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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로 보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번역 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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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스 프랑켄Frans Francken, 〈컬렉터의 캐비넷A Collector’s Cabinet〉, 1625.
프랜스 프랑켄Frans Francken, 〈수집가의 캐비넷A Collector’s Cabinet〉, 1625.

 

옌스 호프먼과 마리아 린드는 큐레이팅에 관한 두 가지 다른 관점으로 활기 넘치는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전시 형식을 거의 채택되지 않는 것도 포함하는 전례前例에 따라 탐색하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확장된’ 개념을 가지며 그의 주된 목표는 예술을 대중에 알리는 데 있다. 문제는 예술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으로 오늘날 급격한 생산 증가는 대단히 위험한 상태로 보인다.     

 

옌스 호프먼(이하 호프먼): 저에게 큐레이팅은 기본적으로 전시 제작exhibition making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큐레이팅’이란 용어가 무언가를 선별하는 것과 관련된 아무 과정이나 설명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분야에서 쓰이는 데 불만을 느낍니다. DJ가 파티에서 음악 목록을 큐레이팅하고, 요리사가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큐레이팅하고, 장식업자가 고객의 거실을 큐레이팅하는 것 등등처럼 말입니다. 제게 큐레이팅은 특정 이론이나 논의를 공식화하는 것입니다. 작품을 대중에게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전시 제작을 위해 예술작품이나 오브제의 셀렉션을 만드는 데서 시작해서 말이죠. 당신은 전시 제작을 넘어선 큐레이팅의 확장된 개념을 옹호해왔죠. 왜 큐레토리얼 혁신을 추구하는 수많은 큐레이터들이 오직 전시 형식을 저버림으로써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으며 우리 대화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마리아 린드(이하 린드): 혁신은 공식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종의 긴급함을 필요로 합니다제가 볼 때 큐레이팅에 관한 새로운, 그리고/혹은 변화된 형식과 접근을 고찰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예술 그 자체와 예술의 감성, 태도 등과 연결됩니다. 제 프로세스는 이론이나 논의보다 예술에서 시작하고, 이론과 논의는 나중에 도입합니다. 또한 저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기보다 현재에 도전하려는 성향이 있죠. 현재의 조건은 주로 문제적이거나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제가 쿤스트페어라인 뮌헨Kunstverein München의 디렉터로 일할 때, 우리는 크리스틴 볼랜드Christine Borland의 회고전을 1년이란 기간 동안 열었습니다. 전시는 한 작품만을 선보였고, 이는 어떻게 작가의 작업이 작동하는지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죠. 그 작품은 난해하며, 제작에도 작품에 개입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다가, 시간의 흐름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만든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회고전도 예가 될 수 있죠. 그의 전시는 주말 미팅의 형식을 띠었고, 이후 작가의 예전 학생들, 오랜 동안 그의 작업과 연을 맺은 큐레이터 및 비평가와 함께 일주일 간 워크숍을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전시 형식은 작업의 논리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전시 제작의 측면에서 무엇이 특별하게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특정 전시 형식? 저는 전시 제작은 계산되고 미리 프로그래밍된 큰 변화만을 따르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유기적인 과정이 될 때 가장 잘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큐레이팅을 전시 제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예술을 회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화와 전시 제작은 모두 각각의 영역을 장악해왔죠. 너무 환원주의적으로 말입니다

 

프랜스 프랑켄Frans Francken, 〈예술과 호기심의 방Chamber of Art and Curiosities〉, 1636.
프랜스 프랑켄, 〈예술과 호기심의 방Chamber of Art and Curiosities〉, 1636.

 

호프먼: 저는 당신의 비유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회화와 큐레이팅은 아주 다른 목적과 역사를 지닌 완전히 다른 활동입니다. 만약 누군가 예술이 곧 회화라고 말한다면 그건 괜찮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의견이니까요. 전시 큐레이팅 외의 것에 대한 수많은 큐레토리얼 작업을 목격하고 있지만, 저에게 그런 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린드: 그런데 제가 전시 제작을 저버렸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저는 줄곧 화이트큐브와, 동시에 예술을 실행하고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서 다른 유형의 공간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끼며 전시 작업을 의식적으로 해왔습니다. 사실 저는 끊임없이 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 예로 스톡홀름 국제 예술가 스튜디오 프로그램IAPIS, The International Artists Studio Program in Stockholm에서의 전시 《형식들Formalities》, 바드 대학교 큐레토리얼 연구센터CCS Bard, Center for Curatorial Studies Bard에서 열린 개인의 프로토콜과 다른 기호성Personal Protocols and Other Preferences》과 《그린룸: 기록와 동시대 미술에 대한 재고The Green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 스톡홀름의 루마니아 문화 연구소the Romanian Cultural Institute에서의 《다른 하나 이후의 한 가지One Thing After the Other》를 들 수 있죠. 그리고 예술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다른 방법들을 동시에 수용하는 많은 큐레이터들이 있습니다. 예술 유형과 시간, 장소에 가장 적합한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죠.   

 

호프먼: 당신이 언급한 여러 프로젝트를 본 적이 있고, 그중 어떤 것도 저에겐 전시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 프로젝트의 퀄리티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웠죠. 자고로 제가 흥미로운 큐레이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와 일하는 법을 알고, 전시를 설치하는 법을 알고, 좋은 전시도록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누구든지 저널에서 읽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강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자신을 큐레이터라고 부를 수 있죠. 그것은 너무 쉽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제작은 기술craft이고 저는 그 기술을 대단히 귀하게 여깁니다. 너무 많은 큐레이터들이 전시 제작은 과거의 것이고, 오늘날은 제가 파라큐레토리얼paracuratorial이라 부르는 것강연, 스크리닝, 작품 없는 전시, 전시 가능한 그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 예술가와의 협업 프로젝트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이를 단지 여기 저기에서 목격하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향하는 엄청난 압박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실 여전히 전시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전시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지닌 중요한 사회적 의식ritual입니다. 저는 전시가 예술을 선보이기 위한 형식으로서 완전히 탐색되지 않았고, 더 탐색할 게 확실히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린드: 당연하게도 저에게 큐레이팅은 당면한 것에 따라 아주 다양한 형식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예술을 대중에 알리는지’ 입니다. 예술 주위를 돌며, 제가 예술의 특수성이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맥락과 시간같은 크기의 열렬한 호기심과 분석적 회의주의에서 비롯된을 따르면서 말입니다. 아주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이죠. 예술은 탐색하고, 전해지고,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은 이해에 대한 탁월한 형식이고, 새로운 상상의 생산자이죠. 만약 제가 공유된 공간에서 예술이 이해되고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고 복합성을 설명하며 강화할 수도 있는 형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형식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모든 것을 위해 한 가지 패키지만 쓰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앞서 언급한 화이트큐브 전시 공간에서의 예술작품의 프레젠테이션과 편성이 ‘전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니 조금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한 전시가 정확히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요?

 

프랜스 프랑켄Frans Francken, 〈예술과 호기심의 방Chamber of Art and Curiosities〉, 1636.
프랜스 프랑켄, 〈예술과 호기심의 방〉, 1636.

 

호프먼: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매우 독단적이고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묵살하는 많은 큐레이터들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깊이와 진지함이 있다고 느끼면 가능한 한 수많은 다양한 입장에 대해 살펴보고 고려하려 합니다. 물론 전시 제작은 단지 하나의 형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제 작업을,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시 형식을 제가 포괄했고 계획했는지를, 제가 살펴보는 예술작품과 미학적 오브제의 광범위함을 알고 있죠. 전시 제작에 관한 규범적 코드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러한 것들 말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들을 대체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하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제가 역사를 담고 역사에 대해 말하는 요소로서 오브제에, 그리고 우리가 미술관에서 오브제를 볼 때 어떻게 오브제를 경험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무대 위로 올린다는 아이디어와 연극적 경험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 전공을 한 제 배경에서 발전된 것이겠죠.

 

린드: 당신의 작업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요?

 

호프먼: 누군가 정말로 제 작업에 대해 다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확실히 전시 제작자입니다. 글을 많이 쓰고, 항상 가르치고, 저널을 출판하고, 컬렉션 관련 일을 하는 등 다른 일도 하지만 말이죠. 제 실천의 핵심은 전시를 만들고, 그 특정 경험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린드: 당신은 계속 다양한 유형의 전시를 탐색해왔죠. (저는 예술을 대중에 알리는 다양한 방식전시는 그중 하나이고, 스크리닝 시리즈 등 여러 가지가 있죠에 대해 ‘형식format’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그룹전과 개인전 같이 각 형식의 하위범주로 ‘유형type’이란 용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우리는 전시를 매체로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큐레이팅에 대한 얄팍한 접근에 뒤이어 생긴 이러한 종류의 집중과 전문성을 인정합니다. 우리 둘 모두 예술만 아는 괴짜이고, 거기다 당신은 전시만 아는 괴짜이죠. 아마도 저는 큐레이팅의 역사와 실천에 대한 괴짜가 되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적절한 때에 예술의 순수한 격려와 ‘위로’를 넘어설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종속적인 것이 좋을 수 있고 유용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예술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에 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저한테 그것은 예술과 예술가를 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프먼: 최근 전시 제작에 관해 말하자면, 확실히 질보다 양이죠.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전시 제작은 끝났다’라고 말할 도화선으로 쓰는 것은 조금 근시안적으로 보입니다.   

 

린드: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들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사람들이 전시 제작이 과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전시는 세심함이나 신중함 없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는듯 보입니다. 지겨운 일상으로서 그저 기계적으로 말이죠. 당신의 전시는 그러한 예는 아닙니다. 제 12회 이스탄불 비엔날레에 기계적인 측면이 있었고, 같은 구성의 반복이 다섯 번 있었어도 말이죠. 저는 이러한 면을 다른 곳에서 관료주의적 실행의 논리와 유사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호프먼: 이 맥락에서 당신이 ‘기계적’이나 ‘관료주의적’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전시는 아주 환원주의적으로 보여도, 전시 형식을 기꺼이 불신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었죠. 전시를 만드는 방법론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개념과 주제, 맥락을 적용하는 데 기계적인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이스탄불 비엔날레에 대해 깊게 들어가고 싶진 않지만, 아마도 당신은 각 섹션이 아주 다른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다는 것을 볼 만큼 주의 깊게 다섯 섹션을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린드: 그것이 제 포인트입니다. 당신이 아주 다른 무언가를 설명하기 원한다면, 매번 그것을 구체적, 즉 맥락특정적context-sensitive으로 만드는 게 거의 항상 필요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다섯 번의 반복이 저에겐 맞지 않았죠. 각 파트는 각각에 맞는 처리와 형태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방법론이 예술보다 더 우선시되었죠. 따라서 전시 형식을 불신하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호프먼: 아마도 어떤 것을 좋은 전시 제작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프랜스 프랑켄Frans Francken, 〈예술과 호기심의 방Chamber of Art and Curiosities〉, 1636.
프랜스 프랑켄, 〈예술과 호기심의 방〉, 1636.

 

린드: 저는 ‘좋은 전시 제작’보다 형식으로서 전시에 대한 명확한 강조가 있는, 흥미롭고 적절한 전시 제작 실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실천은 물론 줄리 아울트Julie Ault, 츄스 마르티네즈Chus Martínez, 쇠렌 그람멜Søren Grammel, 그리고 (보다 고전적 의미에서) 린 쿡Lynne Cooke의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형식에 대한 의식적이며 세심한 고심을 보여 주죠. 저는 당신의 작업이 전시 제작이 어떻게 큐레토리얼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전시 제작이라는 당신의 영역 내에서 현 상태에 대해 도전해왔죠. 당신의 큐레토리얼 작업은 레야 미라 브랜더Leya Mira Brander와 고전 회화, 빅토르 로스달Viktor Rosdahl과 구상 회화, 그리고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과 비디오 에세이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를 탐색하고 그 매체를 어느 정도 뛰어넘기도 하나 해당 매체 자체에 독실한 예술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호프먼: 미술계에 무엇이든 가능하단 태도가 만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술과 큐레이팅은 점차 인기를 얻어서 엄청난 퀄리티 저하에 시달리게 되었죠. 어느 정도는 완성된 작업의 퀄리티를 평가하는 기준이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큐레이팅이 전시 제작과 단절된 순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큐레이팅이 모두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큐레이팅으로 하는 일종의 사유speculations가 어느 정도는 그 원인이고, 또한 그러한 사유가 제가 더이상 스스로를 큐레이터라고 부르길 망설이는 이유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린드: 저는 특정 큐레이터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군요. 그리고 전통적 큐레이터와 에듀케이터, 에디터 등등 같은 수없이 다양한 역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큐레토리얼the curatorial’에 관해 논하고 싶습니다.

 

호프먼: 당신이 말하는 ‘큐레토리얼’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주십시오.

 

린드: 저는 큐레이팅을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을 대중에 알리는 기술적 양식이라 보고, 큐레토리얼은 제게 큐레이팅을 넘어선 실천을 의미합니다. ‘큐레이팅’은 전시로 취합하고, 커미션을 기획하고, 스크리닝 시리즈를 프로그래밍하는 등의 ‘늘 같은 일business as usual’이죠. ‘큐레토리얼’은 더 나아가 예술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현 상태에 도전하기 위해 이를 특정 맥락과 시간, 질문과 관련해 고려하는 방법론을 내포합니다. 큐레토리얼은 큐레이터, 에디터, 에듀케이터, 홍보 전문가 등 같은 다양한 역할에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즉 큐레토리얼은 예술 생태계 내 수많은 서로 다른 역할로 일하는 이들에 의해 취해지거나 수행될 수 있다는 뜻이죠. 저는 큐레이팅과 큐레토리얼 간에 질적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후자는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개념처럼 변화를 위한 잠재력을 갖습니다. ‘누구든 큐레이터라 주장할 수 있다’는 상황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오늘날 큐레이팅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큐레이팅 프로그램, 특히 수강료가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과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업무 경력으로서 큐레이팅은 좁은 의미에서 전시 제작 활동과 넓은 의미에서의 큐레이팅 모두에 영향을 미칩니다. 첫 전시 기획 이후 큐레이터가 되었다고 느끼는 수많은 학생과 초심자를 보았습니다. ‘자격증’ 문제의 일부라 할 수 있죠. 그저 스스로의 방법론을 습득하기 시작한 이들이 정말 큐레이터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하는 학위나 증명서를 큐레이팅 프로그램이 주는 것 말입니다. 큐레이팅은 상당한 현장 경험 없이 불가능한 응용적 활동입니다. 저술가나 철학가가 큐레이팅을 시작할 때 이러한 문제가 항상 분명하게 보이죠. 이들은 거의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이태리 나폴리 팔라초 그라비나Palazzo Gravina에 있는 페란테 임페라토Ferrante Imperato의 예술의 방Kunstkammer/쿤스트캄머.
이태리 나폴리 팔라초 그라비나Palazzo Gravina에 있는 페란테 임페라토Ferrante Imperato의 예술의 방Kunstkammer.

 

호프먼: 큐레토리얼 교육은 정말 어려운 주제입니다. 우리는 이 분야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초기 단계에 있고, 우리와 학생들을 진정 만족시킬 수 있는 큐레이팅 교육 방법을 찾기까지 아마도 수십 년이 걸릴 것입니다. 누군가 문학이나 철학, 미술사가 아닌 큐레이팅 2년 코스를 선택하는 건 저에게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린드: 당신이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억누를 수는 없죠. 이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찾고 다양한 변화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글쓰기 같죠. 한때는 소수가 하는 희귀한 활동이었지만 지금은 계속 발전하는 방법으로 쓰이고 있죠. 소설을 쓰는 기법art이 한물간 것이라거나 글쓰기에서 새롭고 엄청난 형식이 발명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도 스스로를 저술가라고 부를 수 있죠. 저는 특수성과 신중함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떤 것이 슬그머니 지나가게 두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엉성한 작업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갑니다.

 

호프먼: 당신의 마지막 표현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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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직역하면 ‘보여 줄 것인가,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라고 번역해야 하나, 두 큐레이터의 전체 대화 맥락을 고려해 ‘전시로 보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로 옮겼다.

 

Jens Hoffmann and Maria Lind, "To Show or Not to Show," Mousse Vol. 31, 2011.
변현주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며 번역을 하고 아트북을 출판한다. 베를린의 에스더 쉬퍼, 서울의 국제갤러리와 아트선재센터 등에서 일하며 여러 전시를 조직 및 기획했고, 독립 큐레이터로서 런던과 서울, 온라인 등에서 전시와 프로젝트를 큐레이팅했다. 예술 재현의 형식을 탐구하며 『큐레이팅의 주제들』 (2013/2021)과 『동시대 큐레이팅의 역사』 (2019)를 번역했고, 『Curating Research』(Open Editions/De Appel, 2014)를 공저하는 등 미술과 큐레이팅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2019년 '더플로어플랜'을 공동 설립,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