유하게 불확정적이다. 따라서 빛의 본질은 (상대적으로) 결정된 개별체로서, 전체적으로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리적, 물질적 도구들을 앞서지 않으며, 완전히 분리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통찰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급진적인 확장을 통해, 바라드는 실재에 대한 “존재인식론적”(ontoepistemological)[note title=”86″back] Barad, Meeting the Universe 43–44.[/note] 사고를 제안한다. 이 사고에서 관찰행위는 결코 단순히 “선재하는 가치들” 또는 속성들을 “드러내는”[note title=”87″back] Ibid. 265.[/note] 것이 아니라, 사실상 언제나 그것들을 구성하는 역할을 마찬가지로 한다. 나아가 보어의 휴머니즘이 관찰의 구성적 역할에 대한 그의 사유를 미리 존재하는 인간의 도구들과 기술을 제어하는 과학 실험실의 한계 안으로 제한했지만, 바라드는 그 이론이 가진 함축을 더 멀리까지 밀어붙였다.[note title=”88″back] 보어가 그와 같은 인간주의에 제한되는 한, 바라드는 그의 사유를 ‘인식론적’이라고 규정한다.[/note] 결정적으로 바라드는 과학 실험실조차 그 세계의 나머지와 나누어지는 어떤 엄격하거나 고정된 경계선도 없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인간은 결코 마치 바깥에 있는 것인양 우주를 관찰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note title=”89″back] 놀라울 정도록 날카로운 예로는, 슈테른-게를라흐 실험(Stern–Gerlach experiment)에 대한 논의를 보라. 이것은 경험적으로 공간 양화를 증명한 실험이다. 바라드의 논의에 따르면, 실험의 성공은 단지 물질의 특수한 수행들와 물질을 측정하기 위한 관찰 도구들 뿐 아니라 발터 게를라흐 자신의 무의식적인 젠더와 계급의 수행에 속한 상간-작용에 따라 발생한다. 이것은 그가 피우고 있었던 값싼 시가에 의해 방출된 연기에 있는 높은 황 성분 안에서 스스로를 표명한다. Barad, Meeting the Universe 161–68.[/note] 따라서 그녀는 “인간이 과학적이거나 다른 지적 실천에 참여하는 한에서, 그들은 좀 더 큰 세계의 물질적 배치의 일부로서 행위하며, 그 계속되는 제한 없는 절합에 연루된다.”[note title=”90″back] Ibid. 342.[/note] 이와 같이 인간은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늘 부분적으로는 구성하며, 또한 그들이 관찰하는 바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성된다. 

 

이 존재인식론적 사고는, 그녀가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note title=”91″back] Ibid. 134–37.[/not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어떤 총체적으로 ‘수행적’이고 관계적인 유물론으로 이끈다. 이때 물질은 그것이 활동하는 바, 또 그것이 움직이는 방식일 뿐이다.[note title=”92″back] 주석 [11]과 [12]를 보라.[/note] 어떤 분별가능한 사물/사태의 속성이라 해도 – 그것이 물리적 성질이나 행위주체이든 심지어 그것의 언설이나 사유이든 – 그것의 행위들 또는 다른 것들과의 만남에 의해 전반적으로 앞서거나 변하지 않고 남겨지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유는 생명력이 모든 사물/사태들에 스며들거나 사물/사태의 행위들을 가로질러 변하지 않고 남는 평면 존재론(flat ontology)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오히려 행위주체(Agency)와 생명성(vitality)은 특정한 간-행적(intra-active) 수행과 떨어져서 단순하게 존재할 수 없다. 예컨대 어떤 기존의 식물은 특정한 바위 또는 인간과는 다르게 행위주체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해서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이 유기체와 비유기체 간의 구별을 제거한다는 이유로[note title=”93″back] Arienne F. Conty, “The Politics of Nature: New Materialist Responses to the Anthropocene,” Theory, Culture and Society 35.7–8 (2018): 82.[/note] 또는 ‘관계적인 것-이상의’ 행위주체성을 모든 사물/사태들에 부과하는 ‘소박한 실재론’(naıve realism)으로 인해[note title=”94″back] Steve Hinchliffe,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ialogues in Human Geography 1.3 (2011): 35.[/note], 정당하게 비판될 수 있음에 반해, 바라드의 유물론은 그럴 수 없다. 나아가 바라드의 단어 선택이 생명성이나 살아 있음(liveness)을 죽음이나 비활동성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해도, 그녀는 전자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생기론의 새로운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살아감(aliveness)”[note title=”95″back] Barad, Meeting the Universe 177.[/note]을 의미하는 것이고, “활동성과 비활동성 사이의 바로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note title=”96″back] Ibid. 437 n. 81.[/note] 베넷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바라드의 물질 생명성 개념은 삶과 죽음 사이의 급조된 본질적 차이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그러한 차이들을 수행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바라드는 양자 입자에서도 죽음과 필멸성(mortality)을 인식할 수 있다.[note title=”97″back] Transmaterialities: “Trans*/Matter/Realities and Queer Political Imaginings,” GLQ 21.2–3 (2015): 394.[/note]

 

게다가 사물/사태들 간의 어떤 근원적인 외재성 없이, 수행적 유물론은 가능한 것의 궁극적인 또는 불변하는 총체성을 거부한다. 대신에 발생적 ‘존재론적 불확정성’[note title=”98″back] Barad, Meeting the Universe, e.g., 344–45.[/note]이 그와 같은 사유의 핵심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내적 분할들(internal divisions)만을 통해서라 해도, 즉 특정하고 언제나 다소 미결정된 ‘구성적 배제들’에 의해 결정된 국지적 제한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새로운 수행성과 함께 바로 그러한 물질이 할 수 있는 것의 “가능성들 […] 그리고 불가능성들이 재배치(reconfiguraton, 재형상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note title=”99″back] Ibid. 149.[/note] 하지만 버틀러의 배제와는 달리 바라드의 개념은 그 자체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근원적으로 충분히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인간 담론의 실패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방식에서 물질의 고유한 비결정성을 잠정적으로 해결하는 내적 단절 또는 접힘(fold)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note title=”100″back] 버틀러의 ‘구성적 배제’(constitutive exclusion) 개념에 대한 비판적 옹호에 대해서는 ibid. 64를 보라. 이 개념에 관한 바라드 자신의 용법은 135-36을 보라.[/note] 또한 [사변적 실재론의] OOO과 달리, 배제되거나 물러나는 것은 이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언제나 수행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구성되는 것, 그래서 새로운 것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강력하기도 하고 총체적이기도 한 수행적 유물론을 발전시키면서, 커비는 특별히 생기 넘치고 도발적인 언어로 그와 같은 접근법의 보다 큰 이론적 결론에 강조점을 둔다. 커비는 특히 어떤 암시적인 것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만약 우리 인간이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수행성이라면, 그때 우리에 대해 이른바 예외적인 어떤 것이란 충분히 일반화 가능한 자연의 행위에 관한 특정한 변형일 뿐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증식하는 언어 안에서 자연이 이미 말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실존하도록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인간이 읽고 쓴다면, 그러면 ‘불미스러워 보이지만’ 확실히 우리는 ‘자연이 읽고 쓴다는 것’, 즉 ‘자연이 휘갈겨 쓰거나 육체가 읽는다’[note title=”101″back] Kirby, Telling Flesh 127.[/note]는 것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선에 속하는 탐구를 요약하면서, 2008년 한 책의 장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제목삼았다. “지금까지의 문화가 사실상 자연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note title=”102″back] Alaimo and Hekman, Material Feminisms, 214–36. 보다 최근의 저작으로는 Vicki Kirby, ed., What if Culture Was Nature All Along? (Edinburgh: Edinburgh UP, 2017)을 보라.[/note]

 

이러한 질문은 다음 책에서 더 멀리까지 추구되는데, 커비는 이 ‘시원적 인간성’(originary humanicity)을 인간과 그 외의 다른 것들 모두의 영역에서, 수많은 기발한 시도를 통해 탐구해 들어간다. 예컨대 그녀는 번개가 얼마나 비-국지적인 현상인지, 그것이 어떠 것에 대한 깨달음을 주면서 심지어 터지기 전 대지와 대화의 섬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음미한다.[note title=”103″back] Kirby, Quantum Anthropologies 10–13.[/note] 그리고 지질학자들이란, 연구하고, 분석하고, 양화하며 스스로를 예견하는 자연의 실재적으로 편재하는(하지만 언제나 특정한) 실천들 중 특유한 한 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note title=”104″back] Ibid. 39–40.[/note] 이런 작업들 속에서, 우리는 커비가 모든 것 위에 어떤 획일적인 언어적, 인지적 또는 정동적 평등성 같은 것을 투사함으로써 평면화하는 실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대신 그녀는 다음과 같은 전제, 즉 만약 그 어떤 근원적 또는 절대적 경계가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여 사물/사태들 사이에 없다면, 그때 인간은 지성, 언어 또는 심지어 과학적 탐구로 간주되는 것에 대하여 그 외 다른 것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독점권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커비는 항구적으로 증식하는 독특성(specificity)과 그러한 생각들의 잡종성(variegation)에 관한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이때 그 독특성과 잡종성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적, 비-인간적 수행들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보다 최근에 이 논증의 수학적 함축들을 추구하면서, 커비는 수학에 대한 메이야수의 궁극적으로 비-수행적 관점에 대한 수행적 유물론의 매우 신랄한 응답을 제공한다.[note title=”105″back] “Matter out of Place: ‘New Materialism’ in Review” in Kirby, What if Culture Was Nature All Along? 1–25. 메이야수와 커비의 본래적인 불일치가 직접적으로 돌피언과 반 데어 튄의 그들에 대한 독해와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다. 이 두 사람은 내 생각에 부당하게도 메이야수와 커비 사이의 본질적인 일치점을 마수미의 ‘존재론적 선행성’이라는 생각을 경유하며 발견한다. Dolphijn and van der Tuin, New Materialism 174를 보라.[/note] 흥미롭게도 커비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그녀와 메이야수 둘 다, 비유기적 물질을 ‘고유하게 수학적인 것’으로 인식한다.[note title=”106″back] “Matter out of Place” 12.[/note] 하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수학을 수행하고 수행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널리 알려진 과학적 관점을 채택하면서, 메이야수는 비유기적 물질이 수동적으로 어떤 고정되고, 선결정된 자연을 작동시키는 한에서만 그러한 물질을 수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편으로 수학적 사유 – 그러한 자연에 접근하고 재현하기 위해 수학을 능동적으로 하는 능력[note title=”107″back] 예컨대 Meillassoux, After Finitude 108; idem, “Iteration, Reiteration, Repetition” 18.[/note] – 는 메이야수에게 무로부터 단순히 기적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특유한 인간 능력이다.[note title=”108″back] Meillassoux, “The Immanence of the World Beyond” 461.[/note]

 

이와 유사하게도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예견하는 데 있어서 ‘수학의 비합리적인 유효성’에 놀라면서, 커비는 거의 반대 결론을 이끌어냈다.[note title=”109″back] Kirby의 다음 장을 참고하라. “Enumerating Language: ‘The Unrea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in Quantum Anthropologies 이 장은 수학에 관한 더 폭넓고도 흥미로운 논의를 제공한다.[/note] 커비에 따르면, 언어가 인간의 외부에 있지 않은 것처럼, 수학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록 언제나 수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재)정의하도록 하는 특정한 방식에서이긴 하지만, 모든 것은 수학을 행한다. 아무리 이상하거나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관점은 인간 예외주의에 의해 조건화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즉 만약 인간이 수학을 하는 완연하게 물질적인 존재자라면, 그때에 물질은 수학을 하는 것이다.[note title=”110″back] 예컨대 커비의 “Matter out of Place” 5–6에서 박테리아 ‘암호-해독 능력’에 관한 논의가 있다. 또한 현재 논평 중인, Thomas Nail, Theory of the Earth도 참고. 네일은 어째서 비유기적 물질이 수학적인지에 대해, 예를 들어 엽서(葉序, phyllotaxis)와 무기물 내에서의 격자 결합 패턴에 대해 검토한다.[/note] 사실상, 만약 이미 자연이 수학적이지 않다면, 달리 어떤 방식으로 자연이 인간적인 수학을 생산할 수 있겠는가? 달리 어떻게 수학자들이 발견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원리들을 자연이 생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부인할 수 없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물질이 또한 고유하게 수행적이고 즉흥적이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그러한 원리들이 결코 완연하게 양화되거나 물질을 예견하는 데 그리 잘 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요컨대 커비는 물질이 지속적으로 어떤 제한이나 불변하는 외적 경계 없이 스스로를 연구하고 재발명한다는 수행적 유물론을 진전시킨다. 그녀가 견결하게 그녀의 관점을 옹호할 때, 마찬가지로 그녀는 데리다에 대한 (유물론적 독해의) 이론적 채무를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텍스트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자연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다.[note title=”111″back] Quantum Anthropologies x.[/note]

 

마지막으로 우리는 커비와 데리다 의해 공식화된 수행적 유물론 그리고, 호메로스와 호메로스적 영감에 따라 쓰여진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De Rerum Natura』, 둘 모두에서 발견하는 존재론들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실재 최근의 책에서, 네일은 루크레티우스를 완연한 수행적 신유물론자로 독해해 낸다. 놀랍게도 루크레티우스는 양자물리학을 포함하여 자연과학에서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신유물론 친화적 관점들을 적절히 예견했다.[note title=”112″back] Nail, Lucretius I.[/note] 마찬가지로 놀라운 것은 네일의 발견인데, 그는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늘상 영어로 번역되는 방식과 반대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atom)’라는 단어의 어떤 변형, 변화 또는 번역을 신중하게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 우리의 앞서의 논의에 기반하면, 우리는 어째서 루크레티우스가 원자론자가 될 수 없는지, 그리고 물질에 관해 충분히 수행적이고 관계적 관점을 채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진행중인 저작에서, 크리스 갬블 또한 호메로스 서사시에 대한 수행적 신유물론의 독해에 대해 논한다.[note title=”113″back] Christopher N. Gamble (MS in progress).[/note] 이것은 서구 역사의 구술적, 원주민적 과거와의 중요한 연관성을 설명하는 도구로서의 수행적 신유물론의 함축을 추적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원주민적 존재론들에 보다 큰 연관을 가지도록 촉진하고 고무한다.[note title=”114″back]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과 여러 원주민 문화에 관한 ‘행위적 존재론’ 간의 중요한 친연성의 특별한 기초에 대한 그와 같은 연구를 고무하는 최근의 매력적인 논문으로는, Rosiek, Snyder, and Pratt, “New Materialisms and Indigenous Theories”가 있다.[/note]

 

 

4부: 신유물론의 미래

이 논문의 네 번째 부분이자 결론부에서, 우리는 수행적 유물론의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사상가들로부터 도출한 세 가지 일반 테제 또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수행적 신유물론의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 중심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무작위[방행적] 운동(pedesis), 전진적 과정(ongoing process), 그리고 관계다. ‘모든 것이 물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것은 ‘존재하는 그것인 바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note title=”115″back] 살란스키스가 논한 바에 따르면, “‘거기 있는 것이 물질이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거기 있는 것이 있다’를 의미하지 않는다”(“Some Figures of Matter” 5).[/note] 우리에게는 ‘물질 외에는 아무 것도’[note title=”116″back] Ibid.[/note] 없다는 명제가 있지만, 구유물론과는 다르게 이것은 환원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모든 것이 환원가능한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물질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수행 또는 운동-중-진행[전진](process-in-motion)이다. 우리는 이 테제를 수행적 유물론에 관한 세 가지 뒤얽힌 테제들의 형식으로 놓을 수 있다.

 

(1) 물질의 활동 자체는 무작위적(pedetic, 방행적)이거나 불확정성(indeterminacy, 비결정적)으로 특성화된다. 그렇지 않으면 신유물론은 형상과 같은 다른 어떤 것, 즉 결정론적이거나 개연적인 자연법칙, 힘 또는 신에 대한 물질의 활동성이라는 속성화로 되떨어질 것이다.  
(2) 물질은 전진적인 반복 과정(ongoing iterative process)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신유물론은 실체-기반 존재론으로 되돌아 가거나, 물질을 합리주의 또는 형식주의와 같은 어떤 것으로 축소할 위험을 안게 된다.             
(3) 물질은 완연히 관계적이고 내재적으로 자기-원인적이다. 물질은 단순히 신, 자연 또는 인간의 수동적 효과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단순히 능동적 행위자인 것도 아니다. 물질적 관계들은 언제나 비대칭적이다(능동과 수용 둘 다 동시에). 그것은 ‘평평(flat)’하지 않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테제들로서 수행적 유물론의 핵심적 통찰을 개괄한다고 믿는다. 결론을 맺기 위해 각각의 테제들을 차례로 간략하게 전개해 보자.

 

무작위[방행]
수행적 신유물론의 첫 번째 기준은 물질이 무작위하다는 것이다. 무작위(pedesis는 어근 ped-의 원형인 PIE로부터 오는 것으로, ‘발 foot‘이란 의미를 지닌다)란 반-자동적 자기-이동(semi-autonomous self-transport)의 운동이다. 걷고, 뛰고, 도약하고, 춤추기 위해 발은 다소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운동에 관한 결정론적, 개연적 또는 우연적 이론들과 반대로, 무작위란 바로 반복적으로 그 즉각적 과거와 연결되지만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작위라는 것은 불규칙하고 부분적으로 예측불가능한 운동이지만, 그것이 제멋대로(random, 우연적)이거나 개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note title=”117″back] 우리가 여기서 해석하는 논증은 서구 형이상학을 지배해 온, 그리고 변함없이 물질을 고유하게 수동적이고 비-생성적인 것으로 형상화한, 우연성(randomness), 결정론 그리고 개연성이 모두 본질적으로 단일한 수학적이고 통계적인 틀거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진행중인 논문에서 갬블은 수행적 유물론이 그와 같은 틀거리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함축하는 방식과 그 비판이 야기하는 것 둘 모두를 보다 충분하게 구체화한다.[/note] 무작위 운동으로서 물질은 준안정적 구성을 생성할 뿐 아니라, 관건적으로 이러한 구성들이 또한 이어지는 구성들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성한다. 반대로 우연성(randomness)과 개연성이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예측불가능(unpredictable)하지만, 생성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논의했던 바대로, 우연성은 개연성과 유사하게 선결되고 고정된 개개 영역에 반해 정의내려진다.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무한한 수의 우연적으로 움직이는 개별체들(데모크리토스의 원자처럼)은 무한한 결과들 또는 심지어 가능성들의 유한한 영역 안에서 세계들을 실현할 수 있다. 반복들을 가로질러, 그러한 우연적 결과들의 특정 조합들은 대략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고, 마치 반복적으로 구르는 두 개의 육 면의 주사위가 둘들보다 더 많은 일곱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다른 것들보다 더 높은 또는 낮은 개연성을 반영한다. 하지만 주사위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처럼 우연적으로 움직이는 개별체들의 내적 특성들이 상호작용을 가로질러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완전한 영역도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영역은 간단히 말해서 어떤 절대적, 불변의 한계로 남는다. 왜냐하면 우연적 물질은 수행적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순수하게 우연적인 운동에 관한 바로 그 생각이 전제하는 것은 그것이 사전의 어떤 다른 것과 관계하거나 그것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사물/사태임을 전제하는 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내적으로 모순적인 가정에 속하는 판본이다. 즉 무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우연적 또는 개연적 운동과는 달리, 무작위 운동은 총체적으로 관계적이며 따라서 수행적이고 생성적이다. 전자의 두 가지가, 각 개별체가 그것의 상호작용에 따라 본질적으로 불변한 채 남는 한에서, 예측불가능한 반면, 무작위 운동의 예측불가능성은 정확히 그와 같은 관계적 변화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것에 예측불가능의 특성이 부여되는 것은 바로 상간-작용 또는 물질 스스로의 상호 영향력이다. 그것의 전진적인 가정을 통해, 물질의 무작위 운동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패턴들, 일치들, 그리고 관계들 안으로, 평형성과 견고함의 외관을 주는 동안, 오직 다시 소용돌이치게 되면서만 그리고 새로운 결합 관계들로 들어서기 위해서만, 결합하고 평형을 찾아 간다. 이것이 바로 비결정성[불확정성]이 점진적으로 결정되어 가는 방식이다.[note title=”118″back] 이것은 여기서 충분히 답변되지 못하는 주요한 질문이다. 어떻게 물질의 비결정적 흐름들이 준안정적 과정이 되는지에 관한 보다 상세한 이론을 위해서는 Nail, Being and Motion 55–123을 보라. 비결정성[불확정성]이 어떻게 (관계적으로) 해결되는지에 대한 바라드의 일관된 논의는, Meeting the Universe chapters 3, 4, 7, 특히 342–50를 보라.[/note] 달리 말해, 무작위란 우연도 결정도 개연적인 것도 아니고, 다만 발생적으로 비결정적[불확정적](generatively indeterminate)이다.[note title=”119″back] Lucretius, De Rerum Natura 2.114–28; Meeting the Universe 114.[/note] 따라서 물질은, 오직 그것의 운동이 무작위적이거나 관계적으로 즉흥적일 경우에만, 능동적이면서 수용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와 운동성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전진적인 반복 과정
두 번째 기준은 만약에 그리고 오직(if and only if) 물질이 반복적, 전진적, 비결정적 과정으로 이해될 때에만, 물질이 수행적이라는 것이다.[note title=”120″back] 비결정적이고 반복적 운동에 대한 완전한 이론은 여기서 충분히 전개될 수 없다. Nail, Being and Motion 55–123을 보라. 반복에 대한 바라드의 논의는 “posthumanist performativity,” 그리고 Meeting the Universe chapter 4; 310–17를 보라.[/note] 만약 물질이 그 작동하는 바 또는 움직이는 방식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리고 만약 그 운동들이 –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시공간적 규모에 이르기까지 – 결코 궁극적으로 또는 충분히 완성되지 않으면,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그것의 끝나지 않는 무작위적 재발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수행적, 무작위적 물질의 근본적 특성은 구유물론의 불변하고, 영원한 자연 법칙에 의해 고정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질이 불변하는 – 따라서 -수행적인 – 생명력에 의해 가동될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힘[생명력]은 아마도 창조적일테고, 그 창조성은 언제나 무엇이 그것을 본질적으로 정의하는냐에 따라, 즉 삶/생명, 행위주체, 생명성 [등]에 따라 앞서 제한될 것이다. 수행적 물질의 무작위적 운동은, 반대로 결코 양단으로 편향된 것의 의미를 항구적으로 고정하거나 표준화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것들 자체의 한계들과 경계들을 (재)절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계나 한계도 절대적이지 않은 반면, 이것이 메이야수의 초카오스와 같은 급진적인 우발성이나 무차별성의 세계로 이끌지는 않는다. 부유하는 우주-암석들에는 날개나 다리가 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관계적으로 묶여진 어떤 특유한 행성의 생명역(biosphere)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무작위적 반복이 충분히 주어지면, 그 바위들은 그와 같은 생명역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고, 사실 그와 같이 날개가 돋고 다리가 난 생명체들이 언젠가는 생겨날 것이다.

 

그와 같은 변형적 생성은, 오직 모든 ‘개별적’ 반복이 다소간 새롭고 특이하며, 아무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결정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는 그러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심지어 가장 미세한 ‘단일’ 전자(electron)의 언제나-부분적으로-특이하고-예측불가능한 수행들도 우주의 ‘전반적인’ 개방-전체성을 재배치하여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한다. 요컨대 수행적 물질은 언제나 근원적으로 뒤얽혀진 상태로 남겨지며, 그러므로 또한 언제나 부분적으로 미결정적이고 즉흥적이다.

 

더 나아가 어떤 고유하게 미결정적인 목적-없는-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물질적 실재 전체를 하나의 연속적 전체성으로 통일하는 기저에 흐르는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물질은 창조할 수도 또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 가져갈 수도 없다. 따라서 수행적 물질은 연속적이지도 않고, 불연속적 실체도 아니며, 어떤 불연속적 과정도 아니다.[note title=”121″back] 우리는 바라드가 ‘양자 불/연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충분히 받아들이는데, 여기서 슬래쉬 기호가 가르는 후자의 단어는 수행적으로 물질이 “충분히 연속성과 함께 불연속적이지도, 마찬가지로 충분히 불연속성과 더불어 연속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확실히 그 자체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Quantum Entanglements and Hauntological Relations of Inheritance,” Derrida Today 3.2 (2010): 240–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채택하지는 않는데, 적어도 우리중 한 사람이 그 슬래쉬가 화이트헤드적인 ‘연속적’ 과정에 의해 옹호된 것과 같은 둘모두/그리고의 논리를 야기함으로써 오독된다는 견해에서 기인한다. 화이트헤드의 이 개념은 완연하게 불연속적인 현실화이며, 수행적 비결정성에 관한 둘다아닌/그러나의 논리라기 보다 각각의 것이 ‘모든 비결정의 증발’로 표시되는 것이다 (Whitehead, Epperson, Quantum Mechanics 135에서 재인용).[/note]

 

만약 물질이 근원적으로 연속적 실체라면, 그것은 동질적인 총체성일 것이다. 물질은, 그 자체 바깥에서 변화나 운동의 가능성이 없는 일자 – 유한한 또는 무한한 통일성 – 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 바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제논과 파르메니데스가 언젠가 논증했듯이, 모든 운동은 하나의 환영이다. 하지만 만약 물질이 모든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 존재라면, 모든 존재를 함축한 그 존재는 그것에 의해 함축된 존재와는 달라야만 할 것이다. 물질적 존재는 따라서 괴델(Gödel) 등이 오래전에 발견했던 일자의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note title=”122″back] Kurt Gödel, On Formally Undecidable Propositions of Principia Mathematica and Related Systems (New York: Basic, 1962)를 보라.[/note] 즉 일자는 그것이 포함하는 것 안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 없는 실체적 연속체는 그 자신을 그 자신의 총체성 안에 포함할 수 없는 총체성의 역설적 개념을 초래한다.

 

다른 한편, 만약 물질의 운동이 근원적으로 불연속적 실체 또는 과정이라면,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시작과 끝을 가져야 하고, 역설적으로 거기에는 아무런 운동이 없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운동’이란 그러므로 전혀 어떤 운동이 아니다. 예컨대 점 A로부터 B로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도약들을 통해 움직이는 어떤 개별체의 경우, 각각의 도약 사이의 그 시공간적 거리는 비결정적 점들의 무한성에 의해 분할될 것이고, [또한] 그것들[점들] 자신이 비결정적 점들을 따라 분할될 것이며, 이는 무한정 이어진다. 게다가 만약 그것이 각각의 새로운 도약을 가로질러 바로 그 동일한 개별체로 남는다면, 그 개별체는 분명히 수행적으로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 대신에, 우리는 어떤 급진적으로 이산적이고 추상적인 개별체가 A로부터 B까지의 그것의 경로를 따르는 그 장소성(location) 안에서 일련의 변화들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장소 안에서 각각의 변화는 동일한 운동의 상이한 면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그것들 사이의 운동이 전혀 없지는 않은 근원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구성한다.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운동이란 따라서, 운동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지만, 단지 불연속적, 형식적 또는 논리적 변화일 뿐이다.[note title=”123″back] 지취(Geach)는 이 구절을 러셀과 맥타가르트(McTaggart)의 형식적 변화에 관한 이론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P.T. Geach, God and the Soul (New York: Schocken, 1969) 71–72. 또한 화이트헤드의 변화에 관한 이론은, Alfred North Whitehead,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P, 1978) 73, 59를 보라.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변화는 오직 “몇몇 결정된 사건들에 일치하는 현실적 계기들 사이의 차이”이며, 따라서 “어떤 현실적 개별체에 변화를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화와 운동은 그러므로 현실적 개별체들의 연속과 관련되고, 오직 그들 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모든 개별체는 단순히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것”이며 그 전체 관계들의 집합과 더불어 그 안에 고유한 다른 개별체들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하거나 움직일 수 없다.[/note]

 

관계
세 번째 기준은 물질이 완연하게 관계적이고 내재적으로 자기-촉발적(self-caused, 자기-원인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를테면 신, 자연 또는 인간적 구조들과 같은 다른 비-물질적 행위주체의 단지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다. 이것은 신유물론의 철학적 실천을 위한 직접적 결과다. 생기적 신유물론과 부정적 신유물론은 둘 다 관계성 바깥에 (그것이 생명력이든, 물러난 본질이든, 또는 무로부터의 창조든지 간에) 어떤 것을 놓는다. 따라서 그들은 유물론을 물질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한 엄격하게 존재론적인 유형의 탐구작업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만약 수행적이고 동력학적 물질 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바로 그 존재론의 작업은 자체로 언제나 관찰하고, 배제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하는 특정 물질적 실천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관계는 언제나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정치적 등등으로) 비대칭적이며, 평평하지 않다(not flat). 모든 관계들을 일반화된 주체적 힘들로 평탄화하는 생기론과 모든 관계들을 특정 객체의 물러난 본질들을 특권화함으로써 완전히 제거하는 OOO과는 대조적으로, 수행적 접근은 비대칭성에 주목하며, 따라서 특정 물질적 관계에 속한 독특성(specificity)에 착목한다.[note title=”124″back] 이 논점은 보다 많은 공간 그리고 다양한 예화들을 요구한다. Thomas Nail, The Figure of the Migrant (Stanford: Stanford UP, 2015)를 보라.[/note]

 

존재론은 단순히 물질의 ‘실재적인 것’을 언제나 뒤로 물리는 인간주의적 구성주의나 실패한 유물론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과 존재론적 실천들은 그 수행의 간단없는 운동 안에서 실재적으로 공-구축(co-constructed)되며 뒤얽혀(entangled)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의 첫 번째 탐구는 존재론적임에 틀림 없지만, 토대적이지는 않다. 즉 그것은 역사적으로 관계적이어야 한다.[note title=”125″back] Choat, “Science, Agency and Ontology.”[/note] 다시 말해 신유물론은 영원하고 늘 존재하는 (존재인 하에서의 존재, being qua being) 절대적인 것 또는 존재의 불변적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어떤 수렴적이고, 완연히 물질적인(fully-material) 부분인 바, 주어진 특정 역사적 출현, 그 출현의 실재 조건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명쾌한 것을 원한다. 역사 관념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사란 인간이 포함될 때, 그 인간이, 물질적 독해와 (재)기술의 특정 수행들로서 독해하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수행적 신유물론은 엄격하게 역사적인 바, 현재에 의해 제한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 미래의 가능 존재에 대해 어떠한 존재론적 주장도 하지 않는 – 존재론적 실천(ontological practice) 자체에 관한 영역적 존재론(regional ontology)이다. 수행적 유물론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맑스의 역사에 대한 역진적 독해(retrograde reading)를 따라, 우리는 신유물론이 운동하면서 뒤얽혀지는 물질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존재론을 가능케 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점증되는 물질적 뒤얽힘을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note title=”126″back] 이 논문의 저자들은 이 세 가지 기준을 따라 여러 방면에서 신유물론 연구를 해 오고 있다. Nail, Being and Motion; Christopher N. Gamble (MS in progress); Joshua S. Hanan, Rhetorical Economies of Power (MS in progress)를 보라.[/note]

 

 

닫는 말

저자들에게는 어떤 관심사의 잠재적인 갈등도 없었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