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 포스트휴먼 자본주의에 대한 어떤 관점
번역 이성민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영화 스틸샷

 

자본주의와 포스트-인류의 전망은 어떻게 연결될까? 통상 자본주의는 (더) 역사적인 것으로 상정되고, 성적 차이를 포함한 우리의 인간성은 더 기본적인 것으로, 심지어 비역사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바로 포스트-인류로의 이행을 자본주의 안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목격하고 있다. 엘론 머스크 같은 억만장자 영도자들의 노력은 바로 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서의” 자본주의는 종언에 이르고 있다는 그들의 예언은 “인간적”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행은 “인간”에서 포스트-인간으로의 이행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는 이 주제를 다룬다. 이야기는 2049년을 배경으로 한다. 리플리컨트(생체공학으로 만든 인간)는 하인과 노예로 사회 안에 통합되었다.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새 리플리컨트 모델인 K는 LAPD를 위해 “블레이드 러너”로 일하며, 옛 모델의 떠돌이 리플리컨트를 추적하여 “은퇴”시킨다. 집에서의 삶은 홀로그램 여자친구 조이와 보내는데, 그녀는 월레스 사의 인공지능 제품이다. 커져가는 리플리컨트 해방운동을 조사하다가 K는 한 농장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서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해를 발견한다. 그녀는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리플리컨트의 임신은 원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K는 이 사실을 불안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두 리플리컨트(〈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 1편에 나오는 데커드와 레이첼)가 성적인 커플을 형성하고 인간적 방식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어떤 이들은 기적으로 찬양하고 다른 이들은 위협으로 비난하는, 왜 그토록 외상적인 사건으로 경험되는가? 그것은 재생산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섹스, 즉 특별히 인간적인 형태의 성욕에 관한 것인가? 영화에서 성욕의 이미지는 표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성행위는 남성 관점에서 보여지며, 그래서 피와 살을 가진 안드로이드 여자는 남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창조된 홀로그램 환상-여자 조이의 물질적 지지물로 환원된다. 영화는 이미 붐이 일고 있는 경향, 점점 더 완벽해지는 실리콘 인형의 경향을 가져다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혹은, 브라이언 애플야드가 말하듯이, “어쩌면 일방적 사랑이 미래의 유일한 로맨스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힘을 갖는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새로운 그 무엇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실제 파트너를 자기 환상의 지지물로 환원하는 전형적인 남성적 절차를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또한 “진짜 살을 가진” 안드로이드와 3D 홀로그램 영상에 불과한 신체를 가진 안드로이드라는 인드로이드 자신들 간의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차이를 탐구하는 데도 실패한다. 섹스 장면에서 피와 살을 가진 안드로이드 여자는 어떻게 남성 환상의 물질적 지지물로 환원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왜 그녀는 이를 저항하고 방해하지 않는가?


영화는 낡은 디지털 기계 폐품을 뒤지는 데 아동 노동(수백 명의 인간 고아들)을 이용하는 반은 불법적인 사업가를 포함해서 온갖 착취를 다 보여준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상한 질문들이 여기서 생겨난다. 제작된 안드로이드가 노동을 한다면, 여기서 여전히 착취가 작동하는 것인가? 그들의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자신들의 가치를 초과하는 가치, 그래서 그들의 소유주들이 잉여가치로서 착취할 수 있는 가치를 생산하는가? 완벽한 포스트-인간 노동자나 병사를 창조하기 위해 인간 역량을 증강시킨다는 아이디어는 20세기에 긴 역사를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920년대 말, 다름 아닌 스탈린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레닌의 비판의 표적이었던 보그다노프의 추종자인) 생물학자 일리야 이바노프가 제안한 “인간-원숭이” 프로젝트를 한동안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아이디어는 인간과 오랑우탄을 교배시켜, 고통과 피로와 나쁜 음식에 영향 받지 않는 완벽한 노동자와 병사를 창조한다는 것이었다. (이바노프는 자생적인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서, 당연히 남자 인간과 암컷 원숭이를 짝짓기하려고 했으며, 덧붙여 그가 이용한 인간은 콩고에서 온 흑인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유전학적으로 원숭이에 더 가깝다고 가정되었으니까. 소련은 큰 비용이 드는 콩고 원정의 재정을 지원했다.) 실험이 실패하자 이바노프는 제거되었다. 더 나아가, 나치 역시 엘리트 병사들의 체력을 증강하기 위해 약물을 정규적으로 사용했다. 덧붙여 미군은 이제 병사들을 초고도-회복력을 갖게 하기 위해 유전학적 변화와 약물로 실험을 하고 있다(그들은 이미 72시간 동안 비행하며 전투할 준비가 된 조종사를 가지고 있다. 기타 등등.) 허구의 영역에서 우리는 이 목록에 좀비를 포함시켜야 한다. 호러 영화는 계급 차이를 뱀파이어와 좀비의 차이라는 형태로 등록한다. 뱀파이어들은 매너가 좋고, 섬세하고, 귀족적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좀비들은 투박하고, 활력이 없고, 더럽고, 배제된 자들의 원시적 반란처럼 외부에서 공격한다. 좀비와 노동계급의 등치는 헤이스 코드 이전의 무삭제 좀비 영화 〈화이트 좀비 White Zombie〉(1932, 빅터 핼퍼린 Victor Halperin)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영화에 뱀파이어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좀비를 통제하는 주된 악당을 그 전 해에 드라큘라로 유명해진 벨라 루고시가 연기한다. 〈화이트 좀비〉는 가장 유명한 노예 반란의 현장인 아이티의 플랜테이션을 배경으로 한다. 루고시는 또 다른 플랜테이션 소유주를 응접하면서 설탕 공장을 보여준다. 그곳 노동자는 좀비들인데, 루고시가 재빨리 설명하듯이 좀비들은 긴 노동시간에 불평하지 않으며, 노동조합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파업을 하는 일도 없고, 단지 계속 일만 한다…. 이런 영화는 헤이스 코드 도입 이전에만 가능했다.


주인공이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다가(그리고 그렇다고 생각하다가)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가진 예외적인 인물임을 발견하는 표준적인 공식을 뒤집어, 여기서 K는 자신이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특별한 인물(데커드와 레이첼의 아이)이라고 생각하다가 점차로 위대함의 환영에 사로잡힌 평범한 리플리컨트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찾고 있는 진정한 예외적 인물 스텔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스텔린이라는 수수께끼 인물은 여기서 핵심적이다: 그녀는 데커드와 레이첼의 “진짜” (인간) 딸(그들의 성교의 결과물)인데, 이는 인간이 만든 리플리컨트의 과정을 돌려놓는 리플리컨트의 인간 딸을 의미한다. 전적인 불모 상태(하얀 벽의 텅 빈 방 안의 하얀 옷)에 갇힌 채 (진짜 식물과 동물로 충만한 열린 공간에서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고립된 세계 안에 살아가면서, 생명과의 접촉은 디지털 기계들이 생성한 가상의 우주에 제한된 채, 그녀는 꿈의 창조자로 이상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그녀는 리플리컨트에게 거짓 기억이 이식되도록 프로그램하는 독립 계약자로 일한다). 그러한 인물로서 스텔린은 성관계의 부재를(혹은 오히려, 불가능성을) 예시한다. 그녀는 성관계를 풍요로운 환상적 태피스트리로 대리보충한다. 영화 말미에 창조되는 커플이 표준적인 성적인 커플이 아니라 아버지와 딸의 비성적인 커플인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바로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쇼트들은 그토록 친숙한 동시에 기이하다. K는 커플을…, 아버지와 딸의 커플을 창조하기 위해 눈 위에서 예수 같은 제스처로 자신을 희생한다.


이러한 재결합에 구원의 힘이 있을까? 혹은 영화가 묘사하는 사회 안에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적대에 대한 영화의 증상적 침묵을 배경으로 이러한 재결합의 매력을 읽어야 할까? 즉 인간 “하층 계급”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만, 영화는 우리의 글로벌 자본주의 안에서 지배 엘리트 그 자체를 가로지르는 적대를 실로 말끔하게 묘사한다. (조시로 구현된) 국가 및 국가장치와 자기파괴적 종말로까지 진보를 추구하는 (월레스로 구현되는) 대기업 사이의 적대. 월레스는 진짜 인간이지만, 이미 비인간처럼, 과도한 욕망에 눈이 먼 안드로이드처럼 행동한다. 반면에 조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상징하며,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엄격한 분리를 상징한다 – 그녀의 관점은 이 분리가 유지되지 못하면 전쟁과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영화 스틸샷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영화 스틸샷


따라서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관련하여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묘사를 보충하여 이렇게 덧붙여야 하지 않는가? 성적인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며, 성적 실천의 영역에서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며,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표준적인 정상규범적 이성애를 불안정하고 변동하는 정체성들 그리고/또는 정향들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오늘날 “소수자들”과 “주변자들”에 대한 찬사는 정말로 지배적인 다수 위치다. 심지어 자유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의 공포에 불평하는 대안-우파들조차도 위험에 처한 소수자의 보호자로 자처한다. 혹은, 가부장제를 마치 여전히 헤게모니 위치인 양 공격하는 저 가부장제 비판가들을 보자. 그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150년도 더 전에 『공산당 선언』 첫 장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라고 썼던 것을 무시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바로 그 분리를 산산히 흩어놓을 새로운 형태의 안드로이드 (유전학적으로나 생화학적으로 조작된) 포스트-인류의 전망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왜 새로운 세대의 리플리컨트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가? 예전의 리플리컨트들은 자신의 기억이 진짜라고 믿었고 그래서 기억이 진짜가 아님을 깨닫는 소외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새로운 리플리컨트들은 기억이 가짜라는 것을 처음부터 안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속지 않는다 –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대한 단순한 무지보다도 더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다. 새로운 세대의 리플리컨트들은 진정한 기억이라는 환영을, 자신들의 존재의 모든 실체적 내용을 박탈당하며, 그로써 주체성의 공백으로, “실체 없는 주체성”이라는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적 지위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은 반란이 압제적 권력에 위협을 받는 어떤 최소한의 실체적 내용에 의해 지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K는 국가와 자본(월레스)의 눈에서뿐만이 아니라 (독일어로 Freiheit인 자유 freedom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프리사 Freysa라는 여자가 이끄는) 리플리컨트 반란군의 눈에서 데커드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거짓 사고를 꾸민다. 프리사 역시 (월레스가 리플리컨트 재생산의 비밀을 발견할 수 없도록) 데커드의 죽음을 원한다는 – (조시로 체화된) 국가장치와 (프리사 체화된) 혁명군 양쪽 모두 데커드의 죽음을 원한다는 – 사실로 그의 결정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K의 결정은 이야기에 보수적인-인간주의적인 비틀림을 제공한다. 즉 그 결정은 가족 영역을 핵심적인 사회적 갈등에서 면제시키려고 노력하며, 양 측을 똑같이 잔혹한 것으로 제시한다. 이 편들지 않기는 영화의 거짓을 폭로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인간들과 인간이기를(인간으로 간주되기를) 원하는 자들 혹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 주변에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너무나도 인간주의적이다. (유전공학의 결과는 우리 – “평범한” 인간들 – 가 그것, 즉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지 못하는 인간, 즉 자기의식을 가진 신경 기계라는 것 아닌가?)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영화 스틸샷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영화 스틸샷


영화의 암묵적인 인간주의적 메시지는 자유주의적 관용의 메시지다. 즉 우리는 인간적 감정(사랑, 등등)을 갖는 안드로이드에게 인권을 부여해야 하고, 그들을 인간처럼 대해야 하고, 우리의 우주 안으로 병합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도래할 때, 우리의 우주는 여전히 동일한 인간 우주로 남게 될까? 누락된 것은 자각을 가진 안드로이드의 도래가 인간들 그 자신의 지위와 관련해 어떤 변화를 의미할 것인지에 대한 일체의 고려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통상적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닐 것이고, 새로운 어떤 것이 출현할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정의할 것인가? (더 나아가, “진짜” 신체를 가진 안드로이드와 홀로그램 안드로이드의 구분과 관련하여, 우리의 인정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K에게 봉사하고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창조된 조이처럼) 감정과 자각을 갖는 홀로그램 리플리컨트 또한 인간처럼 행위하는 존재자로서 인정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그 자체의 실제 신체가 없는 한낱 홀로그램 리플리컨트인 조이가 영화에서 K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근본적 행위, 그것(혹은, 오히려 그녀)에게 프로그램되지 않았던 행위를 한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새로운 것을 회피하게 되면 회향적인 위협감(위협받고 있는 성적인 재생산의 “사적” 영역)이라는 선택지만 남는다. 그리고 이 거짓은 영화의 바로 그 (시각적이고 내러티브적인) 형식에 기입되어 있는데, 영화의 내용 중 억압된 것은 그 형식 안에서 회귀한다. 형식이 더 진보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형식은 이야기의 진보적인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흐려놓는 데 복무한다는 의미에서. 심미화된 이미지의 느린 리듬은 편들지 않기, 수동적인 부유하기라는 사회적 자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안드로이드를 인간처럼 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논쟁될 때면 초점은 늘 자각이나 의식에 맞추어진다. 즉 그들은 내적인 삶을 가지는가? (그들의 기억이 프로그램된 것이고 이식된 것이라고 해도, 그 기억은 여전히 진짜 기억으로 경험될 수 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는 초점을 의식이나 자각에서 무의식으로 변경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정확한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가지는가? 무의식은 어떤 더 깊은 비합리적인 차원이 아니다. 무의식은 주체의 의식적 내용에 동반하는, 라캉이 가상의 “다른 장면”이라고 부르곤 했던 어떤 것이다. 예상치 못했을 사례를 들어보자. 루비치(Ernst Lubitsch)의 〈니노치카 Ninotchka〉(1939)에 나오는 유명한 농담을 생각해보자. “‘웨이터! 크림 없는 커피 한 잔 부탁해!’ ‘미안해, 손님. 크림은 없고 우유만 있어. 우유 없는 커피도 될까?’” 사실의 차원에서 커피는 여전히 동일한 커피다.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크림 없는 커피를 우유 없는 커피로 만드는 것이다. 혹은 심지어 더 단순하게는, 함축된 부정을 덧붙여 그냥 커피를 우유 없는 커피로 만드는 것이다. “그냥 커피”와 “우유 없는 커피”의 차이는 순전히 가상적이며, 실제 커피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경우도 정확히 똑같다. 그것의 지위 역시 순전히 가상적이다. 그것은 “더 깊은” 심적 현실이 아니다. 요컨대, 무의식은 “우유 없는 커피”에서 “우유”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핵심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디지털 대타자 역시 “그냥 커피”와 “우유 없는 커피”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을까? 혹은 반사실적(counterfactual) 영역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두뇌와 사회적 환경 속의 사실들에 제한되어 있는 디지털 대타자의 영역 바깥에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차이는 우리를 규정하는 “무의식적”(뉴런적, 사회적…) 사실들과 순전히 반사실적 지위를 갖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차이다. 이 반사실적인 것들의 영역은 주체성이 여기 있어야만 작동할 수 있다. “그냥 커피”와 “우유 없는 커피”의 차이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작동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2049〉로 되돌아가서, 리플리컨트는 이 차이를 등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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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광주비엔날레(The Gwangju Biennale)에서 발행하는 「눈  NOON」 7호에 수록된 바 있으나 광주비엔날레재단과 번역자의 동의를 얻어 수정 후 재게재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