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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위한 애가
번역 김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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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탠시Mark Tansey, 〈’프레임 버리기’ 연구Study for “Discarding the Frame”〉, 캔버스에 유화, 1992-1999.

 

Éloge. 남성 명사. (1580, 라틴어 elogium, 그리스어 eulogia에서 유래).
1. 누군가에 혹은 무언가에 대한 연설.
추도사, 학문적 헌사, 성자에 대한 찬미.
– 『르 프티 로베르Le Petit Robert

 

그는 엄숙하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의복을 갖춰 입은
사절단Theôry을 그곳에 보냈다.
– 조지 그로트, 『그리스사A History of Greece』(1862)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를 지나며 북미와 유럽의 대학들은 영화학의 제도화를 이론의 특정 이념과 동일시했다. 이 이론은 순수과학 혹은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이론”이라기보다 인문학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 더 많은 반향을 일으킨 문학 기호학, 라캉식 정신분석 그리고 알튀세르식 마르크스주의에서 파생된 개념들과 방법들의 간학제적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초반 이후, 영화 연구의 변화는 다음 두 가지, 즉 미디어와 시각 연구와 관련하면서 탈중심화된 영화 그리고 이론에서의 후퇴로 특징지어졌다. 이는 확실히 여러 유익한 효과를 발생시켰다. 즉 역사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관람성과 관객이 사회학적으로 더 엄밀하게 재개념화 되었으며, 영화가 시각 문화와 전자 미디어라는 더 폭넓은 맥락에 위치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혁신적 결과들이 모두 동일하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1996년,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과 노엘 캐롤Noël Carrol은 포스트-이론 논쟁을 시작하며 1970년대 유행했던 거대 이론을 비논리적이라 보고 그것의 폐기를 주장했다. 문화·미디어연구 역시 동일하게 의심스러웠던 그들은 영화 연구를 자연과학적 방법에 근거한 실증적 탐구의 대상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거의 같은 시기, 이론에 대한 다른 철학적 도전들이 분석철학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영화학자들로부터 나타났다. 이 논쟁들은 1990년대 문화전쟁과 정체성 정치 그리고 문화연구가 고조되는 까다로운 배경과 대립하며 등장했다.

 

이러한 논쟁에서 상실된 대문자 이론Theory과 “이론theory”[note title=”1″back][옮긴이] 이론에 대한 이론으로서 인류학, 고고학, 문학, 예술사, 영화 연구 등 기타 인문학의 모든 분야에 대한 해체주의 전략으로 간주하는 대문자 이론과 자연과학적 실증주의에 근거한 인식론적 이론, 즉 가설에 대한 구분.[/note]에 대한 혼동은 역사, 비평, 철학에서 인식론적 기준에 대한 질적 평가 없이 개진된 판단에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론을 단념하길 원하는 것은 인식론적 기준에 대한 논쟁을 상회한다. 이는 지식의 양식들 뒤에 놓인 윤리적 입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1970년대 이론의 개념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인식론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책임을 동등하게 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 주의를 기울이는 인문 철학을 무엇으로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 과감하게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기획에 있어 이론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확실히 유용하다. 돌아보면 흥미롭게도 20세기 초 영화는 미학이나 예술철학보다 이론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미 1924년에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는 그가 쓴 가시적 인간Der sichtbare Mensch』에서 개념의 구축으로부터 이끌어진 예술적 발전의 나침반으로서 영화이론을 주장한다.[note title=”2″back]Béla Balázs, Der sichtbare Mensch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1). 인용된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Theorie ist, wenn auch nicht das Steuerruder, doch zumindest der Kompass einer Kunstentwicklung. Und erst wenn ihr euch einen Begriff von der guten Richtung gemacht habt, dürft ihr von Verirrungen reden. Diesen Begriff: die Theorie des Films, müsst ihr euch eben machen” (p. 12). Balázs does, however, associate this theory with a “film philosophy of art” (p. 1).[/note] 여기서 환기된 이론은 자연과학에서 방법과 인식론에 비견되는 학문Wissenschaft으로의 미학을 나타내기 위한 독일 예술철학의 19세기적 경향을 대표한다. 이 시기 이후 영화미학이나 영화철학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언제나 영화이론으로 재기되었다.

 

그렇지만 “이론”은 수세기 동안 꽤 가변적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이론의 고상한 기원은 바라봄, 사변 혹은 사색적 삶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테오리아theoria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서 그것은 인간 행위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원동자의 최고 행위이다. 그리스적 의미로 이론은 단지 행위만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삶의 양식 혹은 존재 방식과 관련지은 에토스ethos로 여겼다.[note title=”3″back] 새로운 존재 방식을 향한 의지라는 윤리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Pierre Hadot, What Is Ancient Philosophy?, trans. Michael Chas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에 해당하는 “자기 배려”에서 영향을 받은 아도의 주장은 철학적 삶에 대한 욕망이 윤리적 헌신이나 일련의 실존적 선택에 의해 우선 추진되며, 이는 세계에 대한 비전과 공동체에 속한 욕망으로부터 철학적 담론이 분리될 수 없는 삶의 양식에 대한 선택을 포함한다.[/note]

 

테아thea[시각] 그리고 테오로스theoros[관람자]를 하나로 결합한 이론theory은 종종 바라봄 그리고 광경과의 연관성을 지녀왔다. (이것은 아마도 헤겔이 『미학』에서 시각을 감각들 가운데 가장 이론적인 것으로 규정한 의도였을 것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그의 책 『키워드Keywords』에서 17세기에 등장한 이론이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4가지 기본 의미들을 다음과 같이 광경, 관조적 시각, 개념 체계 그리고 설명 체계로 규정한다.[note title=”4″back]Raymond Williams,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p.267 [레이먼드 윌리엄스, 『키워드』, 김성기, 유리 옮김, 민음사, 2010.][/note] 이론이 극장과 맺는 어원적 연관성으로 인해 이제 막 나온 매체인 영화가 이론을 요구하리라는 점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생각을 이론과 지속적으로 연관짓는 일이 관람하기와 광경에서 기인함에도, 현대 상식 개념은 4가지 의미 중 마지막 두 의미를 따른다. 이론은 대개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설명하려 하지만 여기서의 이론은 종종 행위나 실천과는 구분된다. 이와 같이 윌리엄스는 “실천을 설명하는 관념 체계”로 이론을 정리한다.[note title=”5″back]Raymond Williams,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p. 267.[/note] 이는 확실히 발라즈 혹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이 이론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디지털 영화 미학The Virtual Life of Film』에서 나는 전자 디지털 미디어의 급작스런 등장이 불러온 강력한 결과 중 하나는 더 이상 무엇이 “영화”인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영화의 존재론적 고정점의 토대가 없는─이며, 따라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재질문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토대 없음은 영화연구에서 영화 자체의 역사를 발굴하고 영화이론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었는지 반성적으로 검증하는 현재 관심사를 개괄하면서 내가 말한 “메타비평적 태도”에 의해 현대영화연구의 개념사 속에서 공명한다. 이론Theory에 대한 이와 같은 반성적 태도는 아마 내가 쓴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과하며 그 속에서 다양하고도 상충된 접근들로 드러났다. 말하자면 캐롤의 『고전영화이론의 철학적 문제들』과 『신비화된 영화들』, 보드웰의 『의미 만들기』, 주디스 메이네Judith Mayne의 『영화와 관람성』,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의 『환영 투사하기』, 보드웰과 캐롤의 『포스트 이론: 영화연구 재구축하기』, 알렌과 머레이 스미스Murray Smith의 『영화이론 그리고 철학』, 프란치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의 『영화 이론들, 1945-1995』, 알렌과 말콤 터비Malcolm Turvey의  『비트겐슈타인, 이론 그리고 예술』 등과 함께 촉발되었다.[note title=”6″back]다음을 보라. D. N. Rodowick,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 Criticism and Ideology in Contemporary Film Theory (1988;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Noël Carroll, Philosophical Problems of Classical Film Theo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Noël Carroll, Mystifying Movi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David Bordwell, Making Meaning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Judith Mayne, Cinema and Spectatorship (London: Routledge, 1993); Richard Allen, Projecting Illus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David Bordwell and Noël Carroll, eds., Post-Theory: Reconstructing Film Studie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96); Richard Allen and Murray Smith, eds. Film Theory and Philosophy (Oxford: Clarendon Press, 1997); Francesco Casetti, Theories of Cinema, 1945–1995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9); and Richard Allen and Malcolm Turvey, eds., Wittgenstein, Theory and the Arts (London: Routledge, 2001).[/note]

 

역사적이면서 이론적으로 검증 가능한 대상으로 이 “이론”이라는 것을 떼어놓고 보면 언급한 책들은 전반적으로 세 가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자연과학적 모델이 철학적이고 분석적인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잘 구성된 이론의 인식론적 가치가 제한된 범위의 가설로 정의된 정밀한 개념 체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은 모든 이론에 인식론적 가치를 도출하는 이상적 모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와 달리 카세티의 접근 방식은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이다. 이는 인식론적 가치에 대한 논쟁과 관련한 불가지론으로 진술의 내적 특성과 외적 맥락 모두를 설명하면서 자칭 이론의 실천가들에 의한 진술들을 하나로 모은다.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에서 내가 취한 접근 방식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Archaeology of Knowledge』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지식의 조건 자체가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즉 담론이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은 대상의 가시적 집단을 만들거나 생성하고, 개념들을 창안하고, 호칭의 배치를 정의하며, 수사적 전략을 조직함으로써 진술들의 질서와 분산에 규칙을 부여하는 언표행위적 양태를 설정한다. 이 접근 방식은 지식이 어떻게 제한적이고 가변적인 담론의 맥락에서 생산되는지 분석한다.

 

우선, 이론을 역사와 연계하는 것은 꽤나 낯설어 보일 수 있다. 1998년, 비엔나대학교 역사학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련의 강의에서 나는 영화이론이 실제로 복수의 역사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학생들을 당황하게 했다. 여기서 이론에 대한 분석적 접근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학적, 고고학적 접근법이 갈라진다. 자연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은 동일한 시간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역사를 가진다는 사실은 이미 영화이론 그리고 실제로 모든 미학 이론을 자연과학적 탐구와 구분짓는다. 미학적 탐구는 문화와 혁신의 가변성 그리고 그 변동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식론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균형적) 합의와 자기 검증으로부터 도출된다. 이처럼 자연 세계에 대한 검증은 인문학적 문화와는 다르게 사전 지식 없이 모형화 과정에서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하고, 새로운 가설을 개선해 나가는 목적론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

 

나는 영화가 어떻게 20세기 초 무렵 이론과 연관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론의 이념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와 국가적 맥락 속에서 다양화되었는지에 대한 더 세밀한 개념적 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단은 이론에 대한 보다 최근의 메타비평적 태도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1990년대 중반, 영화이론과 “이론”의 개념 자체는 여러 관점들로부터 도전 받았다. 이 충돌은 세 가지 부분적으로 중복된 단계들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1980년대 내내 보드웰이 주장한 영화의 “역사시학”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1989년에 출간된 『의미 만들기: 영화 해석에서 추론과 수사Making Meaning: Inference and Rhetoric in the Interpretation of Cinema』로부터 그리고 “영화와 인지 심리학”에 관한 『아이리스Iris』 특별호로부터 촉발된 논쟁으로 귀결된다. 두 번째 단계의 성취는 1996년에 출간된 『포스트-이론Post-Theory』이다. “영화연구 재구축하기Reconstructing Film Studies”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인지과학과 역사시학을 모델로 하여 분과로서 영화학을 정립하고 자연과학적 추론을 통한 인식론적 이상에 부합하는 “이론”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두 번째 단계가 이론을 ‘과학적’ 탐구와 설명의 모델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이론과 과학의 연관성을 철학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알렌과 터비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되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다룬 이론 비판에서 깊이 영향받은 이 관점은 인문 철학을 통해 문화와 예술을 검토한다는 새로운 방향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는 동안 역사, 과학 그리고 마침내 철학에 의한 이론의 삼중 변위가 발생했다.

 

내가 영화연구에서 특징지은 메타비평적 혹은 메타이론적 태도에 대해 보드웰의 기여를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세대 가운데, 처음으로 보드웰은 영화 연구의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고, 영화 형식과 스타일의 역사적 연구와 비평적 분석의 쟁점들과 관련한 방법론적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1980년대 내내 보드웰은 영화의 “역사시학”[note title=”7″back][옮긴이] 보드웰은 『영화의 내레이션』 서문에서 1927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펴낸 『영화시학 Poetika Kino』을 인용하면서 보편적 미학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영화가 어떤 서술적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통해 구성되는지에 대한 형식적 방법을 주요하게 언급한다.[/note]을 알리는 방법론적으로 혁신적인 다수의 에세이들을 발표했다.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and the Fiction Film』(1985)에서 『의미 만들기』까지를 보면 그가 취한 접근 방식의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드웰이 이론에서 물러섰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좋은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어느 누구의 성과도 그보다 더 대단하거나 존경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note title=”8″back]이와 관련해서는 특히 보드웰의 『영화와 인지 심리학 Cinema and Cognitive Cognitivism』서문을 보라. “A Case for Cognitivism,” iris 5, no. 2 (1989), pp. 11–40. 여기서 내가 특히 관심 있게 살펴본 것은 보드웰이 이론을 ‘’좋은 자연화’’로 특징지은 지점이다.[/note] 대신 보드웰이 하려 한 것은 이론을 역사로 재조명하거나, 이론을 경험주의적 역사 연구의 맥락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드웰은 문화·미디어연구를 이중의 위협으로 지각하고 그에 반응했다. 즉 한편에는 간학제적 책임이 너무 광범위한 영역에 분포되어 있어 방법론적 불일치의 위험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연구의 맥락에서 영화 연구의 근본 기반─특정 가능한 효과들로 제한하는 형식적 대상으로서의 영화─이 분산되는 것에 따른 위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역사시학의 목적은 중심이 상실되었다고 간주된 연구 영역에 방법론적 일관성의 비전을 투영하며, 그 중심에 영화의 개념을 특정할 수 있는 형식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학은 형식과 양식의 문제들에 관여한다. 그것은 미학적 실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문화가 예술작품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사회적 관습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영화에 포함된 미학적 기능의 특수성을 설명한다.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시학의 역사적 측면은 국가적 그리고/혹은 문화적 맥락을 세심하게 시대별로 구분할 수 있는 특정 양식으로서의 서사(고전 할리우드, 소비에트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 전후 유럽 예술영화 등)의 확산을 다룬다. 여기서 보드웰은 개별 작품 분석을 위해 역사, 분석, 이론 사이에 있는 임의의 경계를 피하는 방식으로 치밀한 역사적 탐구와 명시적 이론 원리에 근거한 최선의 사례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1989년 해석에 대한 보드웰의 공격과 그의 인지주의를 촉진한 모델인 “중간 단계 연구”는 다음 세 가지 특정 명제들과 관련하여 이론을 재구성한다. 첫째, 중간 단계 연구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에서 벗어나 영화의 내재적 구조와 기능에 대해 다시금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그는 대상에 대해 정신분석 이론으로부터 경험적으로 범위를 정할 수 있는 정신과 지각 구조에 기반한 영화적 이해로의 비교 가능한 전환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역사에 대해 새롭게 강조한 것은 높은 단계의 개념적 관심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의 근본 데이터와 그 제작의 맥락에서 생성된 1차 자료에 다시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드웰은 해석이 추상 개념을 지나치게 고차원적으로 파악하여 대상과 의미론적으로 연결하는 해석을 비난한다. 여기서 영화-대상 자체는 그 특수성으로 사라지며, 하나의 개념적 사례에 그치게 된다. 이에 더해 해석자들은 그들이 실행하는 인지적 효과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한 발견을 반복적으로 언급하여 다른 영화들의 모델을 만든다.

 

이따금 『의미 만들기』와 『영화와 인지심리학』에 대한 제멋대로의 반응은 보드웰의 비평이 신경에 거슬렸다는 사실을 드러냈는데, 이는 그의 글들이 1980년대 말 영화 연구가 직면하기 시작한 이론의 교착 상태에 대해 진실되고 중요한 반응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대문자 이론으로 불리는 비평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역사시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암묵적 결합이다. 『포스트-이론』에 수록된 두 개의 서문에서 보드웰과 캐롤은 현대영화 및 문화 이론의 당시 상태와의 극명한 대조 속에서 좋은 이론의 구성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강하게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나는 현대 영화 이론에 대한 비평보다 자연과학 모델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관심에 내재된 인식론적 이상을 평가하는 부분이 더 흥미롭다.[note title=”9″back]역설적이게도 이 주장의 결과는 캐롤의 글에 강하게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영화 이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캐롤은 다음 세 가지 기본 논의를 통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에 대한 이론들을 비판한다. 우선 이 이론들은 선험적 조건의 예로 영화를 들면서 본질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이다. 다음은 그에게 이 이론들은 자료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 신조에 입각한 것이며, 따라서 경험론적 검증과 검토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들은 영화에 기반하고 있는 문제들에서 광범위하게 벗어나 있는데, 즉 이데올로기, 주체성, 문화에 대한 더 포괄적인 개념을 설명할 때 영화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특수성이 사라진다. “진리에 대한 통상적 기준들”을 규제된 이념으로 묘사한 좋은 이론은 인과적 추론을 추구하고, 규칙과 규준을 추적하여 보편성을 추론하며, 변증법이고, 최대한 자유롭고 열린 논쟁을 요구하며, 결론적으로 오류가능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좋은 이론은 지속적으로 오류를 제거하여 수정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간 단계 연구는 논쟁, 왜곡 그리고 수정을 거쳐 목적론을 향해 투영된 영화 이론이나 이론들에 임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포스트 이론에서 “포스트”는 부적절한 표기이다. 여기서 이론(Theory)으로 특징지어진 것은 인식론적으로 근거가 없는데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론 뒤에 오는 것은 오랜 논쟁과 수정주의의 기간을 거친 후에야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타당한 영화 이론은 아직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무한한 미래의 산물인 것이다.[/note] 보드웰과 캐롤이 그 서문에서 했던 비평의 이면에서 보면, 그들의 관점에서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이유reason를 대체하지 못하는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한 윤리적 호소이기 때문에 나는 “좋은 이론”이라는 그들의 이상적인 모델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캐롤이 제시하는 것처럼 여기서 “변증법”은 진실과 오류의 “일반적 기준”에 따라 왜곡 가능성이 있는 결과를 가진 공통된 문제들과 데이터 집합들에 대해 작동하는 합리적 행위자들로 구성된 이상적 연구 공동체의 근거가 된다.[note title=”10″back]메라 디어(Meraj Dhir)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논문 “영화이론 그리고 과학철학(Film Theor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에서 캐롤의 입장에 대해 훌륭하게 변호한다.[/note] 그런데 이때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이론들 못지 않게 철학적 기반이 확고하지 않다고 나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대문자 이론이 그 행위를 설명하지 못하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주제에 대한 강박으로 비판 받는 반면, 보드웰은 정신 기능으로서 “합리적 행위자” 이론을 내세우는데, 이는 사실상 검토하고자 하는 대상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좋은 이론의 주제이다.[note title=”11″back]관련된 논의들은 리차드 알렌의 다음 글을 보라. “Cognitive Film Theory,” in Wittgenstein, Theory and the Arts, pp. 174–209.[/note] 여기서 합리적 행위자의 개념은 이상적인 과학의 주제가 그 자신의 이미지 윤곽을 찾기 위해 그것이 구성하거나 발견하고자 한 정신의 모델 안에 투사projection한 것이므로 동어반복적 기능을 한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부터 자유롭고 가치 중립적인 인식론을 주장하기 위해 매진한다는 관점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이론』의 서문은 과학적 연구의 이상화된 비전을 모델로 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즉 연구 대상을 보편 가능하고 참된 모습으로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는 공통의 인식론적 기준으로 연합된 연구 공동체이다.

 

『영화 이론과 철학』에서 현대영화 이론에 대한 리처드 알렌과 머레이 스미스의 비평은 보드웰과 캐롤의 관점과 공명한다. 자본주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장된 윤리적 관심에 의해 작동하는 “인식론적 무신론”이라고 대문자 이론을 비난하면서, 알렌과 스미스의 비평은 포스트-이론 비판에서 빠진 많은 철학적 가설들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 분석적 관점으로부터 제기되어 과학 철학이라는 배경 뒤에 자리 잡은 “이론”에 대해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자연과학적 모델에 기반한 인식론적 이상을 구축하는 이론에 참여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설명 방식과 형식을 채택하면서, 적어도 이론의 구성과 관련한 철학은 과학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과학적 방법론과 구분할 수 없게 된 “이론”처럼 과학으로 사라진다.

 

이와 같이 나는 20세기 초에 분석철학이 자연과학적 방법에서 도출된 이론의 인식론적 이상을 투사해온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 이상이 인식론적 탐구와 윤리적 평가에서 균형을 이루던 철학의 오랜 관심사 사이에 괴리를 만들었다.[note title=”12″back] 버트런드 러셀은 1914년 논문 “철학에서 과학적 방법에 관하여”에서 이 개념의 간결한 정의를 제시한다.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과학철학은 다른 과학들처럼 파편적이고 잠정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완전히 진리가 아니더라도 필요에 따라 수정한 뒤에도 여전히 생산적 상태를 유지하며 가설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한 연속된 근사치의 가능성이 무엇보다 과학적 승리의 원천이며, 이 가능성을 철학으로 이전한다는 것은 과장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하여 방법에서의 중요한 진전을 보장해야 한다.” Mysticism and Logic: and Other Essays (New York: Longmans, Green and Co., 1918), p. 113 (강조는 필자)에서 발췌. 이는 캐롤이 지지하는 인식론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론들은 아직 예비적이고 왜곡 가능한 가설들을 통해 파편적으로 구성되며, 전체를 이해할 수 있기 전에 그 부분들의 사실적 특징을 확립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이론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증거에 따라 시험되고, 정제되거나 거부된 후속 가설들을 통해 연속해서 진리에 더욱 근접하는 목적론적 방식으로 나아간다.[/note] 이때 적어도 일반적 의미에서 인문학으로 등장한 이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라진다. 한 가지는, 이론 활동이 과학으로 넘어간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철학 자체가 자율성과 자기 동일성을 잃기 시작한 것인데, 이는 과학적 이상에서 반영된 것으로 비춰 보면 인식론적 기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분석철학이 하나 이상의 측면에서 이론을 공격한 것이다. 거기엔 콰인이 “자연화된 철학”[note title=”13″back][옮긴이]인식론이 선험철학의 부정확함을 거부하고 자연과학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콰인의 합리론.[/note]이라 부르는 것의 지배적 규범에서 밀려난 인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개념과 방법론을 이용하여 기존 영화 이론을 어느 정도 실추시키려는 암묵적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대한 미학적 사고가 과학적 모델과는 거의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캐롤은 미래 어느 시점일 순 있겠지만, 아직 영화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맺는다. 이와 같이 영화 연구를 둘러싼 이론에 대한 갈등은 더 중요한 논쟁을 축소판에서 재생산하는데, 이는 과학에 관한 철학의 위치 그리고 인문학에서 인식론과 인식론적 비판의 역할 모두에 관계된 것이다. 분석철학은 과학철학의 맥락에“이론”을 배치함으로써 영화를 보완하려 했다. 이는 동시에 수십년간 인문학적 특징을 띤 인식론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상 인식론이 인문학을 퇴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후 1990년대 내내, 영화 연구에서 철학은 이론에 도전하며 과학과 연대했다. 이 논쟁의 단계에서 “이론”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인문 철학이 과학에 이론을 넘겨주고 둘 모두에 반대하면서 아주 빠르게 “과학”이 논쟁적 용어가 된다. 이 전환의 중요한 열쇠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연구들 특히 『철학적 탐구』, 그리고 『지식의 나무 그리고 다른 에세이들The Tree of Knowledge, and Other Essays』 (1993)과 같은 저작에서 G. H. 폰 라이트G. H. von Wright가 인문 철학을 필요로 한 부분에 담겨있다.

 

내 연구에서 그리고 인문학 일반에서 갖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관심은 과학과 철학을 동일시하는 지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공격과 관련있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일부가 아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4.111)라고 주장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에서 도출된 인식론적 모델과 결합한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 개념에 만만치 않은 도전을 한다. 러셀과 대조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과학만이 설명과 지식의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되며, 실천으로서 철학이 갖는 특수성을 주장한다. 이론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공격을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설명의 부적절한 형식으로서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기서 내 주요한 관심은 과학과 이론 모두 구분할 수 있는 인문 철학을 지지하는 논의를 탐구하는 데 있다.

 

철학이 다른 방식으로의 설명하기와 이해하기를 포함한다면, 어째서 그 대안이 이론에는 해당되지 않을까? 알렌과 터비가 『비트겐슈타인, 이론과 예술Wittgenstein, Theory and the Arts』 서문에서 요약한 것처럼 철학은 그 주제가 본질적으로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다. 즉 경험적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은 자연뿐이다. 여기서 “경험”은 사전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명확한 정의를 갖는다. 이와 달리, 철학은 개념, 의미의 문제와 연관되며, 이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의 사용과 창조적 표현에 이미 접근 가능하고, 그것이 공동으로 집적된 지식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에서 경험과 관련이 없다.

 

이것은 두 번째 기준과 관련된다. 즉 경험적 현상에 관한 진술은 필연적으로 반증 가능해야 한다. 반면 철학적 탐구는 주어진 명제들로부터 개념과 의미의 한계를 검증하는 것에만 관여한다. 이런 식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인간 행동과 창조성을 연구하기 위한 최선의 대안으로서 그가 말한 “언어적 의미의 자율성”에 근거한다. 이 개념은 이유reason와 원인cause 사이의 구별을 통해 사례로 입증된다. 인과적 설명에서 각각의 결과는 가설에 의해 식별된 원인이 있음을 추정하며, 추가로 등장한 증거에 의해 그 원인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인과적 설명은 과학적 맥락에서는 타당한데, 이때의 행위는 선행하는 지식이 없는 현상에서 도출된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인간의 행위와 행동은 인과적 설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이는 행위자가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율성”은 행위자가 확실한 자기 검증과 자기 정당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과학적 질문과 철학적 질문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차이는 과학이 자연 세계라는 외부 현상에 대한 가설을 검증하는 데 있다. 하지만 철학은 내면 혹은 자기 탐구만을 인정한다. 철학은 참 거짓에 관한 단일한 문제로 접근한다기보다 선행하는 경험과 지식을 통해 명제를 검증하고 “올바름”에 관한 복수의 판단을 내린다.

 

이는 영화 연구에서 이론에 속한 이념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개념적 혼란을 풀기 시작할 한 가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째서 보드웰과 캐롤이 어떤 과학적 견해에 그렇게나 집착해왔는지, 어떤 이유로 이론은 문화적 혹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도 꽤나 똑똑한 지식인들에게 그토록 설득력 있는 것으로 남았는지 묻는 것이다. 터비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영화의 본질과 기능이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법칙과 같다면 어째서 영화이론에서는 기본적인 경험주의적 연구가 부족한가? 왜 이런 연구는 어쩐지 영화 이론가들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나? 그리고 어떻게 영화 이론은 그와 같은 지속적인 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인가?”[note title=”14″back]Malcolm Turvey, “Can Science Help Film Theory?,” Journal of Moving Image Studies 1, no. 1 (2001), http://www.uca.edu/org/ccsmi/journal/issue1_table_contents.htm.이 부분은 최근 출간된 버전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다음을 참조할 것. Turvey, “Can Scientific Models of Theorizing Help Film Theory?,” in The Philosophy of Film: Introductory Texts and Readings, ed. Angela Curren and Thomas E. Wartenberg (London: Blackwell, 2005), p. 25.[/note] 

 

답하자면 이런 기준들이 문화에 대한 연구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영화 이론은 다른 모든 인문학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간 활동과 관련 있으며, 따라서 고도로 선행하는 것, 심지어 영화 이론 자체의 지식과 검증을 상정한다. 어떤 문화 활동과도 마찬가지로 영화는 인간의 창작물이며,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 존재 기반을 형성하는 관행과 제도 속에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관행과 제도에 대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이론을 명제나 개념의 형태로 구성하는 것에 대해 어떤 욕구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일관되고 한결같이 관행과 제도를 통해 행동한다. 이것이 경험적 연구와 실험의 부재 속에서도 문화 이론들이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이유이다. 그 힘과 설득력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어느 정도까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 보이는 지에 근거한다. 이때 우리는 역사적 전개에 따른 우리 자신의 관행에 관한 비판적 탐구 너머의 외적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 연구가 복수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이론이라고 불려왔지만, 이제 그것을 미학이나 철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인문 철학이 무엇이며, 영화 철학이 어떤 모습일지 검증하기 위해 “이론”을 잠시 한쪽에 접어 놓음으로써 방법론적이고, 개념적인 명확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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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의 제목을 Éloge de la théorie로 정하고 싶었는데, 프랑스어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를 이론을 위한 애가Elegy for Theory로 지으면서도 염두에 두었다. 찬미eulogy와 애가elegy라는 영어에서의 두 의미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결합한 엘로주éloge는 찬가와 진혼곡, 찬사와 송별곡chanson d’adieu두를 함의한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유리한 법적 판단으로 표현하는 두 번째 의미를 담고있다.) 확실히 나는 이론의 모험적 진취성이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째서 현대 비평 담론에서 이론에 대한 찬사는 거의 없고, 아무도 그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 걸까?

 

우리는 우선 이론에 대한 논쟁을 서로 다른 인식론적 이해관계를 가진 견해에서 검토해야 한다. “인식론적 무신론”이라 비난 받은 개념으로서 이론은 대륙에서 빼앗긴 뒤 영미 분석철학의 지형과 과학의 해안에 의미론으로 돌아온다. 초기에 이 논쟁은 이론과 철학 사이의 충돌로 제기됐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쟁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그것은 이론을 문제로 삼고 있긴 했지만 철학을 통해 과학에서 인문학으로 이론을 복원하기 위한 전환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언어의 인식론적 완벽성보다 테오리아라는 고대철학의 과제를 복원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학과 인식론 이론이 종종 영혼의 탐색과 인식론적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인식론적 자기 검증에 윤리적 차원을 복원하는 철학 혹은 테오리아와 멀리서부터 공명하는 연관성을 이론에서 찾고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려 한 것처럼, 이론 이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 모두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를 재편한 지점에서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론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공격이 너무 광범위하고 또 제한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인문학에서 철학으로 가져온 것을 부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문학적 연구를 경험적이고 인과적 설명의 사슬에서 해방하기 위해 인문 철학이 명제적 주장을 할 수는 있음에도, 이 주장들이 맞거나 틀려야 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설득력과 명확하고 확증적인 자기 타당성이 요구될 뿐이다. 인문학적 이론이 문화를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와 달리 철학적 탐구는 인간 존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행위를 검증하며, 이 지식은 원칙상 공개되고 모두에게 접근 가능하다. 여기서 보드웰이 말하는 의미의 “자연화”는 좋든 나쁘든 인문학적 내적 탐구와 거의 관련이 없으며, 새로운 정보를 찾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우리가 이미 알고 행하고 있고, 혹은 행하는 방법을 아는 것에 대해서만 명확히 평가하며, 이를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근거로 가치가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서술적 강조로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역사시학의 중요한 한 측면, 즉 문화적 대상들의 내적 규칙들과 일상 속에서 이 대상들과 관계된 의미 만들기 활동들에 대한 분석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역사에 대한 “비경험적” 개념이 특수한 철학적 이유로 요구된다. 자연 법칙은 적어도 인간의 맥락에서 초시간적이며, 따라서 반증 가능한 인과적 설명을 통해 적절하게 탐구된다. 대신 문화적 지식은 특정한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 범위에 대한 지속적 재평가를 필요로 하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그리고 상충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전개된다. 따라서 인류사와 자연사가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 영역이 중복되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연구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자와 달리 인문학자는 바로 눈 앞에서 변화하는 현상을 검증해야 한다. 인문학자는 자기 자신이 변형의 과정 속에 있는 동안에도 생성 중인 그 과정에 대한 변화를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론의 진취성은 어느 정도까지 여전히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철학이 해왔던 그 활동의 특수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 질문은 다르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21세기 인문학의 운명 그리고 인문학의 미래에 위치할 영화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가능한 답변은 인식론적 무신론이 반드시 윤리적 비판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실제로 오늘날 철학과 그것의 가장 오래된 기원과의 연결은 우리의 존재 방식과 그 변형 가능성에 대해 검토함으로써 앎의 양식들을 평가하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프로젝트를 통해서이다. 나는 이 질문들을 윤리적이며 인식론적 평가에 대한 서로 닮은 연구의 사례로서 두 현대 철학자들, 질 들뢰즈와 스텐리 카벨의 논의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 것이다. 들뢰즈와 카벨은 영화에 가장 헌신적이었으면서도 철학의 특수성과 영화에 관한 쳘학적 표현을 뚜렷하게 고유한 개념들로 전개한 현대 철학자들이기도 하다. 묶어서 보기 어려워 보이지만, 이 두 철학자를 함께 읽으면서 영화와 현대철학에서 우리가 이해한 그들이 고유하게 기여한 바를 깊이 있고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영화) 철학이 이론과 구별될 수 있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다. 동시에 나는 인문학에 대해 우리가 원한다면 계속해서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인식론적, 윤리적 자기 검증이라는 유동적인 메타비평의 영역을 구별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시네마 저작들은 영화 철학이 무엇으로 보일 수 있을지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요소들을 두 쌍으로 제시한다. 이 요소들은 들뢰즈의 철학 작업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다. 그 한편에 이미지와 개념의 관계가 있다. 여기서 개념들의 생성은 철학 활동의 자율성을 정의하는 반면, 이미지는 주관성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두 번째의 경우 니체가 제시한 윤리적 행위의 철학적 해석과 평가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적인 재검토와 관련된다.

 

들뢰즈는 『시네마2: 시간-이미지Cinema 2: The Time-Image』를 이론에 대한 기이한 비탄으로 마무리 한다. 이미 1985년에 그는 이론이 영화에 대한 사상적 지위의 자부심을 상실했으며, 실제 창작과는 무관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론은 영화의 실천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이론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천이거나 개념의 구성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론 역시 그 대상 못지 않게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영화 이론은 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낸 개념, 그 스스로 다른 실천에 해당하는 또 다른 개념과 관계된 것이다. (…) 영화 이론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 못지 않게 실용적이고, 효과적이며, 혹은 실재적이다.  (…) 영화의 개념들은 영화에 부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개념들은 영화의 개념이지 영화에 대한 이론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을 때에도, 거기에는 언제나 정오에서 자정까지의 시간이 존재한다. 영화 자체는 이미지와 기호라는 새로운 실천이며, 그 이론 철학은 개념적 실천으로 생산해야 한다.[note title=”15″back]Gilles Deleuze, Cinema 2: The Time-Image, trans. Hugh Tomlinson and Robert Galet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p. 280. [질 들뢰즈, 시네마2: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note]

 

여기서 철학은 그것을 대신하는 이론과 분명히 어긋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들뢰즈가 창작과 개념에 관한 현대적 순간이 약하다고 토로하면서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 이 질문에 가장 충실한 답변은 시네마 저작들에서 제기된 그 문제들을 가장 확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이어진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인간 창작의 세 가지 큰 영역은 예술, 철학, 과학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표현, 즉 지각적, 개념적, 기능적 방식에 기반한 창작 행위를 포함하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직면한 문제는 철학적 표현이 예술 혹은 과학적 표현과 얼마나 다른지 알면서도 그것들과 대화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지각, 개념, 기능은 서로 다른 표현 양상이며, 각각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생산적 활동의 자율성에 영향을 주는 방식은 아니다. 예술가 혹은 과학자는 확실히 개념 활동에 깊숙히 참여하며, 철학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활동의 결과물인 지각과 기능은 자율성과 특수성을 유지한다.

 

한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이 결과물들의 특수성은 쉽게 설명된다. 과학은 기능을 생성하고, 예술은 감각의 총합을 생성하며, 철학은 개념을 생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악마는 이 세부사항 속에 있다. 예술에서 지각은 감각 물질의 구성을 통한 정서적 경험의 창작물로 나타난다. 회화에서 이 표현 물질은 선/색의 덩어리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운동/지속성/사운드의 덩어리가 이에 해당한다. 대신 기능의 역할은 과학적 의미에서 이론과 철학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돕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두 가지 전체를 고정된 관계 속으로 집어 넣는 바로 그곳에 함수-기능function이 있다. 뉴턴의 역제곱 법칙이 적절한 예를 제공한다. 수학적 표현인 함수는 사유(첫 번째 전체)를 자연 현상(에너지 전달)으로 향하도록 것이다. 표현으로서 함수는 물론 특정 현상이 아니며, 생각하는 것과도 유사하지 않다. 함수는 기술어 혹은 알고리즘이다. 이는 자연계에서 움직임을 기술하는 데는 중요하지만, 그 특수한 성질을 해결하는 열쇠는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이며 일반적이고 그 일반성은 시간의 독립성에서 도출된다. 그것이 서술을 만들고 이 서술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타당하며, 따라서 두 번째 전체로 제시된다. 이렇게 향후 행위에 대한 예측일 때 함수는 과학에서 “이론”이라 말하는 것의 전형이며, 이 예측이 규칙적이 될 때 함수는 “법칙”이 된다.

 

반대로 개념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예외적이며, 그 자신의 시간성과 인간적 특수성으로 인해 사유와 관계된다. 이런 이유로 철학은 과학보다 예술에 더 가깝다. 예술적 표현성은 예술과 인간 정서의 감각적 산물에서 그 실체를 발견하고, 과학적 표현성은 자연 현상의 예측된 움직임으로부터 확실함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개념은 오직 사유와 사유 행위를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사유한다는 것은 감각과 물질 세계로부터 단절된 순수하게 내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술은 이념, 기호, 이미지에서 이 질문의 개념과 관계된 중요한 답을 제공한다.

 

1991년, 들뢰즈는 페미스FEMIS(프랑스 국립영화/텔레비전 학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강의를 했고 그 발췌본은 “영화에서 하나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예술에서 하나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이념은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이념은 영역, 환경 혹은 물질을 특정한다. 들뢰즈는 “이념은 이미 이런 저런 표현 방식에 관여하며 그것과 불가분한 잠재성으로 다뤄져야 하는 만큼, 내가 하나의 이념 일반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기술techniques에 따라서 나는 주어진 영역 안에서 이념을, 말하자면 영화 안에서 이념을, 더 정확히는 철학 안에서 이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note title=”16″back]Gilles Deleuze, “Having an Idea in Cinema,” trans. Eleanor Kaufman, in Deleuze and Guattari: New Mappings in Politics, Philosophy, and Culture, ed. Eleanor Kaufman and Kevin Jon Helle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8), p. 14.[/note]라고 말한다. 이제 철학에서 이념들은 이미 들뢰즈가 말한 ‘’사유 이미지’’라는 특정 종류의 이미지에 의해 방향성을 띠며, 따라서 어떤 접속이나 관계는 반드시 이념과 연결되어야 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사유 이미지는 전개념적preconceptual 표현으로 나타난 특정 지형 혹은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되거나, “사유 이미지는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사유 속에서 방향을 정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부여한다.”[note title=”17″back]Gilles Deleuze, What Is Philosophy?, trans. Hugh Tomlinson and Graham Burchel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 37.[/note] 그렇게 하나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특수한 구성, 결합 혹은 들뢰즈가 기호라고 말한 연결고리를 통해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주장하듯 기호는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하는 역량을 표현한 것이다. 이념은 사유 속에서 자율적 배열sequence 혹은 이념의 배열과 분리될 수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concatenatio라고 부른다. 이 기호의 연결concatenation이 형상과 질료를 결합하고, 포텐시아potentia[note title=”18″back][옮긴이] 스피노자의 인간학적-윤리학적 논의의 측면에서 정신은 신체와 연장된 실재(심신평행론)이며 여기서 포텐시아는 자연의 필연성과 정신의 능동성이 함께 작용하도록 이끄는 역량을 말한다.[/note]가 우리의 사유, 행동 혹은 창조의 역량을 표현하는 정신적 자동 기계로 구성한다.

 

들뢰즈의 시네마 저작의 중요성은 운동과 시간을 모델로 한 그의 철학적 기호학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는 데 있으며, 운동 내지 시간에 대해 이미지와 기호가 어떻게 개념적 혁신을 드러내는가 하는 데 있다. 즉 이미지와 기호를 통해 사유의 역량을 재개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유 이미지가 배아개념적protoconceptual 표현을 수반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예술은 이미지와 기호가 전개념적 표현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연결된다. 이 사유 이미지와 예술이 새로운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지형을 예비한다. 영화는 사유를 그릴 수 있고 생각하기를 요청할 수 있도록 최적화 되어 있는데, 사유처럼 영화의 이념들은 특정한 종류의 접속과 연결로 특징지어진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모든 사례는 개념을 암시하는 이념의 표현이며, 철학이 예술과 관련하여 하는 일은 예술의 이념에 암시된 개념을 표현하거나 형태를 부여하여 새로운 구성 혹은 조합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은 예술에서 발생한 이념의 필연성을 초래하는 자동기법을 개념적 형태로 뚜렷하게 제시한다.

 

또한 들뢰즈가 사유 이미지와 관련하여 이미지와 개념을 특징 지은 다양한 방식 가운데 윤리적 차원이 있다. 이는 들뢰즈에게서 해석과 평가라는 분리할 수 없는 두 활동을 포괄하는 니체식 윤리학을 암시한다. 들뢰즈는 “해석한다는 것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결정하는 것이다. 평가한다는 것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힘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note title=”19″back]Gilles 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trans. Hugh Tomlins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3), p. 54.[질 들뢰즈,『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민음사, 2001, 참고][/note]라고 쓴다. 여기서 들뢰즈와 카벨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니체라는 공통의 관심사만이 아니라 존재론에 대한 그들 고유의 개념이다. 카벨은 존재론이란 말을 직접 사용했고, 들뢰즈는 그렇지 않았지만, 둘 다 존재의 특수한 방식을 평가한다. 이는 영화의 존재나 정체성이 아니고, 혹은 영화를 예술로 간주하려는 것도 아니며, 정확히 말해 예술이 우리 안에서 존재 방식을 자극하고, 더 심오하게 말하자면, 영화와 다른 형태의 예술이 어떻게 우리에게 표현하는지, 또는 어떻게 우리를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 놓는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두 철학자에게서 윤리적 관계는 사유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 그리고 사유와의 관계를 유지하는지 아닌지가 존재 방식과 타자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에게서 이 관계를 파악하는 열쇠는 그가 분석한 존재론적이며 윤리적인 개념으로서 이미지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시네마 저작들에서 이미지는 영화적 창작의 산물이 아니라 그 원료이며, 세속적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표현을 부여하는 원질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주장한 핵심은 사물들 안에 이미 사진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에너지처럼 이미지는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도 없다─그것들은 우주의 한 상태이며, 끊임없이 전이되고 다양화 하는 비주관적 세계를 감지하거나 빛을 발산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볼 때 지각은 대체로 추출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제한된 지각의 맥락을 통해 이 거대한 세계의 변화하는 체제 속에서 우리 자신을 향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생리적 한계와 인간적 필요에 의해 지각 혹은 특수한 이미지를 추출하고 만든다. 이 이미지가 바로 주관성의 형태이며, 이는 세계와의 내적 상태와 외적 관계 사이에 있는 갈림길에서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친밀하게 상호작용 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내부) 그리고 세계(외부)와 관계 맺고 있다. 따라서 물질과 세계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있기에 주관성을 순수한 내면성으로만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마찬가지로 사유는 내면성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고, 거기서 우리 자신의 방향을 이끌고, 우리에게 제공하는 재료를 통해 창조하기에 이르는 방식이다. 따라서 예술, 철학 그리고 과학의 자율성을 고찰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르면서도 연관된 사유 이미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지각은 시각적이고 음향적인 감각이며, 이는 우리에게서 정서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개념과 함수는 보다 더 추상적이다. 함수는 과학적 표현이며, 기호는 미학적 표현이다. 그러면 예술과 사유의 관계는 이미지의 본질이 아니라 조합과 결합의 논리에 있다. 확실히 모든 예술 이미지는 일관성이 없거나 매력이 없어 보이더라도 사유 이미지이며, 감각적 형태로 부여된 사유의 물리적 흔적이자 표현이다. 그렇지만 미학적 기호가 명확한 개념을 암시할 수 있다해도, 이는 전적으로 정서적이고 전개념적이다. 그렇다 해도 이미지에는 철학적 역량이 있다. 예술가의 이념이 반드시 철학자의 이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단지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정서를 발생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사유하도록 촉진하거나 사유의 새로운 역량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감각으로부터 추상적 사유로, 하나의 사유 이미지에서 이미지 없는 사유로 내던져지고, 그곳이 곧 철학의 영역이 된다. 또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이동하면서 예술은 개념에 형태를 부여하도록 철학을 고무시킨다.

 

예술에서 철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통해 예술, 즉 이미지와 기호에서 표현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결국 생각하기를 요구한다는 의미일까? 철학에서는 시간을 독립 변수로 받아들일 만큼 과학과 다른 길로 갈라진다. 사실 들뢰즈 (혹은 베르그손)의 철학 프로젝트를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하자면 시간과 변화를 철학의 사유 이미지로 다시 도입하기 위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이 예술에서 영감을 발견하려는 이유는 창조하려는 의지가 가장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여러 다른 방식들에서 처럼 들뢰즈는 현대철학과는 다른 결을 갖는다. 다행히 과학이 창조의 권능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지만, 개념적 성격은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과학이 철학에서와 같은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철학은 점점 더 예술과 가까워졌고, 예술도 철학에 대해 마찬가지다. 이는 21세기가 재고해야 할 20세기 철학에 대해 전해지지 않은 멋진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들은 과학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근대 예술은 미학적 역량을 더 자세히 서술하면서도 점차 철학적 표현에 가까워졌다.

 

예술을 철학적 표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영화에 관심이 있는 들뢰즈와 카벨 사이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들뢰즈처럼 카벨의 시네마 저작들은 영화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연구이다이 책들은 무엇보다도 철학 작업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어떻게 20세기 정신과 존재의 일상을 관통해 왔는지에 이르는 깊은 자각 속에서 그 저작들을 영화 문화에 대한 연구로 읽는 것 역시 타당할 것이다. 아주 다른 방법이긴 하지만 들뢰즈와 카벨 모두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이미 철학이며, 이 철학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는 영화의 이념에 대해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초기 영화사와 연결하여 예시한다. 철학이 사유와 이미지에 관계된 운동과 시간의 문제로 되돌아간 순간, 영화적 장치는 이 문제들의 효과도 아니고, 그것들의 유비analogy로서 나타난 것도 아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은 현재적이며 지속적인 철학적 문제들의 미학적 표현인 것이다. 들뢰즈의 사유가 단순히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 사유는 기호들의 개념과 유형학의 형식으로, 또한 미학적 형식 속에서 전개념적으로 제시된 문제들의 직접적인 철학적 표현이다.

 

카벨도 비슷한 관점을 제시하긴 했지만, 존재론과 윤리에 관한 문제들에서 보다 분명한 틀을 구성한다. 내가 보기에 카벨의 연구는 특히 인식론과 윤리에 대한 관심의 균형을 잡으려는 고유한 시도로서 인문학을 위한 그리고 그에 대한 철학의 범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존재론과 윤리라는 두 주요 이념이 카벨의 철학적인 그리고 영화적인 연구를 통합한다. 나아가 이 두 이념은 어느 정도 연대기적으로 뒤따르는 또 다른 동일한 문제의 반복이라기보다 서로 덜 분리되어 있으며, 말하자면 회의주의와 도덕적 완벽주의라는 개념이 철학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왜 영화가 이 대립과의 동반 혹은 예증으로서 그토록 중요한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단서가 카벨의 주요 에세이 「사진이 생각하도록 요구한 것」[note title=”20″back]Stanley Cavell, “What Photography Calls Thinking,” in Cavell on Film, ed. William Rothma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5), pp. 115–34.[/note] 이라는 제목에 들어있다. 예술이나 이미지가 사고think한다는 것, 혹은 그것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유의 스타일로 철학적 문제에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보여진 세계The World Viewed』의 출간 시기로 대표되는 카벨 영화 철학의 초기 단계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또한 인식론적으로 반응했다. 이 존재론은 예술적 매체도 아니고 예술작품의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도 아니며, 예술이 어떻게 회의주의에 속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존재 양상 혹은 존재 방식을 표현하는지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의 존재론은 영화 매체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세계 그리고 그 세계와 관계 맺는 우리가 현존하는 방식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나타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표상과 지각의 조건에서 특정한 철학의 문제인 회의주의와 그것의 극복을 표현한다. 카벨이 주장하듯 만일 영화가 “회의주의를 움직이는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의주의적 태도의 사례를 든 것도 아니고 그것과의 유사성도 아니다.[note title=”21″back]Stanley Cavell, The World Viewed: Reflections on the Ontology of Film, enlarged edition (1971;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p. 188.[/note] 그보다 영화는 이 문제와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 모두를 표현한다. 이 철학적 이미지에서 “운동”의 성질은 특정한 의미로 볼 때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이다. 세상을 보고 조우하는 바로 그 장치dispositif로서 영화는 철학의 역사적 딜레마(세계와 지각적으로 괴리된 회의주의)를 과거로 제시하는 동시에 근대적 주제의 방향을 가능한 미래로 설정한다. 회의주의가 시각 테크놀로지로 스스로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은 회의주의가 더이상 우리가 숨쉬는 존재론적 공기가 아니라 철학 문화 가운데 나타난 일시적 단계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카벨이 주장하듯, 영화가 우리 앞에 붙잡고 있는 현실이 바로 우리 자신의 지각 조건이라면, 그것이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존재하며 혹은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다시 존재할 수 있는지 인지할 가능성을 연다. (실제로 회의주의의 운명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카벨이 검증한 것은 들뢰즈의 영화 윤리를 이 세계에 대한 믿음과 그 변화 가능성으로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note title=”22″back]다음 나의 글을 참조할 것. See my essay, “A World, Time,” in The Afterimage of Gilles Deleuze’s Film Philosophy, ed. D. N. Rodowick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forthcoming).[/note]) 이런 이유로 영화는 이미 쇠퇴한 회의주의의 상징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철학이 떠난 자리를 또 다른 존재 방식으로 향하는 통로인 전개념적 표현을 통해 차지한다. 이것이 영화가 회의주의(역설적으로 우리를 세상과 다시 연결하고 그 실존적 힘을 과거의 존재로 주장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회의주의적 지각의 형태를 거의 완벽하게 실현하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인식의 역설은 근대성이 더이상 우리의 존재 방식 혹은 시각의 방식을 특징짓지 않는다는 점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밖에 다른 것을 예측해야 한다.

 

후에 출간된 카벨의 저서들 가운데  『말들의 도시들Cities of Words』의 말미에서 이러한 인식론적 조건의 시간성은 예술과 윤리적 평가에 대한 문제로 재고된다. 이 윤리적 평가의 핵심 개념은 카벨이 말하는 도덕적 완벽주의이다. 도덕적 완벽주의는 변화나 생성에 대한 욕망의 비목적론적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의 영화 문화는 지각과 사유의 딜레마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에 반응한다. 이 존재론적 문제에서 윤리적 문제로 이어지는 궤적은 카벨이 영화를 통해 근대성의 주관적 조건을 세속적 혹은 인식론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정지된 것으로 그의 설명을 심화시키기 위한 예시이다. 다음 두 경우 모두에서 영화는 회의주의의 문제에 직면한다. 첫 번째 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관성에 의해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좌절이다. 즉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의 스크린 뒤에 있다. 두 번째 예는 세계의 상태 혹은 개인의 현존재 방식에서 갖게 된 도덕적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이 분열은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본질적으로 시간성과 연관된다. 칸트가 제기한 이 문제와 같이 사물과 지식에 관한 그리고 그것들의 인과법칙을 비롯한 이해의 영역이 시간을 독립 변수로 도출하는 가공할 힘을 가진 근대 과학적 태도를 정의한다. 자연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어떤 규칙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규칙을 바꿀 수 있다면 이는 인과적 추론의 힘을 통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를 그토록 자극한 문제는 초시간적 이성이 도덕적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 있었다.[note title=”23″back][옮긴이] 칸트는 처음과 두 번째 비판서를 통해 자연과학에서 물자체(ding an sich)를 오성(verstand)의 한계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도덕적 목적론, 즉 자유의지를 구분했지만,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에서는 그와 같은 이성의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취향이나 미와 같은 공통감(sensus communis)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판단력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으로 이 모순을 매개하여 우리가 공통감이라는 관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note]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은 어떻게 해서 인과적 관계들 그리고 도덕적 자유의 표현의 대상으로, 오성悟性과 동시에 이성의 대상으로 인간을 묘사할 수 있을까 ? 물질적 생명체로서 우리가 경험적 세계와 인과법칙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철학의 과제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게 경험하는지를 설명하고 미래의 존재를 투사하여 변화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벨이 생각한 도덕적 완벽주의는 우리를 회의주의적 방식으로부터 인간을 변화시킬 가능성으로 이끌며, 현대의 존재 방식을 평가하고 또한 더 나은 미래의 존재를 예견하여 회의주의를 초월하는 더욱 심오한 도덕적 문제로 이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문제는 끝없이 세계를 알아가는 데서 발생한 개인의 도덕적 좌절을 넘어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과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데서 발생한 개인의 좌절이다. 따라서 에머슨(혹은 비트겐슈타인, 니체 혹은 프로이트)에 대한 카벨의 관심은 우리를 더 낫게 해주거나 평화를 얻는 데 결함이 있는 지식을 비롯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절망으로 예시된 철학의 균열을 치유하는 것이다. 대신 도덕적 완벽주의는 윤리적 절망과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최종 목적 없는 시간성이 된 자기 변형에 대한 욕망 안에서 근대적 주제를 붙잡는다. 카벨은 다음과 같이 쓴다. “에머슨과 소로의 인간 존재의 의미에는 영혼의 최종 상태에 도달하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음에도, 오직 그리고 끝없이 향하는 다음 단계, 에머슨이 말한 ‘성취하지 못했지만 성취할 가능성이 있는 자아’─항상 그리고 결코 우리 것이 아닌 자아─는 악에서 선으로 혹은 잘못에서 옳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속박에서 자기 이해와 사회성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이다.”[note title=”24″back]Stanley Cavell, Cities of Words: Pedagogical Letters on a Register of the Moral Life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 13.[/note]

 

이런 생각은 재혼극과 미지의 여인을 다룬 멜로드라마에 대한 카벨 후기 저작의 기저를 이룬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카벨의 관심은 도덕철학의 가장 심오한 고민을 평범하고 일상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표현을 일상 언어와 일상의 관심들로 변환하려 한 것처럼, 바로 영화는 도덕철학을 일상적 드라마의 표현 맥락으로 끌어낸다.

 

이 영화들은 철학이 이미 탐구하고 있던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방법의 다른 구성으로 생각되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전문화 혹은 아카데미화가 진행된 이후, 특히 그것이 형성한 형식 속에서 때로는 섣부르게 변하기도 한다…이 주장에 암시된 것은 최신의 위대한 예술인 영화 자신이 아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평범한 삶에서 종종 보이지 않는 동반자가 되어 철학을 드러낸다는 것이다.[note title=”25″back]Ibid., p. 6.[/note]

 

현대철학이 도덕적 완벽주의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지점에서, 모든 예술과 감각적 표현의 전개념적 방식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반응해왔다. 따라서 오늘날 영화 철학의 위대한 프로젝트는 이 도덕적 성찰을 재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철학의 관계에서 생긴 균열을 사례로 들어 치유하는 것이다.

 

카벨은 『말들의 도시들』 서언에서 소로가 개탄한 부분을 다시 언급한다. “요즘 세상엔 철학을 가르치는 학자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한때는 철학자로 먹고 사는 것이 칭송 받는 일이었기에 철학을 가르치는 것 자체만으로도 칭송 받았다.” 소로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꽤나 지난한 철학의 삶을 예견한다. 누군가 이론을 위한 애가를 작곡해야 한다면, 그것이 현재 들어선 천년의 철학을 위한 새로운 삶을 일깨울 수 있길 기대해보자.

 

 

David Norman Rodowick, “An Elegy for Theory,” October Vol. 122, 2007, 91-109.
김웅용
필름/비디오을 전공했고, 기록의 이면에서 발견된 감각의 결핍과 그 시간성에 대한 관심으로 〈피부 밑에 숨은 이름들〉(2014), 〈밤과 안개〉(2018) 등 리얼타임 비디오 퍼포먼스, 〈데모〉(2018), 〈웨이크〉(2019), 〈여자의 파장으로〉(2020) 등 비디오를 제작했다. 대학원에서 영화의 확장성과 무빙 이미지의 역사성에 대해 공부하며, 『무빙 이미지 전시하기: 다시 본 역사』를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