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수행성
번역 허호정

퍼포먼스와 바디 아트의 역사에서 두 개의 친숙한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하나는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슛(Shoot)>(1971)으로, 갤러리를 배경으로 작가가 그의 친구에게 자신을 쏘도록 한 악명 높은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브 클랭(Yves Klein)의 유명한 <허공으로 뛰어들기(Leap into the Void)>(1960)로, 사진은 작가가 2층 건물의 창 밖 아래 도로 쪽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 이미지는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note title=”1″back]이 글에서 주요 논의 대상인 ‘documentation’은 국문 번역에서 ‘기록’ 정도로 순화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그 위상을 연극적인(theatrical) 차원에서 접근하며, 이미 개념적으로 ‘record’와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번역어를 고민해야 했다. 따라서 ‘record’를 ‘기록’으로 번역하는 한편, ‘documentation’은 그대로 음차하여 ‘도큐멘테이션’으로 번역한다. 단, 그것의 동사형인 ‘document’의 경우 문맥상 큰 오해의 소지가 없는 한 ‘기록하다’를 따르고, 퍼포먼스를 기록한 결과물을 가리키는 명사 ‘documentation’과 ‘documents’는 모두 도큐멘테이션으로 통일했다.(역자 주) [/note]의 한 예시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두 번째는 어떤가? 버든은 <슛>을 찍으며 실제로 자기 팔에 총상을 입혔지만, 클랭은 무방비 상태에서 창 밖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사진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퍼포먼스를 하여 바로 그 동일한 이미지의 도큐멘테이션을 남겼다. 하나는 “실제” 일어난 퍼포먼스를 기록한 것인 한편,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이라는 개념과 이들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하는 차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제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 방향을 돌려볼까 한다. 

 

크리스 버든, , 1971
크리스 버든, <슛>, 1971

 

분석을 시작하며 나는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이 ‘다큐멘터리적인(documentary) 것’과 ‘연극적(theatrical)인 것’ 두 가지 범주를 아울러 이해되어 왔음을 주장한다. 다큐멘터리적인 것의 범주는 퍼포먼스 아트와 도큐멘테이션 사이의 관계를 고안해 온 전통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즉, 도큐멘테이션이 퍼포먼스를 재구축할 수 있게 하는 기록(record)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시 오델(Kathy O’Dell)이 지적하듯 재건이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기 마련이지만[note title=”2″back]Kathy O’Dell, “Displacing the Haptic: Performance Art, the Photographic Document, and the 1970s.” Performance Research 2, 1 (1997): 73-74. [/note]), 동시에 그 퍼포먼스가 실제로 일어났던 것임을 증명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퍼포먼스와 도큐먼테이션 사이의 연관은 존재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선행하는 사건과 함께 도큐먼테이션은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때 버든의 퍼포먼스 도큐먼테이션은, 1960년대 70년대의 고전적인 퍼포먼스와 바디 아트를 기록한 대부분의 도큐먼테이션과 함께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당연시되는 데 반해, 이 첫 번째 범주에서 퍼포먼스와 도큐먼트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전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퍼포먼스의 현실에 접근하는 도구로 보는 관념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돈 슬래터(Don Slater)의 견해에 주석을 단 헬렌 길버트(Helen Gilbert)가 설명하듯 사진에 관한 일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파생한다. “사진은 그 사소한 리얼리즘을 통하여 바르트가 ‘코드 없는 메시지’라는 말로 완벽히 예시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정확한 상응이라는 일루젼(illusion)을 만들어낸다. ‘재현적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실제 세계와 연결된 사진의 감각은, 사진을 현실 세계의 조각으로 그리고 현실 세계의 대체물로 여기도록 한다.’”[note title=”3″back]Helen Gilbert, “Bodies in Focus: Photography and Performativity in Post-Colonial Theatre.” Textual Studies in Canada 10-11 (1998): 18.[/note] (사진이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체한다는 슬래터의 개념과 연관해서, 도큐멘테이션에 기반한 퍼포먼스의 재연이 근본적으로 퍼포먼스를 실제 재생산하는 것인지, 혹은 도큐멘테이션을 수행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가난한 극장 Poor Theatre>(2004)은, 우스터 그룹(Wooster Group)이 저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 그리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가 <일곱 개의 쉬운 작품들 Seven Easy Pieces>(2005)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를 재연한 것을 다시 선보인 것이다. 이 최근의 사례들은 위에서 언급한 까다로운 질문과 분명히 연동한다.

 

이브 클랭, , 1960
이브 클랭, <허공으로 뛰어들기>, 1960

 

존 에릭슨(Jon Erickson)은 고전적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에서 흑백사진을 사용하는 것이 사진의 현실 효과를 강화한다고 본다. (에릭슨에게, 컬러 사진은 사진을 그 자체 사물로서 더욱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흑백 사진에는 단순한 유용성의 감각이 있고, 이는 맥락∙ 공간∙ 행위∙ 관념들과 연관되는 퍼포먼스에 대해 도큐멘테이션은 오로지 보충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리킨다. 결국, 사진은 기본적으로 실제를 상기시키는 것일 뿐이다.”[note title=”4″back]Jon Erickson, “Goldberg Variations: Performing Distinctions.” PAJ: A Journal of Performance and Art 21, 3 (1999): 98. [/note] 아멜리아 존스(Amelia Jones)는 실연(live performance)의 존재론적 우위에 도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사진을 퍼포먼스에 대한 보충물로 보는 관점을 재고한다. 그리고 “퍼포먼스 혹은 바디 아트 및 사진 도큐먼테이션의… 상호 보충성 (바디 아트는 그 사건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진은 그 지시성에 관한 하나의 존재론적 ‘닻’으로서 바디 아트에서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note title=”5″back]Amelia Jones, “‘Presence’ in Absentia: Experiencing Performance as Documentation.” Art Journal 56, 4 (1997): 16. [/note]을 섬세하게 분석한다. 퍼포먼스와 도큐먼테이션의 상호 의존성을 제안하는 이러한 정식은 (퍼포먼스는 그것이 기록되는 데 대해서만 원본이다.) 원 사건으로서 퍼포먼스의 위상에 의문을 던지는 한편, 사진의 위상을 퍼포먼스의 현실에 대한 접근 지점(access point)으로서도 확인한다. 이는 결코 실물로 보지 못했던 (나 역시 완전히 동감하는 상황의) 퍼포먼스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존스 스스로 취해야만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연극적인 것의 범주로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로즈 세라비(Rrose Selavy)로서 찍은 자화상 사진으로부터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분장을 한 사진들과, 매튜 바니(Matthew Barney)의 크래마스터(Cremaster) 영화를 아울러, “수행된 사진”이라 불리는 다수의 작품들을 다루고자 한다. 다른 최근의 사례들은 그레고리 크레드슨(Gregory Crewdson)과 니키 리(Nikki Lee)의 작업을 포함한다. 이들의 경우에 퍼포먼스는 오로지 사진 찍히거나 영상으로 촬영되기 위해서 무대에 올려질 뿐, 관객에게 선보이는 자율적 사건으로서 어떤 유의미한 선(先) 존재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도큐먼테이션의 (시각적 혹은 시청각적) 공간은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클랭의 <뛰어들기>는 이런 범주에 속한다. 클랭은 뛰어내릴 때 (“[스스로] 기대한 초월적 얼굴 표현을 얻기 위해” 여러 번 점프를 시도하면서) “친한 친구들과 사진가들”을 제외한 어떤 관중도 마련하지 않았으며,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은 보호망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사실상 암실에서 두 개의 다른 샷을 조합한 것이었다.[note title=”6″back]Amelia Jones, “Dis/playing the Phallus: Male Artists Perform their Masculinities,” Art History 17, 4 (1994): 554. 존스는 클랭이 이미지를 두 가지 버전으로 발행함으로써 사실상 연극성을 노출시켰다고 지적한다. 이미지의 한 가지 버전에는 길 위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없는데 이로써 작가는 말없이 이미지의 구조화된 본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note] (이때 그의 친구들이 퍼포먼스 혹은 사진 촬영의 목격자인지 아닌 지가 열린 질문으로 남는다. 어느 쪽이든 친구들은 사진에 나타난 그 사건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사진 그 자체 외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기록하게 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다큐멘터리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의 범주는 상호 배타적이다. 만약 누군가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어떤 사건에 퍼포먼스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 사건이 도큐멘테이션에 대해 선행하는 자율적 존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범주에 해당하는 작품들의 기저에 있는 사건은 결코 퍼포먼스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미지들은 도큐먼테이션이 될 수 없고, 다만 다른 것, 다른 종류의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수행된 사진”이라는 말은 이러한 작품이 퍼포먼스보다는 사진의 한 종류로 이해되기를 제안한다.) 에릭슨은 이러한 입장에 대해 (사실상 수용하지는 않고) 응수한다. 그는 로즈리 골드버그(Roselee Goldberg)의 저서 『퍼포먼스: 1960년 이후의 실황 예술 Performance: Live Art Since 1960』에 관한 리뷰를 쓰면서 질문한다. “신디 셔면의 ‘수행된 사진’, 그리고 비디오, 영화 스틸 (매튜 바니의 <크래마스터>), 심지어 로버트 롱고(Robert Longo)의 드로잉과 조각을 포함하면서 [이 책은] 자기 전제를 져버리려는 것인가?”[note title=”7″back]Erickson, 99. [/note] 언급된 사례들이 모두 이런 저런 종류의 ‘기록’일 뿐이라면, “실황” 예술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그러나 상이한 관점에서 보면 두 범주는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두 번째 범주의 연극적인 이미지에서 카메라 외에 어떤 중요한 관객이 없다는 것, 아예 관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퍼포먼스는 실제 공간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 범주 모두에서 이미지는 카메라를 위해 무대 올려진다는 것 역시 똑같이 사실이다. 퍼포먼스와 바디 아트에 있어서 초기의 도큐멘테이션은 그리 신중하게 계획되거나 고안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있던 작가들은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릴 때, 즉각적으로 현전하는 관객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카메라를 신경 쓸 필요를 곧 완전히 의식하게 되었다. 작가들은 존스가 “문화의 영역 안에서 상징적 지위를 얻기 위한”[note title=”8″back]Jones, “‘Presence,’”13. [/note] 것이라 설명한 퍼포먼스의 도큐멘테이션에 대한 의존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례로, 버든은 “각각의 퍼포먼스를 신중히 무대에 올렸고, 그것을 사진 찍고 때로 영상을 남겼다. 그리고 전시에 선보이거나 카탈로그에 싣기 위해서, 각각의 사건에 대해 보통 하나 혹은 두 개의 사진을 골랐다. … 이런 식으로 버든은 꼼꼼하게 조직된 텍스트와 시각적 재현물을 통하여 후대에 남길 자기 자신을 생산했다.”[note title=”9″back]Jones, “Dis/playing the Phallus,” 568. [/note] 다른 예를 들자면, 유럽의 바디 아티스트 지나 페인(Gina Pane)은 다음과 같은 용어로 자신의 작업에서 사진의 역할을 묘사했다. “사진은 관객이 나중에 보게 될 작업을 만든다. 이때 사진가는 외부적 요건이 아니며, 행위의 공간 안에 단 몇 센티미터만 떨어져서 나와 함께 위치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사진가는 [관객의] 시야를 가로막기도 한다!”[note title=”10″back]Quoted in O’Dell, 76-77. [/note]

 

버든과 페인의 경우처럼 전형적인 퍼포먼스 및 바디 아트 작업에서, 퍼포먼스는 도큐멘테이션이 다만 원 사건을 보충하고 그에 접근하도록 할 뿐인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대신,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하는 만큼, 적어도 그만큼은 도큐멘테이션을 위해 무대에 올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페인이 관찰한 바, 도큐멘테이션의 과정은 때로 관객이 퍼포먼스를 인지하는 데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어떤 기록된 작품도 오로지 퍼포먼스를 그 자체의 목적으로 하여 상연된다고 할 수가 없다. 퍼포먼스는 항상 도큐멘테이션이라는 최종재의 원료라는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도큐멘테이션을 통해 유통되는 퍼포먼스는 종국에 도큐먼테이션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는, 사진이 스스로 기록하는 어떤 현실을 대체할 것이라는 슬래터의 주장 (또는, “퍼포먼스 아트는 그 재현물에 사실상 등가이다.”[note title=”11″back]O’Dell, 77. [/note] 라고 말하는 오델O’Dell의 견해)을 정당화한다. 결국,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두 범주, 다큐멘터리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 사이에서 단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전자에서 사건이란 온전히 현존하는 관객을 위해 상연되는 것이며, 도큐멘테이션은 그 자체에 선행하는 진실된 사건에 대해 이차적 ∙ 보충적인 기록이라고 가정된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이러한 믿음은 퍼포먼스가 만들어지고 기록되는 실제 상황들과 전혀 무관하다.

 

해당 문제에 관해 결론을 도출하기 전에, 나는 두 범주를 섞어 놓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려 한다. 비토 아콘치(Vito Acconci)의 퍼포먼스, <포토-피스 Photo-Piece>(1969)[note title=”12″back]1969년에 뉴욕의 그린위치 가에서 진행된 비토 아콘치의 해당 작업은, 사진과 텍스트 등의 도큐멘테이션 형식으로 남긴 일련의 연작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논고에서 저자는 <포토-피스>라고 부른 이 작업은 아콘치의 웹 페이지에 의하면 제목은 <블링크Blinks>이며, 장르상으로 포토-액티비티(photo-activity)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http://www.vitoacconci.org/portfolio_page/blinks-1969/ [/note]는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의 관계에 관한 신랄한 질문들을 제기한다.(역자 주) [note title=”13″back]누군가는 아콘치의 작업을 퍼포먼스로 분류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이 시기 아콘치의 작업이 자주 개념 미술이라는 항목 하에 범주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프로세스 아트로 고려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작업을 퍼포먼스로 보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오델은 어떠한 코멘트 없이 아콘치를 퍼포먼스 아트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프레이저 워드는 (각주16 참고)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 아트라는 두 범주를 뚜렷이 구분하기 보다는, 그 둘이 밀접하게 엮이고 지속적인 교류 속에 서로 관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note] 퍼포먼스에 관한 아콘치의 설명은 간단하다. “카메라를 들고, 나에게서 좀 떨어져 사진 찍을 준비를 한다. 도시의 거리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걸으면서, 눈은 깜빡이지 않도록 한다.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작업의 도큐멘테이션은, 꽤 한가한 편인 뉴욕 시의 그린위치 가(Greenwich Street)에서 위의 지시문에 따라 찍은 12개의 흑백 사진 그리드로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아콘치의 많은 퍼포먼스들과 마찬가지로 <포토-피스>는 실패가 예견된 것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아콘치가 눈을 깜빡이지 않고 길을 걷는 것은 결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note title=”14″back]아콘치의 예견된 실패에 대한 간단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Philip Auslander, “Vito Acconci and the Politics of the Body in Postmodern Performance.” In From Acting to Performance. London: Routledge, 1997, 89-97. [/note] <포토-피스>의 조건이 불가능한 것이었던 이유는, 그가 걷는 동안 자율신경 기능을 (아마 주변환경도 함께) 과민하게 의식해야 함에 따라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높은 수준의 자각(self-consciousness)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세스 프라이스(Seth Price)가 내게 말했듯, 아콘치는 나아가 무(無)에서 예술을 창조한 셈인데, 말하자면 그는 ‘내용 없는’ 예술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다큐멘터리적인 이미지와 연극적인 이미지, 두 범주 사이의 이미 불안정한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편에서, 아콘치가 생산한 사진들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전통적인 기능을 작동시킨다. 사진들은 그가 작업을 실제로 수행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퍼포먼스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진들이 아콘치가 퍼포먼스를 행하는 모습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 기능을 작동시키지는 않는다. 즉, 작업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동안 찍은, 아콘치에 의한 사진이며, 퍼포먼스를 하는 아콘치 사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토-피스>의 도큐멘테이션으로 제시된 그 사진들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전통적인 존재론에 가담한다. 작품의 행위가 사진 찍기를 포함하고, 사진의 존재는 아콘치가 스스로의 지시사항을 수행했다는 첫 번째 증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들이 (퍼포먼스 사진이기보다는) 퍼포먼스로서 (혹은 퍼포먼스에 의해) 생산되었고, 따라서 퍼포먼스와 도큐먼트 사이의 존재론적 연관이 이 경우에는 유달리 긴밀해 보인다.

 

비토 아콘치,  , 1969
비토 아콘치, <포토-피스>, 1969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아콘치의 퍼포먼스는 또한 그 자신의 도큐멘테이션 외에 어떤 형식으로도 관객에게도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연극적인 작업이다. 사진에서는 퍼포먼스가 행해진 도로가 관객이 될 수 있는 행인 하나 없이 황량한 곳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행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본 것은 한 남자가 걷고 사진을 찍고 있는 상황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때 행인들은 그들이 어떤 퍼포먼스를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조차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퍼포먼스로서 아콘치의 퍼포먼스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도큐멘테이션을 통할 때이기에, 이 사진들은 다큐멘터리적이기보다는 연극적인 것이다.

 

아콘치의 <포토-피스>는 도큐멘테이션 자체의 수행성이라는 중심 문제를 겨냥한다. 나는 이 용어를 오스틴(J.L. Austin)이 제시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언어에 관하여 오스틴은 발화가 그 자체로 행위를 구성하는 (예를 들어, 결혼식에서 “네, 맹세합니다. I  do.”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경우의) 진술을 수행적이라고 불렀다. 수행적 발화와 진술적 발화를 구별하면서,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를] 말하는 것은, 발화가 곧 행위가 되도록 말해져야만 하는 무엇을 하는 것을 묘사하기-가 아니며, 내가 말하기를 하고 있음을 진술하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수행적 발화에서 말하기는 하는 것(to do it)이다.”[note title=”15″back]J.L. Austin, “Lecture I 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In Performance: Critical Concepts in Literary and Cultural Studies, volume 1, edited by Philip Auslander. London: Routledge, 2003, 93. [/note] 만약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 이미지를 언어적 서술로 분석한다고 하면, 전통적인 관점은 도큐멘테이션을 퍼포먼스에 관해 묘사하거나, 일어났던 일을 보고하는 진술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을 진술이 아닌 수행적 표현과 유사하게 볼 것을 제안한다. 달리 말하자면, 퍼포먼스로서의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사건을 구성한다. 도큐멘테이션은 어떤 자율적 퍼포먼스를 설명하고 그것이 일어났음을 보고하는 이미지/진술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도큐멘테이션은 사건을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생산하고, 프레이저 워드(Frazer Ward)가 말하듯 퍼포머를 “작가(artist)”로 만든다.[note title=”16″back]Frazer Ward, “Some Relations between Conceptual and Performance Art.” Art Journal 56, 4 (1997): 40. [/note]

 

아마도 이 대목은 리차드 바우만(Richard Bauman)이 정의한 직접적인 개념과 연관 지어 볼 때 더 명확해질것이다:


“간단히 말해, 퍼포먼스는 의사 전달의 한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퍼포머는 관객에게 “거기, 나를 봐! 나 시작한다! 내가 얼마나 노련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봐!” 라는 식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퍼포먼스는 의사소통의 기교(communicative virtuosity)를 선보이는 데 있어, 관객의 책임(responsibility to an audience)을 상정한다고 할 수 있다. […] 퍼포먼스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했을 때, 표현 그 자체의 행위는 전시되는 것(display)으로 여겨진다. 이때 퍼포먼스는 물화되고, 어느 정도 맥락적인 주변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에 따라 관객은 퍼포먼스 자체의 내적 자질 면에서나 이후의 감응 측면 모두에서, 해석적이고 평가적으로 퍼포먼스를 검토하게 된다. […] 퍼포머가 퍼포먼스를 규정하는  – 즉, “나 시작한다”라는 메타 소통적 메시지를 보내는 – 구체적인 기호학적 도구는 장소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관중의 협업적 참여는 상호 소통을 성취하는 퍼포먼스에 필수 구성요소가 된다.”[note title=”17″back]Richard Bauman, A World of Others’ Words: Cross-Cultural Perspectives on Intertextuality. Malden: Blackwell, 2004, 9. [/note]

 

나는 앞서 아콘치의 작업에서 “바디 아트의 비평적 기준”[note title=”18″back]Auslander, 96. [/note] 을 구체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살펴본 것 외에는, 기술(skill) 및 의사소통의 기교의 문제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퍼포먼스와 바디 아트에 적용된다고 보지 않는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부분의 퍼포먼스 및 바디 아트, 그리고 아콘치의 작업과 같은 종류의 퍼포먼스에서 기교는, 퍼포머가 퍼포먼스 기술을 숙달한 정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대신, 그것은 개념과 수행의 원본성, 그리고 대담성(audacity)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럼에도 바우만이 위 인용에서 퍼포먼스로서 사건을 규정하는 것(the framing of an event)과, 관객의 책임이라 상정한 개념들은 <포토-피스>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작업에는 “실황” 퍼포먼스를 위한 관객이 없었고, 사건은 우연이라 할지라도 있을 수 있는 어떤 관객을 위해 짜인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아콘치는 관객에게 자신이 단순히 걷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하는 중이라 말할 어떤 메타-의사전달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콘치의 행위가 “전시되는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고 “맥락적인 주변환경으로부터 ….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은 오로지 도큐멘테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아콘치가 관객에게 책임을 넘긴다면 그것 역시 오로지 도큐먼트의 행위, 도큐멘테이션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러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제의 관객이 도큐멘테이션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작가의 행위를 지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 관객은 그린위치 가에서 걷고 사진 찍는 작가를 우연히 봤을 지도 모르는 행인이 아니다. 이때의 관객은 다른 무엇도 아닌 도큐멘테이션를 통해 아콘치의 행위를 퍼포먼스로서 해석하고 평가한다.

 

나는 아콘치의 퍼포먼스가 특별한 경우이면서 동시에 보이는 만큼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서 제시한 연극적 범주의 모든 작품들은 <포토-피스>와 마찬가지로 퍼포먼스와 관계 맺고 있다. 그 모든 경우에, 작가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또 이미지로 제시된 행위들은 관객에게 오직 도큐멘테이션을 통해서만 유효한 퍼포먼스가 된다. 또, 작가가 전시된 행위를 퍼포먼스로서 규정하고 관객의 책임을 상정하는 것 역시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콘치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작가들이 책임을 부여한 관객은 도큐멘테이션의 관객이지 실연(live event)의 관객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적인 범주의 퍼포먼스 각각은 어느 정도에서는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왜냐하면 이 작업들은 일반적으로 이중 존재를 갖기 때문이다. 작업들은 갤러리 혹은 다른 경로로 현시됨으로써 퍼포먼스로 규정되는데, 이때 퍼포머가 책임을 부여한 1차 관객(initial audience)이 있기 마련이지만 역시 퍼포먼스를 오로지 도큐멘테이션으로만 경험하도록 상정된 2차 관객(secondary audience)도 있다. 그러나 일차 관객과 이차 관객 사이의 차이는 보기보다 크지 않다. 도큐멘테이션에 대해 1차 관객이 갖는 위상을 생각해보라.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관객의 현존 및 퍼포머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퍼포먼스의 핵심적 사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퍼포먼스 아트 도큐멘테이션의 전통은 다른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관객 자체를 예술 행위와 같은 수준의 구체성을 가지고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퍼포먼스 아트 도큐멘테이션의 목표는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은 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관객과 구체적인 퍼포머 모두를 구체적인 설정 속에서 동등하게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상호작용적 성취”로서 퍼포먼스를 대하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학자와 비평가들은 퍼포먼스의 특징을 알아내는 데 있어 그것을 실견한 목격담을 사용할 뿐, 관객이 퍼포먼스에 기여한 바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정한 관객이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특정한 퍼포먼스를 어떻게 인지하는 지를 논하거나, 그 퍼포먼스가 관객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논의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note title=”19″back]이와 같은 서술은 학제간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언급된 것일 뿐, 퍼포먼스 연구의 민족지적 방향이 미술사에 내재한 순수 조형적 전통에 비해 우월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note] 이러한 관점에서, 퍼포먼스 아트 도큐멘테이션은 사건을 포착하는 민족지적 전통이 아니라, 작품의 복제(reproduction)에 대한 순수 예술 전통에 편승한다.[note title=”20″back]퍼포먼스를 재창안(recreating)하는 것이라는 말은 대상의 재건(reconstruction)을 의미한다. 반면, 영어에서 재생(revival)이라는 용어는 존재하는 극(play)의 연극적 생산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세운다(rebuilding)는 의미이기보다는 유기적 실체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다(reawakening)는 것을 뜻한다. [/note]

 

나는 1차 관객이라는 현존이, 도큐멘테이션에 의해 삶을 지속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퍼포먼스에 어떠한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종류의 도큐멘테이션을 소비하는 우리의 평범한 고민은 상황 전체의 상호작용이 아닌 작가의 작품을 재창안하는(recreate)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크리스 버든의 <슛>에 대해 사실상 어떤 관객도 없었던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는 단지 텅 빈 갤러리에서 작업을 수행했고 그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밝혀진다고 해서 해당 퍼포먼스에 대한 우리의 지각, 그것을 해석하고 감상할 만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이해, 이 작업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평가 중 어떤 것도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1차 관객이라는 현존이 퍼포머에게 중요하다 할지라도 기록된 것으로서 퍼포먼스 자체에 대해서는 부수적이라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지나 페인의 설명이 충분히 분명하게 보여주었듯, 작가가 자기 퍼포먼스를 기록하기로 결심하면 그는 1차 관객이 아니라 다른 관객의 책임을 상정하는 것이며, 이는 1차 관객이라는 필요를 궁극적으로 제거하는 제스처가 된다. (페인의 경우, 1차 관객은 도큐멘테이션이라는 사태에 때문에 온전히 관객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결국, <슛>이나 다른 다수의 고전적 퍼포먼스 아트 작업에서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관객이 있었는 지와, 누군가 우연히 그린위치 가에서 아콘치를 보거나 변장한 자화상을 위해 신디 셔먼이 촬영하고 있는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되는 것 사이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같은 관점에서, 어떤 사건을 퍼포먼스 아트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관객의 1차적인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도큐멘테이션이라는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 퍼포먼스를 퍼포먼스로 규정하는 것 자체다.

 

신디 셔먼, , 1978
신디 셔먼, <무제 영화 스틸 Unitled Film Stills>, 1978

 

이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려 한다. 크리스 버든의 이미지가 실제로 일어났던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사실과 이브 클랭의 이미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이라는 개념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야기하는 차이는 무엇인가?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사건들을 퍼포먼스로 구성하는 역사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 거기엔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록된 퍼포먼스가 지니는 퍼포먼스로서의 정체성이 1차 관객의 현전에 의존하지 않으며, 물리적으로 현전하는 관객을 위해 상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종류의 것들을 퍼포먼스 아트의 범주로부터 배제할 수 없다는 난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퍼포먼스 아트가 그 도큐멘테이션의 수행성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나의 주장은 버든과 클랭의 작업 모두에 동일하게 옳다. 그 중 하나가 실황 중 관객 앞에서 벌어졌고 또 그럴 수 있었던 반면, 다른 하나는 그러지 않았고 또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 맥락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좀 더 실용주의적 언어로 풀어보자면, 즉, 이들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이미지가 지니는 도상성이나 예술/퍼포먼스 역사상 입지 측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해왔다.

 

어떤 사건을 퍼포먼스로 만드는 결정요인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퍼포먼스에서의 진정성(authenticity) 개념에 관심을 갖는다면 두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더 뚜렷해 보일 것이다. 나는 앞서 클랭의 사진을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입장을 다루었는데, 해당 사진은 우리가 사진을 통해 보는 대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입장은 궁극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다른 문화적 형식을 유비(類比)하자면, 클랭의 <뛰어들기>가 사진적 공간 안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에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주장은, 녹음실 안에서만 존재하는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에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 Sgt. Pee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음반은 비틀즈가 연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비틀즈는 사실상 우리가 듣는 바와 같이 연주하지 않았다.[note title=”21″back]매개된 사회에서는 녹음(recordings)이 음악의 기초적인 경험을 구성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녹음이야 말로 퍼포먼스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관해선 다음을 참조. Philip Auslander, “Performance Analysis and Popular Music: A Manifesto,” Contemporary Theatre Review 14.1 (2004): 5. 여기서 나는 퍼포먼스 아트의 문화적 상황이 팝 음악의 문화적 지형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관객은 퍼포먼스 아트이든 팝 음악이든 기본적으로 그것을 실황 공연이 아닌 도큐멘테이션을 통해 경험하며, 따라서 도큐멘테이션은 사실상 퍼포먼스가 된다. [/note]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이 이상한 주장을 고려해보려 한다. 틀림없이 비틀즈는 그 음악을 연주했다. 비틀즈에 의한 퍼포먼스가 아니라면,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이브 클랭은 뛰어들기를 수행했다.


특히 녹음된 음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의 관계를 보다 확장된 견지에서 던지는 질문 전체를 다루어 왔다. 이 논의에서 두 가지의 기본적인 범주는 다큐멘터리와 포노그래피(phonography)로, 내가 제시했던 범주 쌍과 유사하다. 다큐멘터리 녹음(documentary recordings)은 실제 음성 사건을 바로 포착한 것인 한편, 포노그래피는 실제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퍼포먼스 녹음을 생산하기 위해 음악의 “음향적 조작(sonic manipulation)”을 다루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기했던 미국의 철학자 리 브라운(Lee B. Brown)은 포토그래피가 “포노아트 작품(works of phonoart)”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때, “포토아트 작품”이란 새로운 범주의 “음악적 실체들”을 그 고유의 개념을 통해 전통적 음악 퍼포먼스로부터 구별되도록 정의한 작업을 일컫는다.[note title=”22″back]Lee B. Brown, “Phonography.” In Aesthetics: A Reader in Philosophy of the Arts, 2nd Edition, edited by David Godblatt and Lee B. Brown. Upper Saddle River, NJ: Pearson-Prentice Hall, 2005, 214, 216. [/note]

 

이와 같은 주장은 내가 이미 거부한 입장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브라운은 앞서 논의한 수행된 사진의 청각적 등가라 할 수 있는 포노그래피가 퍼포먼스의 형식이 아닌 음악적 사건의 새로운 종류를 구성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포노아트는 음악적 퍼포먼스의 한 종류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의 공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종류다. 그럼에도 브라운은 중요한 지점을 알려준다. 사실상 다큐멘터리와 포노그래피 간의 현상학적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이다. “주어진 결과물이 포노아트 작업의 하나로 이해될 것인지, 퍼포먼스의 명백한 기록물로 간주될 것인지” 가 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브라운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죽기 몇 년 전에 녹음한 ‘듀엣’ 앨범”을 예로 든다. 시나트라가 그 파트너와 사실상 함께 노래하지 않았음에도 “그 노래는 실제로 녹음된 것처럼(documentary) 들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두 가수의 인상은 순전한 일루젼”[note title=”23″back]Brown, 216. [/note] 을 남긴다.

 

클랭의 사진에 관해서도 정확히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진에서 클랭이 보호장비 없이 창문으로 내리는 장면은, 순전한 일루젼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적인 수준에서, 특정한 퍼포먼스 이미지가 다큐멘터리적인지 연극적인지를 결정할 어떤 본질적인 방도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그 방도를 안다 하더라도, 그 앎이 만드는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실제로 듀엣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트라가 파트너와 노래하는 것을 듣는 기쁨은 박탈되는가? 마찬가지로, 허공에 자신을 내던지는 클랭의 이미지에 관한 감상은 그가 안전망을 사진에서 지워버렸다는 사실만으로 훼손되고 마는가? 퍼포먼스를 행하는 그녀의 신체를 직접적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광대한 범주의 캐릭터와 이미지를 구현하는 셔먼의 모습은 감상될 수 없는 것일까?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을 관조할 때 여전히 진정성의 범주에 머물기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도큐멘테이션으로는 알 수 없는 저변의 상황, 그곳에 놓인 진정성을 믿으려는 것인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브라운은 고민해볼 만한 또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핵심적 관계는 도큐먼트와 퍼포먼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큐먼트와 그 관객 사이에 있다는 점이다. 아마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진정성은 원 사건이 아닌, 도큐멘테이션을 보는 사람과 맺는 관계에 머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존재론적인 것보다는 현상학적인 것이다. 시나트라가 실제 만나지 않은 가수와 듀엣을 부르는 것을 듣고 누군가 기뻐하듯, 어떤 누군가는 클랭의 허공에 뛰어들기를 보면서 혹은 버든이 그 자신을 쏘도록 허락한 상황을 관조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쾌는 도큐멘테이션으로부터 유효한 것이고, 따라서 어떤 관객이 그 원본 사건을 목격했는지 여부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더 급진적으로는, 이때의 쾌가 심지어 해당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 지 여하에 기대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작품들의 현존, 힘, 진정성을 감각하게 되는 것은, 도큐멘테이션을 과거 사건을 지시하는 접근 지점으로서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도큐멘테이션 그 자체를 한 작가의 미적인 기획 혹은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퍼포먼스로, 우리 스스로가 그를 위해 현존하는 관객이 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인식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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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고는 2005년 1월 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루드비히 재단 현대미술관, MUMOK에서 있었던 “행위 이후: 퍼포먼스 아트의 (재)현 After the Act: The (Re)Presentation of Performance Art”이라는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2006년에 개정 및 확장되어 『행위 이후: 퍼포먼스 아트의 (재)현 Die (Re)Präsentation der Performancekunst/ The (Re)Presentation of Performance Art』에 영어와 독어로 수록, 출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