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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처
번역 이주연, 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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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셔먼, 〈무제Untitled〉, 1978

 

픽처Pictures》는 내가 1977년 가을 트로이 브라운턱, 잭 골드스타인, 셰리 레빈, 로버트 롱고, 필립 스미스의 작업을 가지고 아티스츠 스페이스Artists Space를 위해 기획한 전시 제목이었다.[note title=”1″back]Pictures, New York, Committee for the Visual Arts, 1977. 이후 이 전시는 오벌린 소재 앨런 미술관Allen Art Museum, Oberlin, 로스앤젤레스 동시대미술 연구소Los Angeles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불더 소재 콜로라도대학교 미술관University of Colorado Museum, Boulder를 순회했다. 아티스츠 스페이스의 감독인 헬렌 위너Helene Winer에게 세 가지 점에서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녀는 나를 아티스츠 스페이스 전시를 조직하는 데 초빙해줌으로써 스튜디오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광범위한 작업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내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고 여기게 된 작업 일반이 나아간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었고, 특히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 전시가 없었더라면 대단히 의미심장한데도 공적인 차원으로 가시화되지 못했을 일군의 젊은 미술가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데 헌신했다.[/note] 이 전시를 위해 픽처라는 단어를 선택하면서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에는 이들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유지하고 있는 애매함이라는 중요한 측면도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게 된 것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이 새로운 작업은 특정 매체에 한정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작업은 사진, 영화, 퍼포먼스를 회화, 드로잉, 조각 같은 전통적인 방식과 더불어 활용했다. 픽처는 일상의 대화에서 사용될 때도 의미가 딱 정해져 있지 않다. 픽처 북에 담긴 것은 드로잉일 수도 사진일 수도 있고, 흔한 말로는 회화, 드로잉, 판화가 그냥 픽처라고 불릴 때도 많은 것이다. 나의 목적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픽처 동사형인데, 이때 픽처는 미학적 오브제의 생산과 더불어 정신적 과정도 가리킬 수 있다.

 

이어지는 에세이는 《픽처》의 도록에 실린 글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쟁점에 중점을 두며, 본래 전시에 포함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미술가에게로 암암리에 확장된 미학적 현상을 다룬다. 사실 이런 작업은 새롭고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여기에서 논의하고 묘사하는 사례는 매우 적다. 그럼에도, 내가 개괄하는 것이 현재의 젊은 미술가 세대 혹은 적어도 급진적 혁신에 전념하고 있는 일군의 미술가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감수성이라는 말은 실로 해도 무방한 것 같다.

 

 

미술과 환영, 환영과 미술
당신은 정말로 여기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미술일 뿐인가?
나는 정말로 여기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미술일 뿐인가?
– 로리 앤더슨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미니멀 조각을 공격한 1967년의 유명한 글에서, 우리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미술, 즉 모더니즘 추상 회화와 조각이라는 미술의 종말을 예견했다. 그는 “연극의 조건에 접근하면 미술은 타락한다”고 경고했는데, 프리드의 주장에 따르면 연극은 “예술들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note title=”2″back]Michael Fried, “Art and Objecthood,” Artforum, V. 10 (Summer 1967), 21;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 ed. Battcock, New York, E.P. Dutton, 1968, 116-47에 재수록. 이하 프리드를 인용한 모든 부분은 이 글에서 온 것이다. 모든 강조는 프리드의 것이다.[/note] 그런데 지난 십 년간 우리는 모더니즘 전통과의 급진적 단절을 목격했는데, 실로 그것은 정확히 ‘연극적인’ 것에 몰두한 결과였다. 70년대를 통틀어 가장 진지하게 우리의 주목을 끌었던 작품은 개별 예술들 사이 혹은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매체이 범주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탐구가 모더니즘이라는 기획 자체를 구성했다의 완전성integrity은 흩어져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note title=”3″back]이는 오늘날 생산되는 미술 중 매체의 완전성을 따라 범주화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런 생산은 전적으로 아카데미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소위 패턴 회화라고 하는 것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는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양식으로, 하나의 양식명으로 인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비평도 발생시켰으며, 그리고 가장 최근에 열린 휘트니 미술관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어엿이 한 선정 범주를 구성했다.[/note] 게다가, 만일 우리가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는 (…) 오직 각각의 예술들 속에서만 의미가 있거나,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는 프리드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그 경우 우리는 미술 또한 존재론적 범주로서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고 상정해야 할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너무나 많은 미학적 활동들인데, 그 활동들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활력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더 이상 프리드가 그랬던 것처럼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의 완전성이 산산조각난 사태를 안타까워하거나 되돌리고자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미학적 활동들은 무엇인가? 단순히 ‘화가’와 ‘조각가’가 점점 더 의지하게 된 매체들의 목록영화,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을 열거하는 것으로는 이 활동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한 매체의 관습으로부터 다른 매체의 관습으로 이동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 년쯤 전에도 많은 미술가가 매체를 바꾸거나이를테면 조각에서 영화로(세라, 모리스 등) 혹은 무용에서 영화로(레이너)혹은 한 매체를 다른 매체로 일부러 ‘변질’시키거나예를 들어 사진의 형식으로 조각 작품을 제시(스미스슨, 롱)혹은 작품에 대한 모든 물질적 표명을 철회하거나(배리, 와이너) 하는 작업을 쉽사리 해냈는데, 이를 보면 매체의 실제 특징 자체만 가지고는 더 이상 우리가 미술가의 활동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에서 프리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요소, 즉 그가 미니멀리즘의 연극성을 구성한다고 보았던 것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 있다는 미니멀리즘의 “비뚤어진” 위치뿐만 아니라[note title=”4″back]프리드는 도널드 저드가 그의 글 “Specific Objects,” Arts Yearbook, 8(1964), 74-82에서 제시한 “최근 몇 년간 가장 새로운 작품은 회화도 조각도 아니다”라는 주장을 언급한다.[/note], 미니멀리즘이 “시간더 정확히는, 경험의 지속─에 몰두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프리드는 시간성을 “연극적인 것의 전형”으로 여겼고, 그렇기에 모더니즘 추상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점에서 프리드의 두려움은 또한 근거가 확실한 것이기도 했다. 미니멀 조각이 경험되는 방식에 시간성이 암시되어 있었다면, 그 뒤를 이은 많은 미술에서는 시간성이 완전히 명시사실 유일하게 가능한 경험의 방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70년대를 대표하게 된 방식은 퍼포먼스퍼포먼스 미술이라고 불리는 협소하게 정의된 행위뿐만 아니라, 미술가 혹은 관람자 혹은 양자 모두에 의해 상황 속에서 그리고 지속되는 동안 구성되는 모든 작품을 말한다였다. 예를 들어, 피터 캠퍼스Peter Campus, 댄 그레이엄Dan Graham,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몇몇 비디오 설치와 좀 더 최근에 나온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사운드 설치는 관람자가 반드시 현존presence해야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현존의 기입이 의미를 확립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둔다.[note title=”5″back]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최근에 낸 여러 에세이, 특히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October, 1 (Spring, 1976)과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Parts 1 and 2, October, 3 (Spring 1977) and 4 (Fall  1977)에서 이 쟁점에 대해 논했다.[/note] 프리드가 미술에 요구한 것은 그가 “현재성presentness”이라고 부르는, “매순간 작품이 그 자체로 온전히 현현하는” 초월적 조건(그는 그것을 “은총”의 상태라고 언급한다)이었다. 프리드는 이 조건이 그가 미니멀리즘에서 작용하는 것을 본 감수성의 결과로 대체될까봐 두려워했는데, 실제로 그 조건은 연극의 필수요소인 현존으로 대체되었다.[note title=”6″back][옮긴이] 현재성과 현존(성)은 마이클 프리드가 「미술과 사물성 Art and Objecthood」에서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차이를 대조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다. 현재성은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초월적 시간성, 즉 “영원한 지속적 현재에 존재하면서 실로 그런 현재를 환기시키는 상태”라면, 현존(성)은 예술의 세계를 넘어 일상적 세계로 진출한 미니멀리즘 미술의 내재적 시간성, 즉 프리드가 예술의 부정인 연극에 속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시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는 관람자의 즉물적 실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현재성과 현존(성)은 1990년대 중엽 잘못된 번역으로 인한 오랜 혼란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note]

 

 

그의 앞에 무언가가 분명하게 현존했다.

– 헨리 제임스

 

 

이와 같이 즉물적 시간성과 연극의 현존에 기반을 둔 전략을 구사하는 미술은 요즘 뉴욕에서 전시를 하기 시작한 일군의 미술가들을 형성한 결정적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이 그들의 작업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는 즉각 눈에 띄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경험의 연극적 차원이 변형되었고, 또 상당히 뜻밖이게도 픽처 이미지에 다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미술가들은 대부분 미니멀리즘에서 생겨난 퍼포먼스 영역에서 수련기를 거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선순위를 뒤집기 시작하면서, 퍼포먼스에서 수행된 사건의 즉물적 상황과 지속을 가지고 타블로를 만들어냈는데, 이 타블로의 현존과 시간성은 완전히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퍼포먼스는 단지 픽처를 ‘상연하는’ 수많은 방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19452003)의 퍼포먼스는 예전에 퍼포먼스가 보통 그랬던 것처럼 미술가가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을, 재현여기서 재현은 선행하는 것을 다시-제시하는 것re-presentation이라고 생각되기보다 심지어는 현존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이해가능성이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 생각되었다이라고 파악될 만한 방식으로 거리를 두고 제시presentation한다.

 

2년 전 골드스타인은 제네바의 살르 파티노Salle Patino에서 두 펜싱 선수Two Fencers를 선보였다. 펜싱 장비를 착용한 두 사람이 관람자로부터 50피트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스포트라이트의 은은한 붉은 빛에 감싸인 채 할리우드의 검술 영화 사운드트랙에서 음악을 따 녹음한 소리와 함께 이 경기의 루틴을 상연했다.[note title=”7″back]골드스타인의 음반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의도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퍼포먼스의 사운드트랙으로 의도되기도 했는데, 기존의 녹음으로부터 얻은, 때로는 몇 초간의 소리에 지나지 않은 단편들을 짜깁기하여 만들어졌으며, 이는 그가 영화를 만들 때 스톡 푸티지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note] 그들은 마치 데자부 같고 멀리 있으며 유령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바로 그만큼이나 확실하게 현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드스타인의 이전 퍼포먼스에 나온 곡예사와 체조선수처럼, 이들도 관객의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곳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홀로그램의 생생하면서도 흐릿한 이미지처럼 가상적이고 비물질화되어 보였다. 한 펜싱 선수가 다른 선수를 이긴 것 같으면 그 후 스포트라이트는 꺼졌지만 퍼포먼스는 계속되었다. 관객들은 어둠 속에 남겨져 반복 재생되는 배경음악을 들으면서, 이미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 같은 펜싱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연상 경험에 의해 이렇게 이중화가 일어나면서, 기억을 작동시키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명백해진다. 즉, 이미지는 잊히고 대체되는 것이다. (『로제의 유의어 사전Roget’s Thesaurus』에 따르면, 기억에 대한 어린이의 정의는 “내가 잊어버리는 것”이다.)

 

골드스타인의 ‘배우’는 사전에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소에 하는 직업적 소임을 할 뿐인데, 골드스타인의 영화 독일 셰퍼드A German Shepherd에서 큐 사인에 맞춰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도록 훈련받은 할리우드의 독일 셰퍼드, 발끝으로 섰다가 내려오는 발레 슈즈A Ballet Shoe의 발레리나, 황금 로고 틀 안에서 고개를 쳐들며 울부짖는 메트로-골드윈-메이어Metro-Goldwyn-Mayer의 사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영화들은 약간만 차이가 있거나 어떤 차이도 없이 반복되는 단순하고 아주 짧은 순간의 몸짓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다 끝난 것 같은 행위를 약간 더 연장해서 보여주거나 한다. 예를 들어 발레 슈즈를 위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의 발이 발끝으로 선 자세로 보인다. 한 쌍의 손이 영화 프레임의 양 옆에서 들어와 신발의 리본을 푼다. 무용수는 발뒤꿈치를 내려놓는다. 영화 전체는 22초간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 몸짓이 완결된 것이라는 느낌은 파편화된 이미지(수많은 심리학적이고 비유적인 울림을 만드는)와 뭉텅 끝이 잘린 지속에 의해 경감된다. 전체가 파편에 불과한 것이다.

 

한 행동이 완결되었다는 인상(한 펜싱 선수가 다른 선수를 이긴다)은 반복의 구조와 결합(시합은 끊임없는 공격과 방어 중 하나다)되어 있어서, 어떤 행동도 실은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퍼포먼스 혹은 영화는 정지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점프The Jump라는 제목의 최근 영화가 좋은 예다. 점프는 루프로 상영되므로, 잠재적으로 끝없이 반복이 반복되는 작품이다. 다이빙 선수는 뛰어오르고 공중제비를 돌고 낙하하고 와해된다. 이것은 매우 빠르게 일어난 다음, 다시 일어나고, 세 번째에도 여전히 일어난다. 카메라가 세 다이빙 선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그들을 고도의 클로즈업 화면에 담는지라, 세 선수의 궤적은 뚜렷하게 분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선수는 불꽃놀이처럼 화면 중앙에서 폭발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잭 골드스타인, 〈점프〉, 1978 스틸 이미지.

 

점프는 고공 다이빙 장면을 찍은 슈퍼 8 필름 원본을 로토스코핑하고 이미지를 보석 같은 입자로 분해하는 특수 효과 렌즈를 통해 움직임을 촬영함으로써 만들어졌다.[note title=”8″back]로토스코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실사 촬영 장면을 베껴내는 기술이다.[/note] 그 결과로 얻은 이미지는 때로는 다이빙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로는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검은색 바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붉은 실루엣이다. 시간은 극도로 압축되면서도(상연시간은 26초이다) 극도로 팽창된다(루프로 상영되기에 끝없이 재생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경험되는 시간성은 실제로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고, 서사를 종합하는 시간 같은 것도 물론 아니다. 이 영화의 시간 유형은 예측anticipation이라는 심리적 유형이다. 우리는 매번 다이빙이 나타날 순간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기다리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다시 놀라게 하고 언제나 우리가 완전히 만족하기 전에 사라져 우리는 그 다음 등장을 기다리게 된다. 골드스타인의 영화, 퍼포먼스, 사진, 음반 각각에는 전조, 예감, 의심, 불안[note title=”9″back]여기에서 논의된 미술가들은 각각 특정 장르의 관습을 가지고 작업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골드스타인의 작업은 재난 영화의 관습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진Earthquake이라는 영화에서 전체 영화의 1/3은 임박한 지진에 대한 서술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완전히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된다.[/note]과 같이 심리적인 시간성이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의 심리적 울림은 그가 보여주는 픽처의 주제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픽처가 제시되고 상연되는 방식과 관계가 있다. 즉, 픽처의 구조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골드스타인이 이미지를 상연하는 방법은 점프에서 사용된 기술, 즉 로토스코피 기법이 이 완벽한 예인데, 이는 촬영된 이미지를 베끼는 동시에 지우는 절차, 즉 그리기와 지우기가 동시에 행해지는 기법이다. 그런데 이미지를 상연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픽처의 시간성은 그 매체의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성격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픽처가 제시되는 방법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런 시간성은 움직이는 픽처뿐만 아니라 정지된 픽처에서도 얻을 수 있다. 

 

다음 픽처를 보자. 그것은 짧게 자른 머리에 1950년대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 시대에 직장여성이라 불렸던 계층으로 보이는데, 이 인상의 단서, 즉 이 인상을 확인해주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대도시의 사무실 빌딩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뿐인 것 같다. 그러나 그 고층건물들은 이 픽처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한다. 건물들은 이 여성을 둘러싸고 고립시키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으스스한 파사드는 그녀가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불안을 더 강하게 만드는데, 그녀는 시선을 어깨 너머로… 어쩌면 픽처 프레임 바깥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던지고 있다. 그녀는 쫓기는 중인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 

 

그러나 이것을 무언가 임박한 듯한, 예감에 찬 픽처로 만드는 것은 실제로 무엇인가? 의심의 눈초리인가? 아니면, 이 픽처를, 후면 영사라는 영화 기법을 암시하는 약간 어긋난 공간클로즈업된 얼굴을 먼 데 있는 빌딩과 충돌시키는 병치속의 허구인 양 읽으라고 유도하는 요소를 짚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의상과 분장의 세부야말로 위장을 알릴 법한 신호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이면서도 그 이상일 것이다.

 

문제의 픽처는 미술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1954)이 자신을 가지고 제작한 최근 연작 중 한 장의 스틸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다양한 의상을 입고 여러 장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연작은 철저히 애매하지만 고도로 암시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우리는 이 픽처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가 허구적 서사라는 것은 확실히 안다. 우리는 이 사진들을 상연된 것이 아니라고는 결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스틸 사진은 어떤 시공간의 파편이므로, 바로 이 점에서 스스로를 실재의 직접 전사라고 단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반대로 스틸 사진은 바로 그 파편적 성질을 위반함으로써 공간과 시간 모두를 초월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note title=”10″back]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Hollis Frampton, “Impromptus on Edward Weston: Everything in Its Place,” October, 5 (Summer 1978), espcially 59-62.[/note] 셔먼의 사진은 이 중 어느 쪽도 아니다. 평범한 스냅사진처럼 셔먼의 사진도 파편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스냅사진과는 달리 셔먼의 파편화는 자연적 연속체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통합체의 순서, 즉 관습적이고 분할된 시간성을 깨뜨린다. 셔먼의 사진은 영화의 서사적 흐름을 구성하는 장면들의 시퀀스에서 뽑아낸 인용과 같다. 셔먼의 사진에서 감지되는 서사의 느낌은 서사가 있는 동시에 없다는 느낌, 즉 진술되었으나 충족되지는 않은 서사적 분위기다. 간단히 말해, 셔먼의 작품은 영화 스틸, 즉 “해당 파편을 넘어서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note title=”11″back]Roland Barthes, “The Third Meaning: Research Notes on Some Eisenstein Stills,” in Image-Music-Text, trans. Heath, New York, Hill and Wang, 1977, 67. 영화 스틸은 최근의 미술 실제에서 특정한 매력의 대상으로 매우 자주 등장해서 이론적 설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셔먼과 로버트 롱고의 작품 모두 실제로 이 묘한 산물과 닮아 있으며, 특히 존 맨덜슨(John Mendelsohn), 제임스 비렐(James Birrell)의 작품도 그렇다. 게다가 바르트가 논의한 영화 스틸의 많은 특징이 여기서 논의된 모든 작업의 관심사와 관련이 있다. 이 맥락에서 필립 스미스(Philip Smith)의 퍼포먼스가 작가에 의해서 ‘압출 영화(extruded cinema)’라고 불렸고 스틸 이야기 Still Stories, 부분적 전기 Partial Biography, 통제권 포기 Relinquish Control라는 계시적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스미스의 압출 영화는 35밀리미터의 슬라이드가 연속적으로 다중 투사되었고, 영화적 서사를 해체하는 기능을 했다.[/note] 파편이 조건인 사진이다. 

 

이 매우 특별한 종류의 픽처에 기재된 심리적 충격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때는 그 충격이 정규 영화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정지화면이라는 통합체의 분리로 나타날 때다. 서사적 시간이 갑작스레 포기되면서 요청되는 독해는 반드시 해당 픽처 내부에 머물러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픽처가 일부인 시간 유형을 피할 수 없다. 로버트 롱고Robert Longo(1953)의 작품이  위치하는 곳이 바로 이 같은 시간성들의 혼돈 속이다. 그가 작년 프랭클린 퍼니스에서 내놓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 타블로 퍼포먼스 선한 사람의 안전거리Sound Distance of a Good Man〉에서 중앙의 이미지는 영화였지만, 아무 움직임도 없이 (영화의 항상적 특징인 빛의 명멸 효과를 제외하고는)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몸이 휘어지고 머리를 뒤로 젖힌 남성 상반신을 보여주었다. 이 움직임 없는 픽처에서 빠르고 발작적인 움직임을 기재하는 그 자세는 사자 조각상의 꼼짝 않는 부동성과 대조된다. 영화가 돌아가도 보이는 것은 계속 이 스틸 이미지뿐이었다. 영화 전체가 오직 하나의 정지 프레임으로만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미지가 가로지르는 시간적 거리란 그 이미지의 좌우에서 틀 구실을 한 퍼포먼스 사건들의 실제 시간에 다름 아니긴 해도, 그 이미지의 구성은 상당히 복잡한 시나리오를 따른 것이었다. 롱고의 영화 카메라는 한 장의 사진, 더 정확하게는 한 점의 포토-몽타주를 향해 있었는데, 이 포토-몽타주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은 같은 장면을 복제한 일련의 사진들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그 장면이 보여주는 남자는 롱고가 같은 해에 앞서 전시했던 알루미늄 부조 조각을 모방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그 부조는 또 파스빈더의 영화인 미국인 병사The American Soldier(1970)에서 따온 영화 스틸의 단편적인 일부를 복제해서 실은 신문에서 인용된 것이다.

 

로버트 롱고, 〈선한 사람의 안전거리〉, 1978 속 영화 스틸 이미지.

 

방금 기술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파편화, 발췌, 인용을 통해 영화 스틸film still로부터 스틸 영화still film로 나아가는 나선형 시나리오인데, 이는 물론 선한 사람의 안전거리의 관람자들이 보았던 영화에는 부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부재하는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무엇이 움직이는 정지 이미지라는 독특한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지를 그처럼 정교하게 조작한다고 해서 실제로 이미지가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조작은 이미지를 물신화한다. 픽처는 욕망의 대상, 즉 부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의미작용을 욕망하는 대상이다. 픽처가 담고 있는 체하는 현실을 픽처가 생산하기를 바라는 욕망의 표현이 트로이 브라운턱Troy Brauntuch(1954)의 작업 주제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사적인 강박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강박은 우리가 픽처와 맺고 있는 관계의 본성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라운턱이 사용하는 픽처의 소재는 인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를 잔뜩 머금고 있지만, 그런 픽처라도 그의 작품에서 드러날 때는 완전히 종잡을 수가 없다. 

 

다음 픽처를 보자.

 

 

이것은 “자신의 메르세데스 안에서 잠든 히틀러, 1934”라는 캡션이 달린 알베르트 슈피어의 비망록 삽화였던 것 같다.[note title=”12″back]Albert Speer, Inside the Third Reich, New York, Macmillan, 1970, ill. following p. 166. “사진가전조와 예언의 후손의 과제는 자신의 사진에 담긴 죄악과 그 죄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던 이는 물론 발터 벤야민, 이 슈피어의 회고록이 이야기한 바로 그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였다. “‘미래의 문맹은 알파벳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읽을 수 없는 사진가 또한 문맹이라고 간주해야 하지 않는가? 캡션이 장면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A Short History of Photography,” Screen, Spring, 1972, 24).[/note] 브라운턱은 이 삽화를 복제해서, 세 부분으로 구성된 최근의 사진 인화 작업의 가운데 이미지로 썼다. 이미지는 제시되면 어느 정도 물신화되고, 그런 만큼 이미지가 재-현re-presentation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막는다. 브라운턱의 작품은 그 자체가 사진적이기에 다시 사진적으로 복제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비례, 색깔, 화면 설정, 부분과 부분의 관계에서 가장 세세한 부분들과 성질들을 정확하게 처리하므로, 작품이 오브제로 현존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위의 사진을 약 46센티미터의 가로로 확대해서 망점 스크린을 가시화한 다음, 약 2.1미터 길이의 핏빛 바탕 왼쪽에 인쇄했다. 이 픽처의 오른쪽에는 메르세데스의 앞 유리창 바로 위에서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보여주는 부분이 발췌되어 더 크게 확대되어 있다. 이 두 이미지가 등장하는 패널 측면에는 수직으로 위치한 두 개의 다른 패널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진들 전체를 도해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두 수직 패널도 마찬가지로 확대된 사진이지만 너무 추상화되어 사진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 패널들은 사실 광활한 어둠을 나란히 가로지르는 빛줄기가 되어 반짝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조명을 찍은 사진의 한 단편을 복제한 것이다. 그 패널들은 물론 알아볼 수 없는데, 이는 위 사진 속의 오른쪽 인물이 히틀러임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고, 그것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역사에 대해서도 폭로하는 것이 전혀 없다. 

 

브라운턱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런저런 책에 이미 발췌, 확대, 크롭해서 복제된 것들로, 너무 종잡을 수 없고 파편적인지라 그 이미지들의 주제라고 여겨지는 것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그리고 실로 그 무엇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은 히틀러가 직접 그린 드로잉이다.[note title=”13″back]브라운턱이 자신의 몇몇 작업에서 사용한 이 드로잉들은 광범위하게 출판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히틀러가 그린 드로잉의 진부함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강제수용소 내부에서 생산된 미술의 진부함일 것이다. 다음을 보라. Spiritual Resistance: Art from Concentration Camps, 1940-45, New York, Jewish Museum, 1978.[/note] 히틀러의 드로잉은 완벽하게 전통적인데, 그 창작자의 병적인 면을 이보다 더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브라운턱이 이 픽처들에 가하는 조치는 하나같이 모두 매혹과 당혹에 찬 응시의 지속을 대변하고, 이런 응시가 욕망하는 것은 그 픽처들이 자체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 픽처들을 더욱더 픽처 같게 만드는 것, 즉 이 이미지들을 생산한 역사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어떤 우아한 오브제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뿐이다. 바로 그 거리가 이 픽처들이 의미하는 것의 전부다. 

 

셰리 레빈Sherrie Levine(1947)이 자신의 픽처에 가하는 조작은 브라운턱의 경우보다 강박이 훨씬 덜하지만, 주제는 동일하다. 그런 픽처들이 제공하는 동시에 제지하는 것과 우리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런 거리로 인해 발동하는 욕망이 주제인 것이다. 레빈은 문화적 신화의 지위를 가진 픽처에 다가가, 매우 간단한 전략을 이용하여 문화적 신화의 지위와 심리적 울림을 폭로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3부작 연작에서, 레빈은 워싱턴, 링컨, 케네디 대통령을 상징하는 실루엣의 형태로 어머니와 아이 사진 세 장을 잘라냈다. 레빈이 다루는 신화들이 유통중임을 예시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에서 따온 대통령들의 옆모습이고, 사진들은 패션잡지에서 오려낸 것이다. 두 이미지는 대면 구조로 엮여 있어서, 반드시 서로를 통해 읽어야 한다. 즉 케네디의 옆모습은 어머니와 아이 픽처의 윤곽을 이루고, 어머니와 아이 픽처는 케네디의 상징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픽처들은 자율적 의미작용 능력이 전혀 없다(픽처가 그것이 묘사하는 것을 의미화하지 않는다). 이 픽처들의 의미작용을 제공하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 (동전의 면 위에서, 패션잡지의 지면에서) 제시되는 방법이다. 레빈은 이런 픽처들을 우리 문화의 통상적 위치로부터 훔쳐내 거기 담긴 신화적 사고를 전복한다. 

 

 

지난 2월 키친에서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전시된 어머니와 아이/케네디 픽처는 약 2.4미터 높이로 확대되었고 한 줄기 광선을 통해 발산되었다. 이렇게 제시하니 이미지는 인상적이고 연극적으로 현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현존하는 작품의 매체는 무엇인가? 빛? 35밀리미터 슬라이드? 잡지에서 잘라낸 픽처? 혹은 이 작품의 매체는 어쩌면 여기 이 학술지에 실린 복제물일까? 그런데 만일 작품의 물리적 매체를 특정할 수 없다면, 원본 미술작품을 특정할 수 있을까?[note title=”14″back]처음에 레빈은 이 전시를 위해 작품의 세 부분을 세 다른 형식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케네디 실루엣은 갤러리에서 슬라이드로 영사하고, 링컨은 우편엽서로 알리고, 워싱턴은 포스터로 제작함으로써 작품과 매체의 애매한 관계를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행은 앞의 두 부분만 이루어졌다.[/note]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가 목격한 모더니즘과의 단절, 혹은 더 정확히는 마이클 프리드가 옹호한 모더니즘과의 단절이 바로 미술의 매체 자체에 대한 정확히 이런 종류의 포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리드의 모더니즘은 매우 특정하고 편파적인 개념이어서, 예를 들어 영화(“영화는 그 가장 실험적인 것조차도 모더니즘 예술이 아니다”) 혹은 초현실주의의 뛰어난 연극적 회화를 포함하지 못하게 한다. 내가 여기에서 소개하려 했던 작업은 상이한 개념의 모더니즘과 관련되며, 이 모더니즘은 말라르메가 주창한 상징주의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note title=”15″back]이 미학과 회화 매체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는, 나의 다음 글을 보라. “Positive/Nagative: a Note on Degas’s Photographs,” October, 5 (Summer 1978), 89-100.[/note] 상징주의 미학은 직설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시간적 차원을 가진 작품들을 포함하고, 의미가 발생하는 통로인 기호의 물질적 조건을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근의 작업이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야기했으며,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업이라고 보는 것은 여전히 유용하다. 그러나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론적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은 단순히 또 다른 연대기적 용어로 사용될 수 없고, 오히려 모더니즘의 파기라는 특정한 본성을 드러내야 한다.[note title=”16″back]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은 이제 막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원주의라고 보면서, 미술이 급진주의 혹은 아방가르드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이상 없다고 부인하고자 하는 개념인데, 여기에는 위험한 면이 있다. 그 같은 주장은 ‘모더니즘의 실패’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새로운 인본주의를 세우려는 시도의 일환이다.[/note]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매체에 대한 급진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중요한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을 묘사하는 형식적 기술의 특징은 지형학적이라는 것, 즉 미술작품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미술작품의 표면을 지도처럼 파악하는 것이라면, 이제 필요한 것은 작품을 기술하는 일이란 층위를 밝혀내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내가 논의해온 작업의 전략을 구성하는 인용, 발췌, 화면 설정, 상연의 과정에서는 재현의 층들을 벗겨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원천 혹은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작용의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다. 모든 픽처의 아래에는 언제나 또 다른 픽처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이해는 또한 시대에 뒤떨어진 형식들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을 배반할 것이다. 짧게 한 예를 들겠는데, 이 글에서 논의된 픽처들과 겉보기에 유사하기 때문에 선택해보았다. 휘트니 미술관은 최근 《새로운 이미지 회화New Image Painting》라는 제목의 전시를 개최했다. 전시된 작업은 질적 수준과 의도, 의미에서 천차만별이었지만, 이런 다양성은 숨겨졌다. 대부분의 경우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특징이었던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라는 특징을 위해 전시가 억지로 짜맞춰졌기 때문이다. 실상 이 모든 작품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회화의 완전성을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말의 이미지가 상당히 추상화되어 나타나는 수잔 로텐버그Susan Rothenberg(19452020)의 회화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 이미지가 그녀의 회화 표면에서 기능하는 방식 때문에, 말은 충분히 격자가 될 수도 있다. “말은 정확하게 나뉘기 때문에 흥미롭다”[note title=”17″back]In Richard Marshall, New Image Painting, New York, Whitney Museum of America Art, 1978, 56.[/note]는 것이 로텐버그의 설명이다. 그 전시에서 가장 성공적인 회화는 로버트 모스코비츠Robert Moskowitz(19352001)수영하는 사람The Swimmer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서 헤엄치는 사람의 형상이 솟아나는 파란색 면은 물감이 칠해진 영역과 물이라는 해결 불가능한 이중의 독해를 강요한다. 그래서 이 회화는 우리가 정확히 모더니즘적이라고 인식하는 매체에 대한 아이러니를 공유한다. 

 

《새로운 이미지 회화》는 최근 미술관 전시의 전형으로, 미술관이 나서서 제도화했던 모더니즘 미학의 범주를 보존하려 안간힘을 쓰는 미술과 공모한다. 결국, 모더니즘의 시대가 미술관의 시대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만일 우리가 이제는 미학적 활동을 소위 대안 공간, 즉 미술관의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활동들, 그러한 픽처들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Douglas Crimp, “Pictures,” October Vol. 8, 1979, 75-88.
이주연
201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아카이브 미술의 대항적 성격에 관한 연구: 의미의 발굴에서 구축까지, 그 전략적 이행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코디네이터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전시를 만드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생각과 감정의 교류에 깊은 관심이 있고, 이 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비평적 관계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조주연
미술이론가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현대 및 동시대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현대미술 강의』를 지었고 『실재의 귀환』을 함께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