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안의 영화, 폐허 속의 영화
번역 김유진

 (태시타 딘, 2001), 16mm 컬러 필름의 스틸컷, 무성, 2분 30초. 작가, 런던 프리스 스트릿 갤러리(Frith Street Gallery)와 뉴욕/파리의 마리안 굿맨 갤러리(Marian Goodman Gallery) 제공.
태시타 딘(Tacita Dean), <녹색 광선 The Green Ray>, 2001, 16mm 컬러 필름의 스틸컷, 무성, 2분 30초. 작가, 런던 프리스 스트릿 갤러리(Frith Street Gallery)와 뉴욕/파리의 마리안 굿맨 갤러리(Marian Goodman Gallery) 제공.

 

지난 20년 동안 시네마라고 불리는 제도는 현저한 변화를 경험했다. 셀룰로이드 필름의 점진적인 쇠퇴에 대한 우려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영화 산업의 생산품은 인터넷과 모바일 무선 테크놀로지를 통해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도달 범위가 확장되었다. 영화의 동시대적인 이동과 변천에 대한 질문은 디지털 배급과 전시라는 새로운 형태에 관해서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영화의 심도 있는 재구성이 일어난 또 다른 장소인 전시장을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한다. 1990년대 내내 필름과 비디오는 현대 미술에서 점점 더 중심이 되어 갔고, 이들은 영화계와 예술계를 바꾸기 위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1930년대에 이미 발터 벤야민은, 영화에 가장 강력하게 구현된 기계적인 복제의 출현이 어떻게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긴급한 질문을 명확하게 제기했다.[note title=”1″back]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its technological reproducibility (third version)’, trans. Harry Zohn and Edmund Jephcott, in Selected Writings, Volume 4: 1938-1940, ed.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MA: Belknap Press, 2003), pp. 251–83.[/note] 이 질문은 결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21세기를 위해 이 질문을 뒤바꿔서, 필름 영화가 이전에 본 어느 것과도 다른 겉모습을 취하기 위해 변형되고 파손(fracture)되어가며 갤러리와 미술관에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현상이 어떻게 시네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변화시키는지 물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장 크리스토프 르와유(Jean-Christophe Royoux)는 1990년대로부터 시작된 전시장 내의 무빙 이미지 실천의 확산을 전시의 영화(Cinema of Exhibition) 라고 명명했고, 레이몽 벨루(Raymond Bellour)는 이를 ‘다른 영화(other cinema)’라고 불렀다. [note title=”2″back] Jean-Christophe Royoux, ‘Remaking cinema’, inCinema, Cinema: Contemporary Art and the Cinematic Experience(Rotterdam: NAi, 1999), p. 21; Raymond Bellour, ‘Of an other cinema’, in Tanya Leighton (ed.), Art and the Moving Image: a Critical Reader(London: Tate Publishing/Afterall Books, 2008), pp. 406–22.[/note]   일부 예술가들은 시네마 그 자체 – 그것의 역사(‘hi’stories), 제도, 페티쉬, 사랑, 그리고 시간성 – 를 예술적 탐구를 위한 비옥한 토지로 간주한다. 다른 이들은, 영화의 중심인 미장센, 몽타주, 스펙터클, 내러티브, 그리고 지속과 같은 비유, 전략 및 관습의 사용을 지지하기 위해, 영화 역사의 특정성을 언급하기를 회피한다.[note title=”3″back]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첫번째 경향의 전형적인 대표자들이며, 매튜 바니와 더그 에이킨은 두번째 경향을 대표한다.[/note]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맥락이나 ≪거울방: 1945년 이후 미술과 영화 Hall of Mirrors: Art and Film Since 1945≫ (현대미술관, 로스엔젤레스, 1996), ≪주문에 홀리다 Spellbound≫ (헤이워드 갤러리, 런던, 1996), ≪영상의 운동 Le Mouvement des images≫ (퐁피두 센터, 파리, 2006), 또는 ≪영화 효과: 환영, 현실, 동영상 The Cinema Effect: Illusion, Reality and the Moving Image≫ (허쉬혼 박물관, 워싱턴, 2008)과 같은 대규모 그룹 전시에서 이 ‘다른 영화’의 실천이 나타난 유행은 할 포스터(Hal Foster)로 하여금 필름과 비디오가 이제 현대 미술의 ‘기본 매체’ 라고 주장하도록 만들었다.[note title=”4″back] ‘Roundtable: the projected image in contemporary art’, October, no. 104 (2003), p. 93[/note] 이러한 작업들은 두 가지 의미로 영화를 전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영화를 미술의 전시 공간으로 옮기는 것이지만, 또한 이는 영화를 시야에 노출시키고, 환자가 증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검사에 노출시키는 것이다.[note title=”5″back] 전시하다(exhibit)’ 어원은 라틴어 exhibere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ex(밖으로 out)+ habere(내밀다 hold)이다[/note] 바로 그러한 증상에 대한 독해를 통해 우리는 점점 더 경계를 정하기 어려워지는 대상인 시네마의 동시대적인 윤곽을 재구성할 수 있다.

 

현 시대는 1과 0이라는 수치 값으로 모든 매체를 ‘부호 변환(transcode)’하는 뉴 미디어의 능력을 나타내는 키워드인 융합(convergence)의 시기로 흔히 간주된다.[note title=”6″back] 부호 변환이라는 용어는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로부터 유래하는데, 그는 이를  미디어의 5원칙 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Lev Manovich, The Language of New Media (Cambridge, MA: MIT Press, 2001), pp. 45, 47를 보라.[/note]  플랫폼 전반에 걸쳐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비물질적인 패턴으로 강조점이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디지털 컨버전스는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에 대한 그 어떤 생각도 저해시킬 것이다. 광섬유 시대에 데이터 이동성이 향상되고 있지만, 융합과 특정성이라는 한 쌍을 매체의 개념의 해체는 말할 것도 없이  물론이거니와 특정 매체의 소멸로 보기보다는, 역사화된 존재론의 새로운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변증법적인 움직임으로 보면서 매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방식과 명료해지는 방식 모두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물질적인 지지체(support)와 이에 개입하는 담론과 제도 모두를 포함하는 이질성의 집합체(aggregate)로 이해되어야 하는 개념인 매체를 해체하는 대신에, 융합은 ‘시네마’라는 오염되지 않은 대상을 명확히 기술할 수 있는 학문적인 정설을 버리고, 안정적인 본질로 단순화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다양한 매체 특정성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는 ‘불순한 예술(impure art)’이고 언제나 그래 왔다는 앙드레 바쟁의 주장처럼,[note title=”7″back] What Is Cinema? Volume One, trans. and ed. Hugh Grey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pp. 53– 75에 수록된, ‘혼합된 영화를 위한 변명(In defense of mixed cinema)으로 다소 안타깝게 번역된 바쟁의 글 ‘Pour un cinéma impur‘를 보라.[/note] 이러한 접근법은 영화의 계속되는 변형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 그것의 순수성을 포기하면서 영화의 변화하는 윤곽에 대한 연구의 문을 열 것이다. 레이몽 벨루가 말했듯이,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든 예술을 어떤 단일한 앙상블의 부분으로 이해하고, 각 작품을 특히 매체의 측면에서 서로 다른 예술 형태의 혼합으로 분석하거나 또는 단 하나의 메커니즘만을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선택으로 분석하는 것’이다.[note title=”8″back] Raymond Bellour, ‘Battle of the images’, in Jeffery Shaw and Peter Weibel (eds), Future Cinema: the Cinematic Imaginary After Film(Cambridge, MA: MIT Press, 2003), p. 58.[/note]

 

현대 미술에는 대규모의 스펙터클한 영사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더그 에이킨(Doug Aitken), 매튜 바니(Matthew Barney),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와 같은 작가들이 있고 엘리자베스 코위(Elizabeth Cowie)가 자신의 논문 「전시장 안의 다큐멘터리적 사운드와 이미지에 대하여」에서 탐구한 충동이 존재하기도 하지만,[note title=”9″back] Elizabeth Cowie, ‘On documentary sounds and images in the gallery’, Screen, vol. 50, no. 1 (2009), pp. 124 – 34.[/note] 동시에 16mm 필름 장치에 구현된 작은 것, 소중한 것, 낡은 것에 대한 눈에 띄는 관심도 발견된다. 이는 매튜 버킹엄(Matthew Buckingham), 태시타 딘, 빌럼 데 로이/여로엔 데 라이크(Willem de Rooij/Jeroen de Rijke), 샤론 록하트(Sharon Lockhart)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들 모두는 미술계의 배급(한정판 판본 print)과 전시(전시장 설치)라는 방식으로 영화를 실천하기 때문에 영화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메커니즘만을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선택’을 의심해보자고 하는 벨루의 제안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작업은 필름 영화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중요한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탐구가 전통적으로 시네마라고 알려진 것에서 구조적, 담론적으로 제거된 영역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은 영화이론이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필요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킨다. 영화 탄생 100주년이었던 1995년 즈음, 셀룰로이드의 사용이 전시장 내 무빙 이미지 실천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떠오르게 되는데, 이는 비디오 아트가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와 로버트 휘트먼(Robert Whitman) 같은 작가들의 필름 설치를 대체했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이후 처음이었다. 1990년대에 영화에 관한 질문을 향한 더 큰 전환의 일환으로  16mm가 전시장에 재진입하자 25년 전과는 매우 다른 우려들이 발생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장치(apparatus)에 대한 탐구는 관객의 현상학과 맞물려서, 역사와 쇠퇴한 것들에 대한 탐구로 변했다. 조지 베이커(George Baker)가 말했듯이, ‘쇠퇴하는 것, “오래된(outmoded)” 것, 비동기적인 것, 폐기된 형식, 주변부의 매체: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 가장 흥미로운 예술 프로젝트들에 있어 특별한 관심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note title=”10″back] George Baker, ‘Artist questionnaire: 21 responses’, October, no. 100 (2002), p. 6.[/note]

 

쇠퇴에 대한 관심이 영화와의 관계를 훨씬 뛰어넘어서 현대 미술의 하위 장르를 틀림없이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note title=”11″back] 여기에는 제인과 루이스 윌슨의 버려진 국가권력의 장소에 대한 비디오 설치 <Statsi City>(1997), 제임스 콜먼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사용 <INITIALS>(1993–94), 또는  레너드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오브제 모음 <You see I am here after all>(2008) 등이 포함된다.[/note] 영화학은 이 ‘폐기된 형식’에 대한 탐구의 중심이 되는 16mm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첨단 기술의 혁신이 만연한 환경에서, 현대 미술이라는 공간 내에서 16mm를 통해 영화를 ‘낡은 매체(old medium)’로서 탐구하는 일은 매체 특정성을 쇠퇴와 융합의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게다가, 이러한 매체 특정성으로의 회귀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매체를 재창안하라(re-invent the medium)’고 촉구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인데, 크라우스는 폐기된 미디어(media)에서 형성된 모더니스트적인 성찰로 회귀함으로써 미학의 감지된 일반화에 맞서 싸우려 한다. 크라우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임스 콜먼(James Coleman)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사용으로 대표되는 발명된 매체가 폐기된 기술을 전용한다는 것인데, 이 기술은 ‘미학적인 계보가 없고… 지지체로서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이를 매체로 채택하는 것은 곧 그것에 특허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note title=”12″back] Krauss, ‘. . . and then turn away? An essay on James Coleman’, in George Baker (ed.), James Coleman (Cambridge, MA: MIT Press, 2003), pp. 160–61.[/note] 발명된 매체는 소유자 단 한명의 것이다; 이 소유자는 그 매체를 위한 미학적인 시스템을 발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필름은 그 장치의 종합적인 특징으로 인해 발명된 매체의 한 사례가 되지만 풍부하고 다양한 미학적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16mm를 사용하는 것은 크라우스의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16mm로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은 이 역사를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본 연구는 발명된 매체라는 개념을 벗어나서 매체 특정성이 현대 미술의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또 다른 길을 탐구해보려 한다. 쇠퇴한 것으로서 필름이라는 물질과 시네마라는 제도를 고집하는 이러한 동시대적인 실천들을 논의하기 위해, 영국 작가 태시타 딘의 16mm 작업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포스터에 의하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때에는 대개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어떤 작가들은 뉴 미디어가 주는 미래지향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한편, 다른 작가들은 이 미래로의 도약처럼 보이는 것이 지나간 과거와 쇠퇴하는 것들 가운데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보려고 한다.’[note title=”13″back] ‘Round table: the projected image in contemporary art’, p. 73.[/note] 본 연구는 이 두 번째 카테고리의 영향을 다루고, 토마스 앨새서(Thomas Elasesser)에 의하면 ‘영사와 영화이론에 대한 이해에 관해 숙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도(零度)’로 기능하는 디지털이 영화이론가들에게 제공한 기회를 받아들인 예술 실천을 살펴볼 것이다.[note title=”14″back] Thomas Elsaesser, ‘Early film history and multi-media: an archaeology of possible futures?’, in Wendy Chun and Thomas Keenan (eds), Old Media, New Media: a History and Theory Reader (London: Routledge, 2006), p. 16.[/note]

 

16mm 필름 영화가 전시장에 존재하게 되면 이것이 일견 ‘시네마’의 일반화로 간주되고, 장소와 맥락이 분산되어 그 특정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16mm 필름 작업이 이동함으로써 영화의 새로운 디스포지티프(dispositif)[note title=”15″back] Dispositif는 본래 장치로 번역이 되나 앞서 나온 apparatus의 번역으로 쓰인 장치와 구분하기 위해 디스포지티프라고 번역하였다.(역자 주)[/note]가 표현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용어를 영화학에서 장 루이 보드리(Jean-Louis Baudry)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한 푸코를 따라, 내가 디스포지티프라는 용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구성이 역사적으로 특정적인, 물질과 담론적 실천의 이질적인 총체다.[note title=”16″back] 다음을 참조: Michel Foucault, ‘The confession of the flesh’, in Colin Gordon (ed.),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1 – 1977 (New York, NY: Pantheon, 1980), p. 194.[/note] 딘의 작품의 경우, 이 개념은 어떻게 전시장이라는 공간의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결정이 매체 특정성을 새로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필름의 물질적 특성과 연계되어 작용하는지를 고려하게 해준다. 16mm 필름 영화는 순결하고 신성한 예술의 공간 속에서 폐허가 된 시네마의 소중한 유물로 사용되며, 인화 필름은 귀중한 미술 오브제로 지위가 격상된다.

 

쇠퇴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 있는 가운데 전시장 안에 존재하는 16mm 필름 영화는, 더이상 대중 문화의 형식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지 못하게 된 시네마가 특권화되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을 피난처로 삼고 이 영역을 자신의 새로운 장소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대중화된 화이트 큐브라는 건축 양식은 모더니즘 이데올로기 그리고 예술적 자율성을 향한 갈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후자는 오로지 시장의 필요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대중문화의 불순한 촉수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브라이언 오 도허티(Brian O’Doherty)는 이 순결한 공간을 ‘생존의 복합체(survival compound)’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내부(자율적인 예술 작품)와 외부(세계) 사이에 설정하는 엄격한 감시의 경계를 암시한다.[note title=”17″back] Brian O’Doherty, 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Expanded Edition(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p. 80.[/note] 비록 전시장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매우 역사적이기는 하지만 그 이해는 시간적 특정성을 폐지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 Staniszewski)가 ‘전시의 권력(power of display)’이라고 칭한 것을 통해 발생하는 탈시간성(timelessness)을 그 공간 내의 대상들에 부여한다.[note title=”18″back] Mary Ann Staniszewski, The Power of Display: a History of Exhibition Installations at the Museum of Modern Art (Cambridge, MA: MIT Press, 1998)를 보라.[/note]

 

이 제도적인 틀은 시네마의 개념을 대중의 여가 활동이라는 원래의 기능에서 분리시킨 후 대신에 이를 예술이라는 고상한 환경에 부합하도록 만든다. ‘그 어떤 활동도 생존의 도구로서 제 기능을 하던 시기가 끝나 완전히 쇠퇴하기 전 까지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홀리스 프램튼(Hollis Frampton)의 주장을 고려할 때,[note title=”19″back] Hollis Frampton, ‘For a metahistory of film: commonplace notes and hypotheses’, in Circles of Confusion: Film, Photography and Video Texts, 1968-1980 (Rochester, NY: Visual Studies Workshop Press, 1983), p. 112.[/note] 셀룰로이드가 점차 구식이 되어 간다는 점과 현재 그것이 전시장의 공간 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화적인 영역 곳곳으로 분산되고 새로운 이미지 체제와 경쟁해야 하는 시네마는 전시장을 피난처로 삼지만 이는 어쩌면 그것이 방부 처리되어 누울 무덤일지도 모른다. 벨루가 썼듯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 형태인 [시네마]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적이고, 그 화려함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하다.'[note title=”20″back] Bellour, ‘Battle of the images’, p. 59.[/note]

 

2001년 태시타 딘은 마다가스카르 서부 해안을 여행하며 개기 일식을 촬영했고, 이 프로젝트는 이후 <다이아몬드 링 Diamond Ring>(2002)이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우연히 그녀는 ‘녹색 광’이라고 불리는 현상에 대해 듣게 되었다. 종종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이 짧은 녹색 불빛은 마지막 한 조각의 햇빛이 수평선 아래로 내리쬐는 순간 반짝 나타나는 것으로, 오랫동안 선원들에게 행운을 상징했다. 마다가스카의 모롬베(morombe)는 낮은 습도와 맑은 공기라는 조건 하에서 발생하는 이 포착하기 어려운 광선을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또한 그 전날 저녁 우연히, 에릭 로메르의 작품 <녹색 광선 Le Rayon vert>(1986)에서 그 광선 효과가 로메르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서 – 로메르의 촬영감독은 카나리아 제도에서 두 달 동안 매일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후반 작업에서 마법을 부렸다 – 광선을 잡고 말겠다는 딘의 결심은 더욱 강해졌다. 우연이 우연을 낳아 <녹색 광선>(2001)이 탄생했다. 딘은 촬영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의 영화 <녹색 광선>의 특이한 점은 나 또한 이것을 거의 포착하지 못할 뻔 했다는 사실이다. 매일 저녁, 그 모롬베 해변에 서서 내내 모잠비크 해협을 내려다보고 필름 한 롤에서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을 재면서, 나는 그것을 봤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note title=”21″back] Tacita Dean, ‘The Green Ray’, in Rina Caravajal (ed.), Tacita Dean: Film Works (Milan: Edizioni Charta, 2007), p. 88.[/note]”

 

확실히, 관객 또한 절대 확신할 수 없다. 이 필름은 딘의 다른 작품들처럼 순환반복으로 상영되는 대신, 재생 버튼이 16mm 영사기에 장착되어 있어 버튼을 누르는 관객의 의지로 시작된다. 2분 30초 동안 관객들은 황금빛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운명의 순간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하지만 어느새 태양은 사라지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필름은 끝나 있다. 내가 녹색 광선을 포착했던가? 다시 버튼을 누를 시간이다.

 

해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녹색 광선>은 우연한 사건 또는 찰나적인 것을 아카이빙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매체인, 필름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는 희귀한 광학 현상을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딘은 직접 이러한 <녹색 광선>의 물질적인 기반과 그것의 주제 사이의 관련성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촬영하는 동안 혼자가 아니었고 사건을 영상에 담은 다른 두 명의 사람들과 동행했다.  그들은 영상을 즉시 재생해 보면서 자신들의 동영상이 녹색 섬광이 없었음을 입증하며 자신들은 사실 단지 또 하나의 모잠비크 일몰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딘은 다음과 같이 쓴다.

 

“그러나 이후 영국에서 내 필름 조각을 현상했을 때 거기에는 틀림없이 셀룰로이드의 단일 프레임 위에서 확실하게 재현되는 것에 저항하면서, 그렇지만 필름 프레임들의 찰나적인 움직임 속에 분명히 녹색 광선이 존재했고, 이는 디지털 세계의 픽셀화(pixellation)가 그것을 포착하기에 역부족임에 대한 증명이었다.[note title=”22″back] Ibid., p. 89.[/note]”

 

비디오 대 필름, 디지털 대 아날로그, 규칙성 대 우연성, <녹색 광선>은 현대 문화의 디지털화와 그 이후 아날로그 필름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더 큰 문제를 소환한다. 이 영화는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과 신념’의 가능성을 주제로 다루면서 셀룰로이드가 가진 진실을 드러내는 역량, 즉 기록의 능력을 믿을 것을 촉구한다.[note title=”23″back] Ibid.[/note] 계속해서 딘은 ‘이 영화는 하나의 기록이다. 이것은 필름 자체의 구조, 물질, 제조(manufacture)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note title=”24″back] Ibid.[/note] 이 영화에서 녹색 광선을 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필름이라는 물질이 과거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는 믿음과 맹신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기록인가? 어쩌면 찰나 동안의 광학 현상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지만, 영화사에 있어서 특정한 순간과, 제작자와 관객들이 필름에 부여하는 소망에 대한 기록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분명 환상적인 투사이기 때문이다. 1과 0이라는 디지털의 규칙성으로 인해 관객은 식별 가능한 우연성을 정확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셀룰로이드의 역량에 매달린다. 셀룰로이드가 가진 진실을 드러내는 능력에 대한 기대와 셀룰로이드가 보장하는 지표성에 대한 믿음은 종종 과장된 주장이기도 하는 디지털의 무근본성과 그것에 내재된 조작 가능성을 둘러싼 불안이 낳는 증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필름이 쇠퇴하기 시작한 덕분에, 사라지는 과정에서 찰나적인 순간들을 포착하는 능력이 필름이라는 매체의 특정성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된다. 디지털 또한 그러한 작업을 할 수는 있지만 아날로그 필름과 우연성의 관계를 특권화함에 있어서 현안은, 사실상 이 매체가 유령과도 같은 역사성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딘이 말하듯이, ‘그러므로 쇠퇴와 시간 사이의 관계는 필름과 시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하며 둘다 역사적인 시간, 알레고리적인 시간, 아날로그의 시간을 나타낸다. 매끄러운 디지털의 시간은 나를 매료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침묵과 유사하게 죽음을 내포한다.’[note title=”25″back] Tacita Dean, ‘Artist questionnaire: 21 responses’, p. 26.[/note]

 

<녹색 광선>의 우연한 순간은 관람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의 잔재로서 지속되며, 이미지를 기록하고 지각하는 붕괴된 체제의 조각적 유물처럼 기능하는 전시장 안의 16 mm 영사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 주변을 배회한다. <녹색 광선>은 마다가스카 저녁의 일몰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현 순간의 영화사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으로서 존재한다. 필름의 매체 특정성과 우연성의 기록이 연결되는 사례는 영화의 초기 관객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들은 루이스 뤼미에르(Louis Lumiére)의 <아기의 식사 Le Repas de Bébé)>(1895)를 보고 그 표제에 해당하는 행위보다는 배경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에 더 매혹당했다.[note title=”26″back] 이 출처 미상의 텍스트는 사둘(Sadoul)의 <영화의 역사 Histoire générale du cinéma>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배경의 정원에서 나뭇잎들은 햇빛을 받으며 흔들렸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각별한 노력을 기해야 식별 할 수 있는 이 모습은 1896년의 군중들을 열광으로 가득 채웠다’ (필자 번역). 그러한 디테일이 <오늘 today>(1946)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곤 했다는 논평이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다. Georges Sadoul, Histoire générale du cinéma: Tome 1, L’Invention du cinéma, 1832 – 1897(Paris: Denoël, 1946), p. 247를 보라.[/note]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이론과 실제에서 기록의 능력은 아날로그 무빙 이미지의 존재론의 핵심으로 빈번하게 제시되어왔고, 그 빈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화와 맥락화가 필요하다.

 

<녹색 광선>이 제안한 매체의 개념은 최근의 아날로그-디지털 전환에 대한 논의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얻게 된 범주인 지표성이라는 개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상당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디지털 미디어의 이진법적인 기초에 내재된 조작의 능력에 맞서서 아날로그 영화를 지표적인 기호로 생각하는 것은 뉴 미디어에 의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약화되는 것으로 보이는 증언의 힘과 역사성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메리 앤 도앤(Mary Ann Doane)이 과감하게 주장했듯이 ‘지표성이 오늘날 영화적 특정성의 주요한 척도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note title=”27″back] Mary Ann Doane, ‘The indexical and the concept of medium specificity’, Diff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and Cultural Studies, vol. 18, no. 1 (2007), p. 129. [/note]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해온 매체 특정성이라는 범주와는 매우 다른 관계를 제안하기 위함이다. 매체가 자기 비판을 통해 자신이 유능할 수 있는 영역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주장은 외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기지시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기서 제안되는 매체의 개념은 영화의 지시적인 능력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가진 구조 영화(structural film)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note title=”28″back] 다음을 참조하라: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1960). Available online at <http:// www.sharecom.ca/greenberg/ modernism.html> [accessed 20 October 2009]. [/note] 필름 스트립의 표면, 단일 프레임 접합, 스프로킷 구멍,줌, 팬과 같은 영화의 물질적인 특성에 주목함으로써 구조 영화는 필름의 특정성이 과거의 흔적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회전하는 기술이 가진 물질성에 근거를 둔다고 생각했다.[note title=”29″back] 피터 지덜(Peter Gidal)이 썼듯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의 진정한 실체보다 영화가 의미하는(stands for)” 혹은 표현하는(represents)” 바가 더 중요성을 갖는다’. 지덜에게 이는 급진적인 영화 제작이 이미지의 물질성을 고집함으로써 영화재현의 능력을 문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영화는 어떤 것도 기록해서는 안 된다.Peter Gidal, Blow Job(London: Afterall Books, 2008), p. 10를 보라.[/note]

 

이제 그와 반대로 필름의 매체 특정성은 자기 자신의 바깥을 가리킬 수 있는 능력, 즉 근본적으로 부족한 자율성이 행사될 때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는 물질성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성과 역사 사이의 관계, 또는 매체의 물리적인 한계와 매체가 관여하는 광범위한 사회역사적 맥락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전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표적인 보증이 하나의 사실성이라고 하는 주장은 아니다.  도앤이 ‘매체 특정성의 지표성과 개념’에서 설명했듯이 상징성을 지표성으로부터 구분해내고 지표적인 기호가 실재를 재현하기 보다는 실재를 가리킴을 인식하는 사실이 중요하다.[note title=”30″back] Doane, ‘The indexical and the concept of medium specificity’, p. 133.[/note] 이러한 가리킴은 실재의 흔적, 또는 실재의 유령과도 같은 배회라고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지표성이라는 개념은 이미지의 매개되지 않는 현전에 대한 믿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대신 부재 및 상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이 성질들은 지표성의 파토스가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명백한 우울함 뿐만 아니라 <녹색 광선> 같은 영화를 특징짓는다. 여기서 지표는 이전까지 흔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고, 단지 잔여물로만 남아있는 무언가를 가리킴으로써 현전에 대한 꿈을 좌절시킨다.

 

작가 믹스 다우텐다이의 아버지 칼 다우텐다이와 그의 부인
작가 믹스 다우텐다이의 아버지 칼 다우텐다이와 그의 부인

 

톰 거닝(Tom Gunning)은 디지털 미디어 역시 아무리 매개되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지시 대상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이 개념의 유용성에 대해 소리 높여 의문을 제기해 왔다.[note title=”31″back] Tom Gunning, ‘Moving away from the index: cinema and the impression of reality’, Diff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and Cultural Studies,vol. 18, no. 1 (2007), pp. 29–30.[/note] 거닝은 역사적 탐구를 통해 사진이 디지털의 무근본성에 비해 소급적으로 부여받아 온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사진이 결코 신뢰할 만 했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의 존재론이 지시 대상과의 존재기반을 공유한다는 사실 못지 않게 마술적이고 언캐니한 속성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note title=”32″back] Tom Gunning, ‘Phantom images and modern manifestations: spirit photography, magic theatre, trick films, and photography’s uncanny’, in Patrice Petro (ed.), Fugitive Images: From Photography to Video (Indianapolis, 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pp. 42– 71.[/note] 사실 지표성 그 자체가 유령성(ghostliness)과 언캐니함 모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이러한 속성들은 지표성에 결코 반대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주장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언제나 의심스러웠다고 해도, 동시대가 이 매체의 진실을 드러내는 능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며 기술적인 변화를 겪는 현 상태에 대한 징후로서 탐구해야 한다. 사진은 지식보다 페티시즘적인 신념의 체제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 관계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일축하더라도 그들의 정서적 공명은 줄어들지 않는다. 부인(disavowal)이라는 개념은 1970년대에 불신을 멈추고 현실에 대한 환상에 기꺼이 기대려고 하는 관객들의 태도를 개념화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소환된 것으로 영화이론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note title=”33″back] 이 작업의 표준 공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Christian Metz, ‘Disavowal, fetishism’, in The Imaginary Signifier: Psychoanalysis and the Cinema,trans. Celia Britton, Annwyl Williams, Ben Brewster and Alfred Guzzetti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7), pp. 69– 78.[/note] 그러나 이제는 복잡한 부인의 책략이 사진 이미지의 힘에 대한 다소 신비주의적인 기대를 구축한다. ‘나는(사진 이미지가 항상 조작되어 왔고 디지털 또한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 존재하는 시간의 힘으로 인해 사진 이미지에 끌린다,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지식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믿음과 부인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제 필름 이미지에 의해 소환되는 것은 바로 지표의 파토스, 즉 흔적에 내재된 우울한 정서다. 이 정서적인 복합체는 아날로그 필름 영화의 물질성과 맺는 관련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매체 주변을 순환하는 담론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마 순진한 초창기 관객들이 다가오는 기차를 보고 흠칫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가장 잘 보여주듯이 한때 영화의 특정성이란 스크린에 등장하는 대상들의 환상적인 현전에 있었다.[note title=”34″back] 이 최초의 순간의 신화에 대한 조사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Tom Gunning, ‘An aesthetic of astonishment: early film and the (in)credulous spectator’, in Leo Braudy and Marshall Cohen (eds), Film Theory and Criticism: Introductory Readings, Fifth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818–32.[/note]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현존에서 부재,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화를 목격한다. 지표의 정서란 유령과도 같은 현존과 헤아릴 수 없는 상실이 달콤씁쓸하게 뒤섞인 정서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씨네필이 느끼는 정서와 동일하다. 이때 점점 차분해지고 존경의 대상이 된 16mm 필름이 구시대의 혁신과 한때는 현대적이었던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슬픔을 상기시켜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1931년 자신의 책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대규모의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사진이 주는 매혹을 이해하기 위해 장노출로 촬영된 초상 사진을 보면서 사진술의 시초를 되짚어본다.[note title=”35″back] Walter Benjamin, ‘Little history of photography’, trans. Edmund Jephcott and Kingsley Shorter, in Selected Writings, Volume Two, Part Two: 1931–1934, ed.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and Gary Smith (Cambridge, MA: The Belknap Press, 1999), pp. 507–30.[/note] 『작은 역사』에 내재된 역사학적 충동이란 과거 속에 존재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거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우연성의 구심점을 재도입하고 실현되지 않은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여지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그 어떤 생각도 불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한성에 대한 감각과 냉정하게 행진하는 시간의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바로 이 희망과 죽음의 집합체, 또는 역사와 주관성의 집합체가 사진 이미지의 특정성을 설명한다. 벤야민은 자신이 역사학의 필수요건으로 간주하는 것과 사진의 매체 특정적인 특성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상정하는데, 이때 양쪽 모두에 필수적인 범주로서 우연성이 대두된다. 그는 칼 다우텐다이(Karl Dauthendey)가 찍은 자신과 자신의 약혼녀의 사진을 논하면서 오래된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 속에서 미미한 우연성의 불꽃, 즉 여기와 지금의 불꽃을 찾고자 하는 막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그가 찾고자 하는 장소는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이미 잊혀진 순간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장소이며 그 안에는 미래가 의미심장하게 깃들어 있어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그 미래를 재발견할 수 있다.”[note title=”36″back] Ibid., p. 510.[/note]

 

앞서 지표적인 흔적에 의해 개념화된 이 작은 우연성은 여기서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과 연결된다. 잊혀진 미래를 이미지 속에서 재발견하여 현재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딘의 2004년 작인 <궁전 Palast>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나타난다.

 

<궁전 >은 2001년의 <텔레비전 송전탑 Fernsehturm>과 마찬가지로 과거 동독(독일 민주공화국)의 쇠퇴하는 기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셀룰로이드의 지표성을 진보의 내러티브 바깥에서 역사를 사고하는 것과 관련지으려 하는 기대가 발견되는데, 이러한 연결은 벤야민의 다우텐다이의 초상 사진에 대한 논의에서도 발견된다. 딘은 지표적인 이미지와 그 안에 존재하는 비동기적인 시간성을 사용하여 베를린의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이 갖는 시간적, 정서적 복잡성을 탐구한다. 저 멀리서 ‘이 작업의 파토스는 쇠퇴의 시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다’라는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note title=”37″back] Walter Benjamin, The Arcades Project, trans. Howard Eiland and Kevin McLaughlin (Cambridge, MA: The Belknap Press, 1999), p. 458.[/note] <궁전>에서 딘은 2003년에 철거될 예정이었던 궁전을 나른하게 화면에 담아낸다. 1973년에서 1976년 사이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한때 동독 의회가 위치한 자리였다. 그것의 건축 양식은 전형적인 동독의 양식으로, 2차 세계대전까지 그 자리에 서있던 베를린 성(Stadtschloss)이 과거에 왕가가 자리했던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동독 정부는 그 궁전이 프러시아 제국주의의 잔재라고 선언하며 전쟁이 끝난 후 이를 재건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적 미래를 위한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딘의 영화에서 실제 태양이 비유적으로 궁전 위에 내려앉고 청동 유리창의 창문들이 황금색 빛깔을 발산하는 동안 자동차와 보행자들이 인근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을 지나가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많은 이들이 눈엣가시라고 여기는 이 궁전은 여기서 그것이 석면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사실(1990년 독일 통일 직전에 발견)과 2007년 독일 연방의회가 역사를 덮어쓰기 위해 그 장소에 베를린 성의 복제품을 재건하기로 결정한 것을 뛰어넘는 빛바랜 영광을 획득하게 된다.

 

 (태시타 딘, 2004), 16mm 컬러 필름의 스틸컷, 광학 음향, 10분 30초. 작가, 런던 프리스 스트릿 갤러리와 뉴욕/파리의 마리안 굿맨 갤러리 제공.
태시타 딘, <궁전>, 2004, 16mm 컬러 필름의 스틸컷, 광학 음향, 10분 30초. 작가, 런던 프리스 스트릿 갤러리와 뉴욕/파리의 마리안 굿맨 갤러리 제공.

 

딘이 말했듯이 ‘베를린은 이제는 역사의 평가 하에 실수로 분류되어 지워진 유토피아를 부패한 경영 부실로 이끌었던 그 다른 장소, 그 나라의 증거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note title=”38″back] Tacita Dean, ‘Palast’, Tacita Dean: Film Works, p. 94[/note] 딘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유토피아의 실패는 여기서 베를린의 가까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써 나타난다. 동독의 옛 국가(國歌)인 <폐허에서 부활하여 Auferstanden aus Ruinen>는 첫 문장에서 그 나라가 미래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der Zukunft zugewandt)고 선언했지만, 이 또다른 미래에 대한 꿈은 붕괴되면서 이제 과거의 트라우마의 유령을 뒤에 남겨두었고 현재 상태에 대한 대안을 개념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궁전>은 잃어버린 시대를 낭만적으로 과대평가하는 일에 관여하는 대신 역사의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를 기억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파국과 실패야 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우리의 현재를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독은 이 실패한 유토피아 중 하나지만 영화 자체는 별개의 이야기다. <궁전>이 스크린 위에서 하나의 조용한 바니타스와 같이 기능하기 때문에 작고 시끄러운 16mm 영사기는 조각적 오브제로서 전시장 한가운데에 앉아 화이트  큐브라는 신성한 공간이 그 안에 놓인 모든 대상에 부여하는 보호 효과를 누린다. 이 궁전과 영화는 망각이라는 수동적인 폭력의 타격을 받고 잊혀진 채로 남았을 수도 있었지만 딘의 작품에서는 양쪽 모두 신중하게 발굴되어 있다. 그들의 실패한 미래는 새로운 희망에 불을 지피면서 동시에 사라짐에 대한 슬픔을 억제하기 위해 검토된다. 여기서 잉여와 실패는 폐기되지 않고 발전적인 잠재력을 위해서 함양되고 발굴된다. 쇠퇴에 대한 사고를 거부하는 일은 역사를 진보의 내러티브로 파악하려 하는 목적론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고 지금 존재하는 현재만이 단 하나의 가능한 선택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역사적 우연성의 구심점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기 드보르가 ‘영화를 지금의 영화로 만든 것은 어떤 특정한 기술이 아니라, 바로 특정한 사회다. 영화는 역사적인 분석, 이론, 에세이, 그리고 기억이 될 수도 있었다.'[note title=”39″back] Guy Debord,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 (1978)’, Guy Debord, Complete Cinematic Works: Scripts, Stills, Documents, trans. Ken Knabb (Oakland, CA: AK Press, 2003), pp. 145–46 (translation modified)[/note]라고 썼던 바에 대하여 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렇다, 영화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부에서는 처음부터 그 모든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약간의 노력을 더한다면 아마도 영화는, 여전히 그 모든 것일 수 있다.

 

폐허는 딘의 작품 전반에서 핵심적인 수사법이지만 특히 <버블 하우스 Bubble House>(1999), <텔레비전 송전탑>, <코닥 Kodak>(2006), <궁전>, <섹션 시네마 Section Cinéma>(2002), <테인마우스 일렉트론 Teignmouth Electron>(1999)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들 모두는 필름이라는 폐허가 된 매체를 통하여 다양한 종류의 물리적인 폐허를 기록한다. 비록 줄리아나 브루노(Giuliana Bruno)는 우리가 ‘쇠퇴로 잠식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note title=”40″back] Giuliana Bruno, Public Intimacy: Architecture and the Visual Arts(Cambridge, MA: MIT Press, 2007), p. 82[/note] 안드레아 후이센(Andreas Huyssen)은 지난 15년 동안 기술적인 혁신의 폭발 속에서 인터넷과 무선 테크놀로지가 꽃피고, 동시에 구소련의 붕괴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에 맞설 대안이 없다는 절망이 점차 증가하면서 폐허에 대한 집착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후이센에 따르면,

 

“동시대의 폐허에 대한 집착에는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아직 잃지 않은 이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숨어 있다. 문제는 20세기의 대참사를 겪고 아직 남아있는 내외적 식민화의 상처를 인정하고 나서는 감히 떳떳하게 언급할 수 없게 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향수다. 그러나 이러한 향수는 이전의 근대성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상실된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지속되고 있다. 이 향수에 대한 암호가 바로 폐허다.”[note title=”41″back] Andreas Huyssen, ‘Nostalgia for ruins’, Grey Room, no. 23 (2006), p. 7[/note]

 

마이클 뉴먼은 수집가라는 인물이 딘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벤야민의 수집에 관한 이론을 도구로 사용한다.[note title=”42″back] Michael Newman, ‘Sauvetage’, in Tacita Dean: Seven Books – Essays(Paris: Éditions des Musées de la Ville de Paris/Steidl Publishers, 2003), np.[/note] 벤야민에게 있어 수집가는 상품을 시장의 의무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 ‘유용성이라는 책무로부터 사물들의 해방’을 조직하는 사람이다.[note title=”43″back] Benjamin, The Arcades Project, p. 209.[/note] 이 인물은 쇠퇴한 사물들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강조되어야만 하는 점은 벤야민의 글에 나타나는 다른 수많은 인물들과 같이 수집가가 엄청난 모순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수집된 사물은 맥락에서 분리된 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적인 조직 안에 들어서게 된다. 수잔 스튜어트(Susan Stewart)는 수집품을 ‘소비의 천국’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시간성에서 벗어난 질서를 사용해 역사를 분류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note title=”44″back] Susan Stewart, On Longing: Narratives of the Miniature, the Gigantic, the Souvenir, the Collection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3), p. 151.[/note]

 

대조적으로,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관념의 영역에서 알레고리는 사물의 세계에서 폐허와 같다'[note title=”45″back] Walter Benjamin,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 trans. John Osborne(London: Verso, 1985), p.178.[/note]고 말했다. 역사와 쇠퇴의 개념을 다루는 딘의 방식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수집가와의 관련성만이 아니라 바로 위의 관계성을 유념해야 한다. 벤야민의 모순적인 사고 방식답게,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존재할지라도 모든 알레고리스트(allegorist) 속에는 수집가가 숨어있으며 모든 수집가 속에는 알레고리스트가 숨어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알레고리스트는 수집가와 ‘완전히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마주하는 잔해의 역사적 특정성을 보존시키면서도 이 특정성을 연속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어 영화적인 몽타주의 방식을 통해 다른 요소와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note title=”46″back] Benjamin, The Arcades Project, p. 211.[/note] 알레고리는 대상이 시간 속에서 지나온 경로 뿐만이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역사적이고 정서적인 반향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알레고리스트는 폐허를 읽어내는 자, 즉 과거의 잔재를 현재의 관점에서 발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수집가와 달리 알레고리스트는 시간을 이기려 하는 대신 비동기적 시간성을 파고들어 벤야민이 다우텐다이의 초상에서 읽어냈던 희망과 공포의 혼합물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영화에 대한 자신의 알레고리 속에서 딘은 수집가의 원대한 꿈인,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가지고 모든 장소에 알맞은 사물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전체주의적 시스템을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는 일관된 대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손상되면서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알레고리스트는 폐허 안에 집적된 시간성들을 통해 이 ‘시네마’라는 집합체가 어떤 것일지, 이것이 어떤 불안감에 반응할 것인지, 또는 이것이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잠정적인 해석을 생산해 내며 이러한 폐허 가운데를 떠돌아다닌다. 수집과 알레고리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동시대 갤러리 영화(gallery film)의 실천 속에서 영화가 다시 개념화된 방식의 핵심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셀룰로이드가 이러한 맥락 하에서 틀림없이 보존의 기술로 기능하지만, 그렇다고 촬영하는 행위가 이 대상들을 시간에 의한 파괴로부터 구해냈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일이기 때문이다. 딘의 생각에 따르면 영화 자체가 가냘픈 폐허다. 영화는 그러한 대상들과 위상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을 포착하기에 적합하다.

 

뉴먼의 ‘구원(rescue)’이라는 개념이 딘의 비영화적인 작품 몇몇과 관련하여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샬롱쉬르손(Chalon-sur-Saône)의 한 코닥 공장에서 16mm 필름 제작이 중단된 사실에 대한 애가적인 명상록인 <코닥>과 <궁전>같은 작품들은 후이센의 ‘폐허에 대한 향수’와 훨씬 더 가까운 관계에 있고, 더 구체적으로는 20세기 근대성이라는 파괴된 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 폐허는 그 표면 자체에 시간의 흐름이 새겨져 있고, 이는 디지털 혁신이 승리를 거두면서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는 섬세한 끈기를 가지고 변화와 정지의 움직임을 지시한다(indexing). 딘이 디지털의 특징으로 간주한 ‘매끄러움(seamlessness)’은 폐허의 이질적인 시간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욕망과는 분명 반대일 것이다.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21세기 초는 포스트모던의 인용 부호를 넘어설 정도로 폐허에 매혹된 상태인 기이한 폐허애호증을 나타낸다. 갈수록 디지털화되는 현 시대에 폐허는 멸종 위기에 놓인 종이자 현대의 역설을 물리적으로 구현해 현대 기술의 오점과 기술 그 자체를 모두 상기시키는 역할로 등장한다.'[note title=”47″back] Svetlana Boym, ‘Tatlin, or, ruinophilia’, Cabinet, no. 28 (2007–08), p. 44.[/note]고 주장한다. 후이센과는 달리 보임은 연관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동시대의 ‘폐허애호증(ruinphilia)’은 디지털화를 둘러싼 불안과 연관되어 있고 또한 기술적이고 사회적인 실패와 불가분한 관련을 맺고 있다. 새로운 것이 과도하게 생산되는 현 상황에서는 일종의 반동 형성에 의해 오히려 극도로 쇠락한 것이 우리를 매혹한다.

 

태스타 딘, , 2006
태시타 딘, <코닥>, 2006, 16mm 컬러필름 스틸 컷, 60분.

 

영화는 수많은 신체 보철물로 기능하는 디지털 장치가 동시대에 확산되는 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달리 보이기 시작하며 다시 시선을 잡아당긴다. 20세기에 영화의 특정성은 새로움, 속도, 그리고 불가피한 현전과 연결된다고 간주되었지만 이제 영화는 폐허가 이끌어내는 호기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폐허 속에 존재한다. 이를 ‘향수에 불과’하다거나 위험한 낭만화의 산물이라고 일축한다면 이는 오늘날 가장 고무적인 비내러티브 영화의 실천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일이 되고, 또한 아날로그와 쇠퇴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반박이 불가할 정도로 매혹적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에 무관심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시네마는 이러한 실천들에서 20세기의 다른 실패한 유토피아들과 마찬가지로 그 죄와 배신을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해체 후 다시 조립되고 해부된 뒤 그 성취와 한계를 고찰해 보아야 하는 장치로 간주된다. 이제 영화는 기술 변화라는 빛에 의해 변형되면서 역사성의 특별한 중심지가 되었고 한때는 그것이 파괴한다고 일컬어졌던 아우라를 맡게 되었다.

 

신성한 오늘날의 영화는 마치 신격화된 천사처럼 전시장 안에서 천상의 후광을 얻는다. 시네마는 그동안 이미지 확산과 유통의 매개체로 여겼던 20세기 대중 문화의 폐허로부터 구조된 뒤 화이트 큐브 안에서 귀중한 것으로 거듭난다. 전시장의 16mm 실천은 매체에 내재된 기계적 복제의 역량을 발휘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희귀성의 경제를 확립하여 필름 프린트를 대부분 3~6장의 한정판으로 제한해서 생산하고, 이는 이후 상업 화랑에서 수집 가능한 예술 오브제로써 판매된다. 이러한 현상 앞에서는 혹시라도 전시장 안의 필름 영화에 묻어 있는 예스러운 멋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희귀성을 페티시화하는 행위에 대한 탐닉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이를 묻는 이유는 영화가 효용성에서 해방되어 미적 관조의 무관심성에 진입하면서 동시에 미술 시장이라는 새로운 거래 및 상품화의 회로에 진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글에서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위축된다.’고 말했고 이 위축의 주된 행위자(agent)로 영화를 지목했다.[note title=”48″back]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its technological reproducibility’, p. 254.[/note] 그에 의하면 영화배우의 클로즈업과 같이 상품의 ‘거짓된 아우라’를 보여주는 경우를 제외하면 아우라는 영화와 상반된 관계에 놓여있다고 정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혁명적인 잠재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이 기대는 두 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로 영화에 의한 아우라 파괴는 벤야민의 다다에 대한 논의에 요약된 개념인 부르주아 미학의 범주를 청산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또한 둘째로 영화의 충격 효과는 근대성의 외상적인 효과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영화의 촉각적 시각성이 육안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본질에 닿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 영역을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이 개념은 지표성 및 비동기적 시간성에 접근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note title=”49″back] Ibid., p. 254, pp. 266–67.[/note] 우리는 매체에 대한 이 두 가지 기대가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한다.

 

첫번째 가정을 고려해 보자면, 21세기 초에 영화는 전통적인 미학의 가치들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기 보다는 그 가치들로 탈바꿈되면서 회복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이 매체에 대한 벤야민의 첫 번째 희망은 무산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 그 목표는 기술적인 매체를 활용하여 예술 작품의 증가하는 자율성을 비판하고자 함이었다.[note title=”50″back] 이는 페터 뷔르거(Peter Bȕrger)의 입장으로 그는 아방가르드가 자율적인 예술에 필수적인 예술과 삶의 실천 사이의 분리, 개인적인 생산, 개인적인 감상 및 생산에서 분리된 감상과 같은 전제들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필름의 사용은 이 네 개의 가정 중 처음 세 개에 대한 중요한 개입이라고 볼 수 있다. Peter Bȕrger, Theory of the Avant Garde, trans. Michael Shaw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p. 53를 보라.[/note]  1960년대에 플럭서스 그룹이 플럭스박스(Fluxbox)의 일부로 최초의 한정판 8mm와 16mm 영화를 제작했을 때 재차 그 목표는 대량 생산을 예술 제작의 한 형태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술작품의 이데올로기적 지위에 개입하기 위함이었다. 현 상황에서는 플럭서스의 한정판 필름 프린트 사용에 대한 전복이 일어나고 있다. 플럭서스에게 있어서 영화의 사용은 예술의 자율성과 유일성을 물리치기 위해 예술을 일상적인 것과 복제 가능한 것의 단계로 끌어 내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정판은 필름 프린트를 예술품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데 사용되어 필름을 한때 그 자신이 위태롭게 만들었던 경제 안에 소생시킨다. 이것이 현재의 역사적인 시점에 이르러 가능해진 이유에는 가속화된 매체의 쇠퇴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휘트니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크리시 아일스(Chrissie Iles)와 헨리엣 훌디쉬(Henriett Huldisch)가 말했듯이 필름 한정판의 사용은 새롭지 않지만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필름을 오브제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러한 추세는 디지털 녹화 및 편집 장치를 소비자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필름 매체가 귀중하고 비상업적인 재료(material)가 된 현상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다.'[note title=”51″back] Chrissie Iles and Henriette Huldisch, ‘Keeping time: on collecting film and video art in the museum,’ in Bruce Altshuler (ed.), Collecting the New: Museums and Contemporary Art(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p. 81.[/note]

 

비슷한 맥락에서 실험영화와 갤러리 영화를 서로 다른 생산의 양식으로 구분하기 위해 조나단 월리(Jonathan Walley)는 ‘단순히 말해 아티스트 필름(artists’ film)은 아방가르드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필름 프린트를 예술품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한다.[note title=”52″back] Jonathan Walley, ‘Modes of film practice in the avant garde’, in Tanya Leighton (ed.),Art and the Moving Image: a Critical Reader(London: Tate Publishing, 2008), p. 187.[/note]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소재의 갤러리인 블룸&포는 샤론 록하트(Sharon Lockhart)의 <파인 플랫 Pine Flat>(2006)을 6개의 박스 에디션으로 발행했는데, 이는 19장의 사진 인화물과 각각 별개의 필름 릴에 담긴 영화의 롱 테이크 12개로 구성되어있다. 이 오브제에는 여섯 자리수의 가격이 매겨졌다.[note title=”53″back] Paul Young, ‘Black Box White Cube’, Art and Auction (February 2008). <http://www.artinfo.com/ news/story/26655/black-box- white-cube/> [accessed 20 September 2009].[/note] 이런 종류의 에디션을 발행하고 스틸 사진 같은 보충 자료를 포함하는 것은 예술계 내에서 일반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록하트의 32분짜리 영화의 에디션인 <노 No>(2003)를 뉴욕 바바라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3만 달러에 구할 수 있었다고 보도한 스콧 맥도날드(Scott MacDonald)는 16mm 한정판의 아티스트 필름의 인기가 실험영화 16mm 프린트 수집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이어지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노>, 그리고 록하트의 전반적인 영화들은 록하트 자신이 멘토라고 여기는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 모건 피셔(Morgan Fisher), 그리고 다른 영화제작자들의 영화를 종종 연상시킨다. 이러한 멘토들의 작품이 록하트의 영화와 비슷한 수준의 재정적 평가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note title=”54″back] Scott MacDonald, ‘16 mm: reports of its death are greatly exaggerated’, Cinema Journal, vol. 45, no. 3 (2006), p. 128.[/note]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말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맥도날드의 추론에는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미적 유사성을 띠는 작품(여기서 록하트와 그녀의 멘토들 사이의 관계)이 논리적으로 재정적인 유사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미적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가지 부문의 영화 제작이 지지하는 배급 모델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이다. 실험영화는 역사적으로 라이센스 모델에 의존해 왔는데 이 모델에서는 필름(print)을 배급 업체에 맡겨 두면 업체가 이를 건당 상영 수수료를 내고 대여해 왔다. 반면 갤러리 영화는 매체에 내재된 복제 가능성을 역행함에 따라 필름에 아우라적인 거리라는 특질을 다시 인위적으로 부여한다. 태시타 딘의 필름 앞에 존재하는 것, 즉 특정한 지속 시간 동안 그것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되며, 80,000 유로화의 비용으로 현존하는 4개의 에디션 중 하나를 구입하는 것은 훨씬 더 귀중한 경험이 된다.[note title=”55″back] 2009년 봄 뉴욕의 마리안 굿맨 갤러리는 태시타 딘의 <마이클 햄버거 Michael Hamburger>(2007)를 80,000 유로에, 또한 그녀의<다름슈타트 베르크블럭 Darmstädter Werkblock>(2007)을 60,000 유로에 판매했다.[/note] 한정판 배급 모델의 강제적인 희소성이 전시장 내의 셀룰로이드 필름과 결부되는 귀중함과 고풍스러움의 가치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영화가 아우라가 되는 현상은 영화배우의 거짓된 아우라, 즉 상품이 부리는 ‘부패한 마술’의 냄새가 나는 미심쩍은 후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note title=”56″back]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its technological reproducibility’, p. 261.[/note]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광학적인 무의식의 가능성과 연계된다고 명시한, 벤야민의 영화 매체에 대한 두 번째 기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고려하지 않았다. 비록 필름 영화는 언제나 경외할 만한 범주인 부르주아 미학 안에서 완전히 소생되었지만, 영화의 잠재력에 대한 이 두 번째 기대는 전시장 안의 영화가 처한 동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위협당하기 보다는 오히려 승인 받을 수도 있다. 미리암 한센(Miriam Hansen)이 말했듯이 아우라를 기술을 통해 거짓되게 부활시킬 수 있는 전통적인 미학의 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읽기에 기초하는 것이다. 대신 한센은 이 개념의 다면적인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벤야민의 용례를 발굴하면서 위와 관련은 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아우라를, 정확히 『작은 역사』에서 논의된 다우텐다이의 초상에서 보여지는 정서적 복합체에 관한 개념으로 강조한다.[note title=”57″back] 아우라가 미래의 재앙을 예고한다고 보는 관념은 고대의 의학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벤야민에게 있어 아우라의 불길한 측면은 다이몬적인(daemonic) 영역에 속하는데, 특히 이는 이전부터 있었던 또 다른 자아와의 자기 소외적인 만남의 현상이다. 이러한 아우라의 측면은 벤야민이 다우텐다이의 초상에 대한 글에서 펼치는 광학적 무의식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기술적으로 변형되고 특정하게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Miriam Hansen, ‘Benjamin’s aura’, Critical Inquiry, vol. 34, no. 2 (2008), p. 342. 를 보라.[/note]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은 지표적인 흔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분리된 시간성, 그리고 그 시간성이 관람의 주체와 맺는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영화 제작 분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동시대의 갤러리 영화에서 사용된다.  한센은 아우라를 정의하는 요소를 ‘선형적인 시간의 갑작스럽고 순간적인 파괴, 과거와 미래의 언캐니한 연결,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주체(subject)의 탈구’로 간주하면서 아우라적인 거리와 잃어버린 시간이 가지는 우울함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한다.[note title=”58″back] Ibid., p. 347.[/note]

 

간단히 말해 이 관점에서 아우라는 더 이상 기술적인 매체와 상반되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고 더 미묘한 관계를 갖게 된다. 이 글 전체에서 동시대의 갤러리 영화에 등장하는 매체 개념의 핵심인, 정서적 복합체는 이제 아우라라고 불리게 된다. 따라서 딘의 필름은 그 인화물이 희귀한 오브제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상품의 거짓된 아우라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시간, 욕망에 대한 명상을 통해 우연성과 역사성에 결부된 또다른 아우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목적론적인 내러티브에서 구출된 영화는 쇠퇴한 기술, 즉 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이 발견했다고 본 ‘”오래된 것”에서 나타나는 혁명적인 에너지’를 해방하기 위해 탐구해야 할 폐허로서 등장한다. 딘 역시 ‘이러한 것들 속에 숨어있는 “분위기(atmosphere)”의 막대한 힘을 폭발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면서’ 기술적 혁신의 공허한 약속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중대한 순간에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는 유행가에 의해 결정되는 인생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는가?’[note title=”59″back] 특히, 여기서 논의되는 분위기(atmosphere)’는 정확히 한센이 그녀의 글 전체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아우라다. 원래 독일어에서 ‘분위기’는 더 과학적인 Atmosphäre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Stimmung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톤, 감정 또는 무드와 연결된 더 비유적인 용법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쇠퇴한 대상의 정서적인 흡인력을 묘사한다. 다음을 참조할 것: Walter Benjamin, ‘Surrealism: the last snapshot of the European intelligentsia’, trans. Edmund Jephcott, in Selected Writings, Volume Two, Part One: 1927–1930, ed.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and Gary Smith (Cambridge, MA: The Belknap Press, 1999), p. 210; Walter Benjamin, ‘Der Surrealismus: Die letzte Momentaufnahme der europaeischen Intelligenz’, Angelus Novus: Ausgewählte Schriften 2(Frankfurt am Main: Suhrkamp, 1966), p. 205.[/note]

 

오로지 최신 유행가에 의해 결정되는 인생은 사실상 빈곤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본주의 시장의 동력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인 영원한 혁신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현재에 갇힌 삶은 이 시스템 속에서, 과거의 생산품들이 더 이상 스스로를 새롭게 치장하는 광택을 띠지 못해 완전히 잊혀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대중 문화로부터 버림받은 대상들 속에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대상들 안에 잠재된 복합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는 삶과 예술적 실천을 옹호한다. 21세기 초에 영화는 일관성 있는 디스포지티프에서 다수의 새로운 형상으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무엇을 영화의 일부라고 적절히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기가 어려워졌다. 할리우드의 상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 가능해지면서 전세계적인 가시성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그것들은 영화관이라는 의식적인(ritualistic) 공간에서 셀룰로이드로 소비되기 보다는 가정에서 디지털 형태로 소비되는 일이 더 잦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이것이 상실된 이미지 체제 및 상실된 시간과의 관계에 대한 명백한 애도의 행위를 가능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표성이라는 개념에서 발견되는, 죽음을 암시하는 감각은 잃어버린 과거가 이미지에 남아있음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시네마라는 또 다른 유령의 존재를 나타내는 징후이다. 따라서 지표성은 이미지 내부에 있는 죽음과 이미지 자체의 죽음 모두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의 특정성으로 재결집하는 것은 일종의 마지막 사랑, 즉 위협받는 시네마를 보호하고 감싸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유형의 시네필리아는 타란티노 스타일의 비디오 가게 점원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이 시네필리아는 셀룰로이드라는 물질이 시간, 역사, 그리고 유한성과 특권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리라 기대한다. 딘과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현대 미술의 경제적인 힘과 제도적인 힘은, 영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할 능력이 있다는 개념을 더욱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해 함께 작용한다. 

 

현대 미술의 건축, 경제 및 제도적 결정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여기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인 움직임이 매체 특정성과 디지털 컨버전스 사이에서 벌어질 뿐만 아니라, 매체의 물질적 한계와 매체가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디스포지티프의 제도적이고 담론적인 결정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딘에게 있어 이미지의 물질적인 기반이 당연히 중요하기는 해도 그 자체만으로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여기서 탐구해야 할 대상은 물질성이 주는 제약이 매체가 사회적, 역사적 사건에 관여하는 능력과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이 긴장의 핵심이 되는 것은 쇠퇴에 대한 두려움이 오늘날 필름 매체가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현재 영화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열정적인 미사여구는 정말 단지 미사여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수사의 정서적인 진실함과, 오늘날 영화가 전시장에서 보편화된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그 수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평선 위로 반짝이는 녹색 광선을 잡으려고 하는 딘의 집요한 시도는 영화 자체를 붙잡으려는 시도, 즉 사라져가는 영화의 우연성을 기록하려는 시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