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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외로움
번역 이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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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길릭Liam Gillick, , 1992.
리암 길릭Liam Gillick, 〈핀보드 프로토타입Pinboard Prototype〉, 1992.

 

가지각색의 프로젝트를 고안해 내는 일은 현대인의 중차대한 고민거리가 됐다. 이제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서 어떠한 일을 추진하려면, 일단 적절한 프로젝트를 고안한 뒤, 하나 또는 여러 당국으로부터 공식 승인과 기금을 얻기 위해 지원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초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수정된다. 수정된 프로젝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프로젝트로 대체해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셀 수 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작성하고, 논의하고, 거절하는 일에 계속해서 매달린다. 평가서가 작성되고, 예산이 면밀히 검토되고, 위원회가 결집되고, 위원들이 임명되고, 결의안이 상정된다. 적지 않은 수의 현대인들이 오로지 이러한 제안서, 평가서, 예산안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대다수의 프로젝트는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 어떤 평가 위원이 프로젝트가 가능성이 없다거나, 재정을 조달하기 어렵다거나, 또는 단순히 마음에 안 든다고 보고하기만 하면, 프로젝트를 고안하느라 들인 노동은 전부 헛수고가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느라 들인 작업량은 상당하고, 시간이 갈수록 노동 강도는 증가한다. 다양한 심사위, 위원회 그리고 공공 단체들에 제출되는 프로젝트는 미래의 평가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 정교한 디자인으로 포장되고 더욱 더 세밀히 작성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프로젝트 작성법은 자체적인 예술 형식으로 서서히 발전 중이지만,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실행 여부와는 별개로, 각각의 프로젝트는 미래에 대한 특정한 비전의 초안을 상징하고, 때로는 흥미롭고 유익하기도 하다. 하지만 인류가 끝없이 생성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잊히거나 그냥 버려지기 일쑤다. 프로젝트를 예술 형식으로 다루지 않는 태만함은, 프로젝트에 담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얻을지도 모르는 깊숙한 사회적 통찰을 가로막기 때문에 무척 안타깝다. 현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여기서 진행하기는 부적절하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담긴 희망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은 여기서 들 법하다. 또는, 왜 사람들은 프로젝트 걱정 없이 미래를 향해 살아가지 않고 굳이 프로젝트를 하려 하나?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답이 가능하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용인된 외로움을 얻고자 한다. 실제로 계획의 부재는 우리를 세상만사와 필연에 좌우되게끔 하고, 주변 환경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유지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진, 대형 화재, 또는 홍수와 같이 그야말로 사전 계획 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에서 더욱 돋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은 사람들을 밀착시키고, 서로 소통하며 하나 되어 행동하게끔 한다. 하지만 모든 개인적인 불행도 마찬가지다. 다리가 부러졌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즉각적으로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목적 없이 흘러가는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업무와 여가라는 공통된 리듬에 의해 결속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이들과 언제든지 소통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어렵고, 반사회적이고, 불친절하다고 여겨지며, 사회적 검열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용인된 개인적 프로젝트를 자발적 은둔과 소통의 단절을 이유로 내세운다면 상황은 급변한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일 때는 엄청난 시간의 압박을 받고, 그로 인해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아예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이해한다. 책을 쓰거나, 전시를 준비하거나, 과학적 발견을 위해 힘쓰느라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연락을 끊고, 심지어 관계를 끊더라도 자동으로 나쁜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통념이다. 여기서의 (유쾌한) 역설은, 프로젝트의 진행 기간이 길면 길수록 시간의 압박 또한 증가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미술계의 체제에서 승인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최대 5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다. 일정한 은둔 기간이 지나면, 개인은 그 대가로 완성된 결과물을 내놓고, 최소한 또 다른 프로젝트 제안서를 제출할 때까지는 사회적 소통이라는 난전 속으로의 복귀를 요구받는다. 더욱이, 예술이나 과학의 영역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누군가가 일생을 바쳐야만 하는 프로젝트를 승인하고는 한다. 특정한 지식적 목표나 예술적 활동을 향해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무한정의 기간 동안 주변 환경에 할애할 시간이 없더라도 용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은둔 생활에 소급적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어떠한 완성된 결과물이 (다시 말해, 작품이) 요구된다. 하지만 사람들을 전반적인 소통적 동시대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고, 외로운 프로젝트의 시간 속으로 옮겨 놓는, 정해진 기간이 없는 프로젝트도 존재하는데, 종교 또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과 같은 무한한 프로젝트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실현에는 대개 집단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식으로, 한 프로젝트의 은둔성은 공동의 은둔성이 된다. 많은 종교 단체와 분파는 영적 발전이라는 종교적 프로젝트를 위해 보편적인 소통의 틀에서 벗어나고는 한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별 국가들이 통째로 나머지 세계와 단교하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모두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내놓을 만한 결과물이 없을 뿐더러,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원들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자발적 은둔이 아닌 일반적 소통으로의 재진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현대화Modernization란 소통의 지속적 확장, 그리고 모든 자발적 은둔과 외로움의 상태를 허무는 진보적 세속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현대화는 모든 형식의 특권을 부인하는 새로운 사회의 발현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현대적인 현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완전히 세속화된 총체적 소통의 열린사회를 만들려는 프로젝트 또한 여전히 프로젝트로 남아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각각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고립과 자발적 은둔의 선언이자 확립이 된다. 이는 현대성에 모호함을 부여한다. 한편으로, 이는 총체적인 소통과 집단적 동시대성에 대한 강박을 조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은둔을 되찾음으로써 반복적으로 끝을 맺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미학적 목표를 강구한 이전 세대의 예술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다양한 프로젝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아방가르드의 언어는 모두를 위한 미래의 약속으로 보편적 적용을 추구하며 탄생했을지 몰라도, 당시에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소통적 고립으로 이어졌고, 모두에게 이런 식으로 낙인찍히기에 이르렀다.

 

프로젝트는 왜 고립으로 귀결되나?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제시됐다. 무엇보다도, 모든 프로젝트는 프로젝트가 실현되면 도래할 또 다른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선언이다. 하지만 새로운 미래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일단 개인적인 결석 또는 부재의 기간을 가져야 하고, 이로써 프로젝트의 행위자는 다차원적 시간의 평행적 상태로 옮겨진다. 또한, 이와 같은 시간은 사회가 경험하는 시간으로부터 분리되고, 비동기화된다. 이는 사회의 삶과 무관하고, 세상일에 미치는 영향 또한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 너머의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는 책을 쓰거나, 전시를 준비하거나, 거대한 테러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는 책이 출판되거나, 전시가 열리거나, 암살이 거행되면 세상만사가 바뀌고, 온 인류에게 다른 미래가 선사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일을 벌인다. 프로젝트가 예견하고 추구한 바로 그 미래 말이다. 달리 말해, 언뜻 보면 모든 프로젝트는 세상만사와의 재동기화에 대한 기대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듯 보인다. 이 재동기화가 세상일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면 프로젝트는 성공했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실현이 세상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닌다. 양쪽 다 프로젝트를 종료시키고, 양쪽 다 프로젝트의 평행적 시간과 세상만사의 시간의 재동기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양쪽 다 마찬가지로, 재동기화는 대개 불안을 야기하고, 낙담을 안겨 주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양쪽 다 마찬가지로, 평행적 시간 속에서의 존재 불가능함, 세상만사를 넘어서는 삶의 상실이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프로젝트가 있다면 (더 정확히는, 프로젝트 속에 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미래에 존재한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고, 소통 불가능하며, 가리어진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다. 프로젝트는 그가 현재로부터 가상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게끔 하고, 그 자신과 다른 이들 간의 시간적 단절을 야기하는데, 다른 이들은 이 미래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바로 이 미래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저자는 미래의 모습을 이미 안다. 부수적으로, 프로젝트의 승인 과정이 저자에게 그리도 불쾌한 주된 이유는, 초기의 제출 단계부터 이미 이 미래가 어떻게 가능하고, 결과가 무엇일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프로젝트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금 지원도 거부된다. 그러나 명시된 대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는 프로젝트의 매력 그 자체인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거리를 허무는 꼴이 된다. 모두가 처음부터 프로젝트의 방향과 결과를 안다면, 미래는 그들에게 더 이상 놀랍지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프로젝트는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한다. 프로젝트의 저자는 이미 미래에 살며, 현재를 극복하거나, 허물거나, 또는 최소한 변화시켜야 할 무언가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게 지금 현재의 모든 일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와 소통하거나, 현재를 상대로 본인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도리어, 프로젝트를 통해 선포된 미래를 상대로 정당성을 주장해야 하는 쪽은 현재다.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값진 기회, 바로 이 시차가 프로젝트 속에서의 삶이 저자에게 그리도 매혹적인 이유고, 반대로 프로젝트의 실현이 그리도 불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프로젝트 저자의 관점에서 가장 유쾌한 프로젝트는 애초부터 끝이 없도록 고안된 프로젝트일 텐데, 이러한 프로젝트는 미래와 현재 사이의 간격을 무한정의 기간 동안 유지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절대 완수되지 않고, 결과물을 생성하지 않으며, 최종적인 프로젝트를 야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완성되지 않고, 완결될 수도 없는 프로젝트들이, 성패 여부와 무관한 특정한 결과물을 통해 세상만사와 영영 재동기화되지 못하더라도, 사회적 표현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는 그래도 기록될 수는 있다.

 

사르트르는 일전에 ‘미완성 프로젝트로서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어진 개인적인 미래의 관점을 통해 살아간다. 사르트르 식으로 설명하면, 한 개인은 언제나 사적 환경의 다차원적 프로젝트가 아닌 이러한 환경의 결과물로만 타인에게 보여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태는 개개인의 극단적인 소외로 이어진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다차원적인 평행적 시간은 현재의 그 어떤 표현 형식으로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프로젝트가 현실 도피의 의혹, 그리고 개인의 의무와 사회적 소통의 의도적 회피라는 오명을 썼다고 봤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주체의 존재론적 상태를 자기기만mauvais foi, 혹은 진실성이 결여된 상태로 설명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르트르적인 존재론적 주인공은 언제나 프로젝트의 시간과 세상사의 시간 간의 간격을 극단적인 직접 행동action directe을 통해 좁히려는 지속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고, 잠시나마 두 개의 시간을 동기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다차원적 시간을 결론짓기란 불가능할지라도, 위에서 언급한대로 기록할 수는 있다. 예술은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는 다차원적 시간의 기록과 표현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옛날에는, 종교의 역사를 세계 구원을 위한 프로젝트로서 기록하는 일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미래들을 위한 사적, 집단적 프로젝트를 포괄한다. 어찌됐든, 이제는 실현되지 않았거나 실현 불가능한 모든 프로젝트도 성패 여부와 별개로 미술 기록을 통해 현재에서 존재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본인의 글쓰기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프로젝트는 (미술 작품을 대신해) 의심할 여지없이 미술계의 중심이 됐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특정한 목적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을 전제로 할지 몰라도, 이 목표는 대개 프로젝트의 목적이 달성됐는지,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혹은 애당초 불가능한 목표인지를 판단할 기준에 대한 접근성이 없는 상태로 확립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미술 작품을 포함하는) 작업의 생산에서 프로젝트 속의 삶으로 이동한다. 생산성이 최우선시되지 않고, 결과물의 개발에 최적화되지 않은, ‘결과 지향적’이 아닌 삶.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술은 더 이상 작품의 생산이 아닌 프로젝트 속의 삶의 기록, 그 삶의 결과 혹은 의도했던 결과와는 무관한 기록으로 이해된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미술을 정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미술은 더 이상 작가에 의해 생산된 또 다른 새로운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또 다른 다차원적 시간이 기록된 하나의 방식으로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작품은 미술을 온전히 체현하고, 미술에 직접성과 명백한 존재감을 부여하는 무언가로 이해됐다. 전시를 보러 가면, 그곳에 무엇이 전시됐든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비디오, 레디메이드 혹은 설치 미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미술이라고 자연스레 짐작한다. 물론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제 세계의 사물들 또는 특정한 정치적 이슈와 같은 작품 외적인 무언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미술 그 자체를 암시하지는 않는데, 작품은 그 자체로 미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와 미술관 관람을 규정하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통념은 점점 사실과 멀어진다. 오늘날의 미술 공간에서 전시되는 작품들 외에도,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미술 기록을 점점 더 심심찮게 마주한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회화, 드로잉, 사진, 비디오, 텍스트 그리고 설치 미술을 볼 수 있다. 미술이 일반적으로 전시될 때와 똑같은 형식과 매체들 말이다. 하지만 기록 속의 미술 작품은 이러한 매체들을 통해 전시되지 않고, 단순히 기록될 뿐이다. 미술 기록은 정의상 미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미술을 가리키기만 하는 바로 이 행위를 통해, 미술 기록은 미술 그 자체가 더 이상 눈앞에 존재하지 않으며, 도리어 부재하고 가리어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그러므로 미술 기록은 미술 공간에서 쓰이는 매체들을 활용해 삶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려는 시도를 암시한다. 달리 말하면, 순수한 활동 또는 순수한 실천을 지칭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프로젝트 속의 삶을 직접 재현하려 하지 않으며 지칭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술은 삶의 방식으로 변모되고, 작품은 비미술로, 이러한 삶의 방식의 단순한 기록으로 변한다. 또는, 이제 미술은 생명정치화 되어 가는데, 미술적 수단을 통해 삶 그 자체를 순수한 활동으로 생산하고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 기록은 삶 그 자체가 기술적, 미술적 창의성의 대상이 된 현재의 생명정치 시대 상황 속에서만 발전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히 새로운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삶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는데, 여기서는 프로젝트의 탈을 쓴 미술이 삶을 재생산하거나, 삶을 작품으로 채우는 대신, 삶 그 자체가 되기를 지향한다는 역설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통상적인 의문은, 미술 기록을 포함한 기록 그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삶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록은 삶을 심히 밋밋하게 한다는 불신을 받는다. 기록하고 보존하는 행위는 사물과 상황에 대한 특정한 선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택은 언제나 미심쩍은 기준과 가치에 따라 결정되고, 또 마땅히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더욱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과정은 언제나 기록 그 자체와 기록된 사건 사이에 간극을 조성하고, 이 괴리는 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다. 하지만 삶을 온전하고 진실되게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쳐도, 삶의 활력은 삶의 고유성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삶 그 자체가 아닌 삶의 데스마스크만이 남을 테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의 문화는 기록과 아카이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지닌 채, 심지어 삶의 이름으로 아카이브에 격렬히 맞서기도 한다. 기록을 관장하는 아키비스트와 행정가 들은 참된 삶의 적으로 흔히 간주되는데, 그들이 삶의 직접적인 경험보다 죽은 기록물의 편찬과 관리를 더 선호한다고 여기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행정가는 삶을 무미건조하게 (즉, 죽음과 같이) 만드는 오싹한 힘을 지닌 죽음의 대리인으로 인식된다. 이와 비슷하게, 미술 작가가 기록을 지향하기 시작하면, 행정가와 연관되고 새로운 죽음의 대리인으로 의심받을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아카이브에 보관된 행정적 기록은 기억의 기록뿐만 아니라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와 계획 또한 포괄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아카이브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미래에는 실현될지도 모르는 삶의 초안들을 포괄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생명정치 시대에서, 이는 단순히 삶의 근본적 상태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생산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흔히 생명정치는 개별적인 생명체를 재형성하려는 이론상의 목적을 지닌 유전자 조작의 과학적, 기술적 전략들과 혼동된다. 하지만 생명정치 기술의 실질적인 성과는 삶 그 자체를 지속시키는 일, 그리고 삶을 하나의 사건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활동으로 형성하는 일과 더 연관이 깊다. 출산과 일생에 걸쳐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부터, 일과 여가의 균형을 규정하는 일, 그리고 의료적으로 관리되거나 심지어 의료적으로 유도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개인의 삶은 인공적인 통제와 발달의 영속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삶이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존재의 사건, 또는 운명, 또는 저절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인공적으로 생산되고 형성된 시간으로 이해된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삶은 발생하기도 전에 기록되고 아카이브될 수 있다. 물론 행정적이고 기술적인 기록은 현대 생명정치의 주요 매체로 활용된다. 이러한 기록을 형성하는 계획, 규정, 조사 보고, 통계 설문, 그리고 프로젝트 개요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삶을 생성해낸다.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는 유전적 아카이브마저도 결국에는 이러한 기록의 일부로 이해 가능하다. 이전의 퇴화한 생물의 유전자 구조를 기록하는 한편,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미래의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으로 해석 가능하게 하는 그 기록. 생명정치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아카이브가 기억과 프로젝트,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더는 구분 불가능하게 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는 기독교에서 부활이라고 칭하고,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서는 재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의 합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지나간 삶의 형식들을 보관하는 아카이브는 언제든지 미래를 위한 각본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아카이브에 기록됨으로써 원하기만 한다면 반복 가능해지고, 역사적 시간 속에서 계속 재생산될 수도 있다. 아카이브는 과거와 미래가 가역적으로 변화하는 장소다.

 

프로젝트 속의 삶은 원래부터 인공적이었기에 기록 가능하고, 미술 작품이 공간 속에서 재생산되듯, 이 삶 또한 시간 속에서 재생산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승인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모든 프로젝트보다 미완성, 미실시, 심지어 거절된 프로젝트가 프로젝트 속의 삶이라는 오늘날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 이러한 ‘실패한’ 프로젝트들은 프로젝트의 결과물로부터 프로젝트의 과정적 측면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결국에는 프로젝트 저자의 주체성에 집중하게끔 한다. 완결 불가능성을 다루는 프로젝트는 저자라는 존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정의를 제공한다. 여기서의 저자는 더 이상 작품의 제작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포함하는 프로젝트 속의 삶의 다차원적 시간을 기록하고 승인하는 자다. 하지만 저자는, 허가를 통해 승인하는 힘을 지닌 어떠한 공공 단체나 기관에 의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이는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개인적 위험을 동반하는 승인에 더 가깝다. 어찌 됐든, 프로젝트 속의 삶을 이런 식으로 승인하는 행위는 또 다른 다차원적, 평행적 시간을 연다.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바람직한 외로움의 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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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운영했던 웹사이트 《PODOportal of delirium & obsession》에 수록된 바 있으며, 저자와 해당 웹사이트 운영자의 동의를 얻어 수정 후 재게재함을 밝힙니다.

Boris Groys, “The Loneliness of The Project,” New York Magazine of Contemporary Art and Theory, Issue 1.1, 2002.
이계성
런던의 첼시 예술 대학에서 순수 미술을,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서 미디어 예술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번역, 평론을 포함한 글쓰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역서로는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작업실유령,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