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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기술이 부활하다: 미디어 아트 고고학으로의 초대
번역 정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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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허시먼, 〈자기만의 방〉, 1993. 자료출처: 작가 홈페이지(http://www.lynnhershman.com/project/interactivity).

 

 

서론

 

조이트로프zoetropes,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s,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s, 포노스코프phonoscopes, 핀볼 머신pinball machines, 포춘텔링 머신fortune-telling machines, 잠망경 소총periscope guns, 가정용 기기, 오래된 텔레비전, 고장난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기 , 기술 변화 도를 따라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오래된 기술의 목록이 이제 미술관 안으로 쇄도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오늘날 미디어 아트 전시 가보면 언뜻 보기에 마치 기술 박물관에 듯한 느낌이 들기도한다. 하지만 동시대 예술 전시와 교육적 목적의 전시는 서로 다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런던의 무빙 이미 박물관Museum of the Moving Image, MOMI이나 도쿄의 메트로폴리탄 사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 of Photography 같은 장소에 전시된,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영화의 선사시대에 속하는 장치pre-cinematic devices 모형, 또는 샌프란시스코의 익스플로라토리움Exploratorium이나 파리의 라 빌레트La Villette 등의 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컨트롤 노브knob, 핸들, 조이스틱 등과 같이 눈길을 끄는 다양한 인터페이스 장치를 보고 있자면, 미디어 아티스트의 창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형식도 그렇고, 작업 방식도 그렇다. 사실 위 기관들은 기술을 활용한 중요한 예술작품에 재정적 지원을 적지 않게 해오기도 했다. 과거 특정 기술의 시대로 되돌아가 오래전에 일상의 경험에서 사라져 버린 장치를 실제로 (종종 촉각적인 방식으로) 접할 수 있는 현상적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정교하게 구현된 장치를 만드는 작업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교육적 목표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교육적 목적으로 전시된 작품에 예술적 위상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거기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더해져야만 한다. 

 

오늘날 바로 이 다른 무엇을, ‘고고학적’ 성향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주조하고 있다. 물론 알다시피 제프리 쇼Jeffrey Shaw, 토시오 이와이Toshio Iwai 등과 같은 예술가들은 1980년대에 (심지어 그보다 더 일찍) 이미 ‘고고학적 표현양식’으로 작업했었다. 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미디어 아트에서의 고고학적 접근’이라 부르고자 하는 경향은 1990년대에 전방위적인 미학적 관심 속에서 형성되었다. 폴 드 마리니스Paul De Marinis, 켄 파인골드Ken Feingold, 린 허시먼Lynn Hershman, 페리 호버먼Perry Hoberman, 마이클 나이마크Michael Naimark, 캐서린 리처즈Catherine Richards, 질 스콧Jill Scott 등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장본인으로, 이들은 노골적으로 낡은 아날로그 및 기계식 장치를 미학적 전략이자 구성요소로 활용해 예술작품들을 만들었다.    

 

 

새로운 미디어 역사로 향하다

 

고고학적 예술과 문화적·지성적 흐름에서 일어난 변화들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있는 것 같다. 일반적인 틀에서 보았을 때그 접점은 ‘실제’ 시간과 공간에 발 디딜 곳을 다시 한번 찾으려는 시도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1980년대 ‘포스트모던’ 담론의 폐기라 할 수 있다. 사실인즉 포스트모던 시대는 (약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의 창고 안을 어슬렁거리면서 혼성모방pastiche 및 인용references과 벌이는 끝없는 상호텍스트적 게임을 위한 자원으로 역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만화경을 보는 듯한 이러한 자기반영적인 놀이는 문화적 유물에 각인된 역사를 밝혀내기보다는 덧칠해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역사는 마치 영원히 ‘새로운 조각으로 채워지는’ 모자이크와도 같아졌다. 일제히, 명확히 규정되었던 주체의 위치는 사라졌고, 주체는 명확한 교통표지판도 신뢰할 만한 공간적 좌표체계도 없는 새로운 포스트모던 정보공간을 (처지에 따라, 절망적이거나 승리감에 휩싸여) 항해하도록 남겨졌다. 위·아래, 좌·우 등의 개념은 단지 서로 간에만 의미가 있었으며, 외적인 표지판과는 어떠한 의미도 만들지 못했다. 게다가 이 같은 대용 좌표체계는 끊임없이 변신하는 상태에 있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우아해 보였다. 그런 까닭에 ‘이데올로기의 종식’이나 ‘저자의 죽음’ 그리고 ‘역사의 종말’ 같은 개념들이 그렇게도 유행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이래 미디어학에서 등장한 새로운 역사 인식은 변화의 신호였다. 모호한 이론화나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언어 게임들 대신, 미디어 학자들은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체제 내에서 미디어 기술의 변천을 분석하고자 역사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오히려, 담론과 언어를 역사의 작인agent으로서 강조하는 견해를 예로 들어본다면, 이 새로운 역사주의에는 앞선 파도인 포스트모던 이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새로운 미디어 역사에서는 유물 ‘그 자체’보다 그것이 광의의 문화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현상의 징후라는 데 관심이 더 집중된다.[note title=”1″back]새로운 미디어 역사의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Siegfried Zielinski, Audiovisionen: Kino und Fernsehen als Zwischenspiel in der Geschichte, Reinbek bei Hmaburg: Rowolht, 1989; Friedrich Kittler, Discourse Network 1800/1900, translated by Michael Metteer with Chris Cullens, Stan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0 [프리드리히 키틀러, 『기록시스템 1800/1900』, 윤원화 옮김, 문학동네, 2015]; Avital Ronell, The Telephone Book: Technology, Schizophrenia, Electric Speech,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9; Carolyn Marvin,  When Old Technolgies Were New: Thinking About Electric Communication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Susan J. Douglas, Inventing American Broadcasting 1899-1922,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7; Lynn Spiegel, Make Room for TV: Television and the Family Ideal in Postwar America,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Cecelia Tichi, Electronic Hearth: Creating an American Television Culture,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note] 말하자면, 미디어 역사가들도 그들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울 없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는 과거에 속한 만큼 현재에 속한다. 역사는 객관적인 상태를 결코 고수할 없다. 역사는 단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단언컨대 미래) 사이에서 작동하는 매개자이자 의미를 처리하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통해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새로운 미디어 역사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중심지가 아닌 소통의 학문으로 자리잡아왔다.[note title=”2″back]아마도 이러한 접근에 발터 벤야민의 저작이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Susan Buck-Morss,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1989. 가장 극단의 예는 아비탈 로넬의 책 『The Telephone Book』인데, 이 책에서 그는 때때로 비대화 방식을 취하기까지 한다.[/note] 이러한 역사적 접근법을 우리는 미디어 고고학이라 부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미디어 고고학에는 다음의 두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미디어 문화의 변천을 야기하고 이끄는, 주기적으로 순환 발생하는 요소와 동기에 대한 연구다. 둘째,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러한 담론적 전통과 공식이 특정한 미디어 장치와 체계에 각인되어 있는 방식의 ‘발굴’이다.[note title=”3″back]미디어 고고학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필자의 다음 글을 보기 바란다. Errki Huhtamo, “From Kaleidoscomaniac to Cybernerd: Towards an Archaology of the Media,” ISEA’94 Catalogue, edited by Minna Tarkka, Helsink: The University of Art and Design, 1994, 130-135. 미디어 고고학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당연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이다. Michel Foucault, The Archaeology of Knowledge, translated by A.M. Sheridan Smith, London: Tavistock, 1982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note] 사이먼 페니Simon Penny의 논문, 「가상 현실의 2천 년2000 Years of Virtual Reality」은 이러한 미디어 고고학적 접근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본보기다.    

 

 

발굴의 전략

 

미디어 고고학 아티스트들이 채택한 전략과 고고학적 탐구를 추구하는 연구자들이 선택한 전략 사이에는 유사한 데가 있다. 미디어 고고학 예술작품은 공간화된 대화형 ‘역사 쓰기’ 형식, 다시 말해 지나간 기술과 대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고고학적 성향을 지닌 예술가들이 오늘날의 디지털 첨단 기술을 탐구하는 데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계급, 젠더, 권력, 시각의 역사적 본성,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관계 등과 같은 기술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논제들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위한 일종의 장terrain으로서 자신의 예술작품을 활용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 또한 확실하다. 여기서 여러 형태의 미학적 전략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역사책에 나오는 장치들과 매우 흡사한 예술작품들이 있다. 심지어 이러한 작품들은 원작의 리메이크이거나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간주해야 정도다(예를 들어, 캐서린 리처즈의 설치작품 가상의 The Virtual Body핍쇼 머신peep-show machine으로 분류할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뚜렷한 역사적 기준점은 단락되고, 여타의 연관된 것들과 뒤섞인다. 결과, 역사적 연결고리를 (지우지는 않고) 초월하여 의도적으로 모호한 시공간을 가진 초역사적para-historical 오브제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혼종적 구조가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프리 쇼의 설치작품 땅을 발명하다Inventer le Terre(1986), 혹은 마리니스의 음향 설치작품 에디슨 효과The Edison Effect(1993) 등도 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단언컨대 미래)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 장치를 직접적으로 재현하지는 않지만 고고학적 의도를 가진 작품도 있다. 작품들은 보다 연합적인, 콜라주와 같은 접근법을 채택한다. 파인골드의 유년시절/뜨겁고 차가운 전쟁(본성의 출현)Childhood/Hot and Cold Wars (The Appearance of Nature)(1993) 1950년대 등장한 텔레비전이 당시 희망과 두려움과 욕망으로 채워진 미국인의 집단적 담론 체계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다룬다. 파인골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잠재적으로 결속 가능한 이질적인 요소들(1950년대 교외주택의 부속물, 히로시마의원폭 전시된 실제 유골의 복제품, 괘종시계, 투명한 구를 회전하면 나오는 1950년대 텔레비전 영상 자료, 작품에 사용된 알루미늄 재료 ) 결합 하나의 조각으로 만들었다.[note title=”4″back]파인골드는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개인적 기억들을 상당히 강조한다. “나는 유년시절에 접한 텔레비전 기억, 내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내가 기억하고 혹은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미지와 소리 들에 관한 일종의 고고학적 연구 작업을 수행했다.” (Timothy Druckery, Iterations: The New Image,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1993, 164.)[/note]  

 

켄 파인골드, 〈유년시절/뜨겁고 차가운 전쟁(본성의 출현)〉, 1993.

 

고고학적 작품이라고 해서 항상 지나간 기술을 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대 기술을 미디어 고고학적 발굴의 장이자 영역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크리스틴 탬블린Christine Tamblyn그녀가 좋아한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과 기술She Loves It, She Loves It Not: Women and Technology(1993), 제임스 페트릴로James Petrillo시네마볼타Cinema Volta(1993), 노부히로 시바야마Nobuhiro Shibayama머이브릿지 바이오-몰프 백과사전Muybridge Bio-Morph Encyclopedia(1994) 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례다. 이 작품들은 기술에 관한 사적이고 시적인 반영, 역사적 재료, 문화적 담론의 혼합물을 참여자가 발굴하도록 제시한다.    

 

 

전시장 안의 타임머신

 

초창기 미디어 아트 예술가들은 무엇보다 미래로 시선을 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를 직시하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대체되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기술광의 노스탤지어가 원인인 것도 아니고, 제프 쿤스Jeff Koons의 ‘기성품’으로 구성된 습득 가전제품 작품에서 명확히 보이는 진부함이라는 포스트모던적 변모가 원인이 되었던 것도 아니다. 앞으로 명약관화하게 설명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시선 행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려는 시도이며, ‘포스트모던 조건’의 속성이자 일반적으로 시청각성 확산의 결과로 경계와 정의가 끊임없는 흐려지는 현상에 대응하려는 목적에서 과거와의 대화를 개시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미디어 고고학자의 시선은 과거로 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고부동하게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들은 상응과 단절의 지점을 찾기 위해 시간을 앞 뒤로 왔다갔다 옮겨다니며 기술문화적 형식들의 역사적 파노라마를 면밀한 시선으로 분석한다. 결국 이 시선은 현재, 궁극적으로는 미래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고고학적 예술작품은 타임머신이다. 하지만 그 작동의 방식은 H. G. 웰스보다는 베르그송이나 프루스트의 방식에 가깝다. 관람자는 시간여행에 참여하지만, 스톱워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것처럼 단순히 시간의 통로를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는 식은 아니다. 이 타임머신의 여행객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과거로 이루어진 훨씬 더 복잡한 영역을 항해한다. 여기서는 시간의 층들이 중첩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 개념은 단순히 선형적이기보다는 순환적이다. 이러한 타임머신들은 (영화관 같은) (대량) 운송 형태의 자동화나 원거리 조정 방식이 아니라, 개별적인 ‘수동적hand-driven’ 운송 장치 형태다. 오직 능동적인 관객만이 타임머신이 횡단하는 이러한 영역에 참여할 수 있다. 사물을 관습적으로 연대기적 질서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그/그녀의 사회적·문화적으로 규범화된 관측소라는 안전망으로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작품과의 소통의 관계 속에 잠재된 차원들을 탐험하기를 갈구하는 이들에게만 이 공간이 제대로 펼쳐진다.

 

 

실험실 겸 놀이터  

 

지금까지 나는 고고학적 미디어 아트의 ‘장르’에 관해 언급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되도록 중립적으로 개념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현상의 산만한 속성을 상대적으로 부각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선언문도 발표된 바 없으며, 고고학적 예술가 집단이 형성된 바도, ‘미디어 고고학적 미학’이라 할 만한 어떤 원칙도 정립된 바 없다. 고고학적 접근은 그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증가했음에도, 그 어떤 비평적 관심을 받아본 적조차 없다. 또한 거기엔 작가들마다 상이한 구석이 있다. 제프리 쇼, 토시오 이와이, 린 허시먼, 마이클 나이마크 등의 작가들은 미디어 고고학적 작업을 점차 발전시켜 왔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각자만의 특정한 미학적·이데올로기적 논점들을 오랜 시간 논리적으로 붙든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가-고고학자 모두 지난 시대의 미디어 장치들을 문화적 형식이자 문화적·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의미들의 담지체로 다룬다.[note title=”5″back]기술과 문화형식의 구분에 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할 것. Raymond Williams, Televis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Glasgow: Fontana, 1979 [1974]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론』, 박효숙 옮김, 현대미학사, 1996].[/note] 지금까지 나는 이러한 작가들의 접근을 모두 아우르기에 적절한 비유들을 떠올려 보았는데, 실험실 겸 놀이터, 철학적 도구 겸 장난감, 관측탑 겸 게임 장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비유들은 프로젝트의 복잡하고 가끔은 모순적이기도 한 본성을 강조한다.  

 

고고학적 예술작품은 발굴과 관찰과 반영이 일어나는 장을 구축한다. 이는 전시공간을 놀이터로서, 다시 말해 아이들의 놀이방이자 일종의 놀이공원으로 고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업과 놀이의 상호소통은 오락의 목적으로 고안되었지만, 문제가 되는 비판적 과업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그러했다. 린 허시먼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Room 안에 있는 미니어처 방과 같은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 ‘방’ 뒤쪽 벽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한 여자를 본 뒤 관객들이 갖는 인상이 단지 상업적인 핍쇼의 관음증적 즐거움으로 오인되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그러한 인상은 다분히 그러한 효과의 감쇠와 해체를 의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과 벌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지시적 숨바꼭질 게임은 이제 호소력이 없다.    

 

 

기술문화 안의 불안과 대결하기  

 

1990년대 미디어 아트에서 등장한 고고학적 접근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들이 있다. 테크놀로지 아트는 기존에 확립된 순수예술 내에서 여전히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다. 테크놀로지 아트의 역사는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은 여전히 신생 분야로, 침입자이자 낯선 분야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분야’에서 테크놀로지 아트의입지가 확고한 것도 아니다. ‘시그래프 아트 쇼Siggraph Art Show’ 같은 행사에서 테크놀로지 아트는 정기적으로 전시되지만, 이는 단지 또 다른 형태의 기발한 응용, 말하자면 어떤 고유한 미학적·문화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는 기술적 실증에  불과한 것으로 다루어질 우려가 있다.[note title=”6″back]1994년 플로리다 올란도에서 개최된 시그래프의 《엣지》 전시에서 예술가들이 그러한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해 예술가 단체는 강한 불만을 내보였고, 이는 시그아트 리스트(Sigart list)라는 미디어 아티스트가 직면한 문제를 위한 일종의 국제 토론 네트워크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예술계와 컴퓨터 영역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테크놀로지 아트의 입지에 대해서는 나의 글 「인터랙티브이지만, 예술이냐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Errki Huhtamo, “It is Interactive: but is it Art?”, Computer Graphics Visual Proceedings, Annual Conference Series, 1993, edited by Thomas E. Linehan, New York: The Associating for Computer Machinery, 1993, 133-135.[/note]  

 

이러한 의미에서, 고고학적 예술가들은 그들이 시도하는 것들의 뿌리를 찾으려 하며, 동시에 예술계에서의 위상을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환영과 미심쩍은 욕망을 판매하거나 ‘저장된’ 소리와 이미지로 즐거움을 주는 데 사용되는 기술들 또는 도박, 살인, 청소 등에 사용되어온 기술들을 가용하는 것을 보면, 대체로 이 고고학적 접근법의 뿌리는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고급문화 형식들의 일반적 규범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는 듯하다. 물론 미디어 고고학적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적 생존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어 그러한 것은 아님에도, 우리는 이러한 경향에서 고고학적 접근이 등장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미디어에 포섭된 사회에서 고전적인 고급문화는 소비주의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잃어버렸으며, 핀볼머신, 핍쇼, 혹은 코카콜라 자동판매기 등과 같은 대중문화의 기계장치들이 (물론 이미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불멸하게 되었지만) 현재에 정당한 토대를 제공하도록 고안된 가치 체계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팝 문화를 비꼬듯 기념하는 것은 제프 쿤스나 플럭서스 이후의 백남준과 같은 예술가들이 채택했던 방법이었다. 미디어 고고학적 예술가의 경우는 뭔가 다소 다르다. 기계문화의 잔해들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동시대 사회 속에서 기술이 행하는 실제 역할에 대한 불안 및 의구심과 뒤얽혀 있다.  

 

오늘날의 후기 산업사회에서 인터랙티브 기술은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홍보된다. ‘선택의 자유’, ‘사이버 섹스’,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 비행’ 등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들을 약속한다. 미디어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거의 기술과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현재의 기술이라는 선명한 구분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기약들 이면에는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의구심이 형성되고 있다. 만약 인터랙티브 개념이 기업 이해관계에 장악되어 거의 같은 기술을 포장만을 새롭게 디자인해 판매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디어 고고학적 예술가에게는 그 누구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뛰어난 감지 능력이 있다. 이들 중에 여성의 비중이 높은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기술로부터 배제되기도 했지만, 그 반대로 기계와 결속, 즉  혼종화(전화교환수, 타이피스트, ‘자동화된’ 가정주부 등으로서)되어온 역사를 떠올려보면 인터랙티브 기술이 여성에게 선사할 실제의 축복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사이버 공간에서의 ‘젠더 자유 지역’ 등과 같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인터랙티브 장치의 존재로 인해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어떤 질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완전한 오류다. 인터랙티브 기술은 특정한 응용과 구상으로 채워져야 하는 기회의 틀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고학적 표현양식을 갖고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활동이 특히나 중요하다. 이 예술가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과거의 인터랙티브 기술들을 발굴하고, 기술 그 자체로서의 인터랙티브와 문화형식으로서 인터랙티브의 차이를 숙고하면서, 인터랙티브의 속성에 관한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 사이를 순환적으로 움직이면서 새롭고, 다행히도 더 다재다능한 인터페이스와 그것의 응용방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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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의도와 달리 틀리게 번역된 부분을 집어준 미디어 아티스트 지하루 교수(OCAD University, Canada)와 번역투 문장을 바로잡아준 ‘호랑이의 도약’ 운영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rkki Huhtamo, “Resurrecting the Technological Past: An Introduction to the Archeology of Media Art,” InterCommunication No. 14, 1995.
정찬철
영화·미디어 연구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포스트시네마, 디지털 시각효과(VFX)와 3D 등의 영화기술, 초기영화 등에 관한 논문과 글과 책을 발표했다. 미디어 고고학의 관점에 기반해 영화 기술과 예술이 비선형적이고 쌍방향으로 연합하는  ‘영화ⅹ기술ⅹ예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