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용 사본: 무빙 이미지의 유동성에 대하여
번역 이유니

한번은 한 예술가가 점심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말하면서 비평가에게 감상용 사본(viewing copies)을 건넨 적이 있는데, 예상외로 이때 해당 작품의 가치는 25,000유로는 족히 되었다. 물론 농담으로 한 소리로, 둘 모두는 아트 비디오의 DVD 감상용 사본에 대한 가치가 공 DVD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 감상용 사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상용 사본의 유령적 지위는 미술계의 인위적인 희소 경제와 그 경제가 이미지의 이동에 부과하는 엄격한 규제에 달려있는 것이다. 언젠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플랑드르 태피스트리(유럽 전역에 작품을 전파한 초기 재현 매체)를 그림 이동수단(automobile Bilderfahrzeuge)이라고 칭한 바 있다면[note title=”1″back] Aby Warburg, “Mnemosyne. Einleitung” (1929), in Der Bilderatlas Mnemosyne, ed. Martin Warnke and Claudia Brink (Berlin: Akademie Verlag, 2000), 5. (한국어 일부 번역 수록, 『므네모시네』 머리말, 『인문예술잡지』 F 9호, 신동화 옮김, 문지문화원 사이, 2013, p. 72.)[/note] , 그 이후 매체는 포디즘적 조립 라인에서 생산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시각 이동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 경향과는 달리, 동시대 미술에서 비디오와 영화의 경우 작품이 관객에게 이동한다기보다는 관객이 갤러리나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으로 이동해야 한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대량 (재)생산이 무한정 가능한 매체에서 생산된 작품들조차 소량 판본으로만 제작된다. 유튜브 및 파일 공유 시대에 이와 같은 진귀한 사물의 경제는 여느 때보다 예외적인 것이 되고, 감상용 사본은 ‘공식’ 한정판을 넘어서 전시 맥락의 바깥에서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욱 강조된다. 이때 감상용 사본은 한정판의 또 다른 짝인데, 도큐멘테이션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계 전문인’에게 제공하거나 대여하기 위한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상용 사본이 예술 작품의 도달 범위를 넓힌다고 하더라도 이는 일정 정도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선에서 이루어진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위상을 갖는 미술계 경제 내에서, 감상용 사본을 하나의 모범적 대상, 다시 말해 탁월한 이론적 대상(a theoretical object)으로 삼게 하는 것은 바로 감상용 사본의 이러한 기이한 위상이다.

 

 

마이클 스노우, , 2003, DVD.
마이클 스노우, <WVLNT>, 2003, DVD.

 

 

저 낡은 것, 아우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사진이나 (특히) 영화와 같은 뉴미디어가 예술 작품의 ‘제의 가치(cult value)’와 아우라를 필연적으로 약화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위태롭게 하는 발언을 한다. 벤야민도 인정하듯이 결국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은 대스타의 “개성”을 만드는 데 신중을 기울여 새롭고 인위적인 아우라를 창출하고, 이것이 “스타에 대한 추종”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note title=”2″back]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in Illuminations: Essays and Reflections, ed. Hannah Arendt, trans. Harry Zohn (New York: Schocken Books, 1969), 231.[/note] 이런 추종에서 스타의 노출 빈도를 제한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스타의 잦은 노출이 신성모독의 위험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행사 때만 성지에서 벗어나는 제의적 이미지와 같이, 대스타는 신중하게 통제된 환경에서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를 끝없이 떠돌아다니는 싸구려 사진들(B pictures)이 아닌 엄선된 소수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유명 ‘개봉’관에서 먼저 상영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영화관에 서서히 흘러 들어갔다. 한편 할리우드가 대량 복제 매체의 범위 내에서 스타의 페르소나를 정교화하고 스타가 관객과 갖는 거리를 유지하여 희소성과 아우라를 발생시켰다면, 미술계는 영화와 비디오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전개했다.

 

할리우드나 타국의 영화 산업 중심지들은 영화 매체의 복제 가능성을 통제하고자 했다. 복제는 시스템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좋은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했고, 아우라의 쇠퇴는 신중하게 규제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통제는 극도로 어려워졌다, 일부 불법복제 근절 캠페인과 세간의 관심을 끌던 여러 소송 사건의 신경증적 어조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말이다. 메이저 신작 영화의 명성이 신작을 접하고 싶다는 욕망을 발동시킨다면 이러한 욕망은 현대 테크놀로지를 통해 손쉽게 충족된다. 값싼 DVD나 온라인 배포를 위해 영화관에서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신작 영화를 ‘재촬영’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무빙 이미지의 이주, 즉 이들의 물리적 이동을 통제하에 두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미술에서 감상용 사본은 갤러리 측과의 ‘합의’에 반해 너무 자주 재복사되거나 소장된다. 큐레이터, 비평가, 미술사가(그리고 작가)는 극영화 DVD 컬렉션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감상용 사본 라이브러리 전체를 모은다. 그러나 이때 감상용 사본의 위상은 DVD의 위상과는 상당히 다른데, ‘공식적’인 갤러리 작품과 비교했을 때 그 합법성은 여전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비디오 설치 작품은 영화가 영사되는 공간을 관객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원한다면 언제든 그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영화가 상영되는 조건을 세속화한다”고 주장했다.[note title=”3″back] Boris Groys, “On the Aesthetics of Video Installations,” in Stan Douglas: le Détroit(Basel: Kunsthalle Basel, 2001), unpaginated.[/note] 동시대 영화와 비디오 아트에 영화관(cinema) 상영 모델에 더 가까운 상영 방식도 있는 한, 이와 같은 세속화 충동은 사실상 특정 영화와 비디오 설치 작업에 속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미술계 특유의 현상은 아니다. 비디오와 특히 DVD 테크놀로지가 부상함에 따라 소비자들이 영화를 보거나 조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되었고, 이에 따라 영화에 새로운 종류의 분석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본래 영화는 전형적인 은폐 기억(screen memories)의 매체로서, 한 번도 현재인 적 없는 그저 늘 과거인, 다시 말해 찰나의 기억이 되는 매체였다. 더불어 한 편의 영화를 기억한다는 것은 왜곡하여 기억한다는 의미로, 관객은 습관적으로 결말을 바꾸고, 대사를 지어내거나 ‘바로잡으며’, 자신이 놓친 장면을 상상한다. 비디오의 도래는 다시 보기나 화면 정지 기능을 통해 기존의 매체 특성을 일정 수준 변화시켰고 파악하기 어려운 무빙 이미지에 전례 없는 현전을 선사하였다.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비디오 가게 점원의 괴짜 영화(geek movies)는 물론이고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éma>까지 아울러보면, 비디오는 영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신화적 기억은 좀 더 정확한 분석에 어느 정도 자리를 내주었는데, 이는 비디오 테이프가 DVD로 대체되면서 한층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무빙 이미지는 훨씬 더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이해하기 쉬워졌다.

 

재생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또는 캡처)하기가 수월해지자 무빙 이미지의 시간성은 더욱 유연해졌다. 즉, 이용자의 개입에 따른 시간성의 리듬이 생겨난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의 구조 및 짜임새, 전체 구성, ‘광학적 무의식’ 등에 대한 전례 없는 통찰이 가능해졌다. 또한 당연히,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예술가가 기존의 영화들로부터 새로운 작업을 재가공하고, 해체 및 재조합하고, 제작하도록 한다. 때로는 그 결과물이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정도의 흥미밖에 못 준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여전히 단독 한정판으로 공개된다는 사실은, 보수적인 미학적/정치적 경제가 가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이용하는 데 따른 결과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로이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더 광범위한 비디오/DVD 문화와 비교해봤을 때 영화/비디오 설치 작업이 퇴행적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는데, 비디오 설치 작업이 싱글 채널 작업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한정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영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미술계는 사본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영화와 비디오를 재아우라화(re-auratization)한다.

 

오머 파스트(Omer Fast), , 2007, 2채널 견본 셋업 방식. 오리지널 작업은 4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14분. 저자와 작가의 허가를 받아 수록.
오머 파스트(Omer Fast), <더 캐스팅 The Casting>, 2007, 2채널 견본 셋업 방식. 오리지널 작업은 4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14분. 저자와 작가의 허가를 받아 수록.

 

많은 예술가는 감상용 사본에 조바심을 내는 데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내놓는다. 말하자면 자신의 작업은 갤러리 공간의 특정 조건에서 보여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이러한 ‘적절한’ 설치 환경에 대한 바람이 독점이라는 미술계의 신비화 경제를 따른다는 사실과 별개로(이때 이 경제는 성역(聖域)에 고유한 제의적 이미지를 자신의 궁극적 모델로 여전히 사용한다),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제대로 된 환경에서 보여주길 원한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온라인상에서 누구나 무빙 이미지를 심각하게 열화된 형태로 보는 데 익숙해진 시대에,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환경을 ‘바로잡는’ 데, 다시 말해 ‘적절한’ 상영 환경을 상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최신 블록버스터의 불안정한 불법 복제본을 노트북으로 본다고 해서 그 영화에게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해당 영화를 최적의 환경에서 보면 훨씬 좋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은 영화의 아우라를 증가시킬 뿐이다.


따라서 탈아우라화(de-auratization)와 재아우라화의 변증법은 벤야민의 주장보다 훨씬 복잡하다. 영화를 다루는 데 있어 벤야민이 열정을 가지고 (각각, 영화가 자신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펼쳐놓거나 축소하는) ‘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이라고 상정한 바에 맞추고 싶은 유혹도 있겠지만, 그보다 가까운 미래에는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가 점차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혼성 문화에 이르게 될 거라 가정해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현재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투쟁해서 얻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미세한 차이를 가진 문화 말이다. 이는 곧 무빙 이미지의 해방을 말하는데, 이 해방은 한정판의 배급 경로와 동시에 작동하는 다른 방식의 경로를 야기한다. 이 같은 경제 안에서 작업에의 접근성은 인맥이나 영향력에 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이 된 예술을 지나치게 기대하는 건 삼가야겠지만, 벤야민 스타일의 더 ‘진보적’이 된 대중에 대한 기대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전개는 어떤 작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확실히 늘릴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를 나쁘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별도의 허가 없이 볼 수 있는 감상용 사본 판본의 출현이 제지된 것은 ‘진짜’ 작품이 예술적으로 그리고/또는 경제적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점 한정판본이 거액의 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왜 그들은 무한정 배포되는 감상용 사본이 갤러리 작품의 아우라를 위협하지 않음에도 자신들의 수익이 기껏해야 근소하거나, 좀 더 높은 확률로, 아예 없을 때 사본을 의식하는가? 물론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피슐리(Fischli)와 바이스(Weiss)의 <사물들이 가는 방식 Der Lauf der Dinge>, 요한 흐리몬프러(Johan Grimonprez)의 <다이얼 H-I-S-T-O-R-Y Dial H-I-S-T-O-R-Y>,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데이 이즈 던 Day is Done> 등과 같은 작업들은 갤러리 작품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DVD로도 출시되어 있지만, 모든 작품이 <다이얼 H-I-S-T-O-R-Y> 같지는 않다. 그러나 카라가르가(Karagarga)와 같은 파일 공유 사이트는, 비록 선별된 그룹에 한정한 것이긴 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아티스트 비디오와 다양한 형태의 언더그라운드 또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이제는 비물질화된) 감상용 사본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다지 합법적이지 않은 이러한 파일 공유는 미술계가 투자에 관해서는 거의 수요가 없는 제작 및 배급 유형을 모색하기 위한 장려책으로 여겨져야 한다. 주문형 복제 시스템(burn-on-demand)을 비롯해 온라인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끔 하는 데 이르기까지, ‘공식’ 경로는 불법 경로와 공존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취한다.[note title=”4″back] 물론 이는 기업의 저작권 근본주의를 거부해야할 것인데, 이러한 태도는 토렌트 사이트인 파이러트베이(The Pirate Bay)를 상대로 건 소송으로 이어진 바 있다. 그러나 ‘지적 재산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든 카피레프트 옹호자이든 간에, 무빙 이미지 작업을 공식 채널을 통해 제공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note]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1992-현재; 비디오 설치; 다채널 비디오 설치, 모니터, 가변크기. 가고시안 갤러리 제공 이미지.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1992년경부터 현재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와 비디오 작품. 모니터 상영, 일부 헤드폰, 나머지는 무성, 전체 동시 재생 Pretty much every film and video work from about 1992 until now. To be seen on monitors, some with headphones, others run silently, and all simultaneously>, 1992-현재, 다채널 비디오 설치, 모니터, 가변크기. 가고시안 갤러리 제공 이미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많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특히 신작)이 이 같은 단계를 밟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지만, 일부 작가들은 이미 대안적 감상 조건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낡고 쇠퇴한 포맷들을 재시험해보기도 한다.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은 설치 작품 <1992년경부터 현재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와 비디오 작품. 모니터 상영, 일부 헤드폰, 나머지는 무성, 전체 동시 재생>에서 사실상 작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감상용 사본을 볼 수 있는 감상실을 만들었다. 고든의 작품이 대부분 영사되는 방식이었다면, 여기서 그는 자신의 영화와 비디오를 갤러리 작품의 설치 요건과는 확연히 다른 조건에서, 즉 모니터에서 보여준다. 여기서 고든이 감상용 사본을 갤러리 설치 작품으로 재변환한 와중에도, 이러한 설치 작품은 탈맥락화와 열화를 견뎌내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를 즐기는) 이미지의 힘을 기념하며, 이미지의 조합과 재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감상용 사본을 통해 갤러리 작품의 위상을 재사유하도록 초대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욥 반 리프란드(Joep van Liefland)는 설치 작품 <비디오 왕국 Video Palace>에서 사라진 세계인 VHS 비디오 가게, 특히 프랜차이즈화되지 않은 허름한 가게를 미화한다. 이때 반 리프란드가 자신의 저예산 단편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exploitation flicks) 포스터를 대개는 붙여두거나 영사한다면, 설치 구조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선반이 지배적인데, 작가는 이 선반 위에 지나가 버린 문화의 덧없음을, 즉 여러 장르의 값싼 익스플로이테이션 비디오 케이스들을 애정을 담아 전시한다. 무빙 이미지 매체로서는 한물간 테이프는 경우에 따라 순전히 블록을 쌓기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6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 생산된 비디오 아트 테이프를 이용한 반 리프란드의 <비디오 왕국>이라는 실험적 ‘순수 미술’ 버전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비디오 왕국>은 아우라를 생산할 능력이 좋게 봐도 위태로워 보이는 대중문화의 폐물 창고로서 오늘날의 독점 판본 문화와는 다른 초기 배급 모델로 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는데, 이 초기 모델 중 많은 수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제시되었다. 물질이 해체됨에 따라, 비디오 테이프라는 유물은 현재의 배급 방식을 재고하도록 하고, 비디오를 별도의 허가 없이 다시금 좀 더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판매되도록 한다.

 

욥 반 리프란드, , 2007, 설치 전경, 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라틀리에. 저자와 작가의 허가를 받아 수록.
욥 반 리프란드, <비디오 왕국 #23 Video Palace #23 – hollywood was yesterday>, 2007, 설치 전경, 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라틀리에. 저자와 작가의 허가를 받아 수록.

 

그때 이후로 최근 몇 년 동안 비디오갤러리 슘(Videogalerie Schum)과 같은 몇몇 관련 활동이나 조직에 대한 전시 및 출판이 있었지만, 최근의 우려들을 감안해보면 해당 기획들이 갖는 함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note title=”5″back] 슘의 기획에 대해서는, 카탈로그 Ready to Shoot: Fernsehgalerie Gerry Schum, videogalerie schum, ed. Ulrike Groos, Barbara Hess, and Ursula Wevers, (Düsseldorf: Kunsthalle Düsseldorf, 2003)를 보라.[/note] 슘의 비디오갤러리와 같은 기획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 제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행한 오랜 시도만큼이나 교훈적이다. 한때(프로젝트가 아직은 <영화와 텔레비전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éma et de la Télévision>이라고 불리던 때) 고다르는 그 영화를 1시간짜리 비디오카세트 시리즈로 발간할 것을 제안했다. 시리즈는 테이프당 60달러~100달러 사이의 금액으로 제작해서 250~500달러 사이로 판매할 계획으로, 명확하게 개인 소비자보다는 기관을 겨냥한 것이었다.[note title=”6″back] Jean-Luc Godard, undated proposal for Histoire(s) du Cinéma et de la Télévision, in Jean Luc Godard, Documents, ed. Nicole Brenez et al. (Paris: Centre Pompidou, 2006), 281. [/note] 마찬가지로 슘은 한정판으로 제작되지 않은 판본에까지 고다르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테이프를 입수할 수 있는 대상을 사실상 기관과 ‘진지한’ 컬렉터들로 한정했다. 물론 비디오갤러리 슘이 나온 시기나 고다르가 카세트 시리즈를 제안한 당시 홈 비디오 장비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들 각각의 비즈니스 모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의 한계로 작용할 것임이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기획은 주류 영화 배급/네트워크 텔레비전이나 극도의 소량 판본을 통한 아우라의 창출 모두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하다. 고전으로까지는 여겨지지 않는 1990년대 암스테르담 기반의 잽 매거진(Zapp Magazine, 르포뿐만 아니라 아티스트 비디오를 포함한 VHS 테이프에 관한 매거진)과 같은 기획은 적어도 일렉트로닉 아트 인터믹스(Electronic Art Intermix)나 좀 더 최근의 기획인 e-flux 비디오 렌탈과 같은 전문 기관만큼이나 유의미했다.[note title=”7″back] EAI 같은 기관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가격은 ‘일반’ DVD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e-flux 비디오 렌탈은 흥미로운 대안이 된다. 물론 여러 큐레이터들이 선별한 작품 셀렉션을 강조한다는 점이 이 모델이 확고하게 미술계 경제에 뿌리내리고 있고 이러한 경제 내에서 무빙 이미지에 대한 접근권이 규제되고 매개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더라도 말이다.[/note]

 

갤러리, 출판사, 그 밖의 다른 기관들이 공식 ‘감상용 사본 에디션’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영화와 비디오아트가 보이고, 만들어지는 방식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같은 혼성적 형태는 상상해볼 만하고 그럴듯하기도 하다. 설치/프로젝션을 위한 ‘전시용 사본(exhibition copy)’과 컴퓨터나 TV 스크린을 위한 감상용 사본이 공존하는 형태 말이다. 사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렌조 마틴스(Renzo Martens)의 <에피소드 3: 가난을 즐겨라 Episode 3: Enjoy Poverty>(2009)와 같은 작품은 영화제 상영, 비디오 설치 전시 및 판매, TV 방영, DVD 형태로 배포 등을 이미 시행했거나 시행할 예정이다. DVD 발매 시기는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중요한데, DVD는 영화제나 전시 공간에서 영화가 최초 발표된 지 한참 후에나 출시되어야 한다. 이제서야 우리는 마침내 감상용 사본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문화에 한층 가까워진 듯하다. 이 문화의 조건이 여전히 관객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되거나 경제적 합리성의 지배를 받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비디오갤러리 슘의 가격표, 1971.
비디오갤러리 슘의 가격표, 1971.

 

기껏해야 이러한 DVD 발매는 작품의 부분들(elements)을 뒤섞을 기회를 제공하여, 다르면서도 같은 버전들을 제작하도록 한다. 작품의 일부는, 특히 다채널 설치 작품의 경우, 감상용 사본의 조건 안에서 제대로 번역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조건은 실제 갤러리 조건에서보다 작품을 더 잘 독해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마이클 스노우의 중요한 영화인 <파장 wavelength>(1967)을 DVD로 재작업한 <WVLNT>, 또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파장 Wavelength for those who don’t have the time>(2003)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이 작업은 45분짜리의 오리지널 필름을 15분씩 세 부분(segment)으로 나눈 후 겹쳐서 구성한 것이다. 스노우의 역설적인 부제는 단지 ‘더 적은 시간’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시간 구조의 변화를 지적한다. 실제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감각은 그 자체로 일과 여가 사이의 경계를 부식시킨 포스트 포디즘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논하듯 산업주의가 모든 노동을 단지 양적이고 측정된 시간으로, 즉 “복잡성은 분절(articulation)되고, 존재론적 시간은 불연속적이고 조작 가능한 시간이 되는” 상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그 시기는 꽤 오랫동안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었다.[note title=”8″back] Antonio Negri, “The Constitution of Time” (1981), in Time for Revolution, trans. Matteo Mandarini (New York/London: Continuum, 2003), 49.[/note]  ‘사회적 공장’에서 삶 전체는 노동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는데, 네그리에 따르면 이는 급진적인 함의를 갖는다.

 

“시간이 존재 전체의 구조가 되었을 정도로, 시간 그 자체는 실체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생산 관계망에 연루되기 때문이다. 존재노동 상품과 같아진다. 시간적 존재 …. 자본주의 시스템의 제도적 발달이 삶 전체에 투자하는 단계에서 시간은 삶의 척도가 아닌, 삶 그 자체가 된다.”[note title=”9″back]Negri, “The Constitution of Time”, 34-35. [/note]

 

물론 이전의 산업적 (그리고 산업화 이전의) 리듬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이 역시 ‘적시생산시스템(just-in-time)’의 부상에 따라 변화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비물질 노동의 선두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상황은 그다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네그리가 말하듯 자본주의는 이전보다 더 큰 규모와 완결성을 갖고 다시 한번 복잡성을 분절하고 살아있는 시간(lived time)을 측정된 시간으로 축소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척도-로서의-시간을 삶-의-시간으로 대체된 것으로 여기지 않게끔 한다. 오히려 이들 둘은 보다 복잡한 변증법을 형성하는데, 척도는 변형되고 더 유연해지기 때문에,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살아있는 시간은 위상학적 왜곡을 수반하는 측량 형태로부터 좀처럼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 말하자면 자유롭게 멈추고 되감는 상황에 놓인 감상용 사본이야말로 이 복잡하고 집적된 시간 경제의 완벽한 체현물이 아니겠는가?


이는 예술 형태가 자신을 완전히 ‘시대와 조응하는’ 것으로 구분 짓도록 하는 잠재적 경계임이 분명하다. 스펙터클한 비디오 설치 작품과 마찬가지로 감상용 사본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건으로서, 비디오 설치 작품은 ‘사회적 공장’의 필수적 부분으로 기능하는데, ‘사회적 공장’에서 일은 놀이이고 놀이는 일이며 주체성의 생산은 산업 자본주의가 자신의 논리를 세웠던 추상적 노동력 이상의 것을 판매하는 노동자들을 생산한다. 비디오 설치와 감상용 사본 모두가 그들의 시간에 속한다는(de leur temps) 것은 칭찬받을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45분 동안 싱글 테이크로 줌하는 쇼트과 최면을 거는 듯한 사운드트랙으로 구성된 스노우의 <파장>이 척도를 넘어서는 지속을 통해 영화의 힘을 극찬하는 듯 보인다면, 재편집본인 <WVLTN>은 척도의 부활을 보여줌으로써 원본을 보완하고 결과적으로 감상용 사본이라는 포맷을 단순 복제품 이상으로 활용한다. 오늘의 시간 경제에서 사본의 모범적인 위상은 스노우의 <WVLNT>라는 선례를 따르거나 사본을 손쉽게 활용하여 오늘날 무빙 이미지의 복잡성과 모순을 드러내게끔 하는 예술 작품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