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진실성
번역 안광휘

예술은 진실성의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술에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이 질문은 예술의 실존과 생존의 핵심이기도 하다. 만약 예술이 진실성의 매체가 아니라면, 예술은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예술이 취향의 문제이기만 한다면 관객은 생산자보다 훨씬 중요해질 것이다. 이때 예술은 사회나 시장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독립성도 권력도 없다. 예술은 디자인과 동일한 것이 된다.

 

지금, 우리가 예술이 진실성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몇몇 방법이 있다. 하나를 들어보자. 우리의 세계는 국가, 정당, 기업, 과학공동체와 같은 큰 집단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이 집단들의 내부에서 개인들은 자신만의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한 행위는 집단의 행동에 흡수된다. 하지만 우리의 예술 시스템은 작품, 또는 그것을 제작하거나 예술적 행위를 취하는 것의 책임은 개별 예술가에게만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술은 우리가 개인적 책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물론 여기서 범죄 행위와 같이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예술과 범죄의 유사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어느 정도까지 개인들은 자신의 세상을 바꾸길 희망하는가? 예술을 예술가에 의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장으로서 보고, 그 시도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자. 나는 이 본문의 틀에선 그 시도의 결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사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면 다음 질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 번째 대답은 이렇다. 예술은 상상력을 포착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의 의식이 바뀐다면, 달라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 또한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예술가들이 메시지를 보내는 일종의 언어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수용자들의 영혼으로 들어가 그들의 감수성, 태도, 윤리를 바꾸게 된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것이 세상에 미친 영향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관객들과 사용하는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 고대 사원에 있는 동상들은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숭배했고, 그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하거나 간구를 하기도, 도움을 구하기도 하였고, 그들의 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닌 아이콘의 숭상도 기독교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공통의 언어 기원은 공통의 종교적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1929)에서 무릎을 꿇고 기차를 촬영하고 있다.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 Man with a Movie Camera>(1929)에서 무릎을 꿇고 기차를 촬영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현대 예술가도 사람들이 자기의 작품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며, 실용적인 도움을 구하거나 위험을 피하고자 그것을 사용할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19세기 초 헤겔은 이처럼 육화되고, 가시화된 신에 대한 공통의 신앙을 상실한 것을 예술이 진실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의 진실성은 과거의 것이 된 것이다. (그는 오래된 종교에 대비해 법, 이성, 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 사회를 떠올리며 그림을 이야기한다). 물론 근대성은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어떤 정치적 혹은 이념적 개입의 수단으로서 관객과 공통의 언어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하도록 만들었다. 종교적 공동체는 예술가와 관객들이 참여한 정치적 운동으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효과적으로 쓰이기 위해선 대중들이 그것을 좋아해야만 한다. 하지만 좋고 호감이 가는 특정 예술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것에 기반을 둬 세워진 공동체가 반드시 세상을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공동체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진짜 좋은(혁신적이고,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근대적 예술작품은 그 당대에는 거부당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은 전통적이고, 진부하고 단지 상업적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우리가 아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운동은 종종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결국에 그것이 보수의 승리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동시대의 예술가들은 대중의 취향을 불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대중들은, 사실, 또한 자신의 취향을 불신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작품이 정말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이 작품이 정말 좋은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말레비치는 예술가의 가장 위대한 적은 진정성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술가는 아마도 진부하고 예술적으로 부적절한 것을 좋아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그렇게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이해”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관객들과 언어를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대중의 영혼에 미칠 영향과 자신들이 일부가 될 공동체를 건설하는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회의적이었다.

 

여기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두 번째 가능성이 생겨난다. 예술은 메시지의 생산이 아니라 사물의 생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는 관객과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몸담는 있는 물질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특정 종류의 기술의 예술은 그 관객의 영혼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사는 실제 세계를 바꾼다. 그로써 그들은 새로운 환경의 조건에 적응하도록 노력하게 되고 그들의 감각과 태도가 바꾸게 되는 것이다. 맑시스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예술을 상부구조의 일부 또는 물질적 기반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이념적이거나 기술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급진적인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이 두 번째, 세상을 바꾸는 기술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환경 유입시킴으로써 대중들을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은 1920년대 러시아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이 추구했었다. 대중은 그들의 예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 작품을 위한 새로운 대중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리가 새로운 시각 환경에 살아야만 한다면 자신의 감수성을 수용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에펠 타워가 좋은 사례이다.) 그러므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공동체를 만들길 원했지만, 자기 자신을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관객과 세상을 공유했지만, 언어를 공유하진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현대적인 기술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반응은 모호했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기술 세계의 인공물과 어느 정도 친밀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방향성과 기술적 진보의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마셜 맥루한: 예술가들은 상아탑에서 콘트롤 타워로 이동했다.) 그 목표는 아방가르드의 정치적이고 미학적으로 완벽한 사회, 즉 유토피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역사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로 진보가 더이상 필요 없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 기술적 진보와 예술적 협업은 이 진보를 멈추기 위한 목표를 가진 것이다.

 

혁명적 보수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보수주의에 예술이 내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무엇인가? 만약 예술이 일종의 기술이라면, 기술의 예술적 사용은 그것의 비예술적 사용과 다를 것이다. 기술적 진보는 과거의 오래되고 쓸모없는 것을 새롭고 더 좋은 것으로 영원히 대체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혁신이 아니라 개선이다. 혁신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보라.) 반면에 예술 기술은 개선의 기술과 대체의 기술이 아니고 보존과 복원의 기술이다. 과거의 잔재를 현재로 가져오는 기술은 현재의 것을 미래로 가져간다. 마틴 하이데거는 이런 식으로 예술의 진실성이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적어도 한순간, 기술적 진보가 멈춤으로써 예술은 기술적으로 정의된 세계의 진실과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이데거는 이 폭로가 순간적일 뿐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다음 예술작품이 열었던 세계는 다시 닫힌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보통 우리가 예술 제도라고 말하는 것에 의해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그는 예술의 이러한 불경스러운 면을 예술의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이해와 무관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하이데거에겐 아트 딜러나 큐레이터가 아닌 관객이 근본적인 이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만약 관객이 작품을 탈속적이고 실용적인 삶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다 하더라도, 전시장의 직원은 그것을 절대로 그러한 신성한 방식으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그 직원에게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미술관의 온도나 습도를 조절하고, 작품들을 복원하고, 먼지와 때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예술 작품을 대할 때 관람자의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관리하는 이의 관점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미학적인 감상의 대상을 만든다 하더라도 보존, 복원, 그리고 전시의 기술은 세속적인 기술이다. 전시장 안에는 세속적인 삶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시장의 아이템들이 미적인 대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세속적인 일상과 관습이다. 전시장은 예술작품을 일상으로 가져오거나 일상을 예술로 가져올 더이상의 추가적인 신성모독이 필요하지 않다. 전시장은 이미 속속들이 불경한 것이다. 전시장뿐만 아니라 예술 시장에서도 예술 작품을 메시지가 아닌 세속적인 물건으로 취급한다.

 

보통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미술관의 벽은 이 예술 작품의 세속적인 삶을 보호해준다. 물론 최소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20세기 초의 예술의 사실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을 주제화하고, 폭로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예술의 현실 때문에 절대로 그 임무에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이 주제화하려 했었던 예술 작품의 물질적인 측면은 영구적으로 재미학화(re-aestheticized)되었다. 이 주제화는 예술 재현의 표준 조건으로 편입되어버렸다. 제도적 비평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비평가들은 예술 제도의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부분들을 주제화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제도적 비평 또한 예술 기관에 남게 되었다. 이제 나는 최근에 이런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인터넷이 전통적인 예술 기관이 작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던 것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예술 작품의 세속적 차원을 정확하게 주제화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 세상에서 인터넷은 예술 작품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노출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 상영회에 참석한 관객들.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배우들의 옷차림과 대사, 노래를 따라하는 독특한 관람 문화가 있다.(역자 주)
<록키 호러 픽쳐 쇼>의 상영회에 참석한 관객들.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배우들의 옷차림과 대사, 노래를 따라하는 독특한 관람 문화가 있다.(역자 주)

 

이것은 과거의 예술적 생산 방식으로부터의 상당한 일탈을 의미한다. 앞서 내가 언급했던 것을 보자.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은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생산했고, 그 누적되고 부재했던 시간을 회복한 결과물로서 작품을 전시했다. 이 부재의 시간이 우리가 창조적인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사실 그것이 정확히 우리가 창조적 과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앙드레 브레통이 프랑스의 시인에 대해 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잘 때가 되면 문에다가 “시인이 작업 중이니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쓰인 표지판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창조적인 작업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의 통제를 초월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작가의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이 부재의 시간은 며칠이 지속될 수도 있고, 몇 달, 몇 년, 심지어 한 평생 지속될 수도 있다. 오직 이 부재의 기간이 끝났을 때 작가는 (아마도 사후에 문서 속에서 발견될) 작품을 발표하고 그것은 창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등장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note title=”1″back]Boris Groys, “Entering the Flow: Museum between Archive and Gesamtkunstwerk,” e-flux journal 50 (December 2013) http://www.e-flux.com/journal/50/59974/entering-the-flow-museum-between-archive-and-gesamtkunstwerk/[/note]

 

다시 말해, 창조적인 작업은 그 결과물의 작업에 들인 시간과 전시의 시간이 비동기화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가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피해 범죄를 저질렀거나 더러운 비밀을 숨기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은 우리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려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겐 악마의 눈으로서 경험된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오히려 유쾌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비밀을 까발릴 때 우리는 진부하고 평범해지는 것이다. (사르트르: 타자는 지옥이다. 타인의 시선은 우리의 주체성을 부인한다. 라깡: 타자의 시선은 언제나 악마의 눈이다.)

 

오늘날 상황은 바뀌었다. 현대 예술가들은 인터넷을 사용하며 작업한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인터넷에 올린다. 특정 작가의 이름을 구글링하면 그의 작품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문맥에서 생애, 다른 작품, 정치적 활동, 크리틱 리뷰, 디테일한 그의 일생 등의 다른 정보들까지 제공해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의도와 의미로 작품에 투자한 저자의 주제가 해석학적으로 독해 되고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저자의 주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해체되고 죽었다고 선포되었다. 내 말은 인터넷 데이터가 참조한 오프라인 현실에 존재하는 현실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 저자는 인터넷을 예술 생산의 수단 뿐만 아니라 티켓을 사고, 식당을 예약하고, 일을 하는 등으로도 사용한다. 이 모든 행동은 인터넷이라는 통합된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고, 그들 모두는 잠재적으로 다른 인터넷 유저에 접속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술 작품은 세속적이고 “진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이고 진짜인 자신의 작가에 관한 정보에 통합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터넷에서 특정한 종류의 활동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오프라인의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작업에 관한 기록물로서 남는다. 사실 인터넷에서 예술은 군사 기획, 관광 사업, 자본 흐름 등과 같은 공간에서 작동한다. 구글은 그들 사이에 벽이 없음을 보여준다. 인터넷 사용자는 그것이 작품이라고 해서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사물을 대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인터넷 유저들은 예술에 대한 정보를 세계의 다른 정보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마치 전시장의 직원이 된 것처럼 세속적인 행위들이 통합된 공간에서 행해지는 예술은 명확하게 문서화된다.

 

여기서 “문서화”란 단어가 중요하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예술에서 문서화는 전시나 전시공간이 전통적인 예술 작품 옆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항상 문제가 많아 보였다. 예술 작품은 즉시 스스로를 보여질 수 있는 예술이었기 때문에 감탄할만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 기록물들은 예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한 행사나 전시, 설치, 프로젝트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게 해주는 참고자료에 불과했다. 예술 기록은 예술을 참조하지만 예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록물들은 재편집되고, 수정되고, 연장되고, 축소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작업으로 인해 작품의 형태가 변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경우 금지된 이런 모든 행위가 주관적인 예술 기록물에서는 가능했다. 그리고 작품의 형식만이 그것의 재현성과 정체성을 보증하기 때문에 예술 작품의 형태는 제도적으로 보증되었었다. 하지만 기록물은 그 외부에 존재하는 “진짜” 지시 대상에 의해 재현성과 정체성이 보증되기 때문에 그 형식이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록 예술 문서의 등장이 예술 매체로서 인터넷의 출현보다 앞섰다 하더라도, 인터넷의 보급이 그것을 합법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벤야민이 예술과 영화에서의 몽타주에 대해 지적한 것을 언급할 수도 있겠다.)

 

한편, 예술 제도도 인터넷을 자신을 드러내는 주된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술관은 자신의 소장품을 인터넷에 디스플레이했다. 그리고 물론 작품의 이미지를 디지털로 보관하는 것은 전통적인 미술관이 하던 것보다 훨씬 간결하고 유지비가 적게 든다. 따라서 미술관은 항상 수장고에 있어야 하는 소장품의 부분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개개인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에서 작가에 관해 충분히 묘사된 것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작가는 작업실에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작가의 특정 작품을 보기 위해 작업실에 온 것이라면, 작가는 노트북을 통해 그의 활동과 작품들 뿐만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나 일시적인 설치, 도시 개입, 정치 활동 등도 보여줄 수 있다. 작가의 실제 작품은 그의 이력서이다.

 

페리 오그덴(Perry Ogden)이 촬영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실.
페리 오그덴(Perry Ogden)이 촬영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실.

 

오늘날 작가는 다른 개인이나 조직과 마찬가지로 정교한 비밀번호와 데이터 보안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그 정보가 완전히 노출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예전에 내가 인터넷 감시에 관해 논의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의 주체성은 기술적 구조가 되었다. 오늘날 주체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비밀번호의 소유자로서 정의된다. 오늘날 주체는 비밀을 지키는 사람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주체에 관한 매우 전통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주체는 신이 아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타인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주체가 되는 것은 존재론적인 보호 대신 기술적인 보호와 더 많은 연관이 생겼다. 인터넷은 본래 투명하고 관찰 가능한 주체로 구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드러난 비밀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술적인 보안은 뚫린다. 오늘날 해석학자(hermeneutiker)는 해커가 되었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비밀을 상으로 걸고 싸우는 사이버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비밀을 아는 것은 그 비밀로 구성된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사이버 전쟁은 주체화와 탈주체화(subjectivation and desubjectivation)의 전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인터넷이 투명성의 공간이기 때문에만 벌어지는 전쟁이다…

 

인터넷을 통제하는 기업은 그 감시의 결과를 판매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산수단, 즉 인터넷의 물질적-기술적 기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사적인 소유물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의 이윤은 대부분 사용자를 타겟팅한 광고에서 온다. 이는 해석학의 화폐화라는 흥미로운 현상을 가져온다. 작품의 저자를 찾아내는 전통적인 해석학은 구조주의, 클로즈리딩(close reading) 이론가들에게 비판받았었다. 그들은 정의에 의해 접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비밀을 추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오래된, 전통적인 해석학은 그 모든 비밀이 밝혀진 인터넷 공간에서 주체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수단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주체들은 더이상 자신의 작품 뒤에 숨지 않는다. 그 주체가 생산하는 잉여 가치는 인터넷 기업들에 의해 책정된 것이고, 그것은 해석의 가치인 것이다. 주체는 인터넷에서 뭔가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특정한 관심사, 욕망, 욕구를 가진 인간임을 드러낸다. 고전적 해석학의 화폐화는 최근 수십 년간 등장한 가장 흥미로운 과정 중 하나이다. 예술가는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흥미로운 대상이다. 컨텐츠 제공자에 의한 예술적 생산은 이 콘텐츠 제공자의 미래 소비 행태를 예측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이 예측은 이윤을 창출한다.”[note title=”2″back]Boris Groys, “Art Workers: Between Utopia and the Archive,” e-flux journal 45 (May 2013) http://www.e-flux.com/journal/45/60134/art-workers-between-utopia-and-the-archive/ [/note]

 

마크 주커버크는 페이스북에 소셜VR팀을 신설했다.
마크 주커버크는 페이스북에 소셜VR팀을 신설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떠오른다. 인터넷의 관객은 누구일까? 개개인은 그런 관객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인터넷은 신 같은 관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크지만 유한하다. 사실 우리는 누가 인터넷의 관객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글이나 NSA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알고리즘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개인의 행동 가능성과 그 한계를 실험하는 수단으로서 예술에게 그것의 진실성에 관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앞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예술적 전략인 설득과 수용에 대해 논의했었다. 이 두 전략 모두 관객의 시점과 비교되는 예술가가 만든 시각의 과잉(surplus of vision)이라 불리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은 “평균의”, “평범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 시각의 과잉은 이미지의 힘이나 기술적 변화의 힘으로 관객들에게 소통되어야 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조건에서 이 시각의 과잉은 더이상 예술가의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응시의 측면에 놓인다. 이 응시는 예술가를 보지만 예술가가 보이지 않는 예술 활동을 가시적으로 변화시킬 알고리즘을 만들기 시작하지 않는 한 예술가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예술가는 여전히 일반적인 인간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그보다 많은 것을 본다. 예술가는 그들의 특별한 위치를 잃게 된다. 하지만 이 상실은 예술가가 전형적이고,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

 

사실 인터넷의 등장은 대량 예술 생산의 폭발적인 증가를 불러왔다. 최근 수십년간 예술 활동은 과거의 종교와 정치처럼 보편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술대량소비 시대가 아니라 예술대량생산 시대이다. 사진이나 비디오 같은 오늘날 이미지의 생산수단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세계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 플랫폼과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과 같은 네트워크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과 비디오, 텍스트를 전통적인 기관의 검열과 통제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동시에 오늘날 디자인은 사람들의 집이나 일터를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거나 경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다이어트, 운동, 성형수술은 그들의 신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 우리의 시대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진과 영상을 찍고, 글을 쓰고 자신의 활동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인터넷에 저장한다. 과거에 우리가 대량문화소비에 관해 이야기 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대량문화생산에 관해 이야기 해야만 한다. 근대성의 조건 속에서 예술가는 희귀하고 이상한 존재였다. 오늘날 그러한 종류의 예술적 행위에 속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은 모두가 타인의 시선과 복잡한 연극(play)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극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전형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의 규칙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반면에 전문 예술가는 이 놀이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 시대의 시인과 예술가는 이미 자신의 삶을 실제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작품이 되는 것이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객체가 되는 것이 주체가 되는 것보다 낫다. 존경하는 것보다 존경받는 게 낫다.) 우리는 유혹의 전략에 관한 보들레르의 글과 로저 칼로이스와 자크 라깡이 위험한 모방 행위나 예술로서 타인의 악한 시선을 유혹하는 것에 관해 쓴 글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알고리즘은 유혹당하거나 위협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성패는 사실 여기에 걸린 것이 아니다.

 

예술적 행위들은 보통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 이해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모두는 비슷하다.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르고, 그 다름으로써 존중받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요점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차이점이다. 이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사회적으로 형성된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한 명목상의 변수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출생 날짜와 장소에 의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었고, 부모님과 국적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 모든 외부적인 변수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주관적인 단서와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타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나타낼 뿐이다.

 

이미 오래전 근대의 예술가들은 타인과 사회, 국가, 학교, 부모에 의해 강요되는 정체성에 대항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규정할 주권자의 권리를 확인했다. 그들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 예술적 전문성, 그리고 미적 퀄리티에 관한 기대들에 어긋났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와 문화적 정체성을 훼손했다. 근대 미술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질문은 진정한 자신이 진짜인지 아니면 형이상학적 허구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질문은 진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질문이다. 내 정체성에 대한 권력이 나 자신에게 있는지, 사회에게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나아가, 사회의 분류 체계와 정체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인지 나 자신인지 묻는 것이다. 자신의 공공 인격체와 명목상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주권적 인격체 또는 주권적 정체성의 투쟁은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배적인 사회 분류 체계, 모든 부문과 위계질서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에 맞서기 때문이다. 이후 이 예술가들은 대부분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그들은 그들의 명목상의 정체성을 레디메이드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연극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여전히 예술적으로 재해석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명목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에 의한 비동일시(disidentification)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날 예술의 정치학은 비동일시의 정치학이다. 예술은 관객에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나는 나다”라는 말과 완전히 대조된다). 비동일시의 열망은 사실 진정한 인간의 욕망이다. 동물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술과 예술가의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기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미술관 시스템은 비동일시의 욕망에 관해서 양면적인 반응을 보인다. 반면에 미술관은 예술가에게 모든 분류 체계와 명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시대를 초월할 기회를 준다. 미술관은 예술가의 작품을 미래로 가져간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미술관은 그 약속을 이행하는 동시에 배반한다. 작품은 미래로 옮겨지지만 예술가의 명목상의 정체성은 작품에 반영된다. 우리는 미술관의 카탈로그를 통해 여전히 예술가의 이름, 출생 장소와 날짜, 국적 등을 읽는다. (그래서 근대 미술은 미술관을 파괴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인터넷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터넷은 전통적인 도서관이나 미술관보다 덜 역사적인 방식으로 조직된다. 아카이브로서 인터넷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사용자들의 복사와 붙여넣기를 통해 탈문맥화되고 재문맥화되는 가능성에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들을 자신의 문맥보다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떨어지게 해주는 비동일시에 대한 욕망에 더욱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인터넷은 전통적인 아카이브와 제도보다 우리에게 비동일시의 전략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