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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교육에 반대하는 미적 교육
번역 김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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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큐멘타 12 잡지 프로젝트, 2007. 사진: Patricia Canetti
〈도큐멘타 12 잡지들Documenta 12 Magazines〉, 2007. 사진: 패트리샤 카네티Patricia Canetti

 

도큐멘타 12Documenta 12가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문제에 전념한 것은, 엄청난 국가 후원과 미술 시장과의 관계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자율적 문화 영역 및 공공 영역으로 지속해 낸 미술제도가 반길 만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술가와 관객의 자기교육 및 지역화된 형태의 자기조직에 대한 세계화된 문화적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표현되며 논의를 넓힌다. (터키의 이스탄불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대한민국의 서울에까지 비엔날레가 번성하는 데서 보여 주듯) 문화 중심지의 불균일한 세계화globalization 맥락에서 전통적 국제적 미술 전시는, 이러한 신참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풍성함과 진정한 서발턴subaltern[note title=”1″back] [옮긴이] ‘서발턴’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사회 하층 계급’을 지칭한 용어다. 이는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Can the Subaltern Speak?」를 기점으로 보편화되었다. 이 용어는 맥락에 따라 식민지 인구, 여성, 노동자, 이민자 등을 의미할 수 있다.[/note]으로서의 재현에 대응할 의무가 있다. 이 점에서 도큐멘타 12가 지역적이고 자기조직적인 프로젝트를 교류하기 위한 무대로 자부하는 것은, 점점 분산되는 예술계의 조직적 중심으로서 세계적인 중요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그 자비심은 의사제국적quasi-imperial 왜곡, 즉 다중과 제국의 아이러니에 영향받기 쉽다.

 

탈식민성에 전념한 도큐멘타 11에 대한 보수적 반응은 더 지역적이고 근시안적이었으며, 이후 ‘도큐멘타’가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독일 시민권 테스트에 정답으로 출제되기도 했다. 도큐멘타 12의 〈잡지들의 잡지journal of journals〉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이러한 식민지적 기능에 영향받기 쉽다. 잡지는 가상이지만 덜 체계화된 공간에서 그들의 ‘입장’을 세계적으로 교류하고 번역하는 데 참여하도록 초대되었다. 하지만 인트라넷 사이트와 카피프리copyfree right는 여기서 문자 공화국의 꿈을 간직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참여는 이 프로젝트가 지닌 최선의 목적에 따라 교류 조건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도큐멘타 12의 시민권을 제의받은 사람은 아마도 시험에 실패하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그 질문[note title=”2″back] 도큐멘타 12는 프로그램 구성을 위해 일련의 질문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고려한 문제는 ‘교육: 무엇을 해야 하는가?(Education: what is to be done?)’다.[/note]에 답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깊고 푸른 바닷속의 악마

 

교육이 동시대 문화를 구성하는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특히 독일어에서 동어 반복의 위험이 있다. ‘문화는 교육이다’라는 암묵적 주장은 그것이 번역으로서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 내재한 용어 사이의 대립으로 결정된 사변적 명제로 들릴 때만 사실로서 와닿는다. 이러한 대립은 새로운 것의 문화인 모더니즘 안에서 친숙해졌다. 전통적이며 독단적이거나 외부적으로 부과된 권위의 소멸은 그것을 자율성과 자기조직으로 향하게 하는 교육의 개념, 즉 자유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자유에 관한 교육이라는 관념이 키워 낸 모순에는 가치 법칙의 신독단론neo-dogmatism 위에 새로운 형태의 독단론이 형성됨에 있어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현재를 적대의 고전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러한 문제는 도큐멘타가 강조하는 세계화 시나리오에 의해 고루해지지 않았다. 도큐멘타 12의 예술감독은 ‘오늘날 교육은 악마(교훈주의, 학계)와 깊고 푸른 바다(상품의 물신성物神性)[note title=”3″back][옮긴이]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는 ‘진퇴양난에 빠지다’라는 관용적 표현이다.[/note]에 대해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note title=”4″back]Fouad Asfour et al., “Editorial,” Education, Documenta Magazine, No. 3 (2007), Unpaged.[/note]고 주장한다. 이것은 희망 사항이다. 교훈주의와 상품화의 융합으로 위에서 특징지은 동시대 문화의 교육화에 매혹되지 않기란 어렵다.

 

능력주의는 확실히 유럽의 신자유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전반에 걸쳐 있으며,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교육, 교육, 교육’의 삼위일체 예시가 보여 주듯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매개하는 선호 수단 중 하나다. ‘평생 학습’은 젊음의 특권을 넘어 자기변혁을 이루려는 꿈과 유연한 노동 시장의 요구에 따라 무차별적 탈숙련화 및 재교육의 악몽 사이를 오가는 말이다. 모든 수준의 교육이 상품화되는 숨 가쁜 기하급수적 속도에 많은 이들의 어안이 벙벙해지고 있다. ‘선택’과 ‘기회’의 해방은 당근이며, 국가든 개인이든 스스로 초래한 가난의 위협은 채찍이다. 이러한 위협은 기술 주권을 추구하는 국가의 정치적 규율에 영향을 미치지만, 노동 시장의 탈국가화는 더 나아가 이제 국적은 가난에서 구해 주지 않을 것이며, 오직 교육만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명령한다. 대학원 학위의 확대는 (용어상의 모순에 주목하라) 더욱 자기주도적 연구에 확대된 접근성과 국가 또는 기업이 투자한 관심사가 이끄는 트레이닝이나 연구로 인한 고등 교육의 도구화 사이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레저 산업과 같이 무차별적 상품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계에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종종 오인하는 부분이다. 자질이라는 기준은 희미해지고, 성숙함의 가능성은 유아화의 형태를 취한다.

 

예술 교육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런 것에 대해 모범적으로 저항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들로부터 면제되지는 않는다. 종종 예술 교육은 예외가 되고, ‘교육’이 아닌 것 또는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할 수 없는 자 같은 ‘실패자를 위한 교육’으로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고루한 사람들에게 유치해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자율성을 연기하거나 회피하기보다 가정하는 것일 수 있다. 예술 교육은 다른 어떤 분야가 어울리기는커녕 이해할 수조차 없는 방식으로 이미 예술가로서 시작된다. 이 사실은 예술학교 지식인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주입하며, ‘지방과 펠트fat-and-felt‘ 신화[note title=”5″back][옮긴이] 지방과 펠트는 요제프 보이스가 작업에 자주 사용한 재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이스는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의식을 잃은 상태로 타타르(Tatar)족에게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그에게 동물의 지방을 바르고 펠트를 덮어 준 덕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지방과 펠트는 보이스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note]에서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는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테제는 예술학교의 자기비판적이고 심지어 자기부정적 과업의 중심이 되어 현대 예술 교육의 중추적 논쟁으로 남았다. 물론 이 교육적 급진주의의 아이러니는 흔히 규율 없는 선동이었다. 보이스 자신만큼 이를 강력하게 보여 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다’는 발상이 스며든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적 흥미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엄선된 아카데미 출신 졸업생들이 지배하는 채로 남아 있다. 예술학교는 확실히 시장에 나온 젊은 예술가의 브랜드 이름이다.

 

예술 아카데미 내에서의 전통주의academicism 해체(장르와 예술의 엄격한 준수, 예술적 역량과 저자, 그리고 실로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약화하는 것)는 비록 가끔 비판적이기는 해도 노동과 그 프로토콜의 상품화에 대한 새로운 과정의 유명론nominalism을 모방한다. 취향과 천재(그리고 사회 계급, 민족성, 젠더, 섹슈얼리티 또는 다른 결정에 의한 그것의 실제 형성)의 소위 ‘교육받지 못한’ 능력에 대해 만연한 비평에서도 신학문적 경향은 명백하다. 이 경향은 취향과 천재가 어떻게 비독단적 형태의 저자와 자기결정을 함양하는 데 기여하는지에 무관심하다. 만일 취향과 천재의 능력을 상품의 물신성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면, 사회적 공간과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그들의 소멸은 소비자 시장의 추정에 못지않게 징후를 보인다. 사회학적으로 환원적 경향에 수반해 온 예술 실천과 교육의 이론화는 전통주의에 자주 매료된다. ‘이론’은 감정가의 과장된 칭찬만큼 훌륭하게 포장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비평은 양쪽 모두에 대한 해독제다.

 

이와 비슷하게 양면적인 교육학에 따르면 전시 공간은 최근 크게 변모했으며, 흔히 볼 수 있는 확장된 전시 도록부터 방향을 안내하는 벽에 붙은 텍스트와 오디오 가이드, 관객 응답식 형태와 게시판에 이르는 다양한 ‘도움’을 통해 예술작품에 대한 관객의 경험을 매개한다. 도움을 받지 않는 취향 연습에 대비하기 위한 예술 공간의 눈가림이 뒤바뀌고 있다. 심지어 예술이 체험으로 팔리는 곳이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접하는 곳에서도 대개 가이드를 구할 수 있다. 자원이 부족한 공공 공간 안에서 교육은 훌륭한 판촉 기회를 제공한다.

 

전통주의/교훈주의와 상품의 물신성에 대안을 제시하는 자기조직적 교육 프로젝트에 대한 도큐멘타 12의 호소는 교육에 대한 현대적 관념이 이 용어들에 내재한 정도를 억제한다. 실제로 교육을 해방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관념에는 이러한 용어들의 모순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이 발상에 전념하는 것은 내재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오늘날 교육에 대한 경고를 표현할 수 있을까?

 

 

자율성의 교훈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교육에 대한 개념의 위기와 재발명을 유발한 것은,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과 이에 대해 독일 ‘철학자들philosophes‘이 체계화한 자율성을 다룬 현대 정치철학 사상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형태나 겉모습에 주어진 양도될 수 없는 권리로서 자유를 평등에 기초했다. 평등은 고대 귀족적 민주주의 방식에서의 자유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다. 그 방식에서는 평등이 차별의 범주로서 엘리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자율성에 대한 현대적 관념은 자유와 평등의 존재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자유가 없는 평등은 종속이며, 평등이 없는 자유는 특정한 이에게만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므로 제약되어 있다. 이 매개에는 법에 대한 비독단적 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자유는 평등의 보증인으로서 보편 법칙의 대상이어야 하지만, 법 또한 자유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 문제 삼을 수 없어서는 안 된다. 자율성에 대한 개념은 이러한 갈등을 개인에 대한 개념으로 해결하는데, 개인에 대한 개념은 개인이 주체로서 가진 양도할 수 없거나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이들을 지배하는 보편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도덕 법칙이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율성, 즉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독단적이거나 외부적으로 부과된 규칙, 즉 타율성에 적용되지 않으며, 주체로서 스스로 부여하는 규칙의 적용만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율성은 복종과 주체성의 통합이다.

 

자율성에 대한 이런 견해는 교육의 개념에 위기와 재창조를 초래한다. 만일 교육이 본질적으로 학생이 교사에게 복종하는 관계라면, 이는 자율성 구조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 단지 어떤 것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이를 전달함을 의미하더라도, 어떻게 자율성에 교육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율성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특정한 존재에 의해 소유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그러한 교환에 대한 평등주의적 상정이다. 이처럼 교육은 학교에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최선이거나, 자율성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부수적・부차적 문화 기능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 순진무구한 사람, 훈련되지 않은 사람, 또는 아마도 독학한 사람과 연결되는 다양한 형태의 반교육을 정당화한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이를 위해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사슬에 매여 있다’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그런데도 이런 반교육에 대한 발상은 교육에 반대하는 교육에 관한 생각, 자율 교육의 역설적 과제에 대한 제안도 유발했다. 루소의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에는 그의 사부아 출신 목사가 젊은 동지들에게 ‘학습된 연설이나 심오한 이성’을 행하기보다 ‘공통적 이성’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대목이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자네에게 말하려는 것이다. (…) 이성은 누구에게나 공통되므로 그것은 이로울 것이다.”[note title=”6″back] Jean-Jacques Rousseau, Émile, or On Education, Allan Bloom (trans.), Basic Books (1979, Orig. 1762), 266. [장 자크 루소, 『에밀(원제: Émile, ou De l’Éducation)』,이환 옮김, 돋을새김, 2015, 244.][/note] 이 기이한 교육에 열광했던 것으로 유명한 칸트는 계몽을 용기의 문제로 생각했다.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note title=”7″back] Immanuel Kant,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Enlightenment?,” Perpetual Peace and Other Essays, Ted Humphrey (trans.), Hackett (1983, Orig. 1784), 41.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원제: Zum ewigen Frieden und andere Schriften)』 박환덕박열 옮김, 범우사, 2015, 13.][/note] 마지막으로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예로 언급한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의 보편적 가르침은 가장 간결하게 교육에 대항하는 교육의 역설적 원리를 보여 준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note title=”8″back] Jacques Rancière, The Ignorant SchoolmasterFive Lessons in Intellectual Emancipation, Kristin Ross (tran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1, Orig. 1987), 15.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원제: Le maître ignorant)』(개정판),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33.][/note]

 

자신이 대화 상대보다 더 알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함께 진리 탐구에 관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주장은, 궤변뿐만 아니라 교리 주입에도 반대하면서 자율 교육에 대한 교육학적 선례를 동등하게 확립하여 철학 개념의 필수가 되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대가로 남았는데, 제자들이 스스로 플라톤Plato의 대화에 나오는 영웅 또는 군주를 오도할 것을 각오하며 그를 따르고 존경하면서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들은 학생으로 남아 있다. 메논Meno의 노예는 그의 내부에서 잊힌 것, 그의 계급보다 높은 능력으로 보이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경지에 이르며 이에 종속되었다. 여전히 노예로 남아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선발된 제자들, 특히 플라톤에게 교훈은 그들 아래에 밀집된 계급에 대한 ‘특별한’ 남성들, 철학자들, 따라서 통치자들로서 자신의 우월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종을 통한 통치권의 약속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는 아닐지라도 ‘양식’에 복종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통치권은 다른 사람의 복종에 따른 자신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전락한다. 철학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이 종속적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자율 교육을 대안적 훈육이나 반훈육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율 교육의 모순성은 자유가 평등의 대상인 한 (비록 평등이 자유에 대해서도 그렇다 할지라도) 과장되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교육의 지배 기능은 자유에 요구되는 규율에 따라 구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위기를 자율성 자체에 관한 발상으로 확대해 통치나 지배 개념으로서 본질적으로 훈육적 의미로의 자율성을 노출할 뿐이다. 자유는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마치 두 종속이 대상을 해방하는 것처럼 자기가 자신을 지배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자율성의 교육적 영웅은 이를 독학자라고 훌륭하게 명명한다. 따라서 평등과 자유의 통합은 경쟁 규칙의 통합으로서 본질적필연적으로 적대적인 제시가 이루어진다. 미적 교육이라는 발상의 결정적 의미 획득은 자율성과 그 교육에 대한 지배적이고 적대적인 개념의 대안으로서다. 예술 제작과 경험이 지닌 다양한 특징의 규칙 같지만 지배적이지 않은 성격은, 가령 규칙에 순종하지 않아도 취향이 합의될 만한 정도인 자유와 평등의 비지배적・비적대적 통합을 생각하는 모범으로 만든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하여Briefe 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는 자율 교육을 위한 취향과 아름다움에 관한 18세기 담론의 의의를 끌어낸 가장 뚜렷한 시도다.

 

 

감각을 통한 자유

 

실러는 자유가 학습될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한다. 미적 교육은 비록 여기서의 쟁점은 용기가 아니라 자유의 ‘실현’, 즉 다른 의미에서 현실화이지만 이미 자유로운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일종의 훈육을 수반하지만 법이 아닌 아름다움을 통해서, 지배보다 조화나 친밀감을 통해서 이뤄진다. 자율 교육은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고 규칙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적대적이거나 혼란스럽지 않은 것, 즉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자율성은 규칙의 중단만큼 자치의 측면에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규칙의 주입 혹은 부여는 실제로 훈육의 전체 정신이며, 놀이로 대체된다. 자율성에 관한 현대 인류학은 놀이의 담론이 된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만 놀이하며, 놀이할 때만 완전히 인간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그것은 아름다움이 자유로운 공동체, 즉 ‘미적 상태’를 위한 모델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미적 교육은 이성의 신독단론과 자유에 대한 개념, 주로 감각적 특수성에 대한 추상성 또는 무관심, 그리고 이것이 창출하는 분열과 소외에서 나타나는 병적 측면의 해결책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이는 현대 국가의 형식주의, 메커니즘, 소외된 전문화로서 실러가 고대 그리스에서 파생시킨 폴립polyp 상태의 국가와 반대된다. 그곳에서는 “각 개체가 독립적인 삶을 즐기다가도 필요한 경우에는 한데 뭉쳐 전체가 되곤”[note title=”9″back]Friedrich von Schiller, 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 E. M. Wilkinson and L. A. Willoughby (trans.), Clarendon Press (1982, Orig. 1795), 107–135. [프리드리히 실러, 『미학 편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실러의 미학 이론(원제: Briefe 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안인희 옮김, 휴먼아트, 2012, 72.][/note]했다. 실러의 부르주아적 고전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익숙하지만 환원주의적이다. 실러는 ‘미적 상태’가 단순히 ‘도덕적 상태’를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도덕의 반대를 극복함으로써 자유로운 공동체를 실현하자고 제안한다. 실러는 감각으로 자유의 매개를 고집하면서 평등에 대한 헌신을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감각적인 여러 가지는 평등에 의해 자유에 대한 결정이 급진화되는데, 이는 모든 것이 단지 보편성보다 그 특수성에 있어 자유롭다. 실러는 자기결정의 중심에서 느껴지는 자연, 감성이 지배하는 자유 안에 잠재된 독단주의를 강조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정치에 대해 합의된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의 범주는 적어도 칸트에게 있어 감각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경험인 숭고함보다 훨씬 더 도전적인 자유와 감성의 통합을 제안한다.

 

실러와 더불어 자율성에 대한 현대 정치적 존재론은 아름다움, 또는 예술에 관한 교육에 기초하게 된다. 그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에게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그러한 교육이 현대미술의 조건에까지 확대되는 선언문을 제공한다. 그러나 문화의 상품화에 나이브했던 실러는 이 부분에서 우리와 거리가 생긴다. 그런데도 미적 교육에 대한 이 발상은 자본주의 비판에 침투해 있다. 실제로 가치 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사용의 특수성으로부터의 개념)은 실러가 비판한 감각에 대한 형태의 우위를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으로부터 살아 있는 노동을 회복한 것은, 죽은 노동으로서 ‘현대적 인간’의 생명 없는 형태와 반대인 살아 있는 형태로서의 아름다운 것에 대한 실러의 개념을 되풀이한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미적 상태로서 예술 작품에서도 모델링되었다. 자본주의는 병리적 합리주의이자 자율성의 지배적 형태로, 그 안에서 인류의 자율성은 소외된다. 가치 법칙은 정확히 신독단론적 권위로서 자연적 또는 봉건적 형태의 복종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 내에서 생겨나며, 미적 교육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미적 교육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비판을 구상하려는 시도는, 자본주의 문화 자체가 ‘미적 상태’와 관련되어 있는 한 복잡하다. 가치 형태는 노동과 그 생산물의 특수성에서 추출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잉여 가치가 축적됨에 따라 가치나 돈, 심지어 경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삶의 전체 방식으로서의 자본주의)까지 창출하면서 그것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자율성에 관한 새로운 인류학을 유발한다. 미에 대한 초감각적 감수성은 취향을 통한 불안과 함께 상품에 깃든 물신성의 초감각적 감수성으로 재현된다. 실러에게 아름다움이 도덕법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감각임에 비해, 마르크스에게 상품의 물신성은 가치 법칙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감각이다. 미적 교육이라는 생각은 마치 스스로 독을 만들어 내는 해독제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논쟁은 실러나 마르크스가 오늘날 교육의 문제에 대해 잊힌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여전히 고심해야 할 문제인 미적 교육 구조를 가치 법칙의 신독단론 비판과 구현 모두로서 도입한다는 데 있다. 거의 의식적으로 이 문제는 예술의 존재론에 관한 현재 논쟁에 만연해 있는데, 특히 개념주의가 발생시킨 반유미주의anti-aestheticism와 그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신유미주의neo-aestheticism 사이의 갈등이 그중 하나다. 미학에 관한 이런 갈등을 통해 구성되는 것은, 현대미술이 미적인 것 혹은 그 점에 대해 취향과 아름다운 것에 국한된다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오한 미적 교육의 양면성을 반영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예술은 미적 교육에 대한 내재적 비평, 즉 미적 교육에 반대하는 미적 교육의 중심지가 된다. 이는 해방에 대한 교훈을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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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큐레이팅의 교육적 전환』(더플로어플랜, 2021)에 수록된 바 있으며 저자와 한국어판 저작권을 가진 더플로어플랜의 서면 동의를 받아 재게재함을 밝힙니다. 

 

Stewart Martin, "An aesthetic education against aesthetic education," in Curating and the Educational Turn, ed. Paul O’Neill & Mick Wilson(London: Open Editions/Amsterdam: De Appel, 2010), 108–117.
김아람
동시대 문화 예술 연구 및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파리 제1 대학(팡테옹-소르본)에서 미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파리, 서울, 경기, 광주, 런던의 여러 문화·예술 기관에서 연구원, 큐레이터, 대학 강사, 편집자, 번역가로 일했다. 번역서로 『큐레이팅의 교육적 전환』(2021)이 있고, 국내 여러 기관의 전시 도록, 연구서를 공동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