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연극성과 물체성
번역 박정선

마네, , 캔버스에 유화, 186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투우사 복장을 한 마드무아젤 V Mademoiselle V in the Costume of an Espada>, 캔버스에 유화, 186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일전에 내가 마이클 프리드에 대해 썼던 감사의 노트 중 아주 일부만을 수정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1996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ASA(American Society for Aesthetics)의 연례 모임 중 “예술과 물체성(art and objecthood)”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서 마이클 프리드를 앞에 두고 이 노트를 읽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패널들 중에는 스티븐 멜빌(Stephen Melville)과 노튼 뱃킨(Norton Batkin)이 있었다. 당시 나는 멜빌이 프리드의 비평에 대해 쓴 1981년 에세이, “예술과 비평에서의 알레고리의 재등장과 모더니즘에 대한 망각, 수사의 필요성, 그리고 공공성의 조건들에 대한 단상들”을 비롯한 그의 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시점이었다.[note title=”1″back] 스티븐 멜빌, “예술과 비평에서의 알레고리의 재등장, 모더니즘의 망각, 레토릭의 필요성, 그리고 공공성의 조건에 대한 단상들”, Octobert 19 (Winter 1981): 55-92.[/note] 발표에서 언급한 다양한 문제들 중에서도 나는 프리드의 에세이에서의 “물체성(objecthood)”과 “연극(theater)”의 개념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이 개념들은 프리드가 1960년대의 뉴욕과 런던의 특수한 예술계, 그리고 18세기 유럽 회화 사이에 설정한 서술적인 연관을 기초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예술과 물체성”을 비롯하여, 프리드가 그것을 집필할 즈음 출간한 회화나 조각에 대한 수많은 에세이들 속에 드러나는 시각에 대한 그의 강인한 집중력과 철학적인 도전들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새로이 출간된 “예술과 물체성” 선집이 제공하는 프리드의 수많은 저작들을 하나의 전체로 읽을 수 있는 맥락 속에서 프리드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note title=”2″back]   마이클 프리드,예술과 물체성: 에세이와 리뷰들(Art and Objecthood: Essays and Review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note]  “예술과 물체성”이 처음 나왔을 시기는 이론(theory)이 아직 그 편재성이나 그것이 곧 취득하게 될 문화적인 층위를 갖기 이전이었으며, 프리드의 이 에세이는 당대의 예술 이론과 실천 모두에 깊이 개입한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7년, 이 에세이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 글은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의 커뮤니티 모두에서 극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매우 즉각적인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 에세이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은 멈추지 않았지만, 이 글은 이제 오늘날의 완전히 변화된 예술과 비평의 풍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아주 간략하게나마 이 글이 당시의 매우 다른 행위자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킨 예술적, 또는 이론적인 쟁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예술과 물체성”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놓이게 된 위상와 그 변천을 살피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 둔다. 

 

“예술과 물체성”은 모더니즘의 본질에 대한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는 논의의 일부로서, 다시 말해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도널드 저드(Donald Judd), 토니 스미스(Tony Smith) 등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계속해 이끌어간 논의이다. 따라서 이 에세이는 연극성(theatricality)이라 불리는 개념이 감상자와 예술작품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 동원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예술 매체의 성질이나 예술에서의 표현성의 조건들을 질문하기 위해서도 동원되었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등장한 시각 예술에서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예술작품의 (역사화된)존재론의 발전 과정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이지만, 그가 전개한 모더니즘의 변증법은 매우 다양한 작가들의 개념적인 논의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이 에세이에서 프리드는 그린버그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세기 중반, 처음으로 단순한 오락거리로 전락할 위협을 느낀 예술이 […] ‘모더니즘 회화’를 통해 예술이 다른 어떤 종류의 행위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오직 그 자체로만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방법으로 만이 그들이 처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리드는 그린버그가 쓴 다음의 문단을 인용한다. “개별 예술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입증으로부터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시되고 해명되어야 할 것은 예술에서 일반적으로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것뿐만 아니라, 개별 예술에서 또한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것이다. 각각의 예술은 자신에 특수한 작동 방식을 통해 그 특유의 독자적인 효과를 밝혀내야 한다. […]” 

 

이 문단으로부터 개별 예술이 갖는 유일하고 적절한 경쟁성은 그 매체의 성질에 있어 유일한 것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자기비판의 과제는 이제 개별 예술로 하여금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차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효과도 제거하는 일이 된다. 이를 통해 개별 예술은 “순수”해질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순수성(purity)”으로부터 그 예술의 우수성(quality)의 기준, 그리고 그것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수성”은 자기규정을 의미하며, 이제 예술에서의 자기비평은 맹렬한 자기규정의 한 종류가 되었다.[note title=”3″back]  클레멘트 그린버그, “모더니스트 회화” (1960), 맹렬한 모더니즘: 1957-1969(Modernism with a Vengeance: 1957-1969), 존 오브라이언(ed.), 클레멘트 그린버그: 에세이와 비평 모음집 4(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4)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86; 프리드의 34-35에서 인용됨. [/note]

 

이는 시각예술의 영역에서 모더니즘의 전개과정을 성장서사, “순수성” 개념에 대한 칸트적인 호출과 함께 그러나 이번에는 특정한 예술 매체의 성질, 또는 환원 불가능한 본질에 초점을 맞추며, 다시말해 칸트식의 자기비판을 통한 자율성 획득의 서사와 연결시키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프리드 역시 모더니즘을 위기에 빠져 있으며, 예술 매체에의 질문에 대한 자기규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환원 불가능한 본질’의 개념이나, 순수성과 환원에 대한 수사에서 드러나는 그린버그와 프리드 사이의 견해 차이는 매우 크다. 사실상 그린버그의 미학이나 그가 옹호했는 회화 및 조각 모두에 대한 완전한 거부로 드러나는 프리드의 미니멀리즘 이데올로기 비평은, 그가 보기에 이들 모두가 실은 예술 매체에 대해서는 환원이나 본질 등의 개념에 의존하고 있으며, 모더니즘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원한다. 

 

프리드가 자신의 초기 예술비평 모음집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예술과 물체성’에서의 내(프리드) 주장의 주요한 골자는 실재주의[note title=”4″back]  “예술과 물체성”에서 프리드는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실천을 ‘즉물적 예술(literal art)’라고 지칭하며, 마찬가지로 미니멀리즘 역시 ‘literalism’으로 칭한다. 여기에서는 이 단어를 실재주의, 실재주의자라는 용어로 번역한다.(역자 주)[/note]가 모더니즘의 내부로부터 모더니즘의 변증법에 대한 오독으로 인해 발생하였으며, 이 오독은 이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에서부터 예견되어왔다는 점이다. […]” 이와 같은 주장은 연극성과 물체성 개념의 연관관계에 대한 프리드의 진단에 기초한다. 시각예술에서, 적어도 마네부터는, 특정한 매체의 물질성은 새로운 종류의 자기의식과 관련된 문제, 자기의식에 대한 새로운 필요성의 문제로 대두된다. 그린버그의 언어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변증법은 예술형식의 자기규정을 매체의 물질적 기초의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성질들(facts)로 정교화 하는 과정으로, 특히 회화에 한정해 보면 그림-지지체의 한정된 평면성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실재주의자(혹은 미니멀리스트)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예술작품의 (회화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본질적인 ‘사물-성격(object-character)’을 지속적으로 투영하는 방식으로 답한다. “예술과 물체성”에서 프리드는 이와 같은 실천을 ‘현실에 앞선(prior to the present situation)’ 것이라고 표현한다.

 

“예술작품을 그저 하나의 사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는 위험성, 혹은 그럴 가능성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가능성은 1960년대 경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의 결과로 나타났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발전된 회화가 거의 사물에 동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마네부터의 회화의 모든 역사는 그것의 근본적인 물질성에 대한 진보적인 폭로의 일부로 포함되는 것으로 (내 생각에는 거의 망상적인 견해이지만)이해되었다. 그래서 모더니스트 회화에게 형태라는 수단(medium)을 통해 자신의 물질성을 극복하거나, 중단함으로써 자신의 관습적인 (특히 그것의 회화적인) 본질을 밝히는 일은 다급한 과제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실재주의자의 감수성(Literalist sensibility)이란 모더니즘 회화로 하여금 그것의 물질성을 지우도록 강요한 것과 같은 발전에 대한 대답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그와 같은 발전에 대한 연극적인 감수성, 연극에 의해 부패하고 왜곡된 감수성(a sensilbility already theatrical, already corrupted or perverted by theater)의 답변인 셈이다.”

 

모더니즘의 압박으로부터 추동된 연극과 물체성 사이의 개념적인 상호작용은 이미 한 문단 전, “모더니즘 회화가 자신의 물질성을 격파하거나 중단시켜야 한다는 명령은 실제로는 그것이 연극을 격파하고 중지시켜야 한다는 명령인 셈이다’고 밝히며 “물체성의 연극성(theatricality of objecthood)” 자체로 넘어가려는 발언을 통해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물질성의 개념과 그렇게도 친밀한 관계을 맺을 수 있는 연극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들 쌍이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서 심지어는 의식적으로 예술의 부정(the negation of art) 같은 것을 고안해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해 말해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나는 프리드의 에세이 초반에 삽입된 한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실재주의자들의 물질성에 대한 옹호는 새로운 장르의 연극을 위한 변명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연극은 이제 예술의 부정이다”. 그것이 어떤 역사적인 맥락 속에 위치하고, 동시대 예술가나 비평가들이 그 비평의 언어들을 이해하고 공유한다 할지라도 예술의 부정이라는 주제를 상기하는 것은, 프리드 본인이 지적하고 있듯 매우 규정적인 형식의 비평이다. 그것은 회화나 예술 자체, 그리고 예술의 부정과 같은 어떤 대상의 지위에 대해 묻기 위해 비평과 예술 감상의 보다 특수한(local) 언어들을 해제하는 예술에의 절대적인 비평의 모더니스트적인 형식이다. 프리드에게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미술담론에서도 예술의 개념이나 가능성이 언급되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설치작업에서도 역시 그와 같은 개념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물체성과 연극성은 예술의 부정과 같은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그 부정이 예술의 세계 내부로부터, 예술의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될 때에도 서로 연관을 갖는다. 이와 같은 상황이 문화나 미술담론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여전히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 자체의 개념에 대한 적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 적의가 예술 자체의 성질과 그 실행에 내적인 것으로, 적어도 20세기부터는 개별 예술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성취를 이룬 몇몇 작품들에게서 드러나는 면모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스스로 예술적인 실천이라고 부르는 문화 내부에서 스스로를 “예술”에 반대한다고 규정짓는 움직임이 나올 수 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모더니스트들의 실천에서)예술이 예술 자신으로부터 소진되고 상실되거나, 혹은 종말을 불러올 수 있는 가능성이 예술에 내재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멜빌의 저작에서 새롭게 언급되고 있으며, 나는 향후 그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note title=”5″back]  내가 여기서 떠올리는 것은 특히 멜빌의 철학 너머의 철학(Philosophy Beside Itself)의 첫 챕터인 “모더니즘에 관하여(On Modernism)”이다. (Minneapolis, Minn.: University of Minnesota, 1986).[/note] 대부분의 20세기 예술과 개인 사이를 서술하는 현상학적인 설명들은 자기 스스로 분실되는 예술의 실천에 관한 모순된 성격을 없애주지 않는다. 물론 예술제도론과 같은 설명은 (예술의 역사나 실천에서) 그 어떤 것도 제도화의 규칙으로부터 벗어 수 없으며 따라서 무언가 스스로 실종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므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위기’, 또는 ‘불안’과 같은 수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잠시 모순을 피한다 할지라도 이때 우리가 묘사하려는 이 특수한 사회, 문화, 그리고 정치적 현상도 모두 함께 사라져 버린다. 만약 예술의 예술에 대한 분실, 또는 자기부정이 모더니즘 예술에 내재하는 가능성이며,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의 문제(정치적인 압박이나 대중의 무관심 또는 분노로부터 오는)가 아니라면 그 사실 자체가 모더니즘 예술의 성격이며, 모더니즘 예술을 다른 담론들이나 문화적인 실천들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지점일 것이다.

 

마티스, , 캔버스에 유화, 1906, 개인소장.
마티스, <젊은 선원1 Young Sailor I>, 캔버스에 유화, 1906, 개인소장.

 

그러나 내가 제기하고 싶은 보다 구체적인 질문은 ‘모더니즘의 변증법’에 대한 프리드의 독해에서 제기되는 “연극”과 “물체성”이라는 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연극성”과 “물체성”이라는 개념은 프리드가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한 맥락에서마저 서로 매우 다른, 심지어는 서로에 반대되는 개념들로 보인다. 이로부터 이들이 어떻게 비평의 용어로서, 예술에 내재하는 내적 위협을 설명하기 위해 상보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난다. “연극”은 표현의 영역에서 하나의 가능성, 다시 말해 무대화나 자기투사의 한 형태에 대한 용어인 반면, “물체성”은 표현의 영역 바깥에 있는 사물들의 영역을 지칭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다. “예술과 물체성”에서 연극적인 작품에 대한 프리드의 비평은 ‘작품이 감상자로부터 갈취한 범행 공모’, 또는 이들이 지닌 ‘감상자에 대적하려는’ 특성, 또는 ‘감상자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요구’의 일종을 반영하는 효과 등 연극적인 작품들을 의인화하는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의인화된 ‘예술작품을 사물 이상의 것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위험, 또는 가능성’으로서의 연극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대상 자체로서의 대상(An objet qua objet), 그러니까 벽돌, 혹은 고속도로의 한 구간은 표현적이지도, 그렇다고 어떤 표현을 담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약 하나의 사물이 침묵하는 듯 보인다면, 그것의 침묵은 입을 벌리지 않은 인간의 침묵과 같은 것이 아니다. 프리드는 미니멀리즘의 설치작품들의 특징을 물체성의 ‘투사(projection)’라는 용어로 정의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투사, 진열(display), 전시와 같은 것은 우리를 표현의 영역에 즉각적을 동원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의인 셈이다. 하나의 벽돌의 “순전한” 혹은 “순수한” 사물성은 더 이상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설치 공간에 자리한 모든 것은 그것이 어긋나고 부인되거나 유예되었다 할지라도 표현의 기호 속의 자신의 위치를 갖게 된다. 이때 인간형태중심론(anthromorphism)의 유령은 마치 못된 의식과도 같이 실재주의자의 실천 속을 맴돈다. 여기에서 나는 물체성과 연극성의 관계에서 핵심은 물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물체성의 투사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물체성의 투사란 자기 스스로와 내적 갈등관계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전시하는 ‘손’이 언제나 자신이 보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에도 그 손이 의식될 때에는 끝없는 동어반복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널드 저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한 예이다: “나에게 브라스와 조각, 그리고 다섯 수직들은 무엇보다도 그 형태 shape에 다름아니다.”[note title=”6″back]  브루스 글레이저, “스텔라와 저드에 던지는 질문들(Questions to Stella and Judd),” 그레고리 배트콕(Gregory Battcock)(ed.), 미니멀 예술: 비평 선집(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 (New York: E.P. Dutton and Co., 1968), 156-57.[/note] ). 투사나 전시의 상황에 놓여 있는 한 물체성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특정한 요구로부터 착취, 차용, 유배된 것으로서, 다시 말해 의미에의 요구로부터 추방된 ‘난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연극성과 물체성(의 투사)의 개념들을 연관시키는 한 양상은 스스로에 대한 투명성(transparency)을 불허하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이번에는 연극성 개념과 (작품이 감상자에게 미치는)효과의 창출 사이에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물체성이 표현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원인과 결과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들의 설치작업은 효과에 대한 의식적으로 통제된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그의 설치작업을 이전 작업들과 구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나의 고민은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더 많은 제어(control), 그리고/또는 협업에 대한 것이다. 그와 같은 통제는 다양한 사물, 빛, 공간, 그리고 신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note title=”7″back]  로버트 모리스, “조각에 대한 단상들 Part 2(Notes on Sculpture Part 2),” Artforum 5.2 (October 1966), 23; 프리드가 압축적으로 인용하였다, 154.[/note] 내가 앞서 프리드의 진단에 등장했던 비평 용어들이 많은 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도 공유되고 있었다고 말할 때 이와 같은 견해를 떠올렸다. 통제된 효과 생산에 대한 강조는 연극성과 연극성이 물체성와 맺는 관계의 또 다른 차원에 대한 프리드의 비판에 역시 등장한다. 이들의 설치작업들은 “과도하게 고조된” 미장센(mise en scène)을 창출하였으며, “마치 관람객들에게 일종의 고상한 지각적인 경험을 선사할 수밖에 없도록 설정된 듯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그 확실성, 다시 말해 내 생각에는 본질적으로 비예술적일 수밖에 없는 그 효과의 성질을 이해하고자 하였다.”[note title=”8″back]  1987년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Dia Art Foundation)의 심포지엄에서 프리드가 발표한 내용의 일부이다. “미니멀리즘과 팝아트 이후의 이론들(Theories of Art after Minimalism and Pop)”, 할 포스터(Hal Foster)(ed.), 동시대 문화의 논의들(Discussin in Contemporary Culture) 1 (Seattle, Wash.: Bay Press, 1987), 55-6.[/note] 여기에서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실성과 예술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을 정의함에 있어 취미에는 대상에 대한 경험 이전에 판단을 요구하는 원리나 규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취미판단의 법칙,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아름답게 인식되는 효과에 자연의 경험적 법칙을 상정하는 서술적 전제와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칸트에게 취미판단 있어서의 법칙의 부재는, 평범한 경험적 판단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미(beauty) 판단을 정의하는 것이다. 나는 프리드가 미학을 효과의 확실한 생산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칸트를 암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연극성과 물체성의 관념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표면적인 적대감을 넘어, 예술에서의 표현성의 조건에 대한 거부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리드에게서 주장된 연극성의 마지막 특징을 하나 더 다루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전제하는 것은 예술적 또는 신체적 표현은 표현하는 자의 의도가 지닌 권위를 추정하고, 그 표현으로부터 생산되는 효과를 제어하길 포기하는 일 사이에 일종의 상호작용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예술과 물체성”에서 프리드가 제시하듯, 실재주의자들의 예술적 실천은 관람 상황을 완벽히 제어하기 위해 표현성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의도가 지닐 수 있는 모든 권위를 또한 거부한 채 스스로의 반-예술적인(anti-artistic) 지위를 선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버트 모리스, , 1964, 설치, 뉴욕 그린 갤러리(Green Gallery) 소장.
로버트 모리스, <설치작업 Installation>, 1964, 오브제 설치, 뉴욕 그린 갤러리(Green Gallery) 설치전경.

 

지금까지 물체성, 예술의 부정, 예술적 표현이 관람자에게 야기하는 효과에 대한 개입 등의 주제를 통해 연극성에 대한 몇 가지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시하고 싶은 연극성의 특징은 보다 더 명백하게 이질적인 고민들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다시 모더니즘에 대한 그린버그식의 변증법과 예술 매체의 조건에 대한 반성적인 고려를 상기하게 할 것이다.[note title=”9″back]  물론 프리드의 에세이에는 내가 여기서 다루고 있지 않은 “연극성”에 대한 다른 주요한 성격들도 규명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것은 실재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의 작품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성격으로 규정되는 시간성의 조건들일 것이다.[/note]

 

“예술과 물체성”은 결론부에서는 연극 개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해에 도달한다. “질과 가치라는 개념들은, 그것들이 예술과 예술 자체의 개념에 있어 핵심적이라면, 오직 개별 예술들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개별적인 예술들 사이에 놓인 것은 바로 연극일 뿐이다.” 여기에서 우선 프리드의 비평에서 다루어진 매체-특정성(medium-specificity) 개념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린버그가 제시한 것과 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매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모더니즘의 압박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비평, 예술적 자기규명의 이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린버그는 이 압박에 대한 예술의 응답을 자신의 매체에 고유한 순수성과 독점성을 지닌 예술형식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 그 매체의 “고유하고 환원 불가능한” 특성에 대한 내적 탐색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고유성, 내적 가치나 매체의 환원 불가능한 본질에 대한 논의의 다양한 갈래를 풀어헤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프리드는 이미 자신의 글을 통해 예술 매체의 성질을 통한 자기규정의 개념이 그린버그의 목적론적 서사나, 그가 제시하는 “본질”의 개념 모두로부터 구분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note title=”10″back]  프리드가 T.J. 클락(T.J. Clark)에 대한 답신으로서 발표한 “모더니즘의 작동방식(How Modernism Works)” 역시 그중 하나이다. Critical Inquiry 9.1 (September 1982): 217-34.[/note]

 

내가 이해하기로 프리드에게 있어 하나의 특정한 예술 매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예술적, 또는 문화적 실천의 진화하는 역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 역사들보다 영원할 수 있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프리드는 또한 순수성에 대한 상정(예를 들어, 하나의 예술형식에 대해 진정으로 ‘내적인 것’과 고작 ‘외적일’ 뿐인 것 사이의 대비)이 득보다는 실을 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더니즘과 예술 매체의 연관에서 중요한 것은 미리 규정된 “본질”에 대한 매체의 순응 정도가 아니라 자기규정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이다. 자기규정은 개별 예술 작품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성공이나 실패로 가늠될 수 있는 준거(와 같은 무엇)를 제공한다. 프리드가 동원하고 있는 실재주의 예술가들의 발언에서는 바로 이 자기규정에 대한 거부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것이 예술 매체와 실재주의 예술가들의 맺고 있는 관계를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와 구분하는 특징이다.

 

더욱 구체적인 논의들이 가능하겠지만, 만약 이와 같은 그린버그에 대한 독해, 자기규정 및 매체-특정성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이 전제된다면 나는 이러한 이해가 어떻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연극성의 개념, 특히 ‘개별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연극이다’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다시 멜빌의 에세이, “알레고리에 대한 단상들”로 되돌아가보자. “예술과 물체성”에서 프리드는 “…실재주의자의 작품에서 잘못된 점은 그들이 인간형태주의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그들의 인간형태중심주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 자체가 회복 불가능하도록 연극적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멜빌은 이 문단을 인용한 뒤 아래와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토니 스미스의 작품에 대해 프리드가 반대했던 지점은 그것이 자신을 관람자에게 제시함에 있어, 관람자를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어떤 인간적인 관계를 허용하길 거부하는 개인으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것이 단순히 관람자로 전락하도록 종용하는) 관람자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작품이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것도 의미하도록 두지 않으며, 어떤 의미로서 받아들여지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에는 영혼이 없으며(soulless), 보는 이에게 카벨(Stanley Cavell)이 ‘눈 먼 영혼의 상태(soul-blindness)’라고 불렀던 조건을 강요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종류의 모순을 지닌 인물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영혼됨과 자신들의 표현의 인간성을 우리로 하여금 대신 결정하도록 하는.’

 

도널드 저드, , 1973, 로테르담 보이만 뮤지엄 소장.
도널드 저드, <아연철판 galvanized iron 17 January>, 1973, 오브제 설치, 로테르담 보이만 뮤지엄 설치전경.

 

나는 이 문단이 제시하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표현의 관념을 두고 벌이는 상호작용에 대한 부분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이 문단은 실재주의 이론 및 실천에서의 표현에 대한 멜빌의 비판으로 읽힌다. 문단의 도입부에는 실재주의자들의 작품은 스스로 뭔가를 의미하거나 혹은 어떤 의미로서 받아들여지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작품이 스스로 의미를 갖게 되거나, 그렇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의 질문은 우선 차치해두기로 하자. 이 문장에서 우리는 수동성 또는 노출의 거부, 다시 말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것’ 혹은 ‘저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읽혀지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를 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거부는 또한 자신의 표현의 장에 대한 어떠한 통제 권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거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종의 설명인 바로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그들의 영혼이 부여됨에 대해 대신 판결 내려 주기를, 그들의 표현이 지닌 인간성을 그들 대신 결정해 주길 원하는’ 익숙한 ‘인물들’에 대해 상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때의 ‘인물들’은 어떤 판결에 복종하기 보다는 뭔가를 양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앞서 언급한 자신이 읽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대신 결정을 요구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표현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한 독재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중성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권위와 수동성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 그리고 그것이 예술에서 표현의 조건과 매체-특정성, 나아가 프리드로 하여금 개별 예술들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설명되는 연극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대체 연극성이란 무엇인지의 문제에 대해 유의미한 내용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중성은 또한 어떻게 ‘연극’이 어떤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예술 자체의 적처럼 보이거나, 실제로 적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실재주의와 물체성을 예술의 매체 개념과 연관 짓도록 하는 모더니즘 담론은 당연히 예술에 “모던(the modern)”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등장했다. 예술에서의 모던은 매체의 역사 또는 관습이 예술가가 맺는 관계의 위기로 정의되었다. 스탠리 카벨은 자신의 저작, “보여지는 세계(The World Viewe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더니즘은 예술의 힘이 소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제 예술가가 당면한 과제가 예술 자체의 뮤즈를 자신의 예술작품에서 취득하는 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 누군가는 예술가의 과제가 더 이상 새로운 예술의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 매체를 생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 이 곤경 속에서 매체는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체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서의 실패는 이제 예술적 실패의 새로운 한 종류이며, 완전히 절대적인 실패이다.[note title=”11″back]  스탠리 카벨, “보여지는 세계: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단상들(The World Viewed: Reflections on the Ontology of Fil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103.[/note]

 

예술의 매체를 수립해야 한다는 명령은 예술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결정짓고 주장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음을 스스로 상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와 동시에 작품의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들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어떤 매체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직접 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발화나 행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의 의미와 표현의 가능성은 오직 이 표현의 주체가 어떤 대상이며, 어떤 발언, 어떤 행위나 어떤 표현의 매체가 사용되고 있는가와 같은 기준이 되는 질문에 답이 선행 존재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는 기준을 세우고 주창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누군가는 (개인이건 다수이건)특정한 권위를 가지고 말해야 하며, 자신의 이 권위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되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린버그가 모더니즘의 과제로 규정한, 그러나 그가 상정한 순수성이나 독창성의 목표 속에서의 자기규정 및 자율성 획득의 임무와는 동일시되지 않는, 예술의 자기규명의 순간인 셈이다. 매체-특정성은 ‘매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았’고 전통이나 역사로부터 보장되지도 않기 때문에 주요한 이슈가 된다.

 

“그들의 표현에 담긴 인간성을 우리더러 대신 결정하라는” 인물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왜 우리에게 의미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표명의 권한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그 거부를 통해 어떤 것이 말해지고 투영되고, 또 투사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갤러리 공간에 놓인 어떤 것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 순수한 실재성, 실재적 실재성 같은 것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여기에서 답변에 대한 요구를 대면하고 있다.[note title=”12″back]  “그러나 실재주의자들의 예술작품들은 어떻게든 관람자를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공간에 자신의 방식으로 놓여져야만 한다.”(“예술과 물체성,” 154) [/note]

 

토니 스미스, , 1974, 설치 오브제, 뉴욕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Timothy Taylor Gallery) 설치전경.
토니 스미스, <네 번째 사인 The Fourth Sign>, 1974, 오브제 설치, 뉴욕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Timothy Taylor Gallery) 설치전경.

 

매체를 결정하는 일은 예술적 성공 또는 실패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며, 예술에서의 리스크를 설정한다. 따라서 이 결정은 (매체 자체의 준거를 세우며)자신의 권한에 대한 상정을 주장하는 것과 바로 같은 이유로 (관람자의 반응에 대한)통제의 양도까지 포함하게 된다. 예술에서건 다른 곳에서건 표현성의 가능성은 다음의 두 조건을 모두 필요로 한다. 우선 스스로 규범적으로 말할 자신의 권한 자체에 대한 상정이 그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표현이 얻게 될 반응에 대한 통제의 포기이다. 실재주의자들의 오브제나 설치 작업은 매체나 표현성의 방식을 정하는 데에 있어 스스로의 권한을 포기하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관람자가 놓인 상황에 대해서는 완전한 규제를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위에 제시한 표현성의 조건을 반대로 뒤집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예술에 있어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통제의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인 듯, 마치 통제가 권위의 역할을 할 수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완전한 통제(Total Control)’와 ‘완전한 우연(Total Chance)’라는 두 포스트모더니즘의 쌍둥이 전략들 사이에서 관람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연극성이라는 것이 모더니즘의 자기규정의 변증법에 대한 그린버그식의 독해로부터 등장한 물체성의 압박의 일부인 동시에, 어떻게 ‘개별 예술들 사이에 놓인 것은 연극이다’라는 진단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가망이 없으리만치 압축적인 설명이기는 하나, 나는 이것이 어떻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연극이 예술의 부정 자체로 여겨질 수 있었는지의 문제를 이해하는 한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언급하며 마무리하겠다. 먼저 이 글의 대부분은 “어째서 실재주의는 그린버그를 비롯한 이들이 모더니즘을 정의하는 것으로 규정한 자기비판과 같은 원동력의 일부가 아닌가?”하는 질문을 제기하기 위한 지속된 시도이다. 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도출되지 않았지만 이 지면을 통해 나는 적어도 그 질문을 던져냈길 바라는 바이다. 그와 연관하여 둘째로, 내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그 주제들이 놓여 있었던 당대의 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을 밝힌다. 이로 인해 애초에 그와 같은 논의들이 어떻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할 수 있었는지의 문제는 다루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 당대의 맥락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이 시기에 어떻게 표현성의 조건들과 예술 자체의 개념이 부인되었을 뿐 아니라(지루함이나 무능을 비롯한 갖은 이유들로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지만), 예술 개념에 대한 포기나 극복과 같은 주제가 당시의 수많은 야심 찬 예술가와 비평가들로 하여금 의식적인 절박함과 충성을 갖고 다룰 문제로 여겨질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들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1면의 머리기사 제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다시 등장하고 있는 “예술의 종말”에 대한 담론들의 이면에서는 무엇이 요구되고, 또 주장되고 있는가? 어떻게 그와 같은 문제가 어느 쪽의 편을 들 일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전개가 지닌 의미는 그린버그가 주장한 칸트적 자율성과 반성적인 자기비판, 그리고 이들을 고상한 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를 정의하는 것으로 보고자 했던 맥락을 거스르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바로 그 위대한 모더니스트 프로젝트의 유산으로부터 우리는 예술의 종말이라는 언어로 자신을 제창하거나, (암울한 방식으로든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든)스스로 반-미학적인 자세를 취하는 다양한 운동들, 상품들, 태도들을 바라볼 방식을 얻게 되었다. 칸트적이건 포스트-칸트적인 견해이건,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 개념에 규정적인 것으로서, 예술에서도 예술을 넘어서는 것은 그 무엇도 없으며 오직 예술만이 예술의 종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과 같은 것들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