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재배치
번역 채희숙

임철민(Im Cheolmin), , 싱글채널, 2018. 공공의 극장이면서 동시에 남성 성소수자들의 크루징스팟(Cruising Spot)으로 향유되었던 극장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인터넷과 어플리케이션 등의 좀 더 개인적 통로와 함께 크루징의 주무대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가상의 필드로 이동한다. 은 사라져가는 서울의 몇몇 극장들을 중심으로, 공간의 내밀한 이야기와 응축된 과거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드러내고 현재의 시간과 맞붙이려는 시도이다.
임철민(Im Cheolmin), <야광 Glow Job>, 싱글채널, 2018. 공공의 극장이면서 동시에 남성 성소수자들의 크루징스팟(Cruising Spot)으로 향유되었던 극장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인터넷과 어플리케이션 등의 좀 더 개인적 통로와 함께 크루징의 주무대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가상의 필드로 이동한다. <야광>은 사라져가는 서울의 몇몇 극장들을 중심으로, 공간의 내밀한 이야기와 응축된 과거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드러내고 현재의 시간과 맞붙이려는 시도이다.

 

타시타

 

2011년 10월 영국의 예술가 타시타 딘(Tacita Dean)이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in London)’에서 <필름 Film>을 선보였다.[note title=”1″back] 해당 전시는 《유니레버 시리즈 the Unilever Series》의 일환으로 2010년 10월 11일부터 2012년 3월 11일까지 열렸다. <필름>은 몇몇 비평가, 예술가, 이론가, 영화제작자들이 디지털 시대에 필름 및 아날로그 이미지가 가진 중요성에 대해 논평하는 카탈로그인 《필름: 타시타 딘》과 함께 했다.[/note] 딘의 설치작품은 방문객을 위한 좌석이 비치된 어두운 공간에서 대형 스크린에 연속 루프로 투사되는 필름 단편이다. 방 입구에 쓰여 있는 해설은 다음 요소들의 존재로 관심을 끌었다. “35mm 칼라 및 흑백 초상화 형식의 애너모픽 필름, 손으로 색을 입힌 시퀀스, 음 소거, 연속 루프, 11분. 대형 전면 영상, 영사실, 자유로운 스탠딩 스크린, 루프 시스템, 좌석.” 《가디언》에서 샬롯 히긴스(Charlotte Higgins)는 <필름>에 대해 “죽어가는 매체에 오마주를 바친다”라고 표현했다.[note title=”2″back] Higgins 2011. http://www.guardian.co.uk/artanddesign/2011/oct/10/tacita-dean-film-turbine-hall.[/note] 실제로 <필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재료로서의 필름을 옹호하는 행위다. 이 필름은 코닥이 (2009년 6월 22일) 판매량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생산 74년 만에 제조를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타시타 딘, , 2011. 런던 테이트 모던 설치 중 일부
타시타 딘, <필름>, 2011. 런던 테이트 모던 설치 중 일부

 

<필름>은 미디어를 꼭 구하지 않고도 매체를 보존한 덕분에 숙고할만한 사례가 된다. 만약 우리가 영화를 구제하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면 그 노력의 실패는 상황의 비극적 요소를 분명하게 만든다. 대신 내가 믿는 것처럼 우리가 또 다른 (예술) 지형으로의 영화의 이동을 다루고 있다면 그 제스처는 생산적이다. 일부 전통적인 구성 요소들(기계류, 재료로서의 필름)은 그것들 너머의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이로 인해 영화는 질문당하고 거의 도발 당하게 되는 바, 이는 지금까지 휴면 중이었던 새로운 태도를 깨워낸다. 다시 말해서 <필름>에서 영화의 예술로의 재배치는 새로운 지형의 윤곽을 그리면서 영화의 생존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타시타가 영화의 보존을 위해 싸우든, 아니면 영화의 해방을 꿈꾸든 간에 내게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자신의 죽음을 심사숙고함으로써만 현재 살아갈 새로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의 대위법처럼, (너무 쉽게 고전 작품이 보존된 ‘사원’으로 인식되는) 테이트나 영국영화협회를 벗어나면 우리는 매체가 부재하는데도 계속 살아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관습적 영역 너머로 확장되고 있는 미디어(로서의)-영화(cinema-as-media)의 많은 에피소드들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딘의 전시가 열렸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한 런던 시민단체는 고속도로 고가 아래의 수로 옆 공간을 재전용해서 일종의 영화관으로 변형시켰고 이웃 주민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했다.[note title=”5″back]http://mas-studio.tumblr.com/post/9049039925/folly-for-a-flyover-by-assemble (accessed January 2012).[/note] 2011년 8월 파리 크로카데로(시네마테크 옛 터) 앞뜰에서는 야외상영으로 ‘달빛축제(the Moon Light Festival)가 열렸다.[note title=”6″back]http://www.whattoseeinparis.com/cinema-parks-paris/ (accessed January 2012).[/note] 이에 앞서 몇 달 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이미 ‘아랍의 봄’ 기간 왕성했었던 공간이 다양한 비디오를 상영하는 프로젝터 및 대형 스크린을 통해 되살아났다.[note title=”7″back]http://cairobserver.com/post/12731480069/cinema-tahrir-returns (accessed January 2012).[/note] 사실 확산된 미디어-영화의 존재는 이런 에피소드들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제 다양한 새로운 장치로 영화를 볼 수 있다. 블록버스터는 DVD플레이어로 볼 만한 목록을 제공한다. 넷플릭스는 TV와 컴퓨터용 스트리밍을 제공한다. 다른 회사들은 스마트폰용의 새로운 개봉작을 제시한다. 우리는 유튜브로 비디오 시퀀스들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카페나 바에서는 물론 비행기에서도 (스포츠나 뉴스가 섞여 있긴 하지만) 영화들을 발견한다. 영화산업 자체는 이러한 새로운 배급 형태를 지지한다.[note title=”8″back]콜드웰의 설득력 있는 분석을 보라. (Caldwell 2005, pp. 90-97).[/note] 게다가 덜 전통적인 포맷들에도 영화적 언어를 사용하는 막대한 양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있다. 우리는 TV시리즈, 다큐멘터리, 광고, 음악 클립, 교육적인 프레젠테이션 등에서 영화를 발견한다. 우리는 대기실, 상점, 광장, 거리, 도시의 미디어-파사드 등의 방식으로 위장한 영화를 접한다. 마지막으로 트레일러든 패러디든, 비디오 다이어리든 여행기든 간에 영화와 여전히 관련된 온라인 콘텐츠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접속되어 있는 한, 아이패드나 휴대폰에 이러한 콘텐츠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윈도우 또는 테이블탑[note title=”9″back] 예를 들면 코닝이 상상한 일련의 스크린을 그린 비디오 <유리로 만든 날 A Day Made of Glass>. http://www.youtube.com/watch_popup?v=6Cf7IL_eZ38&vq=medium; 또는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가 공개한 비디오 <생산성 Productivity Future Vision>.  http://www.microsoft.com/en-us/showcase/details.aspx?uuid=59099ab6-239c-42af-847a-a6705dddf48b; 또는 삼성의 스크린/윈도우 프레젠테이션. http://www.youtube.com/watch?v=mTVPVobDrms (accessed 29 January 2012).[/note] 방식으로 상호작용적이고 다기능적인 가정 및 도시 환경에 잘 통합된 스크린을 포함해서 우리 일상생활에서의 스크린의 막대한 확산은 영화의 영속성을 생산한다. 이러한 확산은 영화가 새로운 풍경에 적응하면서도 계속 살아남게 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포착되는 영상물들
스마트폰 카메라로 포착되는 영상물들

 

따라서 우리는 작은 역설에 직면해있다. 매체를 옹호하는, 즉 미디어의 손상을 가져옴에도 지지물과 장치의 특수한 배열을 강조하는 예술가가 있다. 또한 미디어의 생존을 북돋는, 즉 매체를 포기하면서도 재현 양식 및 관객성을 장려하는 명백한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산업·소비자·팬에게 영향을 미친다. 죽음을 발표하거나 승리를 축하하는 안이한 선언을 넘어 오늘날 영화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설이다.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잃고 있지만 전례 없는 기회를 얻고 있는 시기에 영화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수렴 과정으로 인해 모든 미디어가 일상적인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영화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영화는 무엇이며, 나아가 어디에 있는가?[note title=”10″back] 이 질문은 말테 하게너의 에세이 「(오늘날)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미디어 내재성 시대의 영화 Where is Cinema (Today)? The Cinema in the Age of Media Immanence」에 나타난다(Hagener 2008, pp. 15-22). 하게너는 존재론 대신 위상기하학의 측면에서 영화이론을 다시 읽자고 제안한다. Hediger 2012, pp. 61-77.[/note]

 

나는 그 지형을 추적하기 위해 네 가지 점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시작할 것이다. 첫째로, 고유한 하나의 미디어는 단지 매체, 즉 지지물이나 장치인 것만이 아니다. 또한 미디어는 무엇보다도 문화형식이다. 미디어는 세계 및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관계 맺게 하는 방법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미디어가 작동시키는 경험의 유형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경험이라는 말로, 현실과의 대면(경험을 얻는 것)과 이 관계를 관리하고 그것에 의미를 주는 능력(경험을 가진 것) 모두를 의미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 및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는 무빙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화는 항상 보는 방식이자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감성의 형식이자 이해의 형식이었다.[note title=”11″back]여기서 ‘경험’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전시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시의 결과로 일어나는 인식도 가리킨다. 우리는 사물과 마주칠 때 그것에 대한 ‘경험을 얻고’, 우리가 사물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경험을 가진다.’ 영화 경험에 대해서는 솝첵과 한센(Sobchack 1992 and Hansen 2012)의 두 가지 다른 접근법을 보라. 또 하보드와 카세티(Harbord 2002, pp. 14-38 and Casetti 2009, pp. 56-66)를 보라.[/note]

 

둘째로, 경험은 순환하며 고전적인 위치와는 다른 현장에서도 재개된다. 영화적 경험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어두운 극장의 바깥, 다른 스크린에서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특유의 성격들을 유지한다. 영화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의 재배치다. 셋째로, 새로운 맥락들이 미디어-영화가 변형되도록 밀어붙이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디어 경험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조건(그리고 특정한 기술적 기반)은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은 자신의 형식, 자신의 구성을 보존하는 한 어떤 면에서는 그대로 남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가 영화에 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관념, 즉 우리의 습관 및 기억,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직관에서 비롯된 관념에 계속 부합하는 한 말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새롭고 변칙적인 상황 속에서 영화에 대한 관념을 보존하는 일에는 노력이 든다. 그것은 과거를 필연적인 것, 현재와 양립할 수 있으며 아마도 미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재사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과거는 존재하는 것과 아마도 존재할 것의 전제이자 모델로서만 현존해 왔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영화에 대한 관념이 일종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새로운 경험을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마지막 역설로 이어진다. 영화의 역사는 현재가 가하는 압박 아래 지속적으로 다시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화의 종말이라는 위험에 맞서면서 형성되고 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역사이지만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돌이킬 수 없이 사후(死後)적이기도 하다.

 

 

영화와 경험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특수한 형식의 경험으로 여겨져 왔다. 분명히 그것은 기술 장치도 포함한다. 사실 초기 이론가들은 ‘기계’라는 존재에 매료되었다. 영화 카메라에 대한 장 엡스타인(Jean Epstein)의 유명한 묘사가 떠오른다.

 

“벨(Bell)과 하웰(Howell)은 표준화되고, 제조되고, 수천 개로 복제되어 팔리는 금속 두뇌로, 이것은 외부세계를 예술로 변형시킨다. … 주체는 양심 즉 망설임과 가책이 없는 사물, 다시 말해 무절제, 사치, 가능한 오류가 없는 완전히 정직한 예술가 ….”[note title=”12″back] Epstein 1984 (orig. 1921), p. 244. 엡스타인과 평행선상에 있는, 카메라의 눈에 대한 찬양은 베르토프(Vertov, 1984)를 보라.[/note]

 

영사기에 대한 블레이즈 센드라즈(Blaise Cendrars)의 기술도 있다.

 

“관람자의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의 원뿔이 돌고래처럼 꿈틀거린다. 인물들은 스크린에서 벗어나서 환등기까지 뻗어있다. 그들은 어둠에서 빛나며 수학적인 정확도를 가지고 뛰어들고, 방향을 돌리고, 서로 뒤쫓고, 교차한다.”[note title=”13″back] Cendars 1984 (orig. 1919), pp. 182-183.[/note]

 

그렇다면 초기 영화 이론의 핵심 텍스트인 「제6의 예술의 탄생 The Birth of a Sixth Art」에서 리치오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정확한 계산과 기계적 표현방식으로 구축된 새로운 종류의 연극, 과학적 연극’이라고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note title=”14″back]Canudo 1984 (orig. 1911), p. 60.[/note] 20세기 초반 30년 동안 유럽에서 영화에 대한 가장 흔한 별칭 중 하나가, 많은 점에서 벤야민주의의 원형에 가까운 유제니오 지오반네티(Eugenio Giovannetti)의 책 제목에 있는 용어인 ‘기계 예술’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note title=”15″back]Giovannetti 1930. 엡스타인의 구절도 보라. “변조의 자유를 도입하여 음악을, 화법기하학을 도입하여 그림을, 그리고 속도·또 다른 빛·다른 지성을 도입하여 모든 삶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형태들을 바꾼 기계 미학은 여기서 걸작을 창조했다. 셔터를 누르면 그전에는 알 수 없었던 포토제니(photogénie)가 생산된다.” Epstein 1984, p. 244.[/note] 영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필름에 담긴 이미지를 보존하고 복원해서 스크린에 영사되기 위해 설계된 장치다. 영화는 확실히 매체다.

 

‘기계’는 그것이 무엇인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할 수 있는 일과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때문에 가치를 가진다. 벨라 발라즈(Béla Balász)는 『가시적인 인간 The Visible Man』의 중요한 페이지 중 하나에서 영화를 “인간 정신 산물의 증식 및 보급을 위한 기술”이라고 말한다.[note title=”16″back]Balász 2010 (orig. 1924), p. 9.[/note] 인쇄기 역시 기술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얼굴을 판독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면, 영화는 우리에게 시각적 능력을 되돌려주고 몸의 언어에 대한 친숙함을 복원한다. “매일 밤 수백만의 사람들이 영화관에 앉아서 말이 필요 없이 자신의 눈을 통해 모든 종류의 사건, 인물, 감정, 정서를 경험하면서 살아간다.”[note title=”17″back]Ibid.[/note] 강조점은 장치가 우리의 감각을 동원하는 방식 및 현실과 관련하여 우리를 배치하는 방식, 즉 장치가 수면 위로 가져오는 경험의 형식에 있다.

 

그 경험은 상당 부분 ‘기계’ 덕분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경험은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또한 다른 곳에서도 지속된다. 예를 들어 시각성이 고양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영화가 이미지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영화는 우리의 집중력을 높이는 어두운 방에서 그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오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가 상기했듯 “[영화]는 하나의 감각과 관점을 차지하고, […] 이러한 독특한 초점은 주의 산만을 방지하는 드라마틱한 바그너 풍의 어두운 극장에 의해 생기는 인위적인 태도에서 훨씬 더 보장된다.”[note title=”18″back]Papini 1907, p. 1.[/note] 그러나 우리가 보기를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호기심 및 강박관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실험 정신 때문에, 좀 더 정밀한 시(詩)에 대한 욕망 때문에, 분석적 성향 때문에, 새로운 실수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보기를 요구한다”라고 언급한다.[note title=”19″back]Epstein 1984 (orig. 1921), p. 239.[/note] 극단적이고 매혹적인 글에서 발터 세르너(Walter Serner)는, 우리를 항상 가장 무서운 스펙터클에 주목하도록 밀어붙이고, 피, 불, 폭력에서 뒷걸음하지 못하게 해온 ‘보기에의 욕망’을 이야기한다.[note title=”20″back]“호러, 싸움, 죽음을 보려는 끔찍한 열망…은 홀린 것처럼 사람들을 영화관에 잡아끄는 것이다.” Serner 2004, p. 18.[/note]

 

영화적 이미지는 신뢰감을 준다. 영화적 이미지는 보통 우리를 벗어나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적 복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엡스타인은 영화 카메라의 눈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 눈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파동을 보며, 스크린의 창조적 열정에는 전에 없던 것, 즉 고유한 몫의 자외선이 들어있다”라고 언급한다.[note title=”21″back]Epstein 1984b, p. 244.[/note]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관객이 영화적 이미지를 믿는다면 카누도가 썼듯이 영화적 이미지가 또한 “인간이 동물보다 실제로 그리고 유일하게 나은 점, 즉 흘러가는 삶을 잡아둘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덧없음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note title=”22″back]Canudo 1984b (orig., 1926), p. 296.[/note]

 

영화는 또한 우리의 상상력을 북돋는다. 스크린의 이미지가 자체의 물질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Georg Lukács)는 “‘영화’의 세계는 배경과 관점이 없고 무게의 차이도 질적 차이도 없는 삶이다”라고 말했으며, 따라서 그 세계는 실제처럼 취급될 때도 순수한 가능성에 열려있다.[note title=”23″back]Lukács 2004 (orig. 1911, 1913), p. 12.[/note] 그러나 프리버그(Oscar Victor Freeburg)가 주목한 것처럼 영화는 풍부한 공상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자체적으로 그리고 다른 예술로부터의 차용을 통해서 정교화된 언어를 갖고 있기에 상상력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note title=”24″back]Freeburg 1918.[/note] 관객을 사로잡는 감각적 흥분이 있다. 그것은 사물의 움직임과 친밀한 구도를 복원하여 보여주는 영화의 능력에 의해 부추겨진다. 클로즈업에 관한 이야기에서 엡스타인은 “나는 보고, 냄새를 맡고, 만진다”고 고백했다.[note title=”25″back]Epstein 1984, p. 237.[/note] 그러나 이와 같은 흥분은 또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긴장하도록 만드는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카렐 테이지(Karel Teige)는 “우리, 즉 전기(electric)의 세기에 사는 현대인들 중 가장 차분한 사람들조차 매일 수많은 극심한 관능적 감정에 폭격을 당하고 약간의 정보에 광분함”을 목격했다.[note title=”26″back]Teige 2008 (orig. 1924), p. 147.[/note]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기계적인 눈은 인간의 눈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미묘한 논리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는 “공간을 채우는 시각적 현상의 카오스를 탐구하기 위해 인간의 눈보다 더 완벽한 키노아이로서의 카메라 사용”을 찬미한다.[note title=”27″back]Vertov 1984 (orig. 1923), pp. 14-15.[/note] 그렇다 하더라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의 기반을 구성하는 시각적 현상의 해체와 재구성은 표의문자로 된 글뿐 아니라 예술과 문학이 오랫동안 실천해온 과정을 구성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절정으로 이끌지만 그 배후에는 오랜 전통이 있다.[note title=”28″back]Eisenstein 1949, pp. 28-44.[/note]

 

마지막으로 영화는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영화보기에 동반되는 소속감은 많은 곳에서 동시에 같은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생긴다. 루이 델뤽(Luis Delluc)이 단언했듯이, “영화 관객을 결속시키는 반원형의 공간은 전 세계를 아우른다. 가장 구분되어 있고 가장 다양한 인간이 반구체를 통해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관람한다.”[note title=”29″back]Delluc 1984 (orig. 1921), p. 257.[/note] 그러나 이런 소속감은 또한 엘리 포르(Elie Faure)가 상상했던 것처럼, 공동의 감정과 가치를 실행하는 공동체 상태를 창조하고자 했던 선조의 욕망과 엮여있다.[note title=”30″back]포르는 인류가 항상 “도덕적 질서를 규정하는 리드미컬한 권력을 칭찬하는 만장일치 공동체에서 모든 계급, 모든 세대, 그리고 일반적으로 두 성별을 결속시키는 집단적인 스펙터클…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Faure 1923 (orig. 1922), p. 15.[/note] 프리버그가 상기시켰듯이 그 소속감이 현대 군중이 지닌, 진정한 의미의 여론을 형성할 정도로 이해관계와 관심의 초점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note title=”31″back]프리버그는 군중(crowd)을, 심사숙고한 표현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공중(public)으로 변형시키는 영화의 역량에 주목했다. “이 심사숙고한 표현은 여론이라고 불린다.” Freeburg 1918, p. 8.[/note]

 

그러므로 영화는 ‘기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문화, 사회, 미학)이 역할을 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영화는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세계를 다루는 우리의 방식을 바꾼 기술 장치 중 하나다.[note title=”32″back]“문명이 발달하면서 전화, 자동차, 비행기, 라디오는 시공간을 너무나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결국 일종의 편재성으로서 옛날에 몰랐던 이해 속도를 획득하게 된다. 영화는 물질과 정신 양자 모두에서 이 새로운 삶의 조건에 대한 예술적 반영으로 보인다.” Luciani 1928, p. 76.[/note] 그러나 영화는 기술적 존재를 넘어선 어떤 것으로, 새로운 언어의 출현이자 인류학적 필요, 전통적인 표현 형태, 시대적 경향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구(apparatus)이지만 우리를 오염되지 않은 세계, “원시의 힘으로 충만한 가시적인 것들”과 접촉하게 한다.[note title=”33″back]Lindsay 1922, p. 290. 영화가 원시적인 상태로 되돌아오게 하고 우리에게 ‘원시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주로 초기 논쟁에 존재한다. 카누도가 전하는 사례를 보면, “영화는 우리가 획득한 모든 정신적 복잡성을 소리 그대로 접하기 전에, 위대하고, 진실되고, 태고의, 합성 언어인 시각 언어를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Canudo 1984b, p. 296. 1920년대에서 1930년대의 영화이론 및 예술이론의 ‘원시적’인 것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Somaini 2011.[/note] 다시 말해서 영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매체지만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표시는 아니다. 어쨌든 영화는 미디어다. 말하자면 우리와 현실 사이, 그리고 우리와 타인들 사이의 매개지점이다. 많은 다른 입장들의 원인이 되는 이 매개의 형식이 영화를 진정으로 특징짓는다.

 

20세기 초반 20년간, 영화이론은 일관되게 이런 ‘경험’에의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1930년대에 상황이 조금 바뀌었고, 매체가 우위를 점했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자신의 영향력 있는 책 『영화 Film』에서 지지물과 장치에 연결된 기술적 제약이 바로 영화를 특정 언어로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은 매체만을, 가장 잘 표현된 해법이 발견될 수 있는 매체만을 고려하고 있다.[note title=”34″back]“좋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조건은 쓰인 매체의 특별한 속성이 정말로 명백하고 깨끗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Arnheim 1933 (orig. 1932), p. 44.[/note] 그러나 ‘경험’에의 접근법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바로 그 시기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gfried Kracauer)의 작업에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며[note title=”35″back]그 시기의 훌륭한 재건은 한센의 2012년 작업에 있다. Hansen 2012.[/note], 이후 앙드레 바쟁(André Bazin)[note title=”36″back]Bazin 2005 (orig. 1958, 1959, 1961, 1962).[/note]과 에드가 모랭(Edgar Morin)[note title=”37″back]Morin 2005 (orig. 1956).[/note]의 글에서 이어진 수십 년 동안 훨씬 더 큰 힘으로 재부상할 것이다(이러한 사정이 현상학과 심리학, 그리고 인류학의 회복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접근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스크린의 영화적 이미지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움켜잡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시 보게 하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강제하면서 우리를 곧장 현실로 이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을 채워준다. 그것은 재현되는 것에의 집착을 요구한다. 그것은 지식과 인식을 제공하고 우리가 다른 관객과 한 마음을 겪게 한다. 영화가 경험이라면 이것이 그 경험이 취하는 방식이다.

 

 

‘감각적 현실을 집으로 배달하기’

 

이 현상에 특유한 특성은 일단 어두운 영화관에서 경험되면 그 현상이 스크린이라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다른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이기 피란델로(Luigi Pirandello)의 에세이 소설 『Shoot』(이후 촬영감독 세라피노 구비오(Serafino Gubbio)의 영화 <노트북>(2004)이 되었다)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이미 나의 눈과 귀 역시 습관의 힘으로 인해 이 빠르고 진동하며 째깍거리는 기계적 복제로 가장해서 모든 것을 보고 듣기 시작하고 있다.”[note title=”38″back]Pirandello 2005 (orig. 1915), p. 8.[/note]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자서전에서 피란델로가 소설을 쓴 해를 언급하면서 영화와 함께 직조된 어린 시절을 상기하고, 가장 예기치 못한 경우에도 최초의 영화관들의 분위기를 발견함을 고백한다.

 

“우리는 정신연령이 같았다. 나는 일곱 살이었고 읽을 줄 알았다. 영화는 열두 살이었고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 나는 우리의 공통적인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여성이 내 근처에서 손톱을 바를 때마다, 지방 호텔의 화장실에서 어떤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야간열차의 천장에 있는 보랏빛 전구를 볼 때마다, 내 눈과 콧구멍, 그리고 혀는 옛 홀의 빛과 냄새를 되찾는다.”[note title=”39″back]Sartre 1964, pp. 122-123.[/note]

 

에트나산(Mt. Etna)을 오르는 일에 관한 아름다운 수필에서 엡스타인은 화산 폭발의 스펙터클에서 영화에 전형적인 무언가를 인식한다. “모든 것을 예상치 않게 마치 처음인 것처럼 신의 시선, 즉 상징적인 얼굴과 어마어마한 비유적 의미를 지닌, 독자적 정체성의 아우라로 뒤덮인 것으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영화의 큰 기쁨이다.”[note title=”40″back]Epstein 2012, p. 289.[/note] 엡스타인은 또 그 전날에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한 호텔에서 거울 붙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유사 및 반전의 인상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 개의 얼굴로 비친 자신의 이미지는 가차 없는 자기 환영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상시의 필터를 제거하고 사물을 보게 되는 스크린에서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는 편견도 없고 도덕도 없으며 영향도 받지 않는 눈이다. 그것은 우리가 연민과 반감, 습관과 생각에 부담을 느껴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는 얼굴이나 인간의 움직임에서 특징을 본다.”[note title=”41″back]Ibid., p. 292.[/note]

 

에트나 화산 폭발 장면
에트나 화산 폭발 장면

 

마지막으로, 몇 년 후 영화의 지위가 이미 변화고 있을 때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를 보는 일은 마치 도시가 스크린에 지속되는 것처럼 다른 눈으로 파리(Paris)를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오면서 관객은 마치 타티의 응시를 공유한 것처럼 거리의 유머를 알아차린다. 영화는 자신이 아니면 이끌어 낼 수 없었던 유머러스한 시각을 가능하게 했다. 시 읽기, 사람 만나기, 집단적 흥분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인식과 이해의 등록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그 사건이 세계와의 이 같은 다른 종류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들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화했기 때문이다.”[note title=”42″back]De Certeau 1987, p. 210.[/note]

 

어두운 극장에서 멀리 있을지라도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영화적 경험의 이러한 능력을 보다 잘 틀 지어보자. 그리고 이를 위해 미디어를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언급한 1920년대의 또 다른 텍스트를 경유해보자. 폴 발레리(Paul Valéry)는 음악과 축음기에 관한 글에서 힘 있는 의견을 발전시킨다(이 글은, 우연찮게도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제3판에서 제사로 인용했다).[note title=”43″back]Valéry 1964 (orig. 1928), pp. 225-228.[/note] 복제 및 전송 수단을 통해 “그것은 감각시스템을, 보다 정확하게는 임의의 장소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의해 유발되는 자극시스템을 어느 곳으로든 보내거나 어느 곳에서든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note title=”44″back]Ibid., p. 225.[/note] 이것은 음악이나 문학과 같은 특정 분야와 분명하게 연결된 감정을 포함해서, 특수한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감정을 다른 곳에서도 다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은 일종의 편재성을 획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소환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그것들은 현실에 있게 되거나 과거로부터 복원될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구를 가진 누군가가 있는 어디든지 존재할 것이다.”[note title=”45″back]Ibid., pp. 225-226.[/note]

 

그 결과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경험을 명령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재활성화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물, 가스, 전기가 최소한의 노력에 반응해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는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를 제공받을 것으로 그것은 거의 신호에 지나지 않는 손의 단순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사라질 것이다.”[note title=”46″back]Ibid., p. 226.[/note]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감각적 현실을 집으로 배달하는 데 관여하게 되는 회사”도 생길 것이다.[note title=”47″back]Ibid.[/note]

 

발레리는 영화적 경험이 영화관에서 멀리 떨어져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의견에 중요한 찬사를 보낸다. 모든 경험을 새로운 환경에 다시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 수송시스템으로서 매체의 특정성이란 이런 경험들을 자유롭게 수송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필요하다면 매체는 (축음기가 악기에서 사운드를 훔쳤을 때처럼) 경험들을 또 다른 매체로부터 훔쳐올 수도 있다. 이는 미디어(발레리의 경우는 음악)의 전형적인 행동 범위가 더 확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디어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 모험하기 위해 다른 수단, 즉 또 다른 매체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매체는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나타낸다. 그것은 미디어에 다른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화는 이와 같은 경로를 따르기 위한 모든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는 자신을 구별하는 ‘감각의 시스템’을 새로운 맥락 안에 이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발레리가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아직 어두운 극장 바깥에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수송할 수 있는 또 다른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교, 작은 시골 마을의 광장, 심지어 비행기에도 휴대용 영사기가 있었지만, 축음기가 오케스트라의 범위를 넘고 라디오가 축음기의 범위를 넘었던 것과 같이 영사기의 범위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경험했던 감정들을 정제되거나 격렬한 형태로 다시 살아보도록 해주는 것처럼) 수많은 다른 상황에서 다시 살 수 있다. 실제로 영화 스스로 그것을 원했지만, 그저 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수단은 나중에 도래할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20년간의 훌륭한 이론들이 많은 이들에게 기억이 되었을 때, 그리고 ‘클래식’ 영화가 자신의 거대한 포물선을 완성했을 때 말이다. 이 순간은 TV, VHS, DVD, PC, 태블릿, 홈시어터 등이 도래하는 순간과 일치할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확장 영화 Expanded Cinema』[note title=”48″back]Youngblood 1970.[/note]라는 적절한 제목의 책이 부분적으로 파악하고 예측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순간에 살고 있다.

 

 

영화의 재배치

 

영화가 종종 그것의 지지물과 기구들로부터 멀어져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자주 출현한다는 우리의 앞선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대체 장치 및 새로운 환경에서 미디어 경험이 형성되는 장소와 관련하여, 미디어 경험이 다른 곳에서 재개되고 용도 변경되는 과정을 언급하기 위해 재배치(relo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 신문은, 더 이상 반드시 종이로 만들어지지는 않으며, 나는 이제 아이패드 스크린으로도 신문을 숙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현장에서도 신문은 계속 내가 세계를 무한한 뉴스의 묶음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라디오는, 더 이상 가정용 기기나 트랜지스터 구동장치가 아니라 TV나 태블릿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계속 내 인생의 사운드트랙을 공급한다. 영화는, 더 이상 영사기를 통해 움직이는 필름 롤에 의존한 어두운 극장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 공공 스크린, 집, 휴대폰, 컴퓨터에서 이용 가능하며, 여전히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장치들과 함께 손쉽게 지각을 자극하고,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환상에 접근하게 하고, 재현에 투자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전통적으로 미디어에 동반되는 ‘감각의 시스템’은 새로운 출구를 찾는다. 새로운 매체 덕분에 경험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나고, 미디어의 삶은 계속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디지털 스크린 앞에서도 ‘영화 앞에 있고’ ‘영화를 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note title=”49″back]최근에 영화의 이행과 그 경계의 소멸에 대한 연구가 폭발하고 있다. 나는 『스크린 다이나믹스. 영화의 경계 지도를 그리기 Screen Dynamics. Mapping the Borders of Cinema』를 언급하고 싶다. 「스크린 부가 장치. 무빙이미지를 보는 새로운 실천 Screen Attachments. New Practices of Viewing Moving Images」은 온라인 저널 《Screening the Past》(#32, 2011)의 특별호(edited by Katherine Fowler and Paola Voci)를 보라.[/note] 재배치에 대한 생각은 볼터(Bolter)와 그루신(Grusin)이 재매개(remediation)라고 부른 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재매개는 “하나의 매체가 또 다른 매체에 합병되거나 재현되는” 과정이다.[note title=”50″back]Bolter & Grusin 1999, p. 45.[/note] 이는 특히 전자 미디어와 관련해서 진행된 방법으로, 새로운 매체 안으로 옛 매체를 재흡수(볼터와 그루신은 PC의 디지털화된 가족사진 앨범, 그리고 영화에 기반을 두면서 그 특질과 구조를 보존하는 몇몇 비디오 게임을 언급한다)하거나, 새로운 매체를 통해 옛 매체를 리모델링(여기서는 락 콘서트를 CD롬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예다)하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재매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치의 존재와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반면에 재배치는 내 생각에 좀 더 결정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다.

 

재배치는 경험의 역할을 강조한다. 주어진 미디어는 특정한 유형의 보기, 듣기, 주의집중, 감성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그것은 물리적 측면의 영속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보장하는 보고 듣고 감각하는 방식의 영속성이다. 미디어는 자신을 특징짓는 경험 형식이 생존하는 한 살아남는다. 또한 재배치는 주변 환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주어진 미디어는 또한 그것이 작동하거나 창조하는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 경험은 항상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단지 가치 있는 장치의 재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에 발생하는 방식이다. 재배치 개념은 무엇보다도 기존 지형 바깥으로의 미디어의 이행이, 경험의 유형 및 물리적·기술적 공간을 포함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단순한 장치의 복제와는 대조적으로 경험의 자리옮김에 대한 이런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문제점에 직면하도록 한다. 첫째로는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가 자신의 저서 『고삐 풀린 현대성 Modernity at Large』에서 언급한, 흐름지역성의 관계다.[note title=”51″back]Appadurai 1996.[/note]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주변 풍경을 완전히 재설계하는 일련의 ‘폭포들(cascades)’의 존재다. [우리에게 쏟아져 내리는] 상품, 돈, 사람, 생각, 미디어는 가변적인 회로 안에서 계속 재분배되고 재배열된다. 그것들이 어떤 장소에 머무르는 것은 새로운 균형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역사의 흔적도 재배치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새로운 지역성(사원과 도시가 한때 세워졌었던 것처럼 현장을 구축한다)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따리(Felix Guattari)의 탈영토화재영토화라는 용어로 설명된다.[note title=”52″back]Deleuze & Guattari 1977 (orig. 1972).[/note] 자본, 생산양식, 권력, 제도 등은 종종 구조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황무지를 헤매다 아마도 새로운 영토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런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의 과정이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박시키는 것으로부터 자본, 생산양식, 권력, 제도 등을 자유롭게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이행 덕분에 만들어지는 풍경(도착한 환경이 꼭 출발점만큼 조직화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리좀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은 분명히 충동(drive)의 동역학에 관한 것이다. 리비도의 축적은 구속되어 있거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좀 더 조밀하거나 좀 더 불안정한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다. 탈영토화재영토화는 그러므로 정신적(psychic) 모델을 따른다.

 

이런 두 가지 언급은 재배치의 논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아파두라이는 점점 더 유동적이고 점점 더 불안정해져 가는 세계를 보면서, 어떻게 재배치가 더 큰 과정에 참여하는지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과정 안에서 미디어는 항상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장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즉, 미디어는 항상 새로운 ‘경치’에 협력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경우, 그들은 모든 이동이 단지 순수하게 기능적인 이유로만 일어나지 않고 충동과 접속도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또한 욕망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으며, 미디어가 유목적이거나 스스로 한 장소에 갇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욕망과 관련해서이다. 다시 말해 이런 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재배치가 장소와 일련의 충동에 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로 돌아와서 우리는 영화가 (크라카우어가 주장한 대로[note title=”53″back]특히 그가 “집 없는 자를 위한 거처들”에 영화를 포함할 때. 크라카우어를 보라. Kracauer 1998 (orig. 1929), pp. 88-91.[/note]) 집일뿐만 아니라,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잘 이해하고 있었듯이[note title=”54″back]Mulvey 1989.[/note]) 기쁨의 궁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배치는 현재 작용하고 있는 영토들의 유형이 무엇인지 검토하도록 한다.

 

자연스럽게도 재배치에 대한 생각의 이면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복제의 개념에 대해 논하면서 주목하기 시작한 많은 이슈들을 발견한다.[note title=”55″back]Benjamin 2003 (orig. 1936), pp. 251-282.[/note] 우리는 단순히 아우라의 상실이 아니라 그것의 재정복 가능성에 대해서도 단지 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또한 미디어 풍경을 재설계하고 재정립하는 수렴의 과정을 발견하듯이[note title=”56″back]수렴 및 그에 수반되는 문화적 변형에 대해서는 젠킨스를 보라. Jenkins 2006.[/note] 우리는 그 과정을 단순히 산업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새로운 아상블라주를 창조하고 새로운 욕망을 실행하는 메커니즘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다음 절에서 나는 다른 무엇보다 더 환기시키고 풀어야 할 주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함의 및 결과에 있어서 재배치에 대한 생각을 탐구할 것이다.

 

 

거의

 

재배치는 경험이 그전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여기서 ‘거의’는 ‘전혀 아닌’을 의미할 수 있다. 영화와 함께하면서, 그 경험은 현재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네 가지 즉, 디지털 TV, 컴퓨터/태블릿,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미디어 파사드로 시작되는 새로운 유형의 스크린을 접한다. 이런 스크린들은 전통적인 영화 스크린과는 매우 다른 시각적 조건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스크린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되는 감각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대한 집중력을 쉽게 잃는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어떤 경우에는 이미지의 크기 또한 그 이미지의 스펙터클한 본성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서 아이콘은 현실을 묘사하는 것 이상의 지침으로 기능한다. 무수한 (영화에서 광고, 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생산물들이 많은 수의 이러한 스크린에 거주해서, 영화적인 특징들을 엄격하게 분리하기 어렵게 하는 중첩 효과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보는 방법은 각각의 흔적을 담고 있다. 관객은 멀티태스킹 주의력을 활성화해서 동시에 하나 이상의 대상을 따라간다. 관객은 복잡한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디테일을 도외시하고, 단일한 요소들을 분리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마지막으로 관객은 이런 다양한 조건들 사이를 전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는다. 관객은 영화를 볼 때와 똑같이 행한다. 그들은 TV, 컴퓨터, 휴대전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배운 전술에 적응한다. 이 경우 그들이 겪고 있는 것은 영화 너머 영화의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하고 싶은 또 다른 결과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굴절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자주 ‘영화적’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 경험으로의 회귀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을 촉발한다. 실제로 이 같은 관객은 환경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이미지의 웅장함을 회복시키며, 이야기에 집중하고, 스크린에 다시 나타나는 현실을 즐기는 데 성공한다. 관객이 이를 성취하는 이유는 그들이 움직이는 맥락이 관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사전 정의되고 경직된 구조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객은 그들 역시 부분이고 역할을 하는 이질적이고 유연한 구성요소의 ‘아상블라주’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요소들은 전통적인 영역에 더 가까운 요소들에 유리하도록 도외시될 수 있다. 영화는 영화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움직임은 때때로 영화가 아니지만 아마도 영화가 되고 싶어 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관객은 스포츠나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나 비디오 게임에서 역시 매우 격렬한 이야기와 스펙터클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오손 웰스, 1941)
오손 웰스(Orson Welles),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그래서 ‘거의’는 ‘전혀 아닌’을 의미할 수 있지만 또한 ‘거의 완전한’도 의미할 수 있다. 재배치된 경험에서 문제는 물질적 조건형식의 중요성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물질적 조건은 스스로를 자각하게 만든다. 물질적 조건은 경험이 발 딛고 다다르는 구체적인 지형을 조성하며, 그것들은 형식에 두께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진행 중인 요소들이 ‘아상블라주’(따라서 개방적이고 다면적인 전체)를 구성하는 한, 무엇보다도 자신을 자각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하는 순간 구성요소들의 배열이다. 이런 복잡한 전체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하고 작동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 배열이다. 또 상황을 영화적으로 드러내고 우리가 그것을 영화적으로 겪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배열이다.

 

개별적인 것 각각이 자신이 속하는 유적인 것에 비해 그런 것처럼, 모델과 비교하면 상황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더욱이 그것은 우발성 및 우연과 결부된 요소들의 존재로 인해 왜곡된다. 이 배열이 추적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불완전함과 변형을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의 핵심이 나타나도록 돕는다. 우리가 빠져있는 상황의 ‘무엇’과 ‘어떻게’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방식이다. 이것이 명료성의 원리 및 그 본질이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거의’는 필연적 요소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 디테일은 꼭 현존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영화에 대한 관념

 

영화 경험의 형식을 규정하는 특성은 영화 초기 이론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기계적으로 복제되어 스크린에 영사된 움직이는 이미지와의 관계, 시각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감각의 강도, 세계와의 거리의 수축, 실제 못지않게 구체적인 환상적 우주의 개방, 마지막으로 집단적 참여의 감각. 이것들은 영화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거나 이해될 수 있는 다른 상황들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들이 이론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습관에서 그것들을 얻는다.

 

영화관은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영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영화관에서 영화에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우리는 같은 주요 요소들을 경험하고 같은 행동을 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매 순간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통합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 구비오는 이런 통합 경험을 겪는다. 영화를 경험한 후 그는 어디에서나 그것을 발견한다.

 

또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기억도 있다.[note title=”57″back] 영화 경험에서 기억의 역할에 대해서는 쿤을 보라. Kuhn 2002.[/note] 우리는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경험을 시험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관념을 이용한다. 영화에 대한 기억은 세대의 문제로, 그것은 가까운 미래에 디졸브될 수 있다. 손상되기 쉽지만 기억은 과거를 되찾으려는 욕망의 원천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에서 읽은 것처럼 사르트르는 기차 여행 중에도 어떻게 특정한 영화성이 발견될 수 있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를 제공했다. 그것은 살았던 순간 및 그에 대한 노스텔지어의 존재 덕분이다.

 

게다가 상상력 작업이 작동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상황 (예를 들어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우리가 그 본성을 직접 파악할 수 없는 스크린)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 실마리로 해석을 시도한다. 이런 경우에 부합하는 특성은 추정(conjecture)의 형식을 취한다. 상당히 급진적으로 엡스타인은 에트나산의 정상에서 동요를 일으키는 스펙터클 앞에 서 있는 동안 이런 발걸음을 시도한다. 전날 거울 계단이라는 또 다른 놀라운 상황에서 같은 시도를 한 후다.

 

습관, 기억, 상상력—이런 상황에서 영화 경험에 부합하는 특성들 역시 나타난다. 나는 그것들이 이미 정립되어 있고 안정적인 ‘정전’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 특성들은 영화가 출현한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영화가 자체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표면으로 떠올랐으며, 영화가 시작한 길을 따라 스스로를 재조정하고 재정립했다. 그것들은 개인적·집단적 유산이 되었고, 그 자체로 실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 특성들은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여전히 개방적이고 유연한 전체를 구성하면서 선례와의 연결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 상황 안으로 깊게 들어간다.

 

이런 특성들은 경험의 형식 즉 경험의 구성요소와 토대 구조를 정의한다. 그 특성들은 단일한 발생과는 무관하고, 발생들의 구성 중 일부분을 형성한다. 그것들은 주어진 상황에 적용되기보다는 상황에 속한다.[note title=”58″back] 형식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은 상황으로부터 나오며 어떤 방향으로 강제한다는 생각은 카본에게서 모든 개념적 함의 아래 훌륭하게 논의되었다. Carbone 2010 (orig. 2004).[/note] 어떤 경우든 이러한 특성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좀 덜 정전적인 방식이라도 경험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그 경험을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규정한다. 그 특성들은 본질을 나타내고, 참조의 체계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또한 이런 특성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영화에 대한 관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note title=”59″back] 나는 벤야민이 독일 바로크 비극을 논하면서 ‘관념’(idea)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 즉 다양한 사본이 따르는 원형이나 일련의 깨달음 뒤에 전형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한 분야(작품보다는 경험)를 하나로 묶는 것으로서 ‘영화에 대한 관념’이라는 구절을 사용한다. 그 관념은 상황 또는 작품의 본질의 베일을 벗겨주고 동시에 그것 안에 남아있다. Benjamin 1977 (orig. 1928). ‘프롤로그’에 대한 유용한 읽기는 카본 2010에게서 찾을 수 있다. Carbone 2010 (orig. 2004).[/note]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화가 자신의 발전 경로를 따라 무엇을 해왔는지, 어디서 영화를 발견할 수 있는지, 심지어는 영화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말해준다.[note title=”60″back] ‘영화에 대한 관념’의 필요성과 효과는 앤드류(Andrew, 2010)가 최근에 보여주었다. 앤드류의 책에서 내가 중요하게 본 것은 경험적인 것(그는 […] “이중으로 된 세계를 통해 발견하고 맞닥뜨리고 맞서고 드러내기 위한” 영화의 임무를 설명한다. [pp. xviii and xix])과 기술적인 것(촬영, 편집, 영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의 교차점이다.[/note] (나는 영화가 끌어낸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관념들’(ideas)이라고 복수로 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다양성의 핵심, 다양한 경험들의 공통된 근거를 강조하기 위해 단수를 사용한다.)

 

영화에 대한 관념을 갖는 것은 근본적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돌아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다시 말해 그 관념은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 반영적으로 자의식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정말로 어떤 경험이 되려면 모든 경험은 흥분과 지식, 놀라움과 인지를 연합시켜야 한다. 경험이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사로잡아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경험이며 특수한 유형의 경험이라고 우리를 이해시키기 때문에 경험인 것이다. 물론 이 회로는 종종 차단되고,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한다. 우리는 종종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병사들, 즉 전방에서 말을 잃고 돌아온, 자신들이 본 것을 소통할 능력이 없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게 만든 충격의 희생자들 같다.[note title=”61″back]이 이미지는 벤야민에게서 나타난다. Benjamin 1972, p. 219.[/note] 미경험은 매복하고서 심지어 (특히) 더 강도 높은 상황을 기다리고 있다. 관념의 존재가 이 상황을 유발한다. 그것은 감각의 풍부함을 재상술의 경로와 재회시킨다. 경험(Erfahrung)과 함께 하는 체험(Erlebnis).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자기반영적인 순간은 두 가지 공동 요소를 내포한다. 우선 영화에 대한 관념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소들의 본성과 역할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나타내든지 간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에 대한 관념은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스스로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방향을 찾도록 도와주는 나침반과 같다. 그것이 영화이론에서 특히 부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그것이 영화 좌표의 종합을 회복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note title=”62″back] 나는 나의 에세이 「이론, 포스트-이론, 신-이론: 담론의 변화, 대상들의 변화 Theory, Post-theory, Neo-theories: Changes in Discourses, Change in Objects」  (《Cinémas》, 17, 2-3, Spring 2007, pp. 33-45.)에서 이러한 이론의 본성에 대해 강하게 주장한다.[/note] 발라즈는 이를 잘 이해했다. 그는 이론이 “예술들 사이에서 배회하는 이들에게 경로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로드맵”이라고 했다.[note title=”63″back]Balász 2010, p. 3.[/note]

 

상황의 구성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영화에 대한 관념은 또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상황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적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영화에 대한 관념은 상황을 일반적인 범주에 포함되게 한다. 혹은 다른 방법으로 그것은 영화에 영화 자신의 본성을 정의하는 라벨을 부여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것이 영화라고 이해한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영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에 이름과 육체를 부여하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받아들이도록 한다.[note title=”64″back]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인지(recognition)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여러 방식으로 숨겨져 있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인식(agnition)으로서. 그리고 어떤 것이 확인되거나 승인되거나 표준화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정(ratification)으로서. 인지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아는 어떤 것을 재발견하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정체성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 인지라는 단어의 두 가지 다른 의미는 ‘개 아르고가 율리시스를 인지했다’와 ‘대통령 후보가 선거에서의 패배를 인지했다’와 같은 문장에서 각각 명백하게 드러난다.[/note]

 

영화의 탄생을 이끈 과정을 재추적한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가 영화 기술의 도입보다 영화에 대한 관념이 나온 순간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술의 출현은 단순히 일련의 가능성을 향한 길을 연다. 이런 초기 등장 이후에는 절차가 수립되고, 가능성이 흐르고, 관행이 반복되는 단계를 따라야 한다.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의 용어를 사용하면 이것이 오토마티즘(automatism)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매체가 그 기능을 구분하는 목적과 역할을 취하는 순간이다. 영화가 띠는 성격(personality)에 대해 인지하고, 그것의 표현 형식으로서의 잠재성(potential)을 인식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매체가 아닌) 미디어가 구성되는 것은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note title=”65″back]“이는 한편 수신의 의미로, ‘성격’의 인지 그리고 점점 더 자주 특정한 매체의 사용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의 의미로, 매체를 다른 미디어로부터 분리할 수 있거나 이미 구별 및 실행 중인 포괄적으로 ‘표현가능한’ 고유한 매체특정적 표현의 잠재성에 대한 의식을 암시한다.” Gaudreault & Marion 2005, pp. 3-15.[/note]

 

영화가 집단에 인식되는 정체성을 획득하고 제도로 변형되는 것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다. 고드로는 이를 ‘두 번째 탄생’이라고 한다. 모호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이름을 얻고 따라서 무엇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좀 더 정확하게는 ‘세례’(baptism)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에 대한 관념은 이 세례를 받아들인다. 미디어는 충만한 삶을 향해 꽃을 피우고 그것은 영화가 된다.

 

 

역사의 재발명

 

출발점으로 잠시 돌아가자. 이러한 영화에 대한 관념이 재배치에 기인한 상황들에 종종 처하듯이 경계 상황에 적용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비록 그것이 전혀 아닌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거의 완전한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거의를 기준으로 측정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관념은 이런 상황을 영화에 포함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맥락 안에 놓일 수 있는 이런 상황들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식별), 동시에 정확한 차원에서 그 상황들의 소속을 확고히 한다(합법화). 이 이중의 위업 덕분에 우리는 영화의 재배치에 의해 생겨난 여러 가지 가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또 집에서, 여행 중에, 대기실에서, DVD나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한 후, 아마도 단편적으로 또는 유튜브에서 찾은 (영화보다는 비디오) 시청각 생산물의 형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관해 소셜 네트워크로 채팅하는 것을 영화적 경험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작용에는 무시할 수 없는 대가가 든다. 이런 상황을 영화에 대한 관념의 영역 안에 들여놓기 위해, 이런 현상에서 영화적 경험의 방식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도식을 밀어붙이고 어떤 요소들을 무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정전이 된 것에 유리하도록 왜곡을 최소화한다. 우리는 영화관에 있지 않고, 아마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을 수 있고, 산만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을지 모르고, 스크린은 반사 대신 형광성이고, 영화 길이는 전통적이지 않고, 어쩌면 심지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전과 같이 기계적으로 복제된 이미지를 보고 있으며, 우리의 감각은 잘 조율되어 있고, 현실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으며, 구체화된 환상을 요구한다는 등의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영화의 관념형식에 계속 애착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양립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약간 조정한다.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결국 그것은 영화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한다.

 

그러나 양립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또한 관념형식을 약간 조정한다. 우리는 강제로 그것을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과 관련짓고, 그래서 상황은 지나치게 변형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결국 우리 정신에 있는 모델의 몇몇 요소들을 지우고 어떤 다른 것을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다소 임시변통 모델을 만든다.

 

특히 우리는 관념형식의 명백한 지형 위에서 작업한다. 우리는 과거(혹은 적어도 전통)를 돌아보고 그 특성들이 현재를 대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다. 데이터를 위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그것을 재절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적 무게를 재분배하고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새로 만들고, 본질적인 연결점을 다시 정의한다.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관념형식이 나타난 것으로 재조직하는데,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을 계속 ‘영화적’이라고 라벨링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만 우리는 과거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가둬두지 않고 또 현재를 모호하게 남기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지형을 약간 바꾸지만 우리가 도착한 해안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다리를 건설한다.

 

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 나는 관객을 뜻하려 한 것만이 아니라 학자, 비평가, 심지어 (아마도 미디어-영화가 매체 변화에서 살아남는 것을 보증하는 데 가장 위태로울) 산업 자체도 의도했다. 영화관의 사회적 측면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영화관의 이미지 및 사운드와 동급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홈시어터 기술 공급업체들 말이다. 역사적 수준에서 보면 이러한 업체들은 다른 하나의 요소를 지우면서 하나의 요소를 강조하기 때문에, 집에서 이룰 수 있는 경험의 모델은 오랜 기간 지속된 정전에 맞춰져 있다.[note title=”66″back] 좋은 예로, 다음은 홈시어터 기술에 전념하는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매우 흔하고 가장 대중적인 오락이며, 특히 기업의 일을 경영하는 매우 스트레스 받는 삶을 사는 젊은 전문가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영화관을 오가는 데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오락을 향한 수고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당신의 가정 안에 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홈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영화관의 영상과 소리를 구입하십시오. 최고의 홈시어터는 교통량이 많은 극장을 향해 차를 몰고 갈 필요 없이 전체 영화관을 가져올 수 있는 최고 품질의 구성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대의 발명은 여러분에게 편안함을 주고 영화관이 제공하는 실제 삶의 감각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최고 품질의 커다란 스크린, 별개의 스피커, 최고 수준의 DVD에서 나오는 깜박임 없는 이미지들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마련하는 일은 거의 실제 영화관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다음 링크를 보라.http://moremoneystreams.com/2011/12/12/film-like-home-theater-projectors-for-enjoyment-within-your-grasp/ (accessed March 2012).[/note]

 

홈시어터 시스템
홈시어터 시스템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영화가 전통에 걸맞도록 해주는 원형들을 찾는 감독들과 마주친다. 판타지가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장르는 종종 다른 영화들과의 공통점보다도 그래픽노블, 비디오 게임, 테마 파크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들은 같은 시대에 다른 추세가 있었음을 괄호에 넣어놓은 채 멜리에스(Méliès)와 같은 인물을 거론하며 그를 제7의 예술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그러면 자 어떤가, 이런 판타지 작품들은 영화의 ‘심장’이 된다. 이것이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가 <휴고>(2011)에서 한 일이다. 그래서 비록 다양한 경로들에 영향을 받고 열려있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확립된 전통의 흐름 안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note title=”67″back] 물론 스콜세지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 그의 작품은 영화의 역사에 속하고 그는 영화의 유산을 보호하는 데 헌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리뷰들이 이런 시각을 취하는지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대중적인 소설 작가 브라이언 셀즈닉(Brian Selznick)에게서 힌트를 얻은 스콜세지와 시나리오 작가 존 로건(John Logan)은 1902년 무성영화 <달세계 여행>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영화적 속임수의 초기 대가 멜리에스는 레이 해리하우젠(Ray Harryhausen)부터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과 <아바타>(2009)의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까지 현대영화의 몽상가들의 길을 닦았다. 스콜세지가 상기시키듯이 멜리에스의 뮤직홀 마술과 카메라 트릭 간 혼합은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남아있다.” (Glenn Lovell, ‘Hugo: A Clockwork Fantasy’, 《Cinemadope》). 다음을 보라. http://cinemadope.com/reviews/hugo-%E2%9C%AE%E2%9C%AE%E2%9C%AE/ (accessed March 2012).[/note]

 

게다가 서로 동떨어져 영향을 끼치던 것들을 재구성해서 새로운 측면을 오래된 제도의 발전으로 탈바꿈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예를 들어 큐브릭은 3D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note title=”68″back]이에 대한 사례로 《Telegraph》의 제임스 카메론 인터뷰가 있다. 이 인터뷰에서 그의 결과물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일찍이 매혹된 일에서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카메론은 10대에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큰 충격을 받아서 이 영화를 열 번 봤고 16mm 영화의 제작과 모델 구성을 실험하는 데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1984년 <터미네이터>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감독한 것으로 처음 인정받았는데, 영화제작 초기 시절부터 그는 가장 중요한 SF 작가이자 특수효과 선구자였다.” (Hiscock 2009).[/note] 현재의 눈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고, 당연하게도, 영화가 야외든 뮤지엄이든 집이든 늘 상영되어 왔다는 것을 발견하는 역사가들도 있다.[note title=”69″back]사례로 다음을 보라. Wasson 2005 and Griffiths 2008.[/note] 따라서 새로운 감상 환경은 완벽한 타당성을 찾아낸다. 또한 실현되어버렸거나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한 가설을 회복하는 이론사가들도 있다.[note title=”70″back]《Cinema&Cie》의 특별 이슈를 보라. 《Cinema&Cie》, 2 (Spring 2003), edited by Leonardo Quaresima, on ‘Dead Ends/Impasses’. 기고자들은 영화와 3차원성에 관한 초기 담론(폴라 발렌티니 Paola Valentini)이나 영화와 최면상태(루게로 유지니 Ruggero Eugeni)를 추적하고, 동시에 프리 영화(pre-cinema)를 돌이켜보면서 최근의 현실화를 분석한다(레오타르도 쿠아레지마 Leonardo Quaresima).[/note] 이러한 방식으로 현대 실험은 뿌리를 찾는다.[note title=”71″back]나도 카렐 테이지가 1924년에 오늘날 극장과 DVD에서 공존하는 영화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기대감을 관찰했던 바를 기억함으로써 이 운동에 기여하고 싶다. “그동안 파테 베이비(Pathé Baby) 장치는 홈 시네마의 도입을 가능하게 한다. 실내악. […] 공공예술(포스터, 프레스코, 거리음악 등)과 사적 예술, 서정시, 친밀하고 서정적인 영화를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하다.” Teige 2008 (orig. 1924), p. 153.[/note]

 

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이러한 직간접적인 과거 귀환의 많은 수는 꽤 생산적이다. 그것들은 부당하게 무시된 요소들을 포함해서 영화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한다. 많은 현재의 역사기록학 연구를 예로 들어보라. 그것들은 토마스 엘세서(Thomas Elsaesser)의 말을 사용하자면 “우리가 영화로 알고 있는 장대한 강이 되기 위해 합류하는 지류”의 발견에 지속적으로 기여한다.[note title=”72″back]Elsaesser 2004, pp. 85-86.[/note] 더 나아가 영화의 계보를 재진술하는 시도를 숙고해보라. 앤 프리드버그(Anne Friedberg)가 2000년에 명백히 밝혔듯이[note title=”73″back]Friedberg 2000, pp. 438-452.[/note] 그것들은 학문에 필수적인 인식의 순간을 재현한다.

 

그러나 내 초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련의 다양한 작동들을 병치함으로써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과거와 현재를 방법으로서 양립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야심찬 담론 전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영화의 모델에 비추어 현재를 읽는 것과 관련되지만, 또한 그 동안에 영화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고려하여 과거를 다시 읽는 것도 수반한다. 우리는 복잡한 상황들을 영화적이라고 인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화가 이미 겪었던 것으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영화의 과거의 반복을 그것이 지닌, 현재 영화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게끔 해주는 능력과 관련하여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의 전제들을 보지만, 현재에 근거해서 과거를 (그리고 전제로서의 과거를) 확립한다. 그 효과는 역사를 재설계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상황을 읽기 위해 참조하는 모델은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회고적 응시의 결과다. 그러므로 선례가 되어야 하는 (그리고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실제로는 결과다. 영화의 역사는 선형성을 잃는다. 어제와 오늘은 더 이상 릴레이 경주 바통을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작용과 반작용으로 위치를 교환한다.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지만 연속성은 단순한 구조물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는 트랙과 길을 가진 열린 장이다.[note title=”74″back]엘세서는 미디어 고고학으로서의 영화사 연구 기획에 대해, 연구가 “각각의 ‘지금’에서 다른 과거로 이어지는 길을 추적하거나 트랙을 따라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Elsaesser 2004, p. 99.[/note]

 

 

변증법적 상황과 회고적 인과 관계

 

바로 그러한 역사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벤야민에게 돌아가게 하고, 특히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부록에서의 비범한 구절에 이르게 한다.

 

“예술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다. 그것은 오직 완전하게 현행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시작해야만 쓰일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시대는 과거 시대의 예술이 포함하고 있는 예언들을 (상속된 것이 아닐지라도) 정확하게 해석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기회를 가지고 있다.”[note title=”75″back] Benjamin 1972, p.1046.[/note]

 

그래서 과거는 현재에 빛을 던지는 사례를 제공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현재에 의해서만 주목될 수 있다. 더욱이 그 사례가 명백한 진술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예언이 아니므로 현재만이 이런 경우를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벤야민은 확신한다. “현실에서 이런 예언들 중 어느 것도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 가장 임박한 미래일지라도. 오히려 예술작품에서는 아무리 간헐적이더라도 결코 개별적이지 않고 항상 연속되어 온 예언들이 수 세기에 걸쳐 빛을 밝혀온 미래에 대한 모호하고 흐릿한 레퍼런스들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note title=”76″back] Ibid.이 문장은 “영감을 주는 작품과 그렇게 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한 작품을 구분하는 방식으로”라는 말로 끝난다.[/note] 만약 이런 경우가 예언이 되면 (그리고 따라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의 선행사건이 된다면) 그것은 오직 과거에 대해 모범적인 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조건들이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언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예술작품이 이미 수세기 혹은 몇 년 전에 다루었던 환경이 먼저 성숙에 도달해야만 한다.”[note title=”77″back] Ibid.[/note]

 

이런 성숙의 지점은 “예술의 기능을 바꾸는 어떤 사회적 변형, 그리고 […] 어떤 기계적인 발명품”[note title=”78″back] Ibid.[/note]과 동시에 일어난다.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명시적으로 재고하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명백하게 통찰하도록 하는 것은, 벤야민의 파리에 대한 훌륭한 프레스코인 『파사주』에서 ‘변증법적’이라고 규정한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어제와 오늘 모두를 ‘뚜렷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섬광 이미지’[note title=”79″back] 변증법적인 이미지는 섬광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이미지로, […] 인지가능한 지금에 번쩍 빛나는 이미지로서 붙잡힌다. Benjamin 1999 (orig. 1982), p.473.[/note]로, 일반적인 결과주의적 한계 바깥에서 어제와 오늘을 연결한다. 이런 이미지들 덕분에 어제는 오늘의 의식에 넘겨진다. “이미지들의 역사적인 지표는 그것들이 특수한 시간에 속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수한 시간에만 식별가능하게 된다고 말한다.”[note title=”80″back] Ibid., p.462.[/note] 그리고 오늘이 스스로에게 이해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미지들 덕분이다. “모든 현재는 그것과 동기화된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 각각의 ‘지금’(Jetzt)은 특수한 인식가능성의 현재다.”[note title=”81″back]Ibid., p.462-463.[/note]

 

변증법적인 이미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보고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그것들은 시각과 관점을 동시에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언명의 시점에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변증법적 이미지가 허용하는 과거와 현재의 상호 조명은 결과론적 발전에 대한 생각을 약화시킨다. 더 이상 오늘이 어제를 결정하는 것 이상으로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지 않는다. 연대표보다는 별자리에 대해 말해야 한다. “과거가 무엇인지는 현재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현재가 무엇인지는 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는 지금(Jetzt)과 함께 순식간에 합쳐져서 별자리를 형성하는 것이다.[note title=”82″back] Ibid., p. 473.[/note]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회고적으로만 인식되는 예언, 어제와 오늘 모두의 식별성을 보장하는 요소, 연대기적 선형성이 아니라 별자리 배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결이다. 벤야민이 주는 교훈은 분명한데, 그것은 우리가 재배치의 과정들에 스스로를 연루시키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관념을 능숙하게 설명한다. 새로운 상황이 영화적인 것으로서의 인정을 간청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밝혀줄 것을 과거에 요청하는 동시에 이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과거를 읽는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선행하는 조건의 성숙을 보면서 동시에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할 것을 구축한다. 우리는 오늘을 정의하기 위해 어제를 사용하고, 또한 오늘이 정의되기를 요청하기 때문에 어제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대기적 감각을 (존중하는 척할지라도) 깨고 각각의 순간을 다른 순간의 결과로 만든다.

 

도발적인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서, (이 상황은 우리를 무관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 모델에 따르면 ‘변증법적 상황’으로서 기능하는데) 본질적으로 우리는 영화에 대한 관념을 동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었는가에 비추어 무엇임을 고찰하는 위치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별자리 시간성 안에서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진보적이고 인과적인 논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반대로 우리를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다양한 경로를 열어주는, 지그재그의 논리와 더 가까운 성격의 시간성 말이다.

 

나는 두 가지 (정말로 주변적인 메모인) 논평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영화가 재배치의 시대를 나타낸다는 역사에 대한 생각은 다른 분야에서도 잘 작동한다. 미에케 발(Mieke Bal)과 그녀의 ‘터무니없는 역사’가 하나의 사례다. 카라바조와 바로크를 인용한 일련의 현대 작품에 대한 분석에서 발은 원천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 현대 작품이 원천에게 원천이 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한에서라고 언급한다. 이는 연대기적 질서의 반전을 낳아서 ‘연대기상 처음(‘이전 pre’) 온 것을 그보다 더 뒤에 재순환하는 나중(‘이후 post’)의 효과로 놓는다.’ 여기서도 우리는 해당 분야를 복합적으로 재절합하기 위해 연대표가 와해됨을 본다.[note title=”83″back]Bal 1999, p. 7.[/note]

 

두 번째 논평은 주제와 좀 더 관련된다. 이런 역사의 개념화 뒤에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계보, 인과관계, 기원 또는 반복 같은 몇몇 전통적인 생각들에 대한 깊은 재사유가 있다. 예를 들어 사후성 또는 사후작용으로 번역되는 프로이드의 개념 ‘Nachträglichkeit’을 살펴보자. 그 개념은 트라우마의 원인이 그 트라우마가 만들어낸다고 가정되는 결과에 의해 비로소 조명되고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한다.[note title=”84″back] Freud 1953-1974, vol. 17, pp. 1-122.[/note] 또한 들뢰즈가 정체성을 반복의 축적과 연관된 ‘광학적 환영’으로 환원해서 그것을 재정의하는 방식이나,[note title=”85″back] Deleuze 1994 (orig. 1972).[/note]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항상적이고 구성적인 지연(deferment)의 개입을 지우는 기원의 관념을 비워내는 방식이 있다.[note title=”86″back] Derrida 1976 (orig. 1967).[/note] 영화의 재배치는 (영화 또한 결국 단순히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매체에 불과하기에 그것의 가장 소박한 작용 영역에서 고려하더라도) 위와 같은 개념의 장과 직접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생존 전략

 

에이젠슈타인은 1946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8년까지 영화의 역사를 그리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note title=”87″back] Eisenstein 2012. 다음도 보라. Somaini 2011, pp. 383-408.[/note] 그의 아이디어는 예술의 역사 틀 안에 영화를 위치 짓겠다는 것이었다. 예술의 최종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나머지 예술 영역들로부터 그것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끌어낼 수 있는 행위자로서, 특히 순간의 현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인류학적 욕망에서 끌어낼 수 있는 행위자로서 말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영화는 통합된 상황을 해체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측면을 끌어내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으로 보인다. 영화는 낡은 예술을 재배치해서, 그러지 않았더라면 소멸할 위기에 처했을 예술을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에이젠슈타인의 시나리오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하면 우리는 용어를 다소 뒤집어야 한다. 오늘날 재배치되고 있으며 그 자신의 좁은 도로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영화다. 논쟁 중에 있으며 그 자신의 교훈을 주장하기 위한 새로운 지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영화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가 현재 위험한 상황에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매체(어두운 극장, 재료로서의 필름)의 상실은 미디어의 종말을 확인해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서 우리는 영화에 대한 관념을 상기하고, 경계선상의 상황에서 ‘영화성’을 보기 위해 그 관념을 사용한다. 심지어 역사의 편향된 다시 읽기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관념의 영속성, 즉 경험 형식의 영속성이 미디어의 생존을 보장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맥락은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영화 스스로 발견한 위태로운 조건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영화에 대한 관념을 재활성화한다.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영화의 종말 가능성(또는 그것이 종말에 임박했으리라는 급박감)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관념은 결국 약이나 엑소시즘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것은 환자에게 투여되는 치유책이다. 그것은 임박한 참사를 피하기 위해 맞이하는 의식(儀式)이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기껏해야 생존을 돕는다.

 

물론 그 재배치에서 우리는 또한 영화의 가장 활력 있는 제스처를 볼 수 있다. 사실 에이젠슈타인을 따라 영화가 과거에 다른 예술에 했던 일을 오늘날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내부를 들여다보고 새롭고 표현되지 않은 태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형을 찾는 것이다. 거실에서, 광장에서, 컴퓨터로, 다른 미디어와 함께, 다른 언어들과 섞여서, 결코 완전했던 적은 없지만 가능한 것이 되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의 변화는 단순히 한낱 생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진정한 갱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재탄생의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는 죽음의 존재에 대해 다루기를 계속한다. 종결되지 않는 부활은 없다. 영화는 그 죽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필연적으로 시작해야 할 사실이다. 스스로를 불가피하게 미래에 비춘다는 것은 현재에 만연한 정서다. 비극은 항상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고 기다릴 것이다. 재배치된 영화는 항상 죽음의 그늘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화의 지속을 보기 위해 그토록 애타게 다시 써왔던 영화의 역사는 이미 마지막 유언 중에 있음이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영화가 가장 논란이 많은 상황에서도 그렇게 자랑스럽게 단언하는 정체성은 불안의 구름에 둘러싸인 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후적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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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1월 브레멘에서의 발표를 기반으로 하며, 2012년 5월 바이마르 ‘IKKM’에서 영구적으로 완성 및 수정됐다. 브레멘에 초청해준 폴레트(Winfried Pauleit)와 권위있는 지원을 제공해준 엥겔(Lorenz Engell) 및 시에게(Bernhard Siegert)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을 준 엘세서(Thomas Elsaesser), 바이겔(Sigrid Weigel), 호와트(Alexander Horwath), 스트라타우스(Stefanie Schulte Strathaus), 팬텀버그(Volker Pantemburg), 해거너(Malte Hagener), 콜드웰(John Caldwell), 바오(Weihong Bao)의 논평과 주목에 감사한다.

 

원문 및 참고문헌 링크

https://necsus-ejms.org/the-relocation-of-cine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